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너희들의 아버지인 내가 후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친 것인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지금 여기서 사라져 간 시대를 비웃고 연민하듯 너희들도 나의 케케묵은 마음가짐을 비웃고 연민할지 모른다. 나는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은 나를 발판으로 삼아 높고, 멀리나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몹시 쓸쓸하다. 우리들은 그저 이렇게 말만 하며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너희들과 나는 피의 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을 맛보았다. 가자,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쓸쓸함을 제거하기 위해 일하자.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이것은 어버이로서 너희들에게 보답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나의 감사를 받아달라는 것뿐.
죽어 넘어진 어미를 먹어 치우면서 힘을 기르는 사자 새끼처럼 힘차고 용감하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로나아가거라..
내 일생이 아무리 실패작이더라도, 내가 아무리 유혹을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의 발자취에 불순한어떤 것을 너희들이 발견할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 너희들은 내가 죽어 넘어진 곳에서 새로운 - P182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에서 어렴풋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불행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을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의 여정에 오르거라. 앞길은 멀다. 그리고 어둡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거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앞에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가거라. 용감하게, 아이들아! (1919)
- 루쉰의 산문 <아이들에게> - P183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면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것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 이상 숨지 못하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따라 마냥 흔들리고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김기택의 시 <태아의 잠 1〉 부분 - P187

관계 역전의 상태에서 가정의 달 5월을 맞았고 ‘어버이날‘ 카드에는 예의 그 칭찬 메시지가 가득했다. 큰 상을 한 번 받았더니 카드 형식은 시시했다. 나는 딸의 사랑을 간구하는 가엾은 엄마가 되어, 요새 왜 그거 ‘좋은 부모상‘ 안주냐고 묻고 말았다. 물어보면서도 상 이름이 그렇게 진부하지 않았는데 싶어갸웃했는데 "아, 자식사랑상?" 한다. 딸아이는 요즘 자기가 소홀했다며 곧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제는 귀갓길에 딸에게 전화가 왔다. 학교 수업 준비물로 1.5리터 물병이 필요하니사 오란다. 알았다니까 "그럼 나는 그동안 자식사랑상을 준비할게" 한다. 현관문을 열자 딸아이가 돌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엄마한테 상장을 안 준지 6개월이나 됐더라." 삐뚤삐뚤 손글씨 대신 의젓한 명조체로 만든 ‘5월 자식사랑상‘. "위 어른은여섯 달 동안 항상 자식을 위해 많고 많은 노력을 하고, 항상 친절히 대했음으로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 P190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김행숙의 시 <다정함의 세계>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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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1905년부더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물러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 남부는 미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북한공산당은 1948년 북한 지역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50년 봄, 스탈린은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를 ˝주 방어선˝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밖에 놓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1월에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가 남한 군대를 쉽사리 밀어버릴 수 있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행운을빈다고 하고, 소련제 무기를 북한에 보내주었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무력 대결처럼 보일점이 많았다. 미국은 빠르고 확고하게 대응했으며, 일본과 그 밖의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동원, 북한을 본래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버릴수 있었다. 9월, 트루먼은 NSC-68을 승인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서 봉쇄한다는 미국 대전략(조지 케이 수립한 아이디어였다)의 비밀스럽고 공식적인 승인이었다. 10월, 중국이 북한 편에서 참전했다. 1952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북한 및 공산주의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군 탱크가 소련제 탱크와 싸웠고, 미군 전투기가 소련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두 전선에서의 전쟁이 될 확전을 두려워했던 것같다.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위성국가 지도자들을 불러모아유럽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도록 했다. 1951년과 1952년, 붉은 군대의 병력은 두 배로 늘었다.

정확히 이 시기(1951년에서 1952년)에, 소련 유대인들은 미국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탈린에게 상당히 들었던 것같다. 베를린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폴란드에서 실망하고, 한국에서전쟁을 겪은 스탈린은 다시 한번적어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던 그의 상상속에서는)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처럼, 1950년대에도 소련을 국제적 음모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그주체가 더 이상 베를린, 바르샤바, 도쿄(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는 아니더라도. 그러나 워싱턴(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의 음모는?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함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1930년대 말에 위협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P 643, 645


7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두 페이지도 못되는 분량의 ‘한국 전쟁‘을 만난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경찰력 및 디를레방거 특무단이 이것의 실행에 들어간 것은 1944년 8월 5일과 6일로, 양일간 그들 손에 살해당한 민간인의 숫자만 약 4만 명이었다. 그들의 군사적 목표는 서부 중앙 볼라 인근까지 행군해 작센 공원에 있던 독일 지휘부를 한숨 돌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을 자기네 맨 앞에 세워 일을 시키고, 그 와중에 여성과 아이들을 인간 방패로 삼거나 심지어 여인들을강간하면서, 볼가 거리에 폴란드 국내군이 설치해둔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있었다. 또한 앞서 동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솔린과 수류탄을 써서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하나 모조리 파괴했다. 볼라가는 과거게토였던 지역 남쪽과 닿아 있었고, 실제로 최남단부를 통과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파괴 작업은 인근 지역까지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 P547

디를레방거 여단 병사들은 세 곳의 병원을 그곳 환자들과 함께 불살라버렸다. 한 병원에서는, 부상 입은 독일인들이 폴란드인 의사 및간호사들의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은 디를레방거 병사들에게 폴란드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물론 어림없었다. 디를레방거 여단 병사들은 폴란드인 부상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날 저녁이 되자그들은 줄곧 그래왔듯이 간호사들을 야영지로 끌고 갔다. 그들의 관습에서는 매일 밤 그들이 고른 여인들은 일단 장교들 손에 가차 없이폭행당하고, 뒤이어 여러 병사의 윤간이 이어진 뒤 이내 살해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그러한 기준에서 봐도 특이한 날이었다. 플루트 연주가 흐르며 교수대가 설치되었고, 의사 그리고 발가벗겨진 간호사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었다. - P547

영국 언론들은 많은 경우 영국의 동맹국이 수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보도보다는, 오히려 폴란드인들은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 이들이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과 아서 케스틀러 두 사람은 이에 항의했는데, 오웰은 봉기를 도와야 하는 동맹국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영국인들의 "부정직함과 비겁함"을 지적했고, 케스틀러는 스탈린의 무반응을 "이번 전쟁에서 가장 파렴치한 행위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영토에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날아가 독일 거점을 폭격하고 폴란드인들을 돕는 등의 공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요청에 퇴짜를 놓은 1944년 8월 16일 바로 그날, 미국 외교관들은 유럽 동부 및 동남부 일대를 공중에서 폭격하는 ‘프랜틱 작전‘에 폴란드 지역 목표물들을 추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동맹 미국이 보낸 연료 보충 요청을 거절했다.  - P552

어느 폴란드 국내군 병사는 자신의 시에 "우리는 그대를, 붉은 역병을 기다린다 우리를 이 흑사병에서 구해주기를"이라고 적었다. 독일 국방군 또한 바흐와 마찬가지로 힘러의 정책에 반대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비스와강에서 붉은 군대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바르샤바를 일종의 요새로 사용하길, 아니면 적어도 그곳 건물들을 방공호로 이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바흐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고, 군은무시되었으며, 힘러의 바람대로 유럽의 수도 가운데 하나였던 도시는파괴되었다. 소련이 입성하기 하루 전에도, 독일은 바르샤바에 남은마지막 도서관을 불사르고 있었다. - P555

유럽의 다른 어떤 수도도 바르샤바처럼 참담한 운명을 맞은 곳은없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보다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민스크나 레닌그라드 같은 동부 도시들만이 바르샤바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대체로 보면, 전쟁 전 약 13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의 주민 절반가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 P555

1945년 1월에서 5월에 이르는, 종전 직전의 몇 개월 동안, 독일 강제수용소의 사망자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이 기간에만 굶주림과 방치로 약 30만 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 죽어가던 수감자들을 해방시킨 미군과 영국군은 자신들이 나치즘의 공포를 목격했다고 믿었다. 그들의 사진작가와 촬영기사들이 베르겐벨젠과 부헨발트 등지에서 찍은 사체 및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히틀러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바르샤바 유대인 및 폴란드인들이, 그리고 바실리 그로스만과붉은 군대의 병사들이 인지하고 있었듯이,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이야기였다. 오히려 최악은 바로 바르샤바 폐허 속에, 트레블린카 벌판에, 벨라루스 습지대에, 바비야르 구덩이들 사이에 있었다.
붉은 군대는 이 모든 지역을, 그리고 피에 젖은 땅 전역을 해방시켰다. 모든 죽음의 장소와 망령의 도시들은 스탈린이 히틀러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 철의 장막 뒤편의 유럽으로들어갔다.
소련군이 비스에서 발이 묶인 그 시점에 그로스만은 트레블린카에 대해 적고 있었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독일이 바르샤바 봉기와 폴란드 국내군을 진압하는 모습이었다. 바르샤바 잿더미속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냉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 P561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이르렀을 때, 스탈린은 어떤 모습으로 폴란드를 재건할 것인지 이미 계산이 서 있었다. 국경선을 어디로 그을지, 그 주민으로서 어떤 사람들을 강제로 살도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을 강제추방할지 다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폴란드는 공산국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종적으로 단일한 나라가 비록스탈린은 자신이 구상한 동유럽 제국에서 대량학살 정책만큼은 구상하고 있지 않았지만, 폴란드는 인종적 순수성이 지켜지는 지역의중심이 되어야 했다. 독일은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되고, 폴란드는 폴란드인들만의 나라가, 그리고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역은 우크라이나인들만 사는 땅이 될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소수 인종을 대표하기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나라의 소수 인종들을 청소하도록 시킬 작정이었다.  - P565

