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1905년부더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물러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 남부는 미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북한공산당은 1948년 북한 지역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50년 봄, 스탈린은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를 ˝주 방어선˝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밖에 놓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1월에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가 남한 군대를 쉽사리 밀어버릴 수 있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행운을빈다고 하고, 소련제 무기를 북한에 보내주었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무력 대결처럼 보일점이 많았다. 미국은 빠르고 확고하게 대응했으며, 일본과 그 밖의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동원, 북한을 본래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버릴수 있었다. 9월, 트루먼은 NSC-68을 승인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서 봉쇄한다는 미국 대전략(조지 케이 수립한 아이디어였다)의 비밀스럽고 공식적인 승인이었다. 10월, 중국이 북한 편에서 참전했다. 1952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북한 및 공산주의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군 탱크가 소련제 탱크와 싸웠고, 미군 전투기가 소련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두 전선에서의 전쟁이 될 확전을 두려워했던 것같다.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위성국가 지도자들을 불러모아유럽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도록 했다. 1951년과 1952년, 붉은 군대의 병력은 두 배로 늘었다.

정확히 이 시기(1951년에서 1952년)에, 소련 유대인들은 미국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탈린에게 상당히 들었던 것같다. 베를린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폴란드에서 실망하고, 한국에서전쟁을 겪은 스탈린은 다시 한번적어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던 그의 상상속에서는)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처럼, 1950년대에도 소련을 국제적 음모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그주체가 더 이상 베를린, 바르샤바, 도쿄(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는 아니더라도. 그러나 워싱턴(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의 음모는?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함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1930년대 말에 위협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P 643, 645


7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두 페이지도 못되는 분량의 ‘한국 전쟁‘을 만난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경찰력 및 디를레방거 특무단이 이것의 실행에 들어간 것은 1944년 8월 5일과 6일로, 양일간 그들 손에 살해당한 민간인의 숫자만 약 4만 명이었다. 그들의 군사적 목표는 서부 중앙 볼라 인근까지 행군해 작센 공원에 있던 독일 지휘부를 한숨 돌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을 자기네 맨 앞에 세워 일을 시키고, 그 와중에 여성과 아이들을 인간 방패로 삼거나 심지어 여인들을강간하면서, 볼가 거리에 폴란드 국내군이 설치해둔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있었다. 또한 앞서 동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솔린과 수류탄을 써서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하나 모조리 파괴했다. 볼라가는 과거게토였던 지역 남쪽과 닿아 있었고, 실제로 최남단부를 통과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파괴 작업은 인근 지역까지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 P547

디를레방거 여단 병사들은 세 곳의 병원을 그곳 환자들과 함께 불살라버렸다. 한 병원에서는, 부상 입은 독일인들이 폴란드인 의사 및간호사들의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은 디를레방거 병사들에게 폴란드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물론 어림없었다. 디를레방거 여단 병사들은 폴란드인 부상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날 저녁이 되자그들은 줄곧 그래왔듯이 간호사들을 야영지로 끌고 갔다. 그들의 관습에서는 매일 밤 그들이 고른 여인들은 일단 장교들 손에 가차 없이폭행당하고, 뒤이어 여러 병사의 윤간이 이어진 뒤 이내 살해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그러한 기준에서 봐도 특이한 날이었다. 플루트 연주가 흐르며 교수대가 설치되었고, 의사 그리고 발가벗겨진 간호사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었다. - P547

영국 언론들은 많은 경우 영국의 동맹국이 수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보도보다는, 오히려 폴란드인들은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 이들이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과 아서 케스틀러 두 사람은 이에 항의했는데, 오웰은 봉기를 도와야 하는 동맹국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영국인들의 "부정직함과 비겁함"을 지적했고, 케스틀러는 스탈린의 무반응을 "이번 전쟁에서 가장 파렴치한 행위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영토에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날아가 독일 거점을 폭격하고 폴란드인들을 돕는 등의 공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요청에 퇴짜를 놓은 1944년 8월 16일 바로 그날, 미국 외교관들은 유럽 동부 및 동남부 일대를 공중에서 폭격하는 ‘프랜틱 작전‘에 폴란드 지역 목표물들을 추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동맹 미국이 보낸 연료 보충 요청을 거절했다.  - P552

