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철은 전시장으로 가는 길에 폭죽을 샀다. 가게에 들어가서도 폭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잠시 멈칫했다. 폭죽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폭과 죽, 뭐 이렇게 이상한 단어가 다 있어. 용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폭죽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용철은 단어를 자주 잊어버렸다. 잃어버린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근 들어 더욱 그랬다. 쉬운 단어부터 어려운 단어까지, 맥락도 공통점도 이유도 없었다. 폭죽처럼, 발코니라는 말도 잃어버렸다. 어떤 날은 배꼽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배꼽을 들여다보면서도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강이라는 단어도 잊어버렸고, 뒤꿈치라는 말도 잃어버렸다. 단어를 떠올리려고 하면 수십만 개의 단어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몰려들었고, 용철은 단어들의 더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단어와 단어가 서로 얽히고는 알수 없는 형체로 변했다. 용철은 단어를 떠올리려던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멍한 얼굴로 단어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민희는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했지만 용철은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무시했다. - P165

저도 자주 그래요.
그래요?
혼자 병명도 지었어요.
뭐요?
명사 분실중,
그러고보니..…
그렇죠?
명사만 잃어버리네요.
원래 그런 거래요.
뭐가 원래 그래요?
명사부터 잃어버리고 다음엔 형용사와 동사를 잊어버리고……정전될 때처럼 완전 깜깜해지죠?
맞아요.
하나씩, 결국 다 잃는 거래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럼 저는 분실증 초기 환자인 거네요. 다행이다.
위로가 되죠?
무척.
언제부터 그랬어요?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 안 나요.
힘든 시기를 통과한 뒤에 그럴 수 있대요. - P171

이것은 아마도 마지막 기록이 될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기억의 상한선을 미리 정해놓아야 할 것 같다. 무작정 기억을거슬러올라갈 수는 없다. 기억은 시간의 순서대로 늘어서 있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관계없는 내용들이 링크된 것도 많으므로 기억을 골라낼 때는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내야 한다. 기억의 상한선을 넘지 않으려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집중해야한다.
상한선은 아마도 2개월 전이 될 것 같다.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2개월 전, 도시 가득 눈발이 흩날리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물론 그 이전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쩍일것이다. 지금은 10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지만, 때로는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들이 순간순간 의식의 수면 위로 튀어오를 것이다.  - P201

릴케의 책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이 어렵풋하게 떠오른다. 정확하게 떠올릴 수는 없다. 찾아볼 곳도 물어볼사람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오지만 실은 여기에서 죽어갈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시작 부분만 떠올랐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정확히 그렇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카고를 떠나 살기위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여기에서 죽어갈 것이다. 죽어갈것이다. 라고 소리내어 발음하면 오히려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죽어갈 것이다. 곧 죽어갈 것이다. 인간이란, 스스로 죽을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 동물인가.
이제 더이상 기억의 상한선을 넘지 않겠다.  - P204

비행물체를 이용해 땅에다 구멍을 만든 게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지능이 있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 존재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오는 크리스마스이브를 공격 날짜로 정했을 리 없다. ‘인간적인‘ 지능이 있다는 근거는 그 외에도 많다. 땅바닥에 구멍을 내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간 것도 그렇고, 저녁이 되면 작은 불빛을 내어 사람들이 잘 걸어갈 수 있게 한 것도 그렇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구멍이 없는 쪽으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인간들이 소나 양을 한쪽으로 몰아가듯, 비행물체는 인간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멍에 빠지거나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 P206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4년 일기 애플리케이션 역시 사랑하려는 사람들, 꿈 꾸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의 ‘편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녀를 만난 다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 P222

한 남자가 주먹으로 맞은 다음 뒤로 떠밀리며 검은 구멍 쪽으로비틀거렸다. 나는 남자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정화씨의 몸을 붙들었다. 정화씨는 손을 뻗어 남자를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이 영원히 기억날 것이다. 철수세미로뇌를 박박 문질러도 그 장면만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정화씨의 오른손을 잡았고, 나는 정화씨의 몸을 붙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아야겠다는 남자의 필사적인 힘이 정화씨를 붙들어야 한다는 나의 필사적인 힘보다 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책은 끝이 없지만, 죽음 앞에서의 자책은 가벼울 뿐이다. 자책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책뿐이다.  - P227

나는 그녀가 사라져간 검은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암흑 속에서 무언가 나타나나를 잡아챌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두려웠다. 누가 나를 검은 구멍 속으로 떠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이것은 진심이다. 나는 그녀를 따라 곧장 검은 구멍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며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을, 그녀를 안아줄 것이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짧은 순간 그녀와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쿡쿡 쑤셔온다. 그녀는 검은 구멍 속으로 빠지면서 위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내 얼굴의 윤곽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내 얼굴을 몸에서 뜯어내버리고싶다. - P228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섬으로 헤엄쳐가다가 물에 빠져 죽거나 바닷속에서 얼어 죽거나 여기에 남아서 미친 사람들에게 맞아 죽거나 아니면 구멍 속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죽기 전에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수첩과 볼펜이 긴요하게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중간에 버릴까도 생각했던 물건들이다.
이 기록은 내 생각과 달리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읽을 사람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 혹여 읽는다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진실도 없고 역사도 없다. 한 개인의 변변찮은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은 그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말들, 그녀의 생각들을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229

나는 관계를 부수는 사람이다. 고리를 끊는 사람이다. 폐허 위에서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내 차선재의 일기장 맨 앞에는 그말들이 적혀 있었다.
매일 새벽 3시, 모든 소음이 아래로 가라앉으면 차선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에다 뭔가적기도 하고 낙서를 하기도 했다. 의미 없는 말들을 주로 적었다.
연필이 하는 말을 따라다녔다. 의자, 창문, 형광등, 새벽의 자전거소리...... 들리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적었다. 의미 있는 말을 적는게 무서웠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새벽 3시부터의 시간이 차선재를 버티게 해주었다. 6시가 되면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면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학교에서는 무의미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 P265

차선재는 서랍에다 〈Station>을 넣어두었다. 지난 시간을 다시태어나게 할 마음은 없었다. 돌아갈 수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고스케치북을 펼쳤다. 만년필로 원을 그렸다. 원 속에 새로운 시간이흐르게 하고 싶었다. 다이얼과 문자판을 그려넣는 중에 제목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제목을 생각하지 않고 번호만 붙인 작품만 만들었는데, 갑자기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 요요로 하자. 가까워지고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차선재는 만년필로 새로운 원을 그렸다. 스케치를 하고 또 새로운 원을 그렸다. 원에다 계속 또다른 시계를 그려넣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의 시계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방에서, 대학교 때의기숙사에서 그렇게 자주 만났던 시간인데, 한동안 그 시간을 잊고지냈다. 시침과 분침이 단정하게 90도의 각을 만들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 사이를 초침이 막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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