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식탁에 앉자 한 손님이 돌아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신랑이 신부에게 말했다. "이봐요, 내 사랑, 아는 이야기 없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뭐라도 들려줘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 꿈 얘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 그림형제 수집 <강도 신랑>

좋든 나쁘든 모든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아니면 이야기의 일부를 조작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으면,
건너뛰어 다른 이야기를 택하기 바란다.

-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이제 그는 상상 속에서또 다른 행성을 오른다
이 세상을 카메라의 시점으로 한눈에 하나도 빠짐없이 더 잘 보기 위해 매번 울리는 영감어린 찰칵 소리,
이곳의 이야기, 이곳의 속임수, 이곳의 흔적 없음,
이것을, 이것을 그는 책에 쓰고 싶어 한다!

- A. M. 클라인, <풍경으로서의 시인의 초상>

이름을 짓는 행위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위대하고 엄숙한 위로다.

- 엘리아스 카네티 (파리의 교통

나는 무엇 때문에 제정신인 사람이 허구에 매달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만약 그것이 글쓰기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때로 하는 말처럼 애들 장난같은 공상의 연장이라면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것을, 그것만을, 오직 그것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그 일을 자전거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만큼이나 이성적이라 여기는 것을 말이다.

- 메이비스 갤런트, <선집> 서문

굴 속에 깊숙한 굴 속에,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자리하기. 그리고 오직 글쓰기만이 구원해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손톱만큼의 주제도 생각도 없이 있는 것, 이는 다시 한 번 책 앞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광활한 백지. 잠재적 상태의 책, 무 앞에 자리 잡기, 살아 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무언가, 너무나 끔찍해 이겨내기 힘든 무언가 앞에 있기.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먼저 특별할 것 없는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는 작가이자 독자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학자도 아니고 문학 이론가도 아니다. 이책에 그런 개념들이 조금이라도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보통 작가들이 취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방식이란, 갈까마귀가 하는 짓을 떠올리면 된다. 반짝거리는 물건들을훔쳐서 둥지를 마구잡이로 쌓아올리는 것 말이다. - P18

식민지는 진부한 틀을 초월할 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한데(…) 이런에너지가 부족한 건 자신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다. (...) 이들은 아주근사한 장소를 자국의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국경 너머 어딘가 발전 가능성을 넘어서는 어딘가로 설정한다. (…) 위대한 예술은예술가와 관객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의 삶에 대해 열렬하고 유별나게 공통의 관심을 보일 때 자라난다.

- E. K. 브라운, 《캐나다 문학의 문제》(1943)‘

시인 5백 명이 몰려들 만큼 거액의 상금이 걸린 시 쓰기 대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 그들을 한데 모으면 전형적인 캐나다시인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 5백 편을 모두읽고 나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한 세 사람 정도가 뭘 좀 할 줄 안다는것, 그러니까 시를 전문적으로 쓸 줄 안다는 것이다. (...) 이 세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운율은 그럴 듯하나 핵심적인 은유 하나 없는 2백편의 시와, 운율이 있다 해도 절뚝거리는 3백 편의 시를 만나게 된다. (...) 이 수많은 시들 사이에 광인이 쓴, 재치 있고 기묘하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서너 편의 시들도 끼여 있다. (...) 5백 편의 캐나다 시인에 대한 이런 분석은 나를 우울감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나라의 풀뿌리 시인, 시를 애호하는 독자, 감수성 풍부한 보통 시민을 대표하는데, 그 누구도 전혀 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제임스 리니, <캐나다 시인의 곤경》(1957) 

캐나다 시인은 언어 (다른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의 모든 양식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자신이 그 언어 양식들과 경쟁하고 있다는치명적인 인식이 부족하다.

- 밀턴 윌슨, 《기타 캐나다인들과 그 후》(1958)‘

나는 독자이면서 작가도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책을 사서글을 쓰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쓰기도 했는데, 시작은 호기로웠으나금세 글에 맥이 빠지자 엄벌이라도 처하는 양 종이를 찢어내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나는 공책 표지만 남을 때까지 찢고 쓰기를반복했다. 그런 뒤 공책을 또 사서 전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같은 주기가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었다. 흥분했다가 좌절했다가, 흥분했다가 좌절했다가.