어느 폴란드 국내군 병사는 자신의 시에 "우리는 그대를, 붉은 역병을 기다린다 우리를 이 흑사병에서 구해주기를"이라고 적었다. 독일 국방군 또한 바흐와 마찬가지로 힘러의 정책에 반대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비스와강에서 붉은 군대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바르샤바를 일종의 요새로 사용하길, 아니면 적어도 그곳 건물들을 방공호로 이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바흐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고, 군은무시되었으며, 힘러의 바람대로 유럽의 수도 가운데 하나였던 도시는파괴되었다. 소련이 입성하기 하루 전에도, 독일은 바르샤바에 남은마지막 도서관을 불사르고 있었다. - P555

유럽의 다른 어떤 수도도 바르샤바처럼 참담한 운명을 맞은 곳은없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보다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민스크나 레닌그라드 같은 동부 도시들만이 바르샤바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대체로 보면, 전쟁 전 약 13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의 주민 절반가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 P555

1945년 1월에서 5월에 이르는, 종전 직전의 몇 개월 동안, 독일 강제수용소의 사망자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이 기간에만 굶주림과 방치로 약 30만 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 죽어가던 수감자들을 해방시킨 미군과 영국군은 자신들이 나치즘의 공포를 목격했다고 믿었다. 그들의 사진작가와 촬영기사들이 베르겐벨젠과 부헨발트 등지에서 찍은 사체 및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히틀러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바르샤바 유대인 및 폴란드인들이, 그리고 바실리 그로스만과붉은 군대의 병사들이 인지하고 있었듯이,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이야기였다. 오히려 최악은 바로 바르샤바 폐허 속에, 트레블린카 벌판에, 벨라루스 습지대에, 바비야르 구덩이들 사이에 있었다.
붉은 군대는 이 모든 지역을, 그리고 피에 젖은 땅 전역을 해방시켰다. 모든 죽음의 장소와 망령의 도시들은 스탈린이 히틀러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 철의 장막 뒤편의 유럽으로들어갔다.
소련군이 비스에서 발이 묶인 그 시점에 그로스만은 트레블린카에 대해 적고 있었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독일이 바르샤바 봉기와 폴란드 국내군을 진압하는 모습이었다. 바르샤바 잿더미속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냉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 P561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이르렀을 때, 스탈린은 어떤 모습으로 폴란드를 재건할 것인지 이미 계산이 서 있었다. 국경선을 어디로 그을지, 그 주민으로서 어떤 사람들을 강제로 살도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을 강제추방할지 다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폴란드는 공산국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종적으로 단일한 나라가 비록스탈린은 자신이 구상한 동유럽 제국에서 대량학살 정책만큼은 구상하고 있지 않았지만, 폴란드는 인종적 순수성이 지켜지는 지역의중심이 되어야 했다. 독일은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되고, 폴란드는 폴란드인들만의 나라가, 그리고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역은 우크라이나인들만 사는 땅이 될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소수 인종을 대표하기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나라의 소수 인종들을 청소하도록 시킬 작정이었다.  - P565

1945년 2월 영·미 동맹자들과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었고, 그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을 법하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받았던 땅, 다시말해서 폴란드의 절반과 발트 연안국들, 루마니아 동북부를 다시 갖겠다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스탈린은 독일을 징계하는(분단시키는 대가로, 공산화를 전제로, 폴란드 땅의 분단 점령을 상당 부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좀더 서쪽으로 국토가 이동하면서,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을 경계로 하는 독일 땅을 먹어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스탈린의 구상대로 정해진 폴란드의 경계 내에는 적어도 수천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있었다. 그들을 추방하고 재진입을 막는 일은 폴란드 공산 정부의 과제로 주어졌다. 그들은 독일인을 꺼리는 다수의 폴란드인의 태도에 힘입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폴란드 정치인의 자연스러운 숙원이었던 ‘폴란드인들만의 폴란드‘ 이념에서도 덕을 봤다. - P566