1945년 2월 영·미 동맹자들과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었고, 그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을 법하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받았던 땅, 다시말해서 폴란드의 절반과 발트 연안국들, 루마니아 동북부를 다시 갖겠다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스탈린은 독일을 징계하는(분단시키는 대가로, 공산화를 전제로, 폴란드 땅의 분단 점령을 상당 부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좀더 서쪽으로 국토가 이동하면서,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을 경계로 하는 독일 땅을 먹어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스탈린의 구상대로 정해진 폴란드의 경계 내에는 적어도 수천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있었다. 그들을 추방하고 재진입을 막는 일은 폴란드 공산 정부의 과제로 주어졌다. 그들은 독일인을 꺼리는 다수의 폴란드인의 태도에 힘입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폴란드 정치인의 자연스러운 숙원이었던 ‘폴란드인들만의 폴란드‘ 이념에서도 덕을 봤다. - P566

3월까지, 붉은 군대는 스탈린이 폴란드에 병합시키려했던 독일 땅의 전부를 점령해놓은 상태였다. 5월에는 붉은 군대가베를린에 입성했고, 유럽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소련군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동부 독일을 유린했는데, 그 정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다. 붉은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독일 정부는 약 600만 명의 독일인을 소개시켰는데, 이는 스탈린의 폴란드 구상(인종적, 지리적 모두) 실현에 보탬이 되었다. 그들중 다수는 독일의 항복 뒤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성공한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는 1945년 2월에 조지 오웰이 거의 마지막 목소리를 냈다. 독일계를 추방하는 계획은 "중대 범죄"이며 "결코 시행되지 못할것"이라고. 그는 틀렸다. 이번에도, 그의 정치적 상상력은 그의 오판을가져왔다. ‘ - P569

강간의 규모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서면서 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따지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인 소련이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에 대한실제 경험과는 별개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소련 체제의 산물이었다.
그것도 대개 그중 가장 악랄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약 100만명의 강제수용소 수형자가 전선에서 싸우게끔 풀려났다. 모든 소련병사는 그들의 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를 짓밟은 독일의 어리석음에치를 떠는 듯 보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집조차 그들의 집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때때로 그들이 "자본가들만 공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시각에서는 보통 독일 농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백히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은 소련에 쳐들어와 강도질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소련 병사들은 독일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기도 했다. - P571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독일 여성들에게 자행된 폭력은 무시무시했다.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지키려 나선 남자들은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했다. 사실 그녀들을 지켜줄 남자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 전사했거나(이 전선에서 벌어진 작전으로 약 500만 명의 독일 남성이 죽었다), 독일군에 차출되었거나, 비상향토방위군에 차출되었거나, 소련군에게잡혀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가정에 남아 있던 남자들은 대개 노인아니면 장애인이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강간당했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나중에 자라서 알게 된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누이동생 대신 소련군에게 몸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누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윤간도 아주 흔했다. 거듭되는 강간으로 몸이 망가져서 죽는 여성도 많았다! - P572

히틀러는 전쟁을 ‘의지의 문제‘로 내세웠으며, 따라서 언제나 패배를 부정함으로써 실제 결과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으로 독일 민족이 단련된다고 여겼다. "독일이 강대국이 되거나, 멸망하느냐다." 그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특이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이위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자체의 퇴락한 부분을 정화하는 제국의 시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쟁이 계속될수록, 그리고 승리할수록 게르만은 더 위대해질 것이었다.
만일 게르만이 패배시킨 적의 피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실망을 안겨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히틀러는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주었으나, 게르만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게르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생존할 이유가 없다. 히틀러에게, 게르만이 견뎌야 할 모든 고통은 - P574

그들 스스로의 나약함의 업보였다. "게르만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좋다. 멸종할지어다." 14히틀러 스스로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민간인들의 목숨만은 지킬 만큼 실용주의적 태도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동부 독일의 민간 지도자인 가울라이터 Gauleiter들은 나치당의 열혈 당원으로, 히틀러에게 가장 충성하는 지지자들이었다. 중요한 세 지방에서, 가울라이터들은 민간인 소개에 실패했다. 프로이센을 맡고 있던 가울라이터는 에리히 코흐였는데, 그는 우크라이나 총독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내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만한 우크라이나인이 있다면 그를 쏴버려야 한다." 이제(1945년 1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그의 독일 관구에 밀려드는 중이었는데, 그는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포메라니아에서는 프란츠 슈베데코부르크가 독일 피란민들의 홍수를 막으려 시도했다.  - P575

독일군 후퇴 과정에서도 고난이 있었다. 독일인들이 소련군을 피하다가 죽은 숫자보다 독일군을 피하다가 죽은 소련과 폴란드 주민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비록 그런 죽음이 의도적인 살육 정책의 산물은 아니었지만(따라서 이 분야의 연구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피란과 소개, 강제노역 등은 직간접적으로 수백만 명의 소련 및 폴란드 민간인의 죽음을 가져왔다(그리고 독일의 의도적인 대량학살 정책이여기에 1000만 명의 죽음을 추가했다).이 전쟁은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실제 독일 민간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끝났다. 피란과 추방에서 빚어진 죽음에 대해서는 따라서 나치 체제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독일민간인들은 달아나야 한다는 걸 알 만큼 전쟁 중의 독일 정책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피란을 독일 국가는 제대로 채비하지 못했다. 여러 소련 병사는 분명 최고사령부의 용인과 스탈린의 기대에 따른 짓들을 자행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먼저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붉은 군대가 독일에 진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인종적 순수성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스탈린만이 아니라 히틀러 스스로의 인종 정책에서도 불가피성을 띠고 있었다. 민족 추방 자체는승자와 패자의 국제적 합의의 결과였다. - P583

동부 폴란드에서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내몰아서 그 인구 구조를바꾸려는 시도는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때부터 일찌감치 이뤄졌다. 소련은 1940년과 1941년, 이 땅을 처음 점령했을 때 수십만 명을 축출했다. 그중 다수가 폴란드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강제수용소를 거쳐 이란,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연합군에 합류해 서부 전선에서함께 싸웠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끝날 무렵 폴란드 땅을 직접 밟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고향 집에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좋았다. 독일군은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옛 폴란드 동부에서 약 13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때 지역 경찰의 협조를았다.  - P586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은 천천히 또 단속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국가에서 변모해갔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념적 장식일 뿐이고, 국경과 소수 민족에 대해 전통적인 안보관을 견지하는 대규모 다민족제국이 되어갔다. 스탈린은 혁명 시기의 보안 기구를 물려받고, 유지하고, 지배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안보 문제에 대한 우려는 1937년에서 1938년, 그리고 1940년의 대량학살로, 또한 1930년에 시작되어스탈린 생전 내내 계속된 강제이주로 이어졌다. 전쟁 중에도 강제이주는 계속되면서 소련 이주 정책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적대 계급 구성원으로 여겨진 개인을 강제이주시키던 전통적인 소련의 방식에서,
변경지대에서의 인종 청소와 인구 재구성으로전쟁 이전 시기에 강제수용소로의 강제이주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품었다. 소련 경제의 성장, 그리고 소련 인구의 교정, 1930년대에는 소련이 인종을 기준으로 다수의 국민을 추방하기 시작하면서, 그목표도 소수 인종을 민감한 변경지대에서 내지로 보내는 것으로 바뀐다. 이 ‘국민 이주‘는 개인에 대한 징벌로 보기 어려웠건만, 그들은 - P591

계속해서 이주 대상자들이 자기 고향 땅에서 멀리 떠나면 더 나은 소련 국민이 된다는 주장을 했다. 대숙청 시기에는 1937년에서 1938년사이에 25만 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다른 한편 수십만 명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기도 했으며, 그곳에서 이주자들은국가와 스스로의 개혁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되었다. 심지어 새로 병합된 폴란드, 발트 연안, 루마니아 주민들에게 이뤄진 1940년에서1941년의 강제이주는 소련 입장에서는 ‘계급투쟁‘의 일환이었다. 엘리트층의 가족들은 카틴 숲을 비롯한 여기저기서 학살당했으며, 그들의 아내, 자식, 부모들은 카자흐의 스텝 지대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그들은 소련 사회에 통합되든지, 죽든지 해야 했다. - P592

대부분은독일인들의 피란과 강제이주는 의도적인 대량학살 정책이 아닐지라도 전후 인종 청소의 핵심을 이루었다. 1943년에서 1947년까지 모든 내전과 피란, 강제이주, 재정착 사태는 돌아온 붉은 군대가 촉발하거나 주도한 것으로, 그 결과 70만 명의 독일인과 최소 15만 명의 폴란드인, 그리고 약 25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죽었다. 최소한도로 볼때, 캅카스, 크림반도, 몰도바, 발트 연안국들로부터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이 실시된 직후 또 30만 명의 소련 국민이 희생되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반소 민족주의 세력들은 강제이주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10만여 명이 인종 청소 과정에서 숨지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
상대적으로 볼 때, 독일인 전체 숫자에 비해 강제이주된 독일인의수는 최후의 한 명까지 이주 대상이 된 캅카스와 크림반도 주민들에비하면 훨씬 적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끝 무렵에 피란 또는강제이주를 겪은 독일인은 폴란드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삼국인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 독일에 의해 이뤄진 이주민의 숫자가 전쟁 끝 무렵 소련의 점령으로 이뤄진 이주민의 숫자에 더해지면, 그런 차이는 사라지고 만다. 1939년에서 1947년의 기간 - P595

에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발트 삼국인들은 독일인들만큼(또는 살짝 더, 어떤 경우에는 살짝 덜) 강압적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한편 다른 모든 민족은 독일과 소련의 강압을 겪었지만, 독일인들은(일부 예외가 있더라도) 소련 쪽에서만 강압을 겪었다.
전후 시기에, 독일인들은 폴란드인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위협을 겪었다. 그들 또한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야만 했으므로, 그래도 독일인과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발트 삼국인, 캅카스인, 크림반도 사람들보다는 훨씬 적게 죽어갔다. 피란, 추방, 강제이주의 직간접적 결과로 숨진 독일인과 폴란드인의 비율은 10분의 1 미만이었다. 반면 발트 삼국인과 소련인들은 5분의 1을 넘었다.  - P596