- 앨리스 먼로, <코테스 섬>(1999) 

너는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 마태복음 6장 3~4절

정열과 환희의 시인들이여,
지상에 영혼을 남겨두었구나!
새로운 곳에서 이중으로 살면서,
천상에도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 존 키츠, <정열과 환희의 시인들이여>

너는 지킬의 손을, 너는 하이드의 손을 가졌구나.

- 그웬돌린 매큐언〈손과 히로시마

비정상적으로 관찰을 강조하는 것은 관계를 몹시회피한다는 것을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해, 타인의 삶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동일시하는 동시에,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리를 두는 것을 뜻한다. (...) 멀찍이떨어져 있는 것과 완전히 연루돼 있는 것 사이의 긴장, 그것이 작가를 만든다.

- 네이딘 고디머, <선집> 중 서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메리 매케이 선생님에게.

"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부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16)에서 발췌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상점 주인, 기술자, 우편 업무를 보거나 실업 급여를 타려고 줄을선 사람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빙고 홀, 술집, 튀김 - P11

가게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ㅡ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학교로 갔고 엄마들은 고개를 숙이고 빨랫줄로 달려가는 데 이제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아예 빨래를 내다 걸 생각조차안 했고 해지기 전에 셔츠 한 장이라도 말릴 수 있으리란 기대도 안 했다.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 P12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빈주먹만도 못했다고 말할사람도 있을 것이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다. 미시즈 윌슨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큰 집에 혼자 사는 개신교도였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줬다. - P15

펄롱은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멀리 보이는 강을 바라보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했다. 떠돌이 개가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을 찾고, 튀김 봉지와 빈 깡통이 비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구르고, 느지막이 술집에서 나온 남자들이 비틀비틀 집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때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질 때면 펄롱은 긴장했다. 펄롱은 자기 딸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남자들의 세계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벌써 길에서 딸들한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펄롱은 마음 한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 P22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 P22

뉴로스에서는 조선소가 문을 닫았고 강 건너에 있는 큰비료 공장 앨버트로스에서는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했다. 베넷에서는 열한 명을 해고했고 아일린이 근무했던 아주 오래된 회사 그레이브스 앤드 컴퍼니도 문을 닫았다. 경매업자는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다며, 에스키모에게 얼음을 파는 편이 쉽겠다고 말했다. 석탄 야적장 근처에서 꽃집을 하는 미스 케니는 널빤지로 가게 창문을 덮어버렸다. 어느날 저녁 펄롱의 일꾼 중 한 명에게 못질하는 동안 합판을 좀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P24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 P29

가끔 까만 머리카락에 눈빛이 똘망똘망한 딸들이 작은마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여자들이 힘과 욕구와 사회적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겁내는 건 그럴 만하지만, 사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였다. 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하고, 밤에 꿈으로 꾸고, 속마음을 읽었다. 펄롱은 결혼해서 같이 살던중 아일린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아일린의 기개와 시퍼런 직감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 P32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 P36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식탁에 앉아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P44

뜬금없이, 기술학교에서 나와 여름에 버섯공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출근 첫날,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버섯을 땄음에도 손이 더뎌 다른 사람들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침내 라인 끝에 다다랐을 때는 땀이 흐르고있었다. 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았는데, 거기에서 벌써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 P44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 P53

구불구불한 도로에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없어서 펄롱은 우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다. 그 길로 가다가 또 우회전했더니 길이 더 좁아졌다. 또 한 번 우회전을 해서 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건초 창고를 지나다가 짧은 목끈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숫염소 한 마리를 보았고 곧이어 조끼를 입은 노인이 길가에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수 있다네." - P54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냐."
"틀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너무 속이 물러. 그래서 그래.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생기면 다 나눠 주고-"
"오늘 뭣 때문에 화난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무슨 어려움 말야?"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당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아일린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 - P56

