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에 갇힌 지 사흘째가 되자 기민지는 파도의 흐름을 알게되었다. 지식으로 암기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반복해서 본 다음 궤적을 이해하게 되었다. 기민지는 책도 읽지 않고 더이상 노트북도 들여다보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았다. 사람이 없는 바다의 풍경은 구간반복으로 설정해놓은 영상 같았다. 기민지는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다른 그림 찾기를 했다. 파도의 높이가 달라졌고,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의 일렁임이 변했고, 빛이 약해졌고, 먼바다로 지나가는 배의 위치가 바뀌었다. 기민지는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풍경의 일부가 되면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 P63

노트북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기민지는 바다를 한참 더 들여다보다 노트북 앞으로 갔다. 메시지를 읽는 기민지의 표정은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입가가 다시 일그러졌다.
넷째 날 아침, 기민지는 소파에 누운 채 잠이 들었다 깼다 하며하늘을 보고 있었다. 흐린 날씨였다.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언제라도 호텔에 닿을 것 같았다. 기민지는 먹구름을 타고 호텔에서 도망치는 상상을 했다.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먹구름 속으로 풀쩍뛰어내린 다음 유유히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은 화창하게 맑고 먹구름은 폭신폭신하고 발밑에서는 비가 시작된다. 먹구름을타고 공중회전을 하는 상상을 할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민지는 상상 속에서 현실로 잘못 튀어나온 소리라고 생각했다. - P63

백팩의 어깨끈을 붙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 앞을 벗어나자 주택가인 듯한 조용한 동네들이 나타났다. 밤이 깊었지만 불 켜진 집이 많았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모든 창문의 빛이 달라 보였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 창문 하나에 비밀 하나씩이 숨어 있고, 어쩌면 기민지가 저 수많은 창문 중 하나에 있을지 모른다고, 장우영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기민지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 P67

그의 여자친구였을 것이다. 기민지는 갑자기 화가 났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밥을 먹을 때도,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낄낄거릴때도 K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실루엣을보는 순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 남자가 갖고 싶어졌다. 풍경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질투심이 들끓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중 누구를 질투하는지도, 질투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민지는 창문으로 뭔가를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 - P87

규호는 정윤이 가고 난 의자를 계속 보았다. 정윤이 누르고 있던 의자 등받이의 천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다 부었다. 의자 등받이의 천은 아직도 복구되는 중이었다. 규호는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정윤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거기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 P122

강당 천장에 달린 등이 일제히 제각각의 방향으로 흔들렸고, 땅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전등의 불빛이 깜빡거리며 빛과 어둠이 반복됐다. 어둠 사이로 희미한 불꽃 같은 게 보였다. 정민철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속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할머니, 뱀들은 왜 화가 났어? 옛날 옛날 한 사람이 산길을 걷다가 새끼 한마리를 잡아서 곧바로 껍질을 벗기곤 먹어버렸어. 뒤따라가던 어미뱀이 땅바닥에 버려진 껍질을 보고 울기 시작했지. 너무 괴로워서 막 몸을 비틀면서 꿈틀거렸는데 땅속의 모든 뱀들에게 그 고통이 전해진 거야. 땅속에서는 태산보다도 더 큰 뱀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어. 산이 들썩거리고 나무들이 뽑혀나가고 강물이 솟아올랐어. 새끼뱀을 먹었던 사람은 갈라진 땅으로 빨려들어가서 뱀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세상이 조용해질 때쯤 그 사람의 뼈만 땅으로 되돌아왔어. 우리 꼬맹이 잠들었니? 지진 날 때 들리는 소리가 바로 뱀들이 우는 소리야. - P156

낮은 탄식은 좀더 큰 목소리로 변했고, 곳곳에서 엄마, 하는 비명이 들렸다. 어둠 사이로 보이던 짧은 빛이 소리를 삼켰다. 정민철은 숨이 막혔다. 누군가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멱살을 쥐고 흔들던 손이 자신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발목을 잡고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것 같았다. 정민철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정민철은 강당 건너편의 화이트보드가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을 보았다. 세상이 꿈틀거리면서 자신을 휘감고 있었다. 류영선은 두 손을 말아쥔 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눈을 뜨지 않았다. 정민철은 눈을 감을 수없었다. 세상이 미친 듯 흔들렸다.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은 정민철을 풀어주지 않았다. 정민철은 바닥을 짚고 있던 손으로 목을 만졌다. 숨이 막혔다. 류영선을 감싸고 있는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순간이었다. 거대한 힘 앞에서 작은 힘들은 의미를 잃고, 방향을잃었다. 서로 의지하는 힘이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우우웅,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타났다가 땅속으로 사라졌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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