3월까지, 붉은 군대는 스탈린이 폴란드에 병합시키려했던 독일 땅의 전부를 점령해놓은 상태였다. 5월에는 붉은 군대가베를린에 입성했고, 유럽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소련군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동부 독일을 유린했는데, 그 정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다. 붉은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독일 정부는 약 600만 명의 독일인을 소개시켰는데, 이는 스탈린의 폴란드 구상(인종적, 지리적 모두) 실현에 보탬이 되었다. 그들중 다수는 독일의 항복 뒤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성공한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는 1945년 2월에 조지 오웰이 거의 마지막 목소리를 냈다. 독일계를 추방하는 계획은 "중대 범죄"이며 "결코 시행되지 못할것"이라고. 그는 틀렸다. 이번에도, 그의 정치적 상상력은 그의 오판을가져왔다. ‘ - P569

강간의 규모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서면서 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따지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인 소련이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에 대한실제 경험과는 별개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소련 체제의 산물이었다.
그것도 대개 그중 가장 악랄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약 100만명의 강제수용소 수형자가 전선에서 싸우게끔 풀려났다. 모든 소련병사는 그들의 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를 짓밟은 독일의 어리석음에치를 떠는 듯 보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집조차 그들의 집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때때로 그들이 "자본가들만 공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시각에서는 보통 독일 농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백히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은 소련에 쳐들어와 강도질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소련 병사들은 독일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기도 했다. - P571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독일 여성들에게 자행된 폭력은 무시무시했다.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지키려 나선 남자들은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했다. 사실 그녀들을 지켜줄 남자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 전사했거나(이 전선에서 벌어진 작전으로 약 500만 명의 독일 남성이 죽었다), 독일군에 차출되었거나, 비상향토방위군에 차출되었거나, 소련군에게잡혀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가정에 남아 있던 남자들은 대개 노인아니면 장애인이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강간당했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나중에 자라서 알게 된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누이동생 대신 소련군에게 몸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누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윤간도 아주 흔했다. 거듭되는 강간으로 몸이 망가져서 죽는 여성도 많았다! - P572

히틀러는 전쟁을 ‘의지의 문제‘로 내세웠으며, 따라서 언제나 패배를 부정함으로써 실제 결과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으로 독일 민족이 단련된다고 여겼다. "독일이 강대국이 되거나, 멸망하느냐다." 그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특이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이위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자체의 퇴락한 부분을 정화하는 제국의 시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쟁이 계속될수록, 그리고 승리할수록 게르만은 더 위대해질 것이었다.
만일 게르만이 패배시킨 적의 피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실망을 안겨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히틀러는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주었으나, 게르만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게르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생존할 이유가 없다. 히틀러에게, 게르만이 견뎌야 할 모든 고통은 - P574

그들 스스로의 나약함의 업보였다. "게르만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좋다. 멸종할지어다." 14히틀러 스스로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민간인들의 목숨만은 지킬 만큼 실용주의적 태도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동부 독일의 민간 지도자인 가울라이터 Gauleiter들은 나치당의 열혈 당원으로, 히틀러에게 가장 충성하는 지지자들이었다. 중요한 세 지방에서, 가울라이터들은 민간인 소개에 실패했다. 프로이센을 맡고 있던 가울라이터는 에리히 코흐였는데, 그는 우크라이나 총독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내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만한 우크라이나인이 있다면 그를 쏴버려야 한다." 이제(1945년 1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그의 독일 관구에 밀려드는 중이었는데, 그는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포메라니아에서는 프란츠 슈베데코부르크가 독일 피란민들의 홍수를 막으려 시도했다.  - P575