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거기 있는 애들은 세상에 돌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거야. 그 애들 부모는 애들을 멋대로 풀어놨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모른 척 등을 돌려버렸겠지. 자식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서는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펄롱이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P57

차가 수녀원에 가까워지면서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펄롱은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현관문 앞을 지난 다음 후진으로 건물 옆을 따라 석탄 광까지 가서 시동을 껐다. 펄롱은 졸린 상태로 차에서 내려 멀리 주목과 산울타리, 성모상이 있는 작은 동굴을 보았다. 성모는 발치에 놓인 조화造花가 실망스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높은 창에서 흘 - P66

러나온 빛이 닿은 자리에는 서리가 반짝였다.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표면에 불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어딘가에서 「아데스테 피델레스」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옆 건물인 세인트마거릿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학생들일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집에 가지 않았으려나?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 직업학교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수녀들이 아침 미사 전에 연습하는 건가?
펄롱은 잠시 서서 노래를 들으며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솟았고 하늘에서는 작은 별이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는 동안 가장 밝은 별이 순간 칠판 위 분필 선 같은 자취를 남기며 떨어져 사라졌다.
또 다른 별은 다 타버린 것처럼 서서히 희미해졌다. - P67

한참 뒤 위층 커튼이 움직이더니 어린아이가 밖을 내다봤다.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99

펄롱은 대화에 끼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다른 생각을 했고 상상에 빠졌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들이 더왔고,긴의자에서 옆으로 이동한 펄롱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자기 모습을 똑바로 보며 네드와 닮은 데가 있는지 찾았다.
닮은 데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윌슨네 집에 있던 여자가 둘이 친척이라고 여겨 닮았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고 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 P110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게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다.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P111

펄롱은 어렵지 않게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언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부럽기도 했다.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펄롱은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고 다시 한번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펄롱은 이미 여러 차례머릿속으로 그곳에 가서 신부님을만나는 상상을 해봤고 그들도 이미 다 안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시즈 케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다 한통속이야. - P117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날을, 수십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 P119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ㅡ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P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 P120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P121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입니다.
1996년에야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 시설에서 은폐·감금·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적게 잡으면 만 명이고, 3만 명이 더 정확한 수치일 것입니다.
막달레나 세탁소의 기록은 대부분 파기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접근 불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일한 여자와 아이들 가운데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거나 노역을 인정받은 이는 - P123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여자가 아기를 잃었습니다. 목숨을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제대로 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곳 모자 보호소에서 죽거나 다른 곳으로 입양된 아기가 몇천 명이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2021년 초모자 보호소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었던 18개시설에서만 9,000명의 아이들이 사망했습니다. 2014년 역사가 캐서린 콜리스는 골웨이 카운티에 있는 투엄 보호소에서 1925년에서 1961년 사이에 796 명의 아기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이 시설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막달레나 세탁소에 대해 아무런 사죄의뜻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엔다 케니 총리가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 P124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해 클레어 키건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 P127

"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P128

독자가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전체 이야기를 알고 나면첫 문단이 적절하게 느껴지고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 P128

그런 한편 이 짧은 소설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지 않고 암시하고자 한 부분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고 빙산의 일각 같은 이 글을 과연 어떻게 옮겨야 할지 난감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역을 하기 위해 이 책을 무수히 읽으면서 내가 알게된 것을 번역에 설명하듯 담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그랬다가는 클레어 키건이 의도한 대로 삼가고 억누름으로써 깊은 진동과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 되지 못할 터였다. - P129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120쪽)의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언어가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구조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도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위태롭다. 1985년 아일랜드 작은 도시에 사는 빌 펄롱같은 사람들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24) 살아야지,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22쪽). 하루벌어 하루를 버틸 수 있으면 다행이고, 조금이라도 남겨서 앞날의 재앙에 대비할 수 있으면 기적이다. 다른 사람에게동전 한 닢, 마음 한켠이라도 내주는 것도 사치인지 모르다 - P130

