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 연세가 예순일곱이었으며, 센마리팀 군(郡)Y...의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한 조용한 동네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하고 계셨다. 1년 후에는 은퇴할 계획이셨다. 나는 종종 몇 초 동안 혼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리옹의 고등학교에서의 그 장면이 그 전이었는지 아니면 후였는지, 내가 크루아루스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바람 불던 4월이 그가 죽은 그 숨 막히던 6월보다 앞선 일이었는지 나중의 일이었는지가 명확히 분간되지 않는다. - P9

사망 확인을 위해 온 당직 의사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몇 시간도 안 되어 아버지의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오후가 끝나갈 무렵, 난 혼자 침실에 있었다. 햇살이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 들어와 리놀륨 바닥을 비췄다. 그것은 더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휑해져 버린 얼굴 한가운데 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헐렁하게 느껴지는 진청색 양복에 감싸인 그는 누워 있는 한 마리 새 같았다. 임종 직후에 보았던,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남자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얼굴조차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P12

얼마 전부터 난 소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과거 내가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 핵심적인 내용들을 알리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런 글 말이다. - P21

그런데 의혹이 찾아들었다. 어떤 여자가 장 본 물건들을 봉지에 다 넣은 뒤, <요즘 조금 곤란한 일이 있어서요. 돈은 수요일에 지불해도 되나요?>라고 나지막하게 물었을 때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가, 또 다른 여자가 그렇게 했다. 외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공장으로 돌아갈 것인가? 둘 다 고약한 해결책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외상이 조금 나아 보였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욕망을 포기해야 했다. 일요일 말고는 아페리티프나 맛난 통조림 같은 것은 꿈도 꾸지말아야했다.처음에는 자신들도 능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형제자매들을 푸짐하게 대접했지만, 이제는 냉정하게 굴지 않을 수 없었다. 원금을 까먹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뇌리를 떠나지않았다. - P41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간 - P46

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 빠져나온다. - P47

물론 내가 들은 말과 문장들을, 때로는 이탤릭체로 강조까지 해가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제시하려 애쓰는 이런 종류의 시도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말들을 고딕체로 제시하는 것은거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향수든 애잔함이든 조롱이든 독자에게 공모의 쾌감을 안겨 주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거부한다.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 - P47

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 P48

강변의 작은 뜰에서 찍은 사진 한 장 소매를 걷어올린 흰 셔츠, 아마도 플란넬 소재인 듯한 바지, 축 늘어진 어깨, 구부정한 두 팔. 불만스런 표정. 아마도 포즈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사진이 찍혔기 때문이리라. 그는 마흔 살이다. 사진속에는 그가 겪은 불행,
혹은 그가 품고 있는 기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전혀 없다. 단지 약간 나온 배, 관자놀이께가 희끗희끗해져 가는 검은 머리칼 등, 세월의 명확한 흔적들이보일 뿐이다.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사회적조건의 표지(標識들, 몸통으로부터 헤벌어져 있는 팔들, 그리고 소시민적인 취향이라면 사진의 배경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화장실과 세탁실…… - P49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좁은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순의 이쪽에 닿았다, 저쪽에닿았다 하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 P57

그건 욕망을 위한 욕망이었을 뿐이다. 왜냐면 사실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아니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무언가의 색과 형태를 선택해야 할 때면 항상 칠장이, 소목장(小木匠)의 충고에 맡겼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것을 따랐다. 주위를 장식하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선택할수 있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의 침실에는 장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사진 액자 몇 개, 어머니날 선물용으로 제작된 레이스 깔개 몇 장, 그리고 벽난로 위에 코지코너를 살 때 가구 장사가 사은품으로 끼워 준도기로 된 커다란 아이 흉상이 전부였다.
가진 것 이상으로 폼을 잡아선 안 돼! 그가 입만 열면하는 소리였다. - P62

우리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조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정중한 어조는 외부인들에게만 사용했다. 이런 습관이 너무나도 강했기때문에 아버지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점잖게 얘기하려 노력하다가도, 내가 자갈 무더기에 올라가는 게눈에 띌라치면 거친 어조에 노르망디식 억양과 욕설이 다시 튀어나와 버렸고, 그 바람에 사람들에게 좋은인상을 주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그는 품위 있는 태도로 나를 혼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또 나는 나대로 만일 아버지가 따귀를 때리겠다는 위협을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했다면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을 것이다. - P78