일반적으로, 더 먼 동쪽으로 갈수록, 그리고 소련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을수록 결과는 더 비참했다. 이는 독일인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독일인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그러나 더 동쪽으로 강제이주되거나 소련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독일인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동쪽으로 간 사람들보다 나았고, 그들을 반기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멀고 낯선 소련 공화국들로 가는 편보다 나았다. 또한 선진 독일(비록 폭격과 전쟁으로 쑥밭이 되었을지언정)로가는 게 소련의 황무지로 가서 이주자들이 직접 개척해야 하는 상황보다 나았다. 그리고 점령지 가운데 미국과 영국 관할지로 가는 게 내무인민위원회 지부의 통제를 받는 카자흐스탄이나 시베리아 땅으로가는 것보다 나았다. - P596

그것은 모스크바가 각 공산당을 지휘하고 그 정책을 조정하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 그자리에 모인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즉 진보 진영과 반동 진영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운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진영을 이끌도록 운명지어졌고 미국은 퇴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든 결점(최근 나치 독일이 여실히 보여준)을 물려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건드릴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은 진보 진영의 최종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도.
공산주의자들은 진보 진영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해야 하며, 이는 소련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각자 국가별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
그러고 나서 즈다노프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이후 몇 차례 일으킨 심장마비의 첫 번째였다. 아마도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지는 않았다. - P603

1948년 1월, 스탈린은 유대인 한 사람을 죽였다. 솔로몬 미호옐스, 그는 ‘유대 반파시스트 위원회‘ 회장이자 모스크바 이디시어 극장의 감독으로 스탈린 연극상 수상작 심사를 위해 민스크에 파견 와 있었다.
도착한 그는 어느 농촌의 집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소련 벨라루스 공화국 경찰의 라브렌티 차나바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나바는 그와 목격자를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미호옐스의 시체를 조용한도로에 내버려, 트럭에 치이도록 했다.
민스크 사람들이 독일의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본 겨우 몇 년뒤일 뿐이었다. 묘한 점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뜻으로 또 한 명의 소련 유대인을 민스크에서 죽인 장본인인 차나바는 경찰이자 역사가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벨라루스 빨치산 운동에 대한 역사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그 책에서 독일 점령기에 유대인이 겪은 특별한 고통 - P607

과 투쟁에 대해서는 일체 기술하지 않았다. 유대인 빨치산에 대한 소련 역사서가 한 권 집필되기는 했으나, 발행 금지되었다. 전쟁 중 민스크에서, 유대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고통받았다. 그러나 소련에 의한 해방은 유대인의 고통의 끝이 아닌 듯했다. 소련 내 홀로코스트의역사책도 아직은 쓰기 시작할 때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미호엘스는 스탈린이 피하고 싶어하던 쟁점을 건드렸다. 그는 스탈린의 측근이면서 유대계인 사람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가령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나 역시 정치국원이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클리멘트 보료실로프의 부인들과 더 고약했던 점은 전쟁 중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해 스탈린과 소통하고자 그와의 면담을 추진했다는것이다.  - P608

독일인의 손으로 학살된 유대계 소련인의 숫자는 국가 기밀이었다. 독일인들은 대략 100만 명의 소련 태생 유대인들을 죽였는데, 여기에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소련에 병합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유대인 약 160만 명이 추가된다. 루마니아인들도 주로 전후에소련으로 편입될 땅에서 유대인들을 죽였다. 이 숫자들은 분명 민감했다. 그것들이 유대인들의 매우 특별한 고난을(설령 다른 소련 민족들의 운명 역시 녹록지 않았더라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소련 인구의 2퍼센트도 안 되었고, 러시아인은 절반 이상이었다. 독일인들은 점령한 소련 땅에서 러시아계 민간인보다 더 많은 수의 유대계를 죽였다.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족속으로 따로 분류되었다. 러시아인보다는 더 많이 학대받은 우크라이나계나 벨라루스계, 폴란드계등의 슬라브족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소련 지도부도 그 점을 알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점령했던 소련 땅의 소련인들도 알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결코 소련 전쟁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612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 지도부가 소련 국민의 정신세계를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검열 체제는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지만, 소련의 규범이 유일한 규범이 되어야 할 상황, 또는 소련적 삶이 가장나은 삶으로 여겨져야 할 상황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소련 바깥의삶을 경험해봤다. 그 전쟁 자체가 ‘조국(러시아든 소련이든 간에)‘의 범위 안에 국한될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민족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종결은 한 나라가 아닌 세계 전체의 모양을 바꿨다. 특히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은 소련이 유대인 문제를 망각하기로 한 결정을 불가능하게만들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조차 소련에 사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후자는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세우는 땅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민족국가를 가진다면, 그것은 중동의 영국 제국주의를 끝장내고, 소련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 역시 뒤흔들리지 않겠는가? - P618

야쿠프 베르만이 버텨낸 것은 그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볼레스와프비에루트,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이자 삼두정치에서 유일하게 비유대인이었던 인사의 비호 덕분이었다. 언젠가 스탈린은 비에루트에게 그가 베르만과 민츠 가운데 누구를 더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다. 비에루트는 덫에 걸리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 비에루트는 스스로를 스탈린과 베르만 사이에 놓았는데, 이는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에서처럼 서로를 물고 뜯지 않았다. 치욕을 겪은 고무우카조차상대를 깎아내리는 발표문을 내거나 정치재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40년대 말에 집권하고 있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1930년대에 자신의 동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대개알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신호를 보냈다. 그에 따라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서로를 적당히 비판했다. 그러자 대량학살이 이어졌고, 공산당 자체가 끝장나버렸다.  - P639

그러나 베르만 민츠, 비에루트는 굳건히 버텼다. 그들이 제대로 된폴란드인이라고,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라고, 제대로 된 애국자라고못 미더워하는 국민과 의심스러워하는 스탈린 모두에게 계속 주장하면서 비록 유대인들은(공산주의자건 아니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도록 강요받았으나, 당시 폴란드에서 시오니스트와 코즈모폴리턴에 대한 공공연한 숙청은 없었다. 그의 친구 비에루트에게 양보하고 또 충성하면서, 베르만은 폴란드의 주된 체제 위험 요소는 유대인이 아닌 폴란드인의 내셔널리즘 우경화라는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1년 7월에 고무우카가 결국 체포되었을 때, 그를 체포하러온 두 명의 보안요원은 (고무우카의 기억에 따르면 유대계였다. - P640

1950년에서 1952년 사이, 폴란드인들이 숙청에 대해 미적거리는 동안 냉전은 군사적 대립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력에 대한 스탈린의 우려를 극대화시켰다.
1950년대 초, 소련은 세계대전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치에서있는 듯 보였다. 소련을 포위하는 듯싶었던 세 대국, 즉 독일, 폴란드, 일본은 모두 완전히 허약해져 있었다.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가되었다(그 국방장관을 소련 장교가 맡고 있는),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주했고,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독일의 소련 점령 구역은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탈바꿈했고, 독일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일찍이 독일의 발트해 연안 영토였던 동프로이센 땅은 공산 폴란드와 소련 스스로에게 분할 흡수되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일본이 패배하고 무장해제되었다. - P641

다만 그쪽에서는 소련이 승리에 기여한 내용이 별로 없었고, 점령에서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일본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비록 패배했지만, 일본은 동아시아의 정치를 바꿔놓았다. 1937년일본의 중국 침략은 결국 중국 공산당에게 좋은 일만 만들어주었다. 1944년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육전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는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국민당 정권에는 치명타를안겼다. 일단 일본이 항복하자, 그 군대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이 기회를 잡았다. 30년 전 러시아 공산당과 상당히 비슷하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스스로는 대제국을 세울 목표에 실패하고, 이 - P641

웃 나라에 공산혁명이 일어날 기회를 준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1949년 10월에 선포되었다.
워싱턴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세계 공산혁명의 연속으로 봤지만, 스탈린에게 이는 희소식이지만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처럼 스탈린의 종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지만, 스탈린은 그 당에 개인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야심 있고 예측 불가능한 라이벌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정책을 만들며, 스탈린은 이제 소련이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라는 위 - P642

치를 유지하는 목표에 열중해야 했다. 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1905년부더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물러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 남부는 미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북한공산당은 1948년 북한 지역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41950년 봄, 스탈린은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를 "주 방어선"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밖에 놓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1월에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가 남한 군대를 쉽사리 밀어버릴 수 있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행운을빈다고 하고, 소련제 무기를 북한에 보내주었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 P643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무력 대결처럼 보일점이 많았다. 미국은 빠르고 확고하게 대응했으며, 일본과 그 밖의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동원, 북한을 본래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버릴수 있었다. 9월, 트루먼은 NSC-68을 승인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전 세계에서 봉쇄한다는 미국 대전략(조지 케이 수립한 아이디어였다)의 비밀스럽고 공식적인 승인이었다. 10월, 중국이 북한 편에서 참전했다. 1952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북한 및 공산주의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군 탱크가 소련제 탱크와 싸웠고, 미군 전투 - P643

기가 소련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두 전선에서의 전쟁이 될 확전을 두려워했던 것같다.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위성국가 지도자들을 불러모아유럽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도록 했다. 1951년과 1952년, 붉은 군대의 병력은 두 배로 늘었다.