소설의 중심인물인 빌 펄롱의 내면에도 차마 하지 못한사소한 일들,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한 모호한 말들이 꽉차서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지경이다. 수녀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너무 크고, 그 안의 어떤 존재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너무 작은 존재라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펄롱에게 뒤에서 작고 소박한 사랑밖에 줄 수 없었던 네드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덥고 환한 날이다.
들판에 군데군데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길을 따라 푸릇한빛이 갑자기 일렁인다. 우리는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쇼트혼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하고 그걸 딴 사람이 곧장소를 팔아치웠던 카뉴 시장을지난다. 아빠는 조수석에 모자를 내던지더니 차창을 내리 - P9

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땋은 머리를 풀고 뒷좌석에 누워뒤창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본다. 군데군데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고 분필을 칠한 듯한 구름이 떠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얼기설기 지나는 전선에 긁힌 듯한 나무들과 하늘이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이따금 작은 갈색 새 떼가 전속력으로 날아가며 사라진다. - P10

나는 아빠가 왜 건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까 생각한다.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누가 사슬톱을 켜는지 크고 무서운말벌이 멀찍이서 웅웅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난다. 나도 저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주전자가 부글부글 끓으며 김을 피워 올리자 철제 뚜껑이 달각거린다. 창틀에서 까만색과 흰색이 섞인 고양이가 얼핏 움직인다.  - P17

바람이 불자 키가 큰 풀들이 구부러지면서 은색으로 변한다. 한쪽 구획에서는 키 큰 홀스타인 젖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서서 풀을 뜯는다. 우리가 지나가자 몇 마리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만 도망가는 소는 한 마리도 없다. 젖통이 크고 젖꼭지가 길다. 젖소들이 뿌리만 남기고 풀을 뜯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주머니가 나를 끌어당겨 풀밭에 다시 안전하게 올려놓은 다음 혼자 내려간다. 양동이가 옆으로 잠시 떴다가 가라앉아서 꿀꺽꿀꺽 반가운 소리를 내며 물을 삼키더니 수면 밖으로 나와 들어올려진다. - P30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 ㅡ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ㅡ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우리는 해가 뜰 때 일찌감치 일어나서 아침으로 달걀 요리와 토스트, 마멀레이드를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킨셀라 아저씨는 모자를 쓰고 밭으로 나간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나는 해야 할 일들을 큰 소리로 죽 은 다음 일을 한다. - P45

"자." 아저씨가 말한다. "구두 길들이러 가자."
"벌써 길든 거 아니야? 어딜 데려가려고?"
"바닷가까지만 갈 거야." 아저씨가 말한다.
"조심해, 존 킨셀라." 아주머니가 말한다. 램프도 없이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
"오늘 같은 밤에 램프가 왜 필요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지만 아주머니가 램프를 건네자 순순히 받아 든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 P69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던 바다로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두려워하고, 아저씨가 바다에서 발견되는 말들에 대해서,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알아내려고 사람을 믿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계속 걷다가 절벽과 암벽이 튀어나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이제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야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납작하고 하얀 조개껍데기가 모래밭으로 밀려 올라와 여기저기서 반짝인다.  - P73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모퉁이를 돌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 곳에 도착하니 아저씨가 대문 죔쇠를 돌려놓고 다시 잠그고있다. 아저씨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자기 손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 발이 진입로 중앙에 풀이 지저분하게 자란 부분을 따라 달리며 울퉁불퉁한 자갈을 세차게 밟는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아저씨는나를 보자마자 딱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  - P97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차려입은 옷을 통해 전달되는 아저씨의 열기가 느껴진다. 내가 마침내 눈을 뜨고 아저씨의 어깨 너머를 보자 아빠가 보인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 - P97

없이 굳세게 다가온다. 나는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가졌던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볼 용기가 있다면, 나만의 진실, 세상의 진실, 끝없이 우리를 사로잡아 아픔을 주는 이 모든 것의 진실을 발견하고 말리라는 것을 어쨌든 알기에.
- 진 라이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 P9

내 머리와 가슴과 자궁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오며 내 감정을 좌우했다.
동시에 이 끊을 수 없는 존재로 인해 나는 강렬한 삶을살게 되었다. 그녀로 인해,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내면의 움직임을 알게 되었고,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온갖 것들을 꾸며낼 힘과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었고, 열에들떠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었다.
이중의 의미로, 난 사로잡힌 상태였다. - P12