독일군 후퇴 과정에서도 고난이 있었다. 독일인들이 소련군을 피하다가 죽은 숫자보다 독일군을 피하다가 죽은 소련과 폴란드 주민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비록 그런 죽음이 의도적인 살육 정책의 산물은 아니었지만(따라서 이 분야의 연구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피란과 소개, 강제노역 등은 직간접적으로 수백만 명의 소련 및 폴란드 민간인의 죽음을 가져왔다(그리고 독일의 의도적인 대량학살 정책이여기에 1000만 명의 죽음을 추가했다).이 전쟁은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실제 독일 민간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끝났다. 피란과 추방에서 빚어진 죽음에 대해서는 따라서 나치 체제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독일민간인들은 달아나야 한다는 걸 알 만큼 전쟁 중의 독일 정책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피란을 독일 국가는 제대로 채비하지 못했다. 여러 소련 병사는 분명 최고사령부의 용인과 스탈린의 기대에 따른 짓들을 자행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먼저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붉은 군대가 독일에 진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인종적 순수성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스탈린만이 아니라 히틀러 스스로의 인종 정책에서도 불가피성을 띠고 있었다. 민족 추방 자체는승자와 패자의 국제적 합의의 결과였다. - P583

동부 폴란드에서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내몰아서 그 인구 구조를바꾸려는 시도는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때부터 일찌감치 이뤄졌다. 소련은 1940년과 1941년, 이 땅을 처음 점령했을 때 수십만 명을 축출했다. 그중 다수가 폴란드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강제수용소를 거쳐 이란,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연합군에 합류해 서부 전선에서함께 싸웠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끝날 무렵 폴란드 땅을 직접 밟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고향 집에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좋았다. 독일군은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옛 폴란드 동부에서 약 13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때 지역 경찰의 협조를았다.  - P586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은 천천히 또 단속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국가에서 변모해갔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념적 장식일 뿐이고, 국경과 소수 민족에 대해 전통적인 안보관을 견지하는 대규모 다민족제국이 되어갔다. 스탈린은 혁명 시기의 보안 기구를 물려받고, 유지하고, 지배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안보 문제에 대한 우려는 1937년에서 1938년, 그리고 1940년의 대량학살로, 또한 1930년에 시작되어스탈린 생전 내내 계속된 강제이주로 이어졌다. 전쟁 중에도 강제이주는 계속되면서 소련 이주 정책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적대 계급 구성원으로 여겨진 개인을 강제이주시키던 전통적인 소련의 방식에서,
변경지대에서의 인종 청소와 인구 재구성으로전쟁 이전 시기에 강제수용소로의 강제이주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품었다. 소련 경제의 성장, 그리고 소련 인구의 교정, 1930년대에는 소련이 인종을 기준으로 다수의 국민을 추방하기 시작하면서, 그목표도 소수 인종을 민감한 변경지대에서 내지로 보내는 것으로 바뀐다. 이 ‘국민 이주‘는 개인에 대한 징벌로 보기 어려웠건만, 그들은 - P591

계속해서 이주 대상자들이 자기 고향 땅에서 멀리 떠나면 더 나은 소련 국민이 된다는 주장을 했다. 대숙청 시기에는 1937년에서 1938년사이에 25만 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다른 한편 수십만 명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기도 했으며, 그곳에서 이주자들은국가와 스스로의 개혁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되었다. 심지어 새로 병합된 폴란드, 발트 연안, 루마니아 주민들에게 이뤄진 1940년에서1941년의 강제이주는 소련 입장에서는 ‘계급투쟁‘의 일환이었다. 엘리트층의 가족들은 카틴 숲을 비롯한 여기저기서 학살당했으며, 그들의 아내, 자식, 부모들은 카자흐의 스텝 지대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그들은 소련 사회에 통합되든지, 죽든지 해야 했다. - P592

