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며 걷거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 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 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있었던 유대인들은 일종의 뜰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로 나누어 서라는 독일어 혹은 이디시어를 듣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자니 ‘메릴 스트립‘을 처음 만난 영화 ˝소피의 선택˝이 생각난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학살의 페이지들을 끝도 없이 읽는다.
무기력해진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나치의 유토피아들 가운데 이것 또한 독일의 애초 계획과 정확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현된 부분은 유대인 학살뿐이었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벨라루스에서도 ‘마지막 해결책‘이란 것은 그 원래 개념보다 더 과격화된 잔혹 행위들이었다. 당초 소비에트유대인들은 독일 제국 건설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더 먼 동쪽으로 쫓아버릴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임이분명해졌고, 동부에 있던 유대인 대부분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민스크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도 찾아볼 수 있었다.  - P452

이들은 흔히 엄청난 규모의 또 다른 폭력에 참여하는 것을 대가로 도망치거나 살아남은 유대인들, 아니면 강제노동을 위해 끌려간 유대인들로서, 후자의 경우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늦게 그리고 때때로 고향에서한참 떨어진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1943년 9월, 민스크 최후의 유대인 몇몇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있던 소비부르란 이름의 시설로끌려간다그곳에서 이들은 심지어 벨라루스에서조차 몰랐던 죽음의 시설을마주하게 된다.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모든 종류의 공포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P452

약 540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의 세력권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거의 절반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 살해되었으며, 대부분은 총에 맞아 그리고 일부는 독가스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반대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대체로독가스에, 일부는 총탄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는 1941년 절반 기간에, 즉 독일의 점령이 시작된첫 6개월 동안 1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 있던 유대인들은, 동쪽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전부터 독일의 통제 아래 있었으나 동부 유대인들보다 더 늦은 시점에목숨을 빼앗겼다. 동쪽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적이랄 수 있는젊은 남성들이 전쟁 초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눈에 띄는 즉시 총살당하기 일쑤였다.  - P455

라인하르트 작전의 기원은 히틀러가 품은 열망에 대한 힘의 해석에 있었다. 소련군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시행했던 가스 실험이 꽤나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았음을 알고 있던 힘러는 1941년 10월 13일무렵 자신의 부하였던 오딜로 글로보츠니크에게 유대인들을 처리할새 가스 시설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글로보츠니크는 나치의 인종주의적 이상을 위한 중대 실험지대였던 동방 총독부 루블린 지구의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지휘부 소속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구역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들어오기를, 그리고 그들을 식민 노동노예로 삼기를 고대하던 인물이었다. 소련 침공 개시 후, 글로보니크는 동유럽 종합 계획의 실행을 맡게 되었다. 비록 소련 침공 실패로몰살적 식민화를 위한 그의 거대한 기획 대부분이 뒤로 미뤄졌지만,
글로보츠니크는 그 일부를 자신의 관할 구역이자 각자의 고향으로부터 쫓겨온 약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있던 루블린 지구에 실제로 시행한다. 그가 원했던 바는 바로 "동방 총독부의 유대인은 물론 폴란드인들까지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 P457

바르샤바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폴란드인들 대부분 및 유럽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유대인 사회의 고향이자, 나치의 세계관상존재해서는 안 될 거대 도시였다. 1942년 봄을 기점으로, 바르샤바게토에는 여전히 35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수용되어 있었다.
바르샤바는 동방 총독부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행정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총독 한스 프랑크는 크라쿠프를 선호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고대 폴란드 황궁을 넘겨받아 스스로를 현대판 황족이라 내세우며 맡은 업무들을 처리했다. 과거 1939년 10월, 프랑크는 유대인들을 동방 총독부 내 루블린 지구로 들이는 것을 통해 유대인 "문제"
를 해결하려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1941년 12월, 그는 부하들에게
‘반드시 유대인들을 처리할 것"을 주문한다. 사실 프랑크는 이 시점까지도 이를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않았다.  - P469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량학살의 각 단계가 실로 참혹했던만큼, 당사자인 유대인들은 직전의 순간보다 가까운 미래가 그래도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곤 했다. 몇몇 유대인은 정말로동쪽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게토 안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일단 움슐락플라츠에 집결하면, 기차에 오르는 것이 음식, 물, 위생 시설 없이 땡볕 아래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믿었다고 뭐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움슐락플라츠를감시하는 것은 유대인 경찰들의 몫이었는데, 이들은 간혹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 또는 결혼 상대로 삼을 법한 이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이 밝혔듯이, 유대인 경찰들은 때때로 현금과 더불어 "현물로" 값을 치를 것, 다시 말해 구해주는 대신몸을 맡길 것을 요구했다. - P477