정확히 이 시기(1951년에서 1952년)에, 소련 유대인들은 미국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탈린에게 상당히 들었던 것같다. 베를린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폴란드에서 실망하고, 한국에서전쟁을 겪은 스탈린은 다시 한번적어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던 그의 상상속에서는)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처럼, 1950년대에도 소련을 국제적 음모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그주체가 더 이상 베를린, 바르샤바, 도쿄(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는 아니더라도. 그러나 워싱턴(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의 음모는?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함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1930년대 말에 위협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 P644

이때 소련 유대인에 대한 정치재판이 또 이어질 거라고 믿지 않기란힘들었다. 1952년 8월, 13명의 소련인이 미국 첩자라는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기보다 이른바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시오니즘이 그 이유였다. 고문 결과 그들은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미국의 스파이라는 자백을 했고, 비밀 재판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1952년 12월에는 프라하에서 11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재판을 받았다. 대개 모스크바의 경우와 똑같았는데, 다만 대공포 시대를 연상시키는 공개 정치재판을 받았다. 이제는 폴란드 정권조차사람들을 이스라엘 스파이라며 잡아들이고 있었다. "
1952년 가을, 또 여러 명의 소련 의사가 조사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즈다노프나 셰르바코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밖의 유력한 소련 또는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임종 시 치료를 맡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스탈린의 주치의였는데, 그는 1952년 초 스탈린에게 은퇴를 권고했다. 스탈린의 공개적이고 반복적인 지시에 따라, 이들은 무섭게 얻어맞았다. 그러자 일부는 고문자들의 구미에 맞는 대사로 이뤄진 자백서를 썼다. 하필 솔로몬 미호엘스의 조카였던 - P649

미론 봅시는 스탈린주의적인 로봇 같은 말들로 자백서를 썼다. "생각을 거듭한 결과, 제가 지은 죄의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반드시제 사악한 일의 전모를, 소련의 특별한, 지도적인 국가 일꾼들의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줄이려던 음모의 끔찍한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는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자백서가 확보되자, 나이 먹어가던 어떤 남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듯했다. 스탈린은 대개 주먹을 날리기 전에 계획을 잘 짜곤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서두르는 듯 보였다. 1952년 12월 4일, 슬란스키를 처형한 이튿날, 소련 중앙위원회는 "의사들의 음모"를 포착했으며 그 주요 역할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맡고 있다고 발표했다. 음모자들 가운데 한 명은 스탈린의 주치의이고,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그 외에는 유대계 의사들로 음모자 명단이 채워졌다.  - P650

이제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생활을 끝내라고 권고해줬던 주치의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적 두려움과 정치적 우려가 한데 얽혀 있다는 또 다른 증좌를 보였다. 그는 딸 스베틀라나에게 문자 그대로 의존했다. 1952년 12월 21일, 그의 일흔세 번째 생일에 그녀와 함께 춤을 출 만큼.
그 12월, 그는 자기 자신의 사신을 숙청하기를 바랐던 듯하다. 공산주의자는 불멸의 영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믿었다. 생산양식의 변화에서 드러난 대로, 프롤레타리아의 세력화에 반영된 대로, 공산당에 의해 대표되고, 스탈린에 의해 정제된 대로, 그리고 그럼으로써 결국 스탈린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역사! 삶이 다만사회적 구성의 산물이라면, 죽음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리고 모 - P650

든 것이 용감하고 굳건한 의지의 변증법에 따라 역전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의사들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대신 유발했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경고한 사람은 카운슬러가 아니라 살인자였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솔로몬 미호옐스는 기껏해야 리어왕의 역할을 했다. 어리석게도 너무 빠르게 권력을 내준 그것도 잘못된 후계자들에게 그랬던 지도자였다. 이제 미호옐스는 무력한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소련의 몰락을 꾀했고, 제2차세계대전의 역사를 다르게 쓰려 했으며, 잘못된 미래를 꿈꾸었다. 따라서 사라져야 마땅했다. - P651

이제 73세의 병든 노인이 된 스탈린은 누구의 권고도 받아들이지않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 1952년 12월, 그는 "모든 유대인은내셔널리스트이며 미국의 정보원이다"라고 발언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도 편집증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달에 이렇게도 말했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이 미국에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전설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보기 드문 통찰력으로, 스탈린은 냉전(심지어 그것이 끝나고 나서도 수십 년 동안 유지될)의 주요한 신화 가운데 하나를 정확히 예견했다. 사실은 연합국 중 어디도 유대인 구출에 별 힘을 쓰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중요한 살육 공장을 보지도 못했다.  - P651

스탈린은 그가 한때 가졌던 힘, 그가 꾸며낸 세상으로 실제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힘을 잃었다. 그는 안보 총책임자를 위협해야 하는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단지 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말이다.
그의 부하들은 스탈린이 증거로 여겨질 수 있는 자백과 우연의 일치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관료적 우선순위 문제에, 심지어 어떤 점에서는 법률에 가로막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대 반파시즘 위원회 멤버들에게 실형을 부과했던 판사 한 명은피고들에게 항소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했다. 소련 유대인들의 기소과정에서, 보안 총책임자들은 때때로 부하들과 실갱이를 벌였다(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피고들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에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문 과정은 비록 야만적이었으나 언제나 원하는 대로의 증거를 뽑아낼 순 없었다. 고문이 행해졌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스탈린이 직접 실시를 종용한 경우에만 행해졌다. - P657

사표시가 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스탈린의 죽음 뒤 약 40년을 더 지속했다. 그러나 그 보안기구는 다시는 인위적 기근이나 대량 사살을 실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도 나름대로 야만적인 인간들이었으나, 스탈린식의 대중 테러는 삼갔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탈린의 후계자가 된 니키타흐루쇼프는 예전에 그 자신이 수용소로 보낸 우크라이나 죄수들을대부분 석방했다. 대량학살을 막을 힘이 없어서 막지 못했다는 것은흐루쇼프를 두고 할 말이 아니다. 그는 1937년에서 1938년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테러를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앞장서서 우크라이나를 재정복했다. 그보다 그는 소련이 더 이상 종전처럼 굴러갈수 없음을 알았다고 봐야 하리라. 그는 심지어 1956년 당 전체 회의연설에서 스탈린의 범죄 일부를 폭로하기도 했다. 비록 공산당 간부들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더 많은 숫자의 학대받은 집단(농민, 노동자, - P658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지만 말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남았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더 이상 정치재판(1930년대 대공포의 전주곡이었던)을 넘어 대량학살로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폴란드를 제외하고) 농업을 집단화했다. 그러나 결코 농민이 소작물을 사적으로 활용할 권리를 엄금한 적은 없었다. 소련과는 달리, 위성국가에서는 인위적 기근도 없었다. 흐루쇼프 치하에서, 소련은 1956년에 공산 위성국가인 헝가리를침공했다. 비록 그곳의 내전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고, 소련의 개입으로 정권 담당자가 교체되어야 했지만, 유혈 숙청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1953년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 공산 동유럽에서의도적으로 살해당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의 ‘대량학살 시대‘, 그리고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인종 청소 시대‘에 비하면 희생자수는 미미했다. - P659

해 사실상 검토하지 않았다.
1950년대처럼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냉전기에도 이스라엘에대한 불신을 심었다. 1953년 1월 소련 언론의 기사에서 따온 주제로,
1967년 폴란드 언론은 서독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이스라엘에 심었다고 보도했다. 정치 카툰은 이스라엘군을 독일 국방군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자국의 존재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희생에 따라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뒤집어 봐야 마땅한 것이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엔,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이행하는데, 국가사회주의가 그 한 예였다. 당시 제국주의 진영의 수장은 미국이며, 이스라엘과 서독은 그 발톱이었다. 이스라엘은 민족 희생에 대한 특별한 역사적 주장거리가 있는 소국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주춧돌 가운데 하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 P662

바르샤바 거주민들은 움슐락플라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기차역에서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움슐락플라츠, 그곳은 바르샤바 유대인들이 겨우 26년 전에 트레블린카로 떠나가야 했던 곳이다. 적어도 300만 명의 유대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폴란드를 떠났다. 이러한 공산주의 반유대주의의 에피소드 이후에는 약 3만 명이 남았다. 폴란드 공산당과 그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은 1968년이나 그 이전 시기의 희생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폴란드인들을 올바른 주장(인종적 순수성과 영웅주의)에서 엇나가게하려는 자들이었다.
1968년 폴란드의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수만 명의 삶을 바꿨으며, 많은 지적인 동유럽 남녀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를 끝장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에는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그 당시스탈린주의 경제 모델의 잠재력은 공산 폴란드에서 소진되었으며, 이는 다른 공산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단화는 농업경제를 전혀 촉진시키지 못했다. 빠른 성장은 오직 강제적인 산업화 가능했다. - P665

비록 1968년 3월 폴란드 학생들이 휘두르는 경찰봉에 쓰러졌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동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개혁하려고시도했다. ‘프라하의 봄‘ 동안 공산정권은 언론의 자유를 매우 높은수준까지 허용했으며, 그에 따라 경제개혁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측 가능했다시피, 민간의 논의는 정권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났다. 소련의 압력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르 둡체크 체코 공산당 서기장은 집회와 토론이 계속되도록 했다. 그해 8월, 소련군(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헝가리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소련의 선전 내용은 폴란드 지도부의 반유대주의 실험이 원칙에벗어난 게 아니라고 확정했다. 소련 언론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개혁가들이 실제로 또는 허구로 유대인 핏줄이라는 데 크게 주목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비밀경찰이 저항운동 멤버들가운데 유대인 혈통인 사람들을 특히 예의주시했다. 1985년 미하일 - P666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개혁자로 권좌에 올랐을 때, 그의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은 구체제를 지키는 데 러시아 민족주의-반유대주의를 동원하려 했다."스탈린주의는 동유럽 유대인들을 독일의 희생자라는역사적 위치에서 끌어내고 공산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음모가 그들의배경에 있는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음모의 주역들로 못 박는 일은 아주 쉬웠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히틀러의주된 범죄를 구별해내고 정의하기를 꺼린 까닭은 수십 년 뒤 그들이히틀러의 세계관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 P667