이런 상태에 들어서자, 일상의 근심과 성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습관화된 일상의범용함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 시사 문제가 불러일으키기 마련인 성찰들 역시 더이 - P12

상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애써도, 2000년 여름은 이륙 직후 고네스의 한 호텔에 추락한 콩코르드 비행기 사고 말고는 내게 아무런기억도 남겨놓지 않았다.
한편에 고통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이 고통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 사고력이있었다. - P13

47 이라는 숫자는 야릇한 물질성을 띠게 되었다. 이 두자리 숫자가 도처에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듯했다.
난 세월과 노화 순으로가 아니면 더이상 여자들을 자리매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세월과 노화의 징표를 나의 것과 비교하면서 그들을 평가하게 되었다. 사십대에서 오십대 사이로 보이며, 부유층 구역에사는 여성들을 모조리 똑같이 보이게 만드는 그 ‘우아한 단순미‘를 풍기는 복장을 한 여성들은 모두, 한 여자의 분신이었다. - P14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 P21

글쓰기를 통해 나의 강박증과 고통을 여기에 노출하.
고 있는 행위와 랍 대로에 가면 그들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출을 두려워하던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글쓰기,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행하는 것이다. 나의 얼굴, 나의 육체, 나의 목소리.
나라는 인간의 특징을 형성하는 이 모든 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는 내팽개쳐버릴 누군가의눈앞에 드러내는 것은 더없이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지금은 내 강박증을 드러내고 헤집어보는일이 전혀 거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반항심도 전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난 정말이지 아무 느낌도 없다. 나는 나를 본거지로 삼았던 그 질투가 꾸며내는 온갖 상상과 행동들을 묘사하려고만 애쓰며, 개인적이며 내밀한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실체로 변모시키려고만애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형체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것들을 제 것으로 삼을 것이 - P43

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욕망, 나의질투가 아니라 그저 욕망, 질투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순이란 관념은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순은 바로 생명체의 고통 속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헤겔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퐁투아즈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에 들어간 지 두 해째였다.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 왔다. 「모친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10시쯤이었다.


어머니가 머물던 방의 문이 처음으로 닫혀 있었다. 이미 염을 마친 상태여서, 깨끗이 씻긴 뒤 흰색 염포가 턱 밑으로 지나가게 머리를 감아 놓았고, 그 바람에 피부가 전부 입과 눈 주위로 몰려 있었다. 어깨까지 시트로 덮여 있어서 두 손이 보이지 않았다.  - P7

내가 가장 힘들 때는밖에 시내에 있을 때였다. 차를 몰다가 퍼뜩 이런 생각을 하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이제 다시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의 습관적인 행동 방식이 더 이상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들이 정육점에서 자잘한 신경을 써가며 이런저런 부위를 고르는 모습을 보면 끔찍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상태가 차츰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인 이달 초에 그랬듯, 날이 춥고 비가 오면 여전히 만족스러움. 그리고, <이젠 더 이상그래 봐야 소용없구나> 혹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구나>(어머니를 위한 이런저런 일)를 확인할 때마다 밀려드는 공허한 순간들. 어머니가 보지 못할 첫 번째 봄이라는 생각이 자아내는 빈틈. (이제는 평범한 문장들, 심지어 진부한 표현들에 담긴 힘이 느껴짐.) - P17

편지가 아닌 책의 첫머리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를 쓸 수 있었다. 또한 어머니의 사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센 강가에서 찍은 사진 하나에서는 어머니가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어머니의다갈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알파카로 지은 정장의 광채가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치매 환자였다. 기억의 분석을 보다 쉽게 해줄 시간적거리를 확보하자면, 아버지의 죽음과 남편과의 헤어짐이 그랬듯 어머니의 병과 죽음이 내 삶의 지나간 흐름속으로 녹아들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 - P18

이것은 쉽지 않은 시도이다. 내게 어머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는 늘 거기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 - P18