트레블린카를 책임지던 독일인(본래 오스트리아인) 의사 이름프리트 에베를은 줄곧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학살률이 베우제츠와 소비부르에 있던 다른 학살 공장 책임자들보다 한발앞서길 바랐다. 심지어 학살할 인원수가 이미 공장의 최대 질식사 가능 인원을 한참 넘어선 1942년 8월에도 그는 끊임없이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받아들였고, 죽음의 행렬은 곧 공장 내부에서 외부로 퍼져나갔다. 가스실을 가득 채웠던 죽음은 가스실 밖 뜰의 대기 장소로,
여기서 다시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기다리고 있던 역 혹은 선로로,
심지어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점령 폴란드 지역 어딘가까지 퍼져나갔다. 어찌됐든 유대인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기차에서 탈출하는 소수가 있었는데, 이는 소비부르와 베우제츠로의 이송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 P481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바르샤바 게토로 돌아왔는데, 보통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모면했는지 알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은이송과 혼란은 또한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대인을 실은 기차들이 곧잘 멈춰서 있었던 탓에, 독일 군인들을 태우고 동부 전선으로향하던 기차들은 어렵지 않게 이 죽음의 열차들을 지나치거나 따라잡기 일쑤였다. 몇몇 구경꾼은 사진을 찍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죽음의 기차에서 나던 악취 때문에 먹은 것을 게워내기도 했다. 이들 군인 중 일부는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참여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서남부로 향하던 길이었다. 적어도 만약 그들이 알고자 했다면,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본 독일 군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481

에베를은 생각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해임되고,
1942년 8월 슈탕글이 그를 대신해 트레블린카 책임자 자리에 올라선다. 훗날 자신을 유대인 가스 학살 "전문가이자 자신은 그것을 "즐겼다"고 말한 슈탕글은 재빨리 트레블린카를 안정시켰다. 먼저 그는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유대인 노역자들을동원해 시체들을 화장시켰다. 죽음의 시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1942년 9월 초가 되자, 그것은 애초의 기획에서처럼 그야말로 기계돌아가듯 작동하고 있었다.
슈탕글은 특히나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던 부하이자 수용소 유대인들에게 "인형"이라(그의 허영과 빼어난 외모로 인해) 불리던 쿠르트 프란츠의 보조에 힘입어 그곳을 총괄했다.  - P482

프란츠는 유대인들이 살던구역을 관찰하기를 즐겼고, 자신이 특별히 훈련시킨 개들이 유대인을 공격하는 모습을 좋아했으며, 또 언젠가는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동물원을 만들 만큼 동물 관찰을 즐겼다. 독일인들은 수십 명의 트라브니키 인력의 보조를 받았는데, 이 인력들은 주로 경비병으로 활약하거나, 유대인을 모아 가스실에 집어넣고는 일산화탄소를 주입하는 것과 같은 전체 시설물 작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의 일부를 맡기도 했다. 시설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나머지 노동력은 유대인 노역자 수백 명의 몫이었다. 이들은 오직 대량학살 및 약탈과 관련된 일에 동원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남겨둔 인력으로서, 만약 한순간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배우제츠 그리고 소비부르와 마찬가지로, 트레블린카 역시 유대인 노동력으로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었고, 따라서 트라브니키 대원들의 일은 - P482

그리 많지 않았으며, 독일인들이 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트레블린카에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독일인들은 거짓 선전을 짜내느라 바쁜 상황이 되었다.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는 전부터 가스 학살에 관련된 보고를 비롯해 독일인들이 폴란드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각종 학살 소식을 동맹 영국과 미국에 전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그해 여름 영국과 미국에 독일 시민들을 대상으로앙갚음을 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폴란드 저항군을 이끌던 망명 정부군 소속 장교들은 트레블린카를 습격할 것을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독일은 가스 학살을 부인했다. 바르샤바 유대 경찰 수장이자 "재정착 위원이었던 유제프 셰린스키는 자신의 경우 트레블린카로부터 줄곧 엽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 P483