모스크바, 프라하, 바르샤바의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별로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과거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는 소련 인민들의 고통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러시아인과 슬라브족이야말로 최대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충성스러운 슬라브족(그리고 다른 민족들 추종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와희생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슬라브족의 무죄와 서방의침략이라는 구도는 냉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물론 그것은 서방제국주의 진영의 이스라엘과 미국에 유대인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역사에서 침략자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필요로 했지만 말이다.
공산당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한, 홀로코스트는 그 실체를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수백만 명의 비유대 동유럽인이 전장에서, - P667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포위된 도시에서, 촌락과 시골에서 죽어간바로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비유대인의 고난에 역점을 두는 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스탈린에서 시작해 사회주의권이 끝날 때까지,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서방 세계에서 독일 육군을무찌르는 데 붉은 군대가 세운 공을, 또한 독일 점령기에 동유럽 인민이 겪은 고통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 만했다. 여기에 한가지만수정이 가해졌다. 홀로코스트를 일반적인 고난 속에 묻어버리고, 동유럽에서 한때 중심적이던 유대 문명을 외적인 것으로 몰아내는 것. 냉전기 동안, 서방 세계에서의 자연스런 반응은 스탈린주의의 막대한고난이 소련 국민의 몫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역시 사실이었다. - P668

그러나 소련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유일한 진실, 또는 완전한 진실이라고 할 순 없었다. 이러한 기억의 경쟁 가운데, 또 다른독일의 대량학살 정책이었던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주의적 대량학살은 서로 다른 역사로 분기되었다. 비록 시간과 공간에 있어 서로 공통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소련 체제가 저지른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과 같이, 홀로코스트 역시 블러드랜드에서 자행되었다. 대전 이후 유럽 유대인들의오랜 고향은 공산국가의 영토가 되었고, 죽음의 공장과 킬링필드 역시 그리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집단 기억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 아우슈비츠(학살된 유대인 중 겨우 6명에 1명 정도와 관련 있던)에 집 - P668

중되었다.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장막은 서방과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 P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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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며 걷거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 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 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있었던 유대인들은 일종의 뜰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로 나누어 서라는 독일어 혹은 이디시어를 듣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자니 ‘메릴 스트립‘을 처음 만난 영화 ˝소피의 선택˝이 생각난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학살의 페이지들을 끝도 없이 읽는다.
무기력해진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나치의 유토피아들 가운데 이것 또한 독일의 애초 계획과 정확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현된 부분은 유대인 학살뿐이었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벨라루스에서도 ‘마지막 해결책‘이란 것은 그 원래 개념보다 더 과격화된 잔혹 행위들이었다. 당초 소비에트유대인들은 독일 제국 건설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더 먼 동쪽으로 쫓아버릴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임이분명해졌고, 동부에 있던 유대인 대부분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민스크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도 찾아볼 수 있었다.  - P452

이들은 흔히 엄청난 규모의 또 다른 폭력에 참여하는 것을 대가로 도망치거나 살아남은 유대인들, 아니면 강제노동을 위해 끌려간 유대인들로서, 후자의 경우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늦게 그리고 때때로 고향에서한참 떨어진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1943년 9월, 민스크 최후의 유대인 몇몇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있던 소비부르란 이름의 시설로끌려간다그곳에서 이들은 심지어 벨라루스에서조차 몰랐던 죽음의 시설을마주하게 된다.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모든 종류의 공포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P452

약 540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의 세력권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거의 절반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 살해되었으며, 대부분은 총에 맞아 그리고 일부는 독가스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반대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대체로독가스에, 일부는 총탄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는 1941년 절반 기간에, 즉 독일의 점령이 시작된첫 6개월 동안 1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 있던 유대인들은, 동쪽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전부터 독일의 통제 아래 있었으나 동부 유대인들보다 더 늦은 시점에목숨을 빼앗겼다. 동쪽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적이랄 수 있는젊은 남성들이 전쟁 초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눈에 띄는 즉시 총살당하기 일쑤였다.  - P455

라인하르트 작전의 기원은 히틀러가 품은 열망에 대한 힘의 해석에 있었다. 소련군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시행했던 가스 실험이 꽤나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았음을 알고 있던 힘러는 1941년 10월 13일무렵 자신의 부하였던 오딜로 글로보츠니크에게 유대인들을 처리할새 가스 시설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글로보츠니크는 나치의 인종주의적 이상을 위한 중대 실험지대였던 동방 총독부 루블린 지구의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지휘부 소속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구역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들어오기를, 그리고 그들을 식민 노동노예로 삼기를 고대하던 인물이었다. 소련 침공 개시 후, 글로보니크는 동유럽 종합 계획의 실행을 맡게 되었다. 비록 소련 침공 실패로몰살적 식민화를 위한 그의 거대한 기획 대부분이 뒤로 미뤄졌지만,
글로보츠니크는 그 일부를 자신의 관할 구역이자 각자의 고향으로부터 쫓겨온 약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있던 루블린 지구에 실제로 시행한다. 그가 원했던 바는 바로 "동방 총독부의 유대인은 물론 폴란드인들까지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 P457

바르샤바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폴란드인들 대부분 및 유럽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유대인 사회의 고향이자, 나치의 세계관상존재해서는 안 될 거대 도시였다. 1942년 봄을 기점으로, 바르샤바게토에는 여전히 35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수용되어 있었다.
바르샤바는 동방 총독부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행정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총독 한스 프랑크는 크라쿠프를 선호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고대 폴란드 황궁을 넘겨받아 스스로를 현대판 황족이라 내세우며 맡은 업무들을 처리했다. 과거 1939년 10월, 프랑크는 유대인들을 동방 총독부 내 루블린 지구로 들이는 것을 통해 유대인 "문제"
를 해결하려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1941년 12월, 그는 부하들에게
‘반드시 유대인들을 처리할 것"을 주문한다. 사실 프랑크는 이 시점까지도 이를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않았다.  - P469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량학살의 각 단계가 실로 참혹했던만큼, 당사자인 유대인들은 직전의 순간보다 가까운 미래가 그래도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곤 했다. 몇몇 유대인은 정말로동쪽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게토 안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일단 움슐락플라츠에 집결하면, 기차에 오르는 것이 음식, 물, 위생 시설 없이 땡볕 아래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믿었다고 뭐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움슐락플라츠를감시하는 것은 유대인 경찰들의 몫이었는데, 이들은 간혹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 또는 결혼 상대로 삼을 법한 이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이 밝혔듯이, 유대인 경찰들은 때때로 현금과 더불어 "현물로" 값을 치를 것, 다시 말해 구해주는 대신몸을 맡길 것을 요구했다. - P477

트레블린카를 책임지던 독일인(본래 오스트리아인) 의사 이름프리트 에베를은 줄곧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학살률이 베우제츠와 소비부르에 있던 다른 학살 공장 책임자들보다 한발앞서길 바랐다. 심지어 학살할 인원수가 이미 공장의 최대 질식사 가능 인원을 한참 넘어선 1942년 8월에도 그는 끊임없이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받아들였고, 죽음의 행렬은 곧 공장 내부에서 외부로 퍼져나갔다. 가스실을 가득 채웠던 죽음은 가스실 밖 뜰의 대기 장소로,
여기서 다시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기다리고 있던 역 혹은 선로로,
심지어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점령 폴란드 지역 어딘가까지 퍼져나갔다. 어찌됐든 유대인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기차에서 탈출하는 소수가 있었는데, 이는 소비부르와 베우제츠로의 이송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 P481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바르샤바 게토로 돌아왔는데, 보통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모면했는지 알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은이송과 혼란은 또한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대인을 실은 기차들이 곧잘 멈춰서 있었던 탓에, 독일 군인들을 태우고 동부 전선으로향하던 기차들은 어렵지 않게 이 죽음의 열차들을 지나치거나 따라잡기 일쑤였다. 몇몇 구경꾼은 사진을 찍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죽음의 기차에서 나던 악취 때문에 먹은 것을 게워내기도 했다. 이들 군인 중 일부는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참여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서남부로 향하던 길이었다. 적어도 만약 그들이 알고자 했다면,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본 독일 군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481

에베를은 생각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해임되고,
1942년 8월 슈탕글이 그를 대신해 트레블린카 책임자 자리에 올라선다. 훗날 자신을 유대인 가스 학살 "전문가이자 자신은 그것을 "즐겼다"고 말한 슈탕글은 재빨리 트레블린카를 안정시켰다. 먼저 그는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유대인 노역자들을동원해 시체들을 화장시켰다. 죽음의 시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1942년 9월 초가 되자, 그것은 애초의 기획에서처럼 그야말로 기계돌아가듯 작동하고 있었다.
슈탕글은 특히나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던 부하이자 수용소 유대인들에게 "인형"이라(그의 허영과 빼어난 외모로 인해) 불리던 쿠르트 프란츠의 보조에 힘입어 그곳을 총괄했다.  - P482

프란츠는 유대인들이 살던구역을 관찰하기를 즐겼고, 자신이 특별히 훈련시킨 개들이 유대인을 공격하는 모습을 좋아했으며, 또 언젠가는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동물원을 만들 만큼 동물 관찰을 즐겼다. 독일인들은 수십 명의 트라브니키 인력의 보조를 받았는데, 이 인력들은 주로 경비병으로 활약하거나, 유대인을 모아 가스실에 집어넣고는 일산화탄소를 주입하는 것과 같은 전체 시설물 작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의 일부를 맡기도 했다. 시설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나머지 노동력은 유대인 노역자 수백 명의 몫이었다. 이들은 오직 대량학살 및 약탈과 관련된 일에 동원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남겨둔 인력으로서, 만약 한순간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배우제츠 그리고 소비부르와 마찬가지로, 트레블린카 역시 유대인 노동력으로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었고, 따라서 트라브니키 대원들의 일은 - P482

그리 많지 않았으며, 독일인들이 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트레블린카에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독일인들은 거짓 선전을 짜내느라 바쁜 상황이 되었다.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는 전부터 가스 학살에 관련된 보고를 비롯해 독일인들이 폴란드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각종 학살 소식을 동맹 영국과 미국에 전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그해 여름 영국과 미국에 독일 시민들을 대상으로앙갚음을 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폴란드 저항군을 이끌던 망명 정부군 소속 장교들은 트레블린카를 습격할 것을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독일은 가스 학살을 부인했다. 바르샤바 유대 경찰 수장이자 "재정착 위원이었던 유제프 셰린스키는 자신의 경우 트레블린카로부터 줄곧 엽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 P483

물론 이 시점에도 바르샤바 게토에는 우편 업무를 취급하는 곳이 있었고, 이는 몇 주 동안이나 돌아갈 것이었다. 이곳에서 모자를 쓴 채 일하던 이들은 밝은 오렌지색 노동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던 이송을 위해 끌려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손에는 트레블린카로부터 온 어떤 소식도 있을 턱이 없었다.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은 1942년 9월 3일 다시 시작된다. ‘대작전‘에 따른 마지막 이송은 1942년 9월 22일에 이뤄졌으며, 여기에는 유대 경찰 및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되었다. 유대 경찰들은기차가 역에 다다를 무렵이 되자, 차창 밖으로 과거 자신들의 임무나사회적 지위 등을 나타내던 모자와 완장 등을 내던졌다(유대 경찰들은 흔히 유대 명문가 출신이었다). 유대 경찰들은 먼저 가 있던 강제수 - P483

용소 유대인들로부터 제법 거친 환영을 받을 수 있었기에 이는 신중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트레블린카는 수용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죽음의 공장이었고, 이런 행동은 별 의미가 없었다. 유대 경찰들 역시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독가스에 중독돼 숨졌을 따름이다.