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내 상상이 만들어낸여자, 며칠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또 내가 붙들고 싶은 여자는 나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여자, 노르망디의 소도시 촌구석에서 태어나 파리 외곽 지역의 병원에서 운영하는노인병 전문 의료 센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실제의 그여자이기도 하다.  - P19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 - P19

이브토는 루앙과 르아브르 사이의 바람 부는 고원에 세워진 추운 도시이다. 그곳은 금세기 초만 해도, 대지주들이 장악한 순수 농업 지역에서 상업과 행정의중심지였다. 농가의 짐수레꾼이었던 외할아버지와 집에서 직물을 짜던 외할머니는 결혼하고나서 몇 년 뒤그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둘 다 3킬로미터 떨어진 옆마을 출신이었다. 그들은 역 근처 카페들이 드문드문해지는 곳과 유채 밭이 시작되는 곳 사이, 철길 건너편외곽의 경계가 불분명한 시골 지역에 안마당이 있는 작은 단층집을 빌렸다. 나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1906년여섯 아이 중 넷째로 태어났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지 않았단다.」 그 말을 할 때 내비치던 자부심.) - P20

그녀는 살림을 알뜰하게 살았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돈으로 가족들을 먹이고 입혔고, 미사를 보러 가면구멍도 나지 않고 더럽지도 않은 옷을 입힌 아이들을나란히 앉혀 놓았고, 그럼으로써 시골뜨기라는 느낌을 갖지 않고 살아가게 해주는 자존감을 추슬렀다.
그녀는 셔츠의 목과 소매 깃을 뒤집어서 한 번 더 사용했다.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유 위에 뜨는막과 굳은 빵으로는 케이크를 만들었고, 장작을 때고남은 재로는 빨래를 했고, 프라이팬에 남은 열로는 자두나 행주를 말렸고, 아침에 사용한 세숫물은 그날 손을 씻는 데 사용했다. 가난을 덜어 주는 그 모든 행위들을 앓, 여러 세기에 걸쳐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해 오는 그 지식이 내게 와서 멈춘다. 나는 관련 문서정리자에 불과하다. - P22

열두 살 반에 학교를 떠나도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는 것이 일반적 관례." 마가린 공장에 입사한그녀는 그곳에서 추위와 습기로 고생했고, 젖은 손은겨울 내내 동상에 걸려 있었다. 그러고 나니 마가린쪽으로 다시는 <눈길을 돌리기도 싫었다. 따라서<꿈 많은 청소년기>와는 거리가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토요일 밤을 기대함, 모드 잡지인 ‘르 프티 데 - P26

코드 라 모드』*와 백분(白)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남기고 어머니에게 월급 전부를 갖다 바침, 정신없이 깔깔거림, 미워함. 어느 날 작업반장의 목도리가기계 벨트에 말려 들어갔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러 달려가지 않았고, 그는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만 했다.
내 어머니는 그 사람 옆에 있었다. 노동 소외에 버금가는 중압감을 겪었던 게 아니라면 그 사실을 어떻게받아들이겠는가? - P27

여자에게 결혼이란 삶 또는 죽음이었으니, 둘이 되어 보다 쉽게 궁지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일 수도 있고 결정적인 곤두박질로 끝날 수도 있다. 따라서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남자를 알아볼 수 있어야만 했다. 당연히,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당신을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촌구석에서 암소 젖이나 짜게만들 땅 파는 사내는 퇴짜, 나의 아버지는 밧줄 제조공장에서 일했고, 키가 크고 풍채가 근사했으며, 제법<멋쟁이였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가정을 꾸릴 생각으로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다. - P32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서그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두 달 전, 종이 위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쓰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고, 심지어 만약 그문장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읽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병원과 노인요양원이 위치한 구역으로 가는 것이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들이 잊고 있는 줄알 - P41

았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처음에는 내가 글을 빨리 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해야할지, 마치 어머니에 관한진실 - 그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모른다 - 을 유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순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단어들을 고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대해 궁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게는 그러한 순서의 발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 P42