물론 이 시점에도 바르샤바 게토에는 우편 업무를 취급하는 곳이 있었고, 이는 몇 주 동안이나 돌아갈 것이었다. 이곳에서 모자를 쓴 채 일하던 이들은 밝은 오렌지색 노동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던 이송을 위해 끌려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손에는 트레블린카로부터 온 어떤 소식도 있을 턱이 없었다.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은 1942년 9월 3일 다시 시작된다. ‘대작전‘에 따른 마지막 이송은 1942년 9월 22일에 이뤄졌으며, 여기에는 유대 경찰 및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되었다. 유대 경찰들은기차가 역에 다다를 무렵이 되자, 차창 밖으로 과거 자신들의 임무나사회적 지위 등을 나타내던 모자와 완장 등을 내던졌다(유대 경찰들은 흔히 유대 명문가 출신이었다). 유대 경찰들은 먼저 가 있던 강제수 - P483

용소 유대인들로부터 제법 거친 환영을 받을 수 있었기에 이는 신중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트레블린카는 수용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죽음의 공장이었고, 이런 행동은 별 의미가 없었다. 유대 경찰들 역시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독가스에 중독돼 숨졌을 따름이다.

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 P484

절뚝거리며 걷거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있었던 유대인들은 일종의 뜰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로 나누어 서라는 독일어 혹은 이디시어를 듣게 되었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동쪽으로" 보내지기 전 소독을 해야 한다는 - P484

핑계로 발가벗겨졌다. 입고 있던 옷가지는 벗은 뒤 가지런히 정리되고 신발 역시 한데 모아 잘 엮어두어야 했다. 귀중품은 남김없이 내놓아야 했고, 여인들은 깊은 곳까지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이송 과정의 바로 이 지점에서 몇몇 여인은 강간 대상으로 뽑혔고, 소수의 남성은 강제노동 대상으로 골라내졌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곧바로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했던 반면, 강제노동에 동원된 남성들은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노예로 살아갔다."
모든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은 물론, 머리카락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가스실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들 각각은유대인 "이발사‘ 앞에 앉아 삭발당했고, 종교적 관습에 충실해 가발을 쓰고 있던 여인들은 그것마저 내놓아야 했다.  - P485

죽음이 거의 턱밑까지 차오른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여인들은 이 순간까지도 이발이 소독의 마무리 과정일 것이라 여겼고,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이렇게 확보된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독일인 철도 노동자들이 신을 스타킹을 만들거나, 독일 잠수함 선원들이 신을 슬리퍼의 안감으로 쓰일 것이었다.
첫 번째 여인들 그리고 다음으로 남자들로 이뤄진 두 집단은 모두발가벗은 채, 속수무책으로 굴욕을 당하며, 어떤 터널 안을 달려가야 했다. 그곳은 몇 미터 정도의 폭에 길이는 약 100미터에 이르는 터널이었는데, 독일인들은 이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불렀다. 터널 끝에서 유대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의 경사진 지붕 앞에 거대한다윗의 별이 그려진 어두운 방이었다. 히브리어 비문이 적힌 의식용 - P485

막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님께로 가는 문 마땅한 자는 응당 지나가리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입구에 서 있던 두명의 트라브니키 출신 경비병에 의해 거칠게 안쪽으로 밀어넣어졌기에 이를 발견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은 몽둥이를, 다른 한 명은 칼을 들고 있던 경비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유대인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그 뒤 유대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문을닫으며 자물쇠를 채우고는, "물을 틀어!" (바로 마지막 거짓말이자, 굳이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던 거짓말이었다. 그 대상은 이미 가스실에 갇힌 불행한 유대인들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있었던)라고 외쳤다. 그러면 세 번째 트라브니키 대원이 레버를 당겼고, 탱크 엔진에서 뿜어져 나온 일산화탄소가 가스실 안으로 쏟아졌다. - P486

20분쯤 지나면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가스실 뒤쪽 문을 열고, 유대인 강제노동자들이 시신을 치웠다. 타들어가는 열기와 죽음의 고통으로 시체들은 한데 엮인 채 팔다리가 뒤틀려 있었으며, 종종 쉽게부서져버릴 정도였다. 당시 트레블린카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칠 라이흐만이 회상했듯이, 그들은 "극악무도하게 뒤틀려졌다". 그들이 들어갔던 가스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시신은 그들이 흘린 피, 배설물과 함께 치워졌다. 다음에 들어설 유대인들이 극심한 공포에 휘둘리지 않도록 또 여전히 소독이라는 말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강제노역자들은 가스실을 깨끗이 치워야 했다. 그 뒤 그들은 시체들을 구분 - P486