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 P484

절뚝거리며 걷거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있었던 유대인들은 일종의 뜰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로 나누어 서라는 독일어 혹은 이디시어를 듣게 되었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동쪽으로" 보내지기 전 소독을 해야 한다는 - P484

핑계로 발가벗겨졌다. 입고 있던 옷가지는 벗은 뒤 가지런히 정리되고 신발 역시 한데 모아 잘 엮어두어야 했다. 귀중품은 남김없이 내놓아야 했고, 여인들은 깊은 곳까지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이송 과정의 바로 이 지점에서 몇몇 여인은 강간 대상으로 뽑혔고, 소수의 남성은 강제노동 대상으로 골라내졌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곧바로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했던 반면, 강제노동에 동원된 남성들은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노예로 살아갔다."
모든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은 물론, 머리카락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가스실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들 각각은유대인 "이발사‘ 앞에 앉아 삭발당했고, 종교적 관습에 충실해 가발을 쓰고 있던 여인들은 그것마저 내놓아야 했다.  - P485

죽음이 거의 턱밑까지 차오른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여인들은 이 순간까지도 이발이 소독의 마무리 과정일 것이라 여겼고,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이렇게 확보된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독일인 철도 노동자들이 신을 스타킹을 만들거나, 독일 잠수함 선원들이 신을 슬리퍼의 안감으로 쓰일 것이었다.
첫 번째 여인들 그리고 다음으로 남자들로 이뤄진 두 집단은 모두발가벗은 채, 속수무책으로 굴욕을 당하며, 어떤 터널 안을 달려가야 했다. 그곳은 몇 미터 정도의 폭에 길이는 약 100미터에 이르는 터널이었는데, 독일인들은 이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불렀다. 터널 끝에서 유대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의 경사진 지붕 앞에 거대한다윗의 별이 그려진 어두운 방이었다. 히브리어 비문이 적힌 의식용 - P485

막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님께로 가는 문 마땅한 자는 응당 지나가리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입구에 서 있던 두명의 트라브니키 출신 경비병에 의해 거칠게 안쪽으로 밀어넣어졌기에 이를 발견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은 몽둥이를, 다른 한 명은 칼을 들고 있던 경비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유대인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그 뒤 유대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문을닫으며 자물쇠를 채우고는, "물을 틀어!" (바로 마지막 거짓말이자, 굳이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던 거짓말이었다. 그 대상은 이미 가스실에 갇힌 불행한 유대인들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있었던)라고 외쳤다. 그러면 세 번째 트라브니키 대원이 레버를 당겼고, 탱크 엔진에서 뿜어져 나온 일산화탄소가 가스실 안으로 쏟아졌다. - P486

20분쯤 지나면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가스실 뒤쪽 문을 열고, 유대인 강제노동자들이 시신을 치웠다. 타들어가는 열기와 죽음의 고통으로 시체들은 한데 엮인 채 팔다리가 뒤틀려 있었으며, 종종 쉽게부서져버릴 정도였다. 당시 트레블린카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칠 라이흐만이 회상했듯이, 그들은 "극악무도하게 뒤틀려졌다". 그들이 들어갔던 가스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시신은 그들이 흘린 피, 배설물과 함께 치워졌다. 다음에 들어설 유대인들이 극심한 공포에 휘둘리지 않도록 또 여전히 소독이라는 말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강제노역자들은 가스실을 깨끗이 치워야 했다. 그 뒤 그들은 시체들을 구분 - P486

하고, 유대인 "치과의사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시신의 얼굴이 바닥이 아닌 위를 바라보도록 눕혀두었다. 이 치과의사들의 작업은 바로시신에서 금이빨을 따로 빼내는 것이었다. 때때로 시신의 얼굴은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완전히 검은색을 띠기도 했고, 이를 꼭 깨문 상태로 사망해 "치과의사들이 안간힘을 써서 입을 벌리게 만들기도 했다.
금이빨 제거 작업이 끝나면, 유대인 노역자들은 시신들을 매장용 구덩이로 끌고 갔다. 유대인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시점부터 이들의 시체 처리까지의 전 과정이 끝나는 데는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의 겨울이 되자,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두 집단이 아닌 남자, 나이든여자, 젊은 여자의 세 집단으로 나누기시작했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가장 늦게 가스실로 보냈는데, 이는그들이 추위 속 젊은 여인들의 나체 보기를 즐겼기 때문이다.  - P487

그때쯤, 시체들은 땅에 묻히기보다는 불태워졌다. 화장을 위한 자리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지지대 위에 선로를 이용해 만든 폭 약 30미터의 거대한 석쇠가 있었다. 1943년 봄까지 트레블린카에서는 밤낮없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연료는 때때로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매장지에서 파낸 부패한 시체들 그리고 막 가스실에서 꺼낸 시신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지방조직이 많은 여성들의 시신은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잘 타올랐기에, 노역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시체더미 아래쪽에 두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임신한 여성들의 복부는 불타는 과정에서 터지기 일쑤였는데, 이 경우 안쪽의 태아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1943년 봄의 차가운 밤, 독일인들은 불길 근처에서 술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몸은 일종의 연료 - P487

로서, 또 다른 에너지원으로서 활용되었다. 처형자들은 불태움으로써그 어떤 범죄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겠지만, 그 과정에 동원된 유대인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뼛조각들을 온전히 남겨두고, 다른 이들이 훗날 찾을 수 있게끔 메시지를 적어 땅속에 묻어두었다. 48희생자들이 흔적을 남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칠 라이흐만은 자신의 누이와 함께 트레블린카로 끌려왔었다. 그는 시설을 보자마자 자신이 가져온 짐 가방을 그 자리에 놓아버렸다. 누이는 그런그를 보고 왜 그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이제필요 없어"는 그가 누이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강제노동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옷가지를 분류하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P488

 "나는 누이가 입던 옷가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멈춰선 나는 그녀의옷을 집어들고,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자신이 할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누이의 옷가지 역시 어딘가로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타마라 빌렌베르크와 이타 빌렌베르크는 자신들의 짐 꾸러미를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녀들의 남자 형제이자 노역 대상자였던 사무엘은 함께 묶여 있던 누이들의 옷가지를 발견했을 때의 심경을 "마치 그녀들과 다시 포옹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여인들의 경우 모두 이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그들에게는 혹여살아남아 자신들의 말을 전해줄지도 모를 동료 유대인들과 이야기할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루트 도르프만의 경우 그녀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로부터 그녀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나 레빈손은 자신 - P488

에게 배정된 이발사에게 꼭 탈출해 온 세상에 트레블린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유대인들은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 경우에만, 그것도 한정적으로만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언젠가그것을 물물교환 또는 뇌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각자 비교적 휴대하기 편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다면 챙겨두고자 했다. 간혹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지니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열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박해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트레블린카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 이제 죽음의 시설물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유대인노역자들이 맡은 일 중 하나는 귀중품을 수색하는 것이었고, 찾아낸귀중품 중 일부는 물론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 P489

유대인들은이렇게 확보한 귀중품들을 시설물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던 트라브니키 대원들에게 건넸고, 그 대가로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인근 마을에서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유대인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귀중품을 현지 여성들 혹은 분명 바르샤바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매춘부들에게 주었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이들은 다시 의사 출신 유대 노역자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찾아오기도했다. 이렇게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순환의 현지 경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목격자는 이를 두고 귀중품을 휘감은 타락한 "유럽"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
이러저러해서, 1943년까지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강제노역자들은현재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비롯한 바깥세상 소식들을 접 - P489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약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들은 유대인이아니었다. 약 7만4000명의 비유대 폴란드인과 1만5000명가량의 소련군 전쟁포로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당하거나 과로로 숨졌다.
가스 실험에 동원된 소수의 포로들을 제외하면, 이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시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쏟은 에너지만큼은 결코 아니었지만, 집시들은 독일의 힘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학살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이 점령한 소련 땅에서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사살당했고(서류상 약 8000명), 벨라루스에서 있었던 보복 조치 당시 학살 대상 - P496

에 포함돼 있었으며,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쏜총에, 세르비아에서는 보복 작전 와중에 유대인들과 함께 총에 맞았다. 또한 독일의 꼭두각시 동맹 크로아티아에서는 강제수용소에서도죽임을 당했고(1만5000명가량), 독일의 동맹이었던 루마니아가 정복한 땅에서는 말 그대로 민족 청소의 대상이 되었으며, 1942년 1월 헤움노에서(4400명가량) 그리고 1943년 5월(1700명가량)과 1944년 8월(2900명가량으로, 이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이미 배고픔, 질병, 학대로 사망한 뒤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를 마시는 운명을 맞이했다. 적게잡아 10만 명, 십중팔구 이보다 2~3배 많은 수의 집시가 독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 P497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10만 명이넘는 사람은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길이 기억될 이름이자,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였으며, 동부를 덮친 더 커다란 암흑의 흔적이었다. 채100명이 되지 않는 유대인 노동자들은 라인하르트의 학살 시설물 내부를 목격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트레블린카의 경우는 그보다 더흔적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트레블린카에 있던 수용자들은 독일인의 명령으로 하지만 동시에스스로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엘 말레 라하임"은 매일 죽음을 맞이했던 유대인들을 위한 성가였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밖에 서서 이 - P497