대부분은독일인들의 피란과 강제이주는 의도적인 대량학살 정책이 아닐지라도 전후 인종 청소의 핵심을 이루었다. 1943년에서 1947년까지 모든 내전과 피란, 강제이주, 재정착 사태는 돌아온 붉은 군대가 촉발하거나 주도한 것으로, 그 결과 70만 명의 독일인과 최소 15만 명의 폴란드인, 그리고 약 25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죽었다. 최소한도로 볼때, 캅카스, 크림반도, 몰도바, 발트 연안국들로부터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이 실시된 직후 또 30만 명의 소련 국민이 희생되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반소 민족주의 세력들은 강제이주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10만여 명이 인종 청소 과정에서 숨지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
상대적으로 볼 때, 독일인 전체 숫자에 비해 강제이주된 독일인의수는 최후의 한 명까지 이주 대상이 된 캅카스와 크림반도 주민들에비하면 훨씬 적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끝 무렵에 피란 또는강제이주를 겪은 독일인은 폴란드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삼국인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 독일에 의해 이뤄진 이주민의 숫자가 전쟁 끝 무렵 소련의 점령으로 이뤄진 이주민의 숫자에 더해지면, 그런 차이는 사라지고 만다. 1939년에서 1947년의 기간 - P595

에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발트 삼국인들은 독일인들만큼(또는 살짝 더, 어떤 경우에는 살짝 덜) 강압적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한편 다른 모든 민족은 독일과 소련의 강압을 겪었지만, 독일인들은(일부 예외가 있더라도) 소련 쪽에서만 강압을 겪었다.
전후 시기에, 독일인들은 폴란드인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위협을 겪었다. 그들 또한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야만 했으므로, 그래도 독일인과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발트 삼국인, 캅카스인, 크림반도 사람들보다는 훨씬 적게 죽어갔다. 피란, 추방, 강제이주의 직간접적 결과로 숨진 독일인과 폴란드인의 비율은 10분의 1 미만이었다. 반면 발트 삼국인과 소련인들은 5분의 1을 넘었다.  - P596

일반적으로, 더 먼 동쪽으로 갈수록, 그리고 소련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을수록 결과는 더 비참했다. 이는 독일인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독일인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그러나 더 동쪽으로 강제이주되거나 소련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독일인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동쪽으로 간 사람들보다 나았고, 그들을 반기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멀고 낯선 소련 공화국들로 가는 편보다 나았다. 또한 선진 독일(비록 폭격과 전쟁으로 쑥밭이 되었을지언정)로가는 게 소련의 황무지로 가서 이주자들이 직접 개척해야 하는 상황보다 나았다. 그리고 점령지 가운데 미국과 영국 관할지로 가는 게 내무인민위원회 지부의 통제를 받는 카자흐스탄이나 시베리아 땅으로가는 것보다 나았다. - P596

그것은 모스크바가 각 공산당을 지휘하고 그 정책을 조정하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 그자리에 모인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즉 진보 진영과 반동 진영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운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진영을 이끌도록 운명지어졌고 미국은 퇴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든 결점(최근 나치 독일이 여실히 보여준)을 물려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건드릴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은 진보 진영의 최종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도.
공산주의자들은 진보 진영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해야 하며, 이는 소련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각자 국가별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
그러고 나서 즈다노프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이후 몇 차례 일으킨 심장마비의 첫 번째였다. 아마도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지는 않았다. - P603

1948년 1월, 스탈린은 유대인 한 사람을 죽였다. 솔로몬 미호옐스, 그는 ‘유대 반파시스트 위원회‘ 회장이자 모스크바 이디시어 극장의 감독으로 스탈린 연극상 수상작 심사를 위해 민스크에 파견 와 있었다.
도착한 그는 어느 농촌의 집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소련 벨라루스 공화국 경찰의 라브렌티 차나바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나바는 그와 목격자를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미호옐스의 시체를 조용한도로에 내버려, 트럭에 치이도록 했다.
민스크 사람들이 독일의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본 겨우 몇 년뒤일 뿐이었다. 묘한 점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뜻으로 또 한 명의 소련 유대인을 민스크에서 죽인 장본인인 차나바는 경찰이자 역사가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벨라루스 빨치산 운동에 대한 역사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그 책에서 독일 점령기에 유대인이 겪은 특별한 고통 - P607

