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 P10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 - P11

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 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그 사람은외국인이었다).
옷과 화장품을 고른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둔다.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사둔다.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 - P12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 다하다‘ 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 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 P19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0월의 알제리 소요라든가 1989년 7월 14일의 흐린 하늘과 더위, 그리고 6월, 그 사람과만나기 전날 밤 믹서를 산 것 같은 사소한 일들까지도 기억하고있었다. 그러나 폭우에 대해서, 혹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이나 차우세스쿠의 처형처럼 지난 5개월간 벌어진 세계적인 뉴스들 가운데 하나를 한 페이지 정도로 자세히 써내라고 한다면, 나는 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 P52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 - P52

도 하다. (지금도 첫 페이지를 다시 읽으면 그 사람이 내 집에머무는 동안 입고 있다가 떠날 때 벗어놓은 목욕 가운을 바라보고 만지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고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글은 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항상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내게만 의미가 있었던 목욕 가운은 언젠가는 나에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어져 헌옷 더미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보니목욕 가운을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P53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쉬는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이상은 독특한 억양을 가진 그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 사람의 몸을 만질 수도 없다.
현실 속의 그 사람은 A라는 이니셜로 내글 속에 쓰이고 있는남자보다도 더 먼 곳에, 내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추운 도시에서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슬픔을 가라앉혀주고, 절망밖에 없을 때 희망을 갖게 해주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써보았다.
카드점을 쳐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전화해주기를, 그 사람이돌아와주기를‘ 하고 소원을 빌며 오베르 역의 거지에게 10프랑을 주기도 했다. (사실, 글을 쓰는 것도 그런 방법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P53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갈망했던 지난해 봄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하다. 열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감정들이다. 그것은 출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 가치 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자서전입니까?" 하는 유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고,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는 식으로 억지로 정당화시켜야 할지도 모른 - P59

다. 그런 질문들은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모든책이 출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가 아닐까?)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 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 P60

세상에서 그리고 내 삶 속에서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원고도 더 써넣을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원고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쓰였으므로 이미 읽을 만한 글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쓴 원고가 아직 내 손 안에 있는 한, 글쓰기의 가능성은 아직도열려 있다. 내게는 형용사의 위치를 바꾸는 일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덧붙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 P61

지난해 5월 내가 글쓰기를 끝냈을 때와 지금, 1991년 2월 6일사이에 이라크와 서방 연합군 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갈등이폭발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에 투하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폭탄"이 이라크에 퍼부어졌다는 오늘 저녁<르몽드>지의 기사에도, 엄청난 폭음으로 귀가 먹은 아이들이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바그다드 거리를 헤매고 있다는목격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전쟁 당사자들은 그것이 ‘정당한 전쟁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합군의 지상공격과 화학무기를 이용한 사담 후세인의 반격전, 그리고 라파예트 백화점 테러 등 이미 예고되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가슴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랑의 열정을 겪을 때 생겨나는 것과 똑같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욕망과 고뇌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서그친다. 이런 기다림에는 꿈이나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 P62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 P65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P66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 P66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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