이들 세부적인 것들의 의미 규명은 이제 내게 하나의 절대명령으로 다가오며,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지금껏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확신하며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모욕당한 기억만이 그것을 간직해 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세계의 욕망에 굴복해 왔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저아래 세계의 추억을 마치 뭔가 천박한 것인 양 잊게만들려고 애쓰는 이 세계의 욕망에 말이다. - P79

내가 감시 요원으로 있던 어느 여름 방학 학교가 끝났을 때,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어머니가 멀리서 <어이, 어이>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난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햇볕을 피하려 고개를 푹 숙인구부정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귀는 방금 이발을 하고와서 그런지 머리통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었고 불그레한 색이었다. 그들은 성당 앞 보도에 서서 집으로돌아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아주 커다란 소리로 입씨름을 벌였다. 그들의 모습은 외출하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차 안에서 나는 그의 눈가와 관자놀이에 누런 반점들이 생긴 것을 보았다. 난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과 멀리 떨어진, 어느 젊고도 자유로운 세계에서 두달 동안 생활하고 난 참이었다. 아버지는 늙었고, 바짝 오그라들어 있었다. 난 더 이상 내게 대학교에 갈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 P95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살기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편지로 보고해 주었다. 여기는 추운데, 우리는 이런 날씨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요번 일요일에는 그랑에 사는 친구들을 보러 갔었다. X 어멈은 예순 살에 죽었는데, 그렇게 늙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는 글로는 제대로 농담을 하지 못했다. 사실, 편지에서 사용한 언어와 표현들부터가 그녀에겐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것은 한층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는법을 한 번도 배운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서명을 했다. 나 역시 진술서 같은 어조로 그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만일 공들여 다듬은 문체를 사용했다면, 그들은 내가 자신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고 느꼈으리라 - P100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열광하지도 않았다. 스무 살이 넘은 처녀가 아직도 학교 책상에 앉아 있는 상황을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이상하고도 비현실적인 삶을살고 있는 상황을 아버지는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저에는 교사가 되려고 공부를 한답니다. 손님들은 무슨교사가 될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오직 직위만이 중요했다. 아버지 자신도 무슨 교사인지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현대 문학>은 수학이나 스페인어만큼 그의 머리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이 나이까지 유별나게 취급한다고 수군댈까 - P102

봐, 나를 이렇게 밀어 댈 정도로 우리 집이 부자라고생각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털어놓지도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내학비를 국가가 다 대준다고, 우리는 참 운도 좋다고사람들이 입을 삐죽댈 수도 있으니까. 항상 선망과 시샘에 둘러싸여 있었던 그로서는 <교사가 되려고 공부한다>가 자기 처지에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명쾌한설명이었을 것이다. 이따금 나는 밤을 꼬박 새워 놀고는 일요일 아침에 집에 들어가 뻗어서 저녁때까지 자곤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처녀애는 건전하게 놀 수도 있는 일이라며 내가 그래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증거로서 승인해 주기까지 하는눈치였다. 혹은 그로서는 불가해한 지적이고도 부르주아적인 세계의 이상적인 표현의 하나로 받아들인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노동자의 딸이 임신한 채로 결혼을 하면, 벌써 온 동네가 다 알고 있었다. - P103

그는 가게를 파는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가게 옆에 붙어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기리라, 옛날에 가게와 함께 사두었던 것인 듯한 그 집에는 방 두 개와 부엌이 있었고, 포도주저장 창고도 하나 있었다. 좋은 포도주들과 통조림들은 가져가리라. 신선한 달걀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우리라. 또 오트사부아에 사는 딸애 부부도 보러 가리라.
또 그는 예순다섯 살이 되면 사회보장 연금을 받을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흐뭇해했다. 약국에서 돌아올 때면 테이블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건강보험 청구용 중지를 하나하나 붙이곤 했다.

그는 삶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 - P112

12시 반, 난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아이는 잠들지 못하고 용수철 침대 위에서 있는 힘껏 뛰어 댔다. 아버지는 눈을 부릅뜬 채로 간신히 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1시경에 카페와 식료품점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그의 곁으로 올라왔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이모와 이모부가 도착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본 다음 부엌에 내려와 자리를잡고 앉았다. 난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위에서 어머니가 천천히 걷다가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답지 않게 느릿한 그 발걸음에도불구하고 난 그녀가 커피를 마시러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계단이 꺾이는 곳에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끝났어.」 - P124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노가 우릴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네>라는 말이 들어간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계의 경험> 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첫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낙담했던지! 거기에는 온통 형이상학과 문학 얘기뿐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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