하고, 유대인 "치과의사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시신의 얼굴이 바닥이 아닌 위를 바라보도록 눕혀두었다. 이 치과의사들의 작업은 바로시신에서 금이빨을 따로 빼내는 것이었다. 때때로 시신의 얼굴은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완전히 검은색을 띠기도 했고, 이를 꼭 깨문 상태로 사망해 "치과의사들이 안간힘을 써서 입을 벌리게 만들기도 했다.
금이빨 제거 작업이 끝나면, 유대인 노역자들은 시신들을 매장용 구덩이로 끌고 갔다. 유대인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시점부터 이들의 시체 처리까지의 전 과정이 끝나는 데는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의 겨울이 되자,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두 집단이 아닌 남자, 나이든여자, 젊은 여자의 세 집단으로 나누기시작했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가장 늦게 가스실로 보냈는데, 이는그들이 추위 속 젊은 여인들의 나체 보기를 즐겼기 때문이다.  - P487

그때쯤, 시체들은 땅에 묻히기보다는 불태워졌다. 화장을 위한 자리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지지대 위에 선로를 이용해 만든 폭 약 30미터의 거대한 석쇠가 있었다. 1943년 봄까지 트레블린카에서는 밤낮없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연료는 때때로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매장지에서 파낸 부패한 시체들 그리고 막 가스실에서 꺼낸 시신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지방조직이 많은 여성들의 시신은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잘 타올랐기에, 노역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시체더미 아래쪽에 두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임신한 여성들의 복부는 불타는 과정에서 터지기 일쑤였는데, 이 경우 안쪽의 태아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1943년 봄의 차가운 밤, 독일인들은 불길 근처에서 술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몸은 일종의 연료 - P487

로서, 또 다른 에너지원으로서 활용되었다. 처형자들은 불태움으로써그 어떤 범죄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겠지만, 그 과정에 동원된 유대인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뼛조각들을 온전히 남겨두고, 다른 이들이 훗날 찾을 수 있게끔 메시지를 적어 땅속에 묻어두었다. 48희생자들이 흔적을 남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칠 라이흐만은 자신의 누이와 함께 트레블린카로 끌려왔었다. 그는 시설을 보자마자 자신이 가져온 짐 가방을 그 자리에 놓아버렸다. 누이는 그런그를 보고 왜 그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이제필요 없어"는 그가 누이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강제노동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옷가지를 분류하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P488

 "나는 누이가 입던 옷가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멈춰선 나는 그녀의옷을 집어들고,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자신이 할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누이의 옷가지 역시 어딘가로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타마라 빌렌베르크와 이타 빌렌베르크는 자신들의 짐 꾸러미를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녀들의 남자 형제이자 노역 대상자였던 사무엘은 함께 묶여 있던 누이들의 옷가지를 발견했을 때의 심경을 "마치 그녀들과 다시 포옹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여인들의 경우 모두 이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그들에게는 혹여살아남아 자신들의 말을 전해줄지도 모를 동료 유대인들과 이야기할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루트 도르프만의 경우 그녀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로부터 그녀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나 레빈손은 자신 - P488

에게 배정된 이발사에게 꼭 탈출해 온 세상에 트레블린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유대인들은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 경우에만, 그것도 한정적으로만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언젠가그것을 물물교환 또는 뇌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각자 비교적 휴대하기 편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다면 챙겨두고자 했다. 간혹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지니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열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박해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트레블린카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 이제 죽음의 시설물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유대인노역자들이 맡은 일 중 하나는 귀중품을 수색하는 것이었고, 찾아낸귀중품 중 일부는 물론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 P489

유대인들은이렇게 확보한 귀중품들을 시설물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던 트라브니키 대원들에게 건넸고, 그 대가로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인근 마을에서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유대인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귀중품을 현지 여성들 혹은 분명 바르샤바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매춘부들에게 주었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이들은 다시 의사 출신 유대 노역자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찾아오기도했다. 이렇게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순환의 현지 경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목격자는 이를 두고 귀중품을 휘감은 타락한 "유럽"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
이러저러해서, 1943년까지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강제노역자들은현재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비롯한 바깥세상 소식들을 접 - P489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약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들은 유대인이아니었다. 약 7만4000명의 비유대 폴란드인과 1만5000명가량의 소련군 전쟁포로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당하거나 과로로 숨졌다.
가스 실험에 동원된 소수의 포로들을 제외하면, 이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시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쏟은 에너지만큼은 결코 아니었지만, 집시들은 독일의 힘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학살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이 점령한 소련 땅에서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사살당했고(서류상 약 8000명), 벨라루스에서 있었던 보복 조치 당시 학살 대상 - P496