예의범절들(예의범절에 어긋나-어머니는 배움는 것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 관례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 요즘 벌어지는 일들,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 최신상영작(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공원의 꽃 이름들 ㅡ을 열망했다. 누군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면 호기심 때문에, 자신이 지식을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주의 깊게 들었다. 정신적으로 향상된다는 것, 그녀에게 그것은 우선 배우는 것이었고(그녀가 말하기를, <정신을 풍요롭게 해야 한단다>), 그 어떤 것도 지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책이 그녀가 유일하게 조심스럽게 다루는 물건이었다. 책을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었다. - P56

이 글을 쓰면서 때로는 <좋은〉 어머니를, 때로는<나쁜 어머니를 본다. 유년기의 가장 먼 곳에서부터올라오는 이 흔들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어떤 다른 어머니와 내가 아닌 어떤 다른 딸의 이야기인 것처럼 묘사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가장객관적인 방식으로 글을 써나가고 있지만, 내게 몇몇표현들은(〈그러다가 네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추상적인 다른 표현들(예를 들자면 <육체와 성의 거부>)과는 다르게 객관적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열여섯 살 때 꼭 그랬듯이 여전히 의기소침한 기분을 느끼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미쳤던 그 여자와 할례 시술사가 클리토리스를 절제하는 동안 등 뒤로 어린 딸아이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머니들을 순간적으로 혼동한다. - P62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살아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이다. 가끔씩 집에서 어머니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맞닥뜨리는 일이벌어진다. 그저께는, 밧줄 제조 공장에서 기계 때문에휘어 버린 손가락에 끼었던 골무였다. 곧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밀려들며, 나는 어머니가 결코 다시는 존재할 수 없는 진짜 시간 속에 놓인다. 그러한 상황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머니의 - P69

죽음이라는 의미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소를 지으며 <다음 번 책은 언제쯤 나올 건가요?> 묻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은 욕구.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해도 내가 결혼하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속해 있었다. - P70

그녀는 늘 소통하고 싶은 욕구는 지니고 있었다. 언어 기능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귀가 맞는 문장들. 발음은 정확하나, 그저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상상의 세계에만 복종하는 단어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삶을 꾸며냈다. 파리에 가기도 했고, 금붕어 한 마리를 사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남편의 무덤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 - P102

그녀는 또 다른 겨울을 났다. 부활절 다음 일요일에개나리를 안고 그녀를 보러 갔다. 날이 우중충하고 추웠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식당에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내게 웃음을 보냈다. 방까지 휠체어를 밀고 갔다. 화병에 개나리를 가지런히 꽂았다. 곁에 앉아 초콜릿을 먹으라고 주었다. 병원 직원들이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갈색 털양말을 신기고, 삐쩍 마른 허벅지가 내보일 정도로 너무짧은 가운을 입혀 놨다. 손과 입을 씻겨 줬는데, 피부가 미지근했다. 어느 순간엔가 그녀가 개나리 가지들을 잡으려고 했다. 얼마 있다가 그녀를 식당에 데려다줬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자크 마르탱이 사회를 보는「팬들의 학교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는 다음 날 죽음을 맞았다. - P106

지금은 2월 말이고, 비가 잦고, 날씨가 제법 온화하다. 오늘 저녁 장을 보고 난 뒤 노인요양원에 가봤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건물은 보다 환하고, 거의 안락해보였다. 어머니가 있던 방의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있던 곳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구나.>처음으로 깜짝 놀라며 해본 생각이었다. 21세기의 언젠가, 내가 이곳이든 혹은 다른 곳에서든 냅킨을 폈다접었다 하면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들가운데 한 명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 P107

몇 주 전, 고모 한 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사킬 때 공장 화장실에서 만남을 가졌다고 얘기해 줬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금, 그녀가 살아있을 때 그녀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 말고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전혀 없다.
그녀의 이미지는 다시, 내가 유년기에 그녀에 대해서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가 되어 가고 있다. 내 위로 드리워진 커다랗고 희뿌연 그림자.


그녀는 시몬 드 보부아르보다 일주일 앞서 죽었다. 그녀는 받기보다는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 P109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역사가 되어야 했다. - P110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1986년 4월 20일 일요일~1987년 2월 26일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