를 듣고 있었다. 어느 유대인 노동자는 동쪽에서 온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자신들의 "훌륭한 노래"에 "이상한 선물로 화답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덜 고상한 음악이자, 폴란드 민중가요였으며, 트레블린카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수용소 밖을 떠올려주고 탈출을 준비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이 노래들은 사랑과 어리석음을 따라서 삶과 자유를 생각나게 했다. 독일인들의 허드렛일을 하던 여인과 노동자들 사이의 결혼을 축하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
여인 수천 명의 머리를 깎아주었던 유대인 이발사들은 그중 아름다웠던 여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 P498

그 2주일 전부터, 미국 또한 유럽 전선에 뛰어든 상태였다. 앞서 태평양에서 일본 함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미국은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국을 비롯한 그 밖의 서방 연합군과 함께하는) 미군 약 16만 명이 노르망디 해변에 내려섰다. 미국이 가진 힘은 이미 저 불쌍한 독일군을 다름 아닌 미국산 트럭과 지프차로 둘러친 소련의 기계화 부대를 통해 벨라루스 깊은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독일이 구상했던 포위 작전은 더 완전하고, 빠르게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독일군 자신이 되어버렸다. 벨라루스에서 소련이 거둔 위업은 프랑스에서 밀고 들어오던 미국의 그것보다 더 놀라웠다. 독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장교들 또한 한수 아래였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소비에트의 공세가 벨라루스보다는 우크라이나 쪽에서 있을 것으로 봤다. 독일군 약 40만 명이 실종되거나, 부상당하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했다. 이제 독일 중앙 집단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폴란드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502

비유대 폴란드인들은 독일과 소비에트 양쪽으로부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게 있어 두 대상은 별다를바 없었다. 침략자에게 저항하고자 했던 비유대 폴란드인들은 이따금어떤 침략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저항할지를 고르는 것이 가능했다.
반면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들에게는 독일보다는 소비에트를 반길 충분한, 아니 거의 모든 이유가 있었고, 이들 눈에 붉은 군대가 해방자로 비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1942년 여름의 이른바 ‘대작전‘
뒤, 살아남은 약 6만 명의 바르샤바 게토 내 유대인 중 상당수는 저항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또 어디에서 저항할지를 선택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싸우는 것뿐이었다. - P505

움직인 뒤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독일이 게토 습격을 감행한 1943년 4월 19일은 유월절 전날이었고, 다가오는 25일 일요일은 부활절이었다.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는 자신의 시 「꽃밭」에서, 게토 안 유대인들이 싸우고 또 죽어가는 동안, 장벽 너머 크라신스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회전목마를 타고 있던 당시 기독교 축일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미워시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나는 죽음의 고독함을 떠올렸다." 게토 반란 기간 내내회전목마는 돌고 또 돌았고, 그것은 고립된 유대인의 상징이 되었다.
게토 장벽 너머 폴란드인들이 삶 그리고 웃음을 누리던 그 순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많은 폴란드인은 게토안 유대인들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이들은 그그렇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들을 돕고자 했으며, 몇몇은 이를 실행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 P524

서방 연합군 중 오직 폴란드 당국만이 유대인 학살을 멈추기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섰을 뿐이다. 1943년 봄까지 제고타는 숨어 있던 유대인 약 4000명을 돕고 있었고, 폴란드 국내군은 유대인을 갈취하는자들은 총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4일,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이 싸우고 있던 그때, 망명정부 수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모든 동포에게 요청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죽어가고 있는 저들에게 피란처와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십시오. 동시에, 지난 시간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온 전 세계에 밝힙니다. 나는 저들의 범죄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유대인과 폴란드인들 모두 알고 있었듯이,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 지휘부는 그동안 게토 구원에 자신들이 가진 인력과 무기를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 목적을 이룰수 없었다. 적어도 이 시점의 그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여덟 번의 무장 작전 중 일곱 번은 당시 게토 전사들을 지원하던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에 의해 이뤄졌다.  - P525

1944년 여름, 바르샤바 같은 도시에서 저항활동이란 피할 수 없는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 형태와 방향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와 폴란드 국내군 지휘관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분명 폴란드 국민은 그 어떤 동맹국 수도 시민들보다 더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들 지휘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전략적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점령 상황을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소비에트의 점령 위협까지 감안해 판단해야 했다. 7월에 이르자 독일군은 6월 말 붉은 군대가 실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소식이 바르샤바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독일군의 패배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분명 반길 만한 소식이었지만, 마찬가지로이내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접수할 것이라는 예상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폴란드 국내군이 독일군과 공개적으로 싸워 승리한다면, 그들은 붉은 군대가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독일군과 싸워 패배한다면, 곧 들이닥칠 소비에트에게 자신들은 손쉬운 상대이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밖에되지 않을 것이었다.  - P536

폴란드 장교와 정치인들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이 1939년에서 1941년까지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는것을 결코 잊지 않았고, 점령한 폴란드 동부에서 펼쳐진 소련의 정책들은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것이었음도 잊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의 강제이주에 대해서도, 카틴 숲에서 벌어진학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카틴 발견 이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렸고, 이는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또 하나의이유가 되었다. 스탈린이 스스로가 벌인 대학살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는 빌미로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가 어떤 협상이든 선의를 가지고 임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또한 소련이 나치 독일을상대로 한 공동의 전쟁 동안 합법적인 폴란드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뒤 더 강력한 발언권을 지닐 그들이 과연 폴란드독립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을까? - P537

영국과 미국의 관심은 그와는 결이 달랐다.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 어떤 형태의 폴란드 정부보다 더 중요한 동맹이었다. 미국과 영국 입장에서는 카틴 대학살에 대한 소련의 거짓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 스탈린을 설득하기보다는 폴란드에 타협을 종용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폴란드인들이 거짓, 즉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했다고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아울러 폴란드가 주권이 있는 정부라면 결단코 취할 수없는 조치, 즉 자국 영토의 절반인 동부를 소련에 넘겨주길 원했다.
이 문제에 있어 런던과 워싱턴은 종전 후 소련이 전쟁 이전의 폴란 - P537

드 동부 영토를 요구할 경우 이를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이미 1943년말에 합의해둔 상태였다. 스탈린이 과거 히틀러와 합의했던 소비에트의 서쪽 경계는 이제 처칠과 루스벨트에 의해 또다시 승인되었다. 런던과 워싱턴은 훗날의 소비에트-폴란드 국경으로 약간의 변경이 이뤄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보면, 폴란드는 소련뿐만 아니라 서방 동맹국들에게도 배신당한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에게 타협할 것을 요구하며, 폴란드인들의 손에 기대 이하의 결과물만을 쥐여주었다.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 양보된 것이었다. - P538

에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동맹국들 사이에서 고립된 런던의 폴란드 정부는 주도권을 바르샤바 폴란드 전사들에게 넘겼다. 폴란드의 주권을 지켜낼 희망이 거의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폴란드 국내군은 수도에서 들고일어나는 길을택했고, 이는 1944년 8월 1일에 시작될 것이었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는 템페스트 작전의 틀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공들여 계획된 이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폴란드 영토 해방에 폴란드군이 주 역할을 맡는 전국적 봉기를 그 골자로 하고있었다. 하지만 앞선 7월 말까지 템페스트 작전은 이미 틀어진 상태였다. 애초 계획상 폴란드 국내군은 폴란드 동부에서부터 붉은 군대에 밀린 독일군과 교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앞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린 까닭에 이 같은 합동 작전에 대해 소련과 사전에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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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에어컨 바람이 살갗에 닿으니 세포가 탱클탱클 살아났다. 재채기가 나고 정신이 깨어났다. 공부하는 신체로 모드 변환.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폈다. "무화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을 터뜨린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불어대는 북풍이다. 나의벗들이여, 무화과가 떨어지듯 너희에게는 이 가르침이 떨어진다. 이제 그 열매의 즙을 마시고 그 달콤한 살을 먹어라! 온사방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활자가 두 눈에 달려든다. 영혼을 상승시키는 니체의 말 헤어져 있던 애인과의 상봉처럼 이리도 눈물겨울수가. - P145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아래
집안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되는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게 정말 사는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_유하의 시 <달의 몰락> 부분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방

김정란의 시 <눈물의 방>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장석남의 시 <그리운 시냇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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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것이 미군의 무장 속도를 늦추고 또 미국이전투를 벌이더라도 유럽보다는 태평양에서 벌이게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후에도,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보다는 미국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1942년 초까지 소비에트 정복을 완수하고 그 뒤 태평양에서 그동안일본과의 전투로 약해진 미국을 상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역시 줄곧 일본이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가 품은 생각의 핵심은 히틀러와 똑같았다. 즉 ‘소련 땅은 내 것이니, 일본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뜨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묶어두길 원했고, 도쿄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P381

당초 독일의 침공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소련의 주요 도시들을차례로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의 식량 및 캅카스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는 전격적 승리를 거두었다면, 일본의 진주만 폭격 소식은 분명베를린에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상에서라면, 진주만공격은 독일이 새로 얻은 식민지에서 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동안 일본이 미국의 시선을 끌어준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은 자신을 식량 및 자원을 자급자족하면서 영국의 해상 봉쇄 및 미국의 수륙 양동 작전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대륙 제국으로 만들 ‘동유럽 종합계획, 혹은 그것을 다소간 수정한 버전을 실행에 옮길 것이었다. 물론이것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그림이지만, 독일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던 순간만큼은 그래도 아주 약간의 현실성이있었다. - P382