과 투쟁에 대해서는 일체 기술하지 않았다. 유대인 빨치산에 대한 소련 역사서가 한 권 집필되기는 했으나, 발행 금지되었다. 전쟁 중 민스크에서, 유대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고통받았다. 그러나 소련에 의한 해방은 유대인의 고통의 끝이 아닌 듯했다. 소련 내 홀로코스트의역사책도 아직은 쓰기 시작할 때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미호엘스는 스탈린이 피하고 싶어하던 쟁점을 건드렸다. 그는 스탈린의 측근이면서 유대계인 사람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가령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나 역시 정치국원이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클리멘트 보료실로프의 부인들과 더 고약했던 점은 전쟁 중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해 스탈린과 소통하고자 그와의 면담을 추진했다는것이다.  - P608

독일인의 손으로 학살된 유대계 소련인의 숫자는 국가 기밀이었다. 독일인들은 대략 100만 명의 소련 태생 유대인들을 죽였는데, 여기에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소련에 병합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유대인 약 160만 명이 추가된다. 루마니아인들도 주로 전후에소련으로 편입될 땅에서 유대인들을 죽였다. 이 숫자들은 분명 민감했다. 그것들이 유대인들의 매우 특별한 고난을(설령 다른 소련 민족들의 운명 역시 녹록지 않았더라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소련 인구의 2퍼센트도 안 되었고, 러시아인은 절반 이상이었다. 독일인들은 점령한 소련 땅에서 러시아계 민간인보다 더 많은 수의 유대계를 죽였다.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족속으로 따로 분류되었다. 러시아인보다는 더 많이 학대받은 우크라이나계나 벨라루스계, 폴란드계등의 슬라브족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소련 지도부도 그 점을 알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점령했던 소련 땅의 소련인들도 알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결코 소련 전쟁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612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 지도부가 소련 국민의 정신세계를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검열 체제는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지만, 소련의 규범이 유일한 규범이 되어야 할 상황, 또는 소련적 삶이 가장나은 삶으로 여겨져야 할 상황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소련 바깥의삶을 경험해봤다. 그 전쟁 자체가 ‘조국(러시아든 소련이든 간에)‘의 범위 안에 국한될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민족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종결은 한 나라가 아닌 세계 전체의 모양을 바꿨다. 특히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은 소련이 유대인 문제를 망각하기로 한 결정을 불가능하게만들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조차 소련에 사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후자는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세우는 땅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민족국가를 가진다면, 그것은 중동의 영국 제국주의를 끝장내고, 소련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 역시 뒤흔들리지 않겠는가? - P618

야쿠프 베르만이 버텨낸 것은 그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볼레스와프비에루트,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이자 삼두정치에서 유일하게 비유대인이었던 인사의 비호 덕분이었다. 언젠가 스탈린은 비에루트에게 그가 베르만과 민츠 가운데 누구를 더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다. 비에루트는 덫에 걸리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 비에루트는 스스로를 스탈린과 베르만 사이에 놓았는데, 이는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에서처럼 서로를 물고 뜯지 않았다. 치욕을 겪은 고무우카조차상대를 깎아내리는 발표문을 내거나 정치재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40년대 말에 집권하고 있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1930년대에 자신의 동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대개알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신호를 보냈다. 그에 따라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서로를 적당히 비판했다. 그러자 대량학살이 이어졌고, 공산당 자체가 끝장나버렸다.  - P639