에 포함돼 있었으며,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쏜총에, 세르비아에서는 보복 작전 와중에 유대인들과 함께 총에 맞았다. 또한 독일의 꼭두각시 동맹 크로아티아에서는 강제수용소에서도죽임을 당했고(1만5000명가량), 독일의 동맹이었던 루마니아가 정복한 땅에서는 말 그대로 민족 청소의 대상이 되었으며, 1942년 1월 헤움노에서(4400명가량) 그리고 1943년 5월(1700명가량)과 1944년 8월(2900명가량으로, 이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이미 배고픔, 질병, 학대로 사망한 뒤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를 마시는 운명을 맞이했다. 적게잡아 10만 명, 십중팔구 이보다 2~3배 많은 수의 집시가 독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 P497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10만 명이넘는 사람은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길이 기억될 이름이자,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였으며, 동부를 덮친 더 커다란 암흑의 흔적이었다. 채100명이 되지 않는 유대인 노동자들은 라인하르트의 학살 시설물 내부를 목격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트레블린카의 경우는 그보다 더흔적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트레블린카에 있던 수용자들은 독일인의 명령으로 하지만 동시에스스로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엘 말레 라하임"은 매일 죽음을 맞이했던 유대인들을 위한 성가였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밖에 서서 이 - P497

를 듣고 있었다. 어느 유대인 노동자는 동쪽에서 온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자신들의 "훌륭한 노래"에 "이상한 선물로 화답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덜 고상한 음악이자, 폴란드 민중가요였으며, 트레블린카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수용소 밖을 떠올려주고 탈출을 준비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이 노래들은 사랑과 어리석음을 따라서 삶과 자유를 생각나게 했다. 독일인들의 허드렛일을 하던 여인과 노동자들 사이의 결혼을 축하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
여인 수천 명의 머리를 깎아주었던 유대인 이발사들은 그중 아름다웠던 여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 P498

그 2주일 전부터, 미국 또한 유럽 전선에 뛰어든 상태였다. 앞서 태평양에서 일본 함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미국은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국을 비롯한 그 밖의 서방 연합군과 함께하는) 미군 약 16만 명이 노르망디 해변에 내려섰다. 미국이 가진 힘은 이미 저 불쌍한 독일군을 다름 아닌 미국산 트럭과 지프차로 둘러친 소련의 기계화 부대를 통해 벨라루스 깊은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독일이 구상했던 포위 작전은 더 완전하고, 빠르게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독일군 자신이 되어버렸다. 벨라루스에서 소련이 거둔 위업은 프랑스에서 밀고 들어오던 미국의 그것보다 더 놀라웠다. 독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장교들 또한 한수 아래였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소비에트의 공세가 벨라루스보다는 우크라이나 쪽에서 있을 것으로 봤다. 독일군 약 40만 명이 실종되거나, 부상당하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했다. 이제 독일 중앙 집단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폴란드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502

비유대 폴란드인들은 독일과 소비에트 양쪽으로부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게 있어 두 대상은 별다를바 없었다. 침략자에게 저항하고자 했던 비유대 폴란드인들은 이따금어떤 침략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저항할지를 고르는 것이 가능했다.
반면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들에게는 독일보다는 소비에트를 반길 충분한, 아니 거의 모든 이유가 있었고, 이들 눈에 붉은 군대가 해방자로 비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1942년 여름의 이른바 ‘대작전‘
뒤, 살아남은 약 6만 명의 바르샤바 게토 내 유대인 중 상당수는 저항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또 어디에서 저항할지를 선택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싸우는 것뿐이었다. - P505

움직인 뒤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독일이 게토 습격을 감행한 1943년 4월 19일은 유월절 전날이었고, 다가오는 25일 일요일은 부활절이었다.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는 자신의 시 「꽃밭」에서, 게토 안 유대인들이 싸우고 또 죽어가는 동안, 장벽 너머 크라신스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회전목마를 타고 있던 당시 기독교 축일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미워시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나는 죽음의 고독함을 떠올렸다." 게토 반란 기간 내내회전목마는 돌고 또 돌았고, 그것은 고립된 유대인의 상징이 되었다.
게토 장벽 너머 폴란드인들이 삶 그리고 웃음을 누리던 그 순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많은 폴란드인은 게토안 유대인들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이들은 그그렇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들을 돕고자 했으며, 몇몇은 이를 실행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 P524