1941년 12월, 히틀러는 자신이 처한 최악의 전략적 난국에 괴이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스스로는 이미 장군들에게 1941년 말까지 "유럽 대륙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앞으로 다가올 영국 및 미국과의 세계적 수준의 분쟁에 대비하라고 이야기해둔 상태였다. 그러나그렇게 되기는커녕 독일은 두 개의 전선에서 그것도 3개의 패권국과맞서 싸워야 한다는 전략적으로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뻔뻔함과 정치적 민첩성을 발휘하여 애초의 전쟁계획에서 심각하게 틀어져버린 상황을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서와 언어에 맞게 각색해냈다. 비현실적인 기획, 서투른 계산, 인종주의적 오만함, 어리석은 벼랑 끝 전술 말고 대체 무엇이 독일을 영국, 미국, 소련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는가? 히틀러는 이 질문에 대한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유대인들의 음모‘였다 - P383

만약 히틀러가 자신이 했던 예언을 실현시키고자 했다면, 학살은 이 시점에서 그가 가진 단 하나뿐인 선택지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해양 제국이 아닌 대륙 제국이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보내버릴 불모지를 결국 손에 넣지 못했다. 마지막 해결책은 이미 여러 차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고, 힘의 방식, 곧 대량학살은 강제이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학살은 승리의 대체물조차 될 수 없었다. 전격적 승리가 애초 계획과 달리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유대인들은1941년 7월 말부터 이미 학살당해오던 터였다. 그러던 그들은 독일에맞서는 연합국들의 힘이 좀더 강력해진 1941년 12월부터는 모두 싹쓸어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는 여전히 좀더 깊은 감정적 요소들을 건드리고자 했고, 한층 더 악의에 찬 목표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던 독일 지도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 P386

세르비아는 아마도 이를 특히나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독일이 유럽 동남부에서 벌인 전쟁은 소련 땅에서 벌인 전쟁보다 약간 앞선 시점에서부터 치러졌고, 이것은 아주 뚜렷한 선례들을 남겼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인 1941년 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침공했다. 그 주된 목적은 자신의 영양가 없는 동맹인 이탈리아를 지원해 그들이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비록 독일이 순식간에 유고슬라비아군을 제압하고 크로아티아에 꼭두각시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이탈리아와 함께 점령한 세르비아 지역의 저항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군 사령관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로서 ‘유대인 및 집시들만을 학살할 것이며,
그 비율은 독일인 1명당 유대인 및 집시 100명이다‘라고 명령했다. 이같은 방식으로, 세르비아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성은 힘러가 유대인들을 "빨치산으로서" 죽여 없애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줄곧 사살당하고 있었다.  - P389

마지막 해결책의 다섯 번째이자 최종판은 말 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나치의 언어에서 재정착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말의 완곡한 표현이 되었다. 수년 동안 독일의 지도부는 유대인들을 특정 지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옮겨간 어느 곳에서든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해야만 할 것이고, 어쩌면 완전히 씨가 말라 더는 종족 번식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앞서처럼 그들을 죽여 없앤다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재정착은 비록 1940년 그리고 1941년에 들어선 유대인 정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이른바 재정착 혹은 동부로의 재정착은 곧 대량학살을 뜻하게 된다. 아마도 재정착이라는 완곡어법은 기존 나치 유대인 정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것을 통해 나치가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준 듯 보인다. 그 사실은 바로 독일의 정책은 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독일인들로 하여금 군사적 재앙이 자신들의 유대인 정책을 좌우해버린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위안할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 P390

그런 점에서 독일과 루마니아의 정책이 정반대로 갈라선 1942년은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독일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졌기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들 것이었고, 루마니아는 똑같은 이유에서 그해말부터 약간의 유대인들을 살려두고자 할 것이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이제 미국 및 영국과 협상의 여지를 열어둘 것인 반면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그들의 죄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완전히 닫아버렸다. - P393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같은 날, 유대인 남성들은 우츠크성 뜰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P399

한 여인은 아내로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남겨남편이 자신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들 아이의 운명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두 소녀는 함께 "너무나 살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복수해줘. 복수해줘"라며 삶에 대한 갈구를 남겼다. 또 다른젊은 여인은 조금 더 체념한 듯 "나는 내가 스무 살에 죽는다는 것을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상태다"라고 적었다.
누군가의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 아이들이 카디시를 올려주기를, 또유대교의 관습을 잘 지키기를 부탁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전한 어느 딸의 메시지는 이랬다. "사랑하는 엄마! 이제 난 더 못 살거예요. 저들은 우리를 게토 밖에서 이곳으로 끌고 왔고, 우리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해요. 엄마가 우리와 이곳에 함께 있지 못하다는사실이 참 안타깝네요. 한편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지만요. 사랑해요, 엄마. 그동안 제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 - P400

민스크는 나치의 파괴적 본성을 가장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곳이다. 독일 공군은 민스크가 항복을 선언한 1941년 6월 24일까지줄기차게 폭격을 퍼부었고, 심지어 독일 국방군은 그로 인한 불길이잦아들 때까지 도시 입성을 미뤄야 할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7월 말까지 교육 수준이 높은 현지인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유대인들을 도시 북쪽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민스크에는 이제 게토, 강제수용소, 포로수용소, 대량학살을 위한 구역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곳은 결국승리의 대체물로, 즉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시연하는 일종의 무시무시한 죽음의 극장으로 바뀐다. - P404

041941년 가을 민스크. 당시 그곳의 독일인들은 모스크바가 여전히굳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기념일인 11월 7일, 독일인은 단순한 대규모 사살보다 뭔가 더 극적인 것을 내놓기로 했다. 그날 아침, 그들은먼저 게토에 있던 유대인 수천 명을 체포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이 마치 소비에트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런 것인 양,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오게끔 해둔 상태였다. 그러고는 체포한 이들을 길게 늘어서게 한 뒤, 그들 손에 소련 깃발을 쥐여주며 소련의 혁명가를 부르라고 강요했다. 유대인들은자신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을 수밖에없었다. 이들 6624명의 유대인은 트럭에 실려 민스크 너머 투친카 근 - P404

처에 있던 과거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창고로 쓰던 장소로 끌려갔다. 그날 저녁, 고된 강제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가족 모두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그곳에는 우리 가족 8명, 아내, 아이셋, 나이 드신 어머니, 내 형제들, 가운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테러 그 자체는 생소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과거, 1937년에서1938년에도 사람들은 내무인민위원회의 검은 차량에 실려 민스크에서 투카로 끌려갔다. 하지만 스탈린의 대숙청 작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그때도, 내무인민위원회는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둘씩 어두운 밤을 틈타 끌고 가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 P405

이와 달리 독일은 많은 대중에게 알리고자, 여러 의미를 담아, 또 선전 영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낮에 수많은 사람을 보란 듯이 끌고 갔다. 이렇게 연출된 가두 행진은 곧 ‘공산주의자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나치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치의 사고방식,
‘유대인 제거는 중앙 집단군의 후방 지역 안정화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도 일종의 승리‘라는 생각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공허한 승리의 표현은 좀더 명백한 자신들의 패배를 숨기기 위해 고안한거짓말로 보일 따름이었다. 중앙 집단군은 1941년 11월 7일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당연히 이를 달성하지못한 상태였다. - P405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처럼, 스탈린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히틀러는 연합국이 유대인을 위해 싸우고있다고 말했고, 따라서 (국민이 이 주장에 동조할까 우려하던 연합국은자신들이 억압받는 국가들(하지만 특히 유대인은 아닌)을 해방시키고자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히틀러의 선전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이후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소련 역사를 빚어냈는데, 그 대답은 바로 독일 학살 정책의 모든 희생자는 "소련 국민이지만 이 소련 국가 구성원의 최대 다수는 바로 러시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선전 부장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는 1942년 1월 "러시아인민, 모두 평등한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 대중 가운데 첫째, 이들야말로 독일 침략자들과의 투쟁에서 오는 짐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는 선언을 통해 이를 명백히 밝혔다. 셰르바코프가저 말을 내뱉기까지 독일인들은 이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동쪽에서 벨라루스 유대인 약 19만 명을 비롯해 100만 명에 이르는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다. - P408

1942년 하반기, 독일의 대 빨치산 작전은 유대인 대량학살과 따로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1942년 8월 18일 벨라루스 내 빨치산들을 그해 말까지 "완전히 몰살시킬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 기한까지 유대인 역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었다. 총살의 완곡한 표현인 ‘특별 조치"라는 말은 유대인과 벨라루스 시민들에 대한 보고서 양쪽 모두에서 등장한다. 둘 - P430

의 시행에 대한 기본 논리는 순환적이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유대인들은1941년부터 애초에 "빨치산으로서 죽여야 할 대상이었는데, 이때만하더라도 아직 제대로 된 빨치산들의 위협은 없던 시점이었다. 그 뒤1942년 일단 그 같은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자, 이들과 관련된 민간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몰살시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빨치산과 유대인의 동일시는 오직 두 집단 모두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끝난다는 하향 궤적의 수사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 P431

1942년 가을에서 1943년 초까지, 독일은 게토 및 빨치산과 관련 있다고 판단된 모든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1942년 11월에 있었던 늪지열 작전 당시 디를레방거 부대는 그때까지 바라나비치 게토에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8350명을죽이고는 389명의 "노상강도"와 1274명의 "노상강도 용의자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러한 학살을 이끈 이는 바로 동방자치정부 나치 친위대 상급 장교 및 경찰 지휘부를 맡고 있던 프리드리히 예켈른으로, 앞서 우크라이나 카네츠포딜스키에서 있었던 대량 사실과 라트비아리가 게토에서의 이른바 정리 작업을 조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1943년 2월의 이른바 2월 작전은 슬루츠크 게토에 대한 청소 작업, 다시 말해 유대인 약 3300명에 대한 사살과 함께 시작되었다. 슬루츠크 서남부 지역에서 독일인들은 9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2E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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