그러나 베르만 민츠, 비에루트는 굳건히 버텼다. 그들이 제대로 된폴란드인이라고,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라고, 제대로 된 애국자라고못 미더워하는 국민과 의심스러워하는 스탈린 모두에게 계속 주장하면서 비록 유대인들은(공산주의자건 아니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도록 강요받았으나, 당시 폴란드에서 시오니스트와 코즈모폴리턴에 대한 공공연한 숙청은 없었다. 그의 친구 비에루트에게 양보하고 또 충성하면서, 베르만은 폴란드의 주된 체제 위험 요소는 유대인이 아닌 폴란드인의 내셔널리즘 우경화라는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1년 7월에 고무우카가 결국 체포되었을 때, 그를 체포하러온 두 명의 보안요원은 (고무우카의 기억에 따르면 유대계였다. - P640

1950년에서 1952년 사이, 폴란드인들이 숙청에 대해 미적거리는 동안 냉전은 군사적 대립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력에 대한 스탈린의 우려를 극대화시켰다.
1950년대 초, 소련은 세계대전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치에서있는 듯 보였다. 소련을 포위하는 듯싶었던 세 대국, 즉 독일, 폴란드, 일본은 모두 완전히 허약해져 있었다.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가되었다(그 국방장관을 소련 장교가 맡고 있는),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주했고,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독일의 소련 점령 구역은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탈바꿈했고, 독일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일찍이 독일의 발트해 연안 영토였던 동프로이센 땅은 공산 폴란드와 소련 스스로에게 분할 흡수되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일본이 패배하고 무장해제되었다. - P641

다만 그쪽에서는 소련이 승리에 기여한 내용이 별로 없었고, 점령에서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일본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비록 패배했지만, 일본은 동아시아의 정치를 바꿔놓았다. 1937년일본의 중국 침략은 결국 중국 공산당에게 좋은 일만 만들어주었다. 1944년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육전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는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국민당 정권에는 치명타를안겼다. 일단 일본이 항복하자, 그 군대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이 기회를 잡았다. 30년 전 러시아 공산당과 상당히 비슷하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스스로는 대제국을 세울 목표에 실패하고, 이 - P641

웃 나라에 공산혁명이 일어날 기회를 준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1949년 10월에 선포되었다.
워싱턴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세계 공산혁명의 연속으로 봤지만, 스탈린에게 이는 희소식이지만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처럼 스탈린의 종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지만, 스탈린은 그 당에 개인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야심 있고 예측 불가능한 라이벌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정책을 만들며, 스탈린은 이제 소련이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라는 위 - P642

치를 유지하는 목표에 열중해야 했다. 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1905년부더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물러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 남부는 미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북한공산당은 1948년 북한 지역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41950년 봄, 스탈린은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를 "주 방어선"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밖에 놓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1월에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가 남한 군대를 쉽사리 밀어버릴 수 있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행운을빈다고 하고, 소련제 무기를 북한에 보내주었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 P643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무력 대결처럼 보일점이 많았다. 미국은 빠르고 확고하게 대응했으며, 일본과 그 밖의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동원, 북한을 본래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버릴수 있었다. 9월, 트루먼은 NSC-68을 승인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전 세계에서 봉쇄한다는 미국 대전략(조지 케이 수립한 아이디어였다)의 비밀스럽고 공식적인 승인이었다. 10월, 중국이 북한 편에서 참전했다. 1952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북한 및 공산주의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군 탱크가 소련제 탱크와 싸웠고, 미군 전투 - P643

기가 소련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두 전선에서의 전쟁이 될 확전을 두려워했던 것같다.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위성국가 지도자들을 불러모아유럽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도록 했다. 1951년과 1952년, 붉은 군대의 병력은 두 배로 늘었다.