서방 연합군 중 오직 폴란드 당국만이 유대인 학살을 멈추기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섰을 뿐이다. 1943년 봄까지 제고타는 숨어 있던 유대인 약 4000명을 돕고 있었고, 폴란드 국내군은 유대인을 갈취하는자들은 총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4일,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이 싸우고 있던 그때, 망명정부 수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모든 동포에게 요청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죽어가고 있는 저들에게 피란처와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십시오. 동시에, 지난 시간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온 전 세계에 밝힙니다. 나는 저들의 범죄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유대인과 폴란드인들 모두 알고 있었듯이,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 지휘부는 그동안 게토 구원에 자신들이 가진 인력과 무기를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 목적을 이룰수 없었다. 적어도 이 시점의 그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여덟 번의 무장 작전 중 일곱 번은 당시 게토 전사들을 지원하던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에 의해 이뤄졌다.  - P525

1944년 여름, 바르샤바 같은 도시에서 저항활동이란 피할 수 없는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 형태와 방향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와 폴란드 국내군 지휘관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분명 폴란드 국민은 그 어떤 동맹국 수도 시민들보다 더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들 지휘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전략적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점령 상황을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소비에트의 점령 위협까지 감안해 판단해야 했다. 7월에 이르자 독일군은 6월 말 붉은 군대가 실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소식이 바르샤바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독일군의 패배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분명 반길 만한 소식이었지만, 마찬가지로이내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접수할 것이라는 예상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폴란드 국내군이 독일군과 공개적으로 싸워 승리한다면, 그들은 붉은 군대가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독일군과 싸워 패배한다면, 곧 들이닥칠 소비에트에게 자신들은 손쉬운 상대이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밖에되지 않을 것이었다.  - P536

폴란드 장교와 정치인들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이 1939년에서 1941년까지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는것을 결코 잊지 않았고, 점령한 폴란드 동부에서 펼쳐진 소련의 정책들은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것이었음도 잊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의 강제이주에 대해서도, 카틴 숲에서 벌어진학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카틴 발견 이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렸고, 이는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또 하나의이유가 되었다. 스탈린이 스스로가 벌인 대학살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는 빌미로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가 어떤 협상이든 선의를 가지고 임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또한 소련이 나치 독일을상대로 한 공동의 전쟁 동안 합법적인 폴란드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뒤 더 강력한 발언권을 지닐 그들이 과연 폴란드독립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을까? - P537

영국과 미국의 관심은 그와는 결이 달랐다.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 어떤 형태의 폴란드 정부보다 더 중요한 동맹이었다. 미국과 영국 입장에서는 카틴 대학살에 대한 소련의 거짓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 스탈린을 설득하기보다는 폴란드에 타협을 종용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폴란드인들이 거짓, 즉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했다고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아울러 폴란드가 주권이 있는 정부라면 결단코 취할 수없는 조치, 즉 자국 영토의 절반인 동부를 소련에 넘겨주길 원했다.
이 문제에 있어 런던과 워싱턴은 종전 후 소련이 전쟁 이전의 폴란 - P537

드 동부 영토를 요구할 경우 이를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이미 1943년말에 합의해둔 상태였다. 스탈린이 과거 히틀러와 합의했던 소비에트의 서쪽 경계는 이제 처칠과 루스벨트에 의해 또다시 승인되었다. 런던과 워싱턴은 훗날의 소비에트-폴란드 국경으로 약간의 변경이 이뤄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보면, 폴란드는 소련뿐만 아니라 서방 동맹국들에게도 배신당한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에게 타협할 것을 요구하며, 폴란드인들의 손에 기대 이하의 결과물만을 쥐여주었다.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 양보된 것이었다. - P538

에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동맹국들 사이에서 고립된 런던의 폴란드 정부는 주도권을 바르샤바 폴란드 전사들에게 넘겼다. 폴란드의 주권을 지켜낼 희망이 거의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폴란드 국내군은 수도에서 들고일어나는 길을택했고, 이는 1944년 8월 1일에 시작될 것이었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는 템페스트 작전의 틀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공들여 계획된 이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폴란드 영토 해방에 폴란드군이 주 역할을 맡는 전국적 봉기를 그 골자로 하고있었다. 하지만 앞선 7월 말까지 템페스트 작전은 이미 틀어진 상태였다. 애초 계획상 폴란드 국내군은 폴란드 동부에서부터 붉은 군대에 밀린 독일군과 교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앞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린 까닭에 이 같은 합동 작전에 대해 소련과 사전에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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