정확히 이 시기(1951년에서 1952년)에, 소련 유대인들은 미국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탈린에게 상당히 들었던 것같다. 베를린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폴란드에서 실망하고, 한국에서전쟁을 겪은 스탈린은 다시 한번적어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던 그의 상상속에서는)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처럼, 1950년대에도 소련을 국제적 음모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그주체가 더 이상 베를린, 바르샤바, 도쿄(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는 아니더라도. 그러나 워싱턴(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의 음모는?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함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1930년대 말에 위협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 P644

이때 소련 유대인에 대한 정치재판이 또 이어질 거라고 믿지 않기란힘들었다. 1952년 8월, 13명의 소련인이 미국 첩자라는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기보다 이른바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시오니즘이 그 이유였다. 고문 결과 그들은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미국의 스파이라는 자백을 했고, 비밀 재판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1952년 12월에는 프라하에서 11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재판을 받았다. 대개 모스크바의 경우와 똑같았는데, 다만 대공포 시대를 연상시키는 공개 정치재판을 받았다. 이제는 폴란드 정권조차사람들을 이스라엘 스파이라며 잡아들이고 있었다. "
1952년 가을, 또 여러 명의 소련 의사가 조사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즈다노프나 셰르바코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밖의 유력한 소련 또는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임종 시 치료를 맡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스탈린의 주치의였는데, 그는 1952년 초 스탈린에게 은퇴를 권고했다. 스탈린의 공개적이고 반복적인 지시에 따라, 이들은 무섭게 얻어맞았다. 그러자 일부는 고문자들의 구미에 맞는 대사로 이뤄진 자백서를 썼다. 하필 솔로몬 미호엘스의 조카였던 - P649

미론 봅시는 스탈린주의적인 로봇 같은 말들로 자백서를 썼다. "생각을 거듭한 결과, 제가 지은 죄의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반드시제 사악한 일의 전모를, 소련의 특별한, 지도적인 국가 일꾼들의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줄이려던 음모의 끔찍한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는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자백서가 확보되자, 나이 먹어가던 어떤 남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듯했다. 스탈린은 대개 주먹을 날리기 전에 계획을 잘 짜곤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서두르는 듯 보였다. 1952년 12월 4일, 슬란스키를 처형한 이튿날, 소련 중앙위원회는 "의사들의 음모"를 포착했으며 그 주요 역할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맡고 있다고 발표했다. 음모자들 가운데 한 명은 스탈린의 주치의이고,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그 외에는 유대계 의사들로 음모자 명단이 채워졌다.  - P650

이제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생활을 끝내라고 권고해줬던 주치의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적 두려움과 정치적 우려가 한데 얽혀 있다는 또 다른 증좌를 보였다. 그는 딸 스베틀라나에게 문자 그대로 의존했다. 1952년 12월 21일, 그의 일흔세 번째 생일에 그녀와 함께 춤을 출 만큼.
그 12월, 그는 자기 자신의 사신을 숙청하기를 바랐던 듯하다. 공산주의자는 불멸의 영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믿었다. 생산양식의 변화에서 드러난 대로, 프롤레타리아의 세력화에 반영된 대로, 공산당에 의해 대표되고, 스탈린에 의해 정제된 대로, 그리고 그럼으로써 결국 스탈린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역사! 삶이 다만사회적 구성의 산물이라면, 죽음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리고 모 - P650

든 것이 용감하고 굳건한 의지의 변증법에 따라 역전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의사들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대신 유발했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경고한 사람은 카운슬러가 아니라 살인자였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솔로몬 미호옐스는 기껏해야 리어왕의 역할을 했다. 어리석게도 너무 빠르게 권력을 내준 그것도 잘못된 후계자들에게 그랬던 지도자였다. 이제 미호옐스는 무력한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소련의 몰락을 꾀했고, 제2차세계대전의 역사를 다르게 쓰려 했으며, 잘못된 미래를 꿈꾸었다. 따라서 사라져야 마땅했다. - P651

이제 73세의 병든 노인이 된 스탈린은 누구의 권고도 받아들이지않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 1952년 12월, 그는 "모든 유대인은내셔널리스트이며 미국의 정보원이다"라고 발언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도 편집증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달에 이렇게도 말했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이 미국에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전설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보기 드문 통찰력으로, 스탈린은 냉전(심지어 그것이 끝나고 나서도 수십 년 동안 유지될)의 주요한 신화 가운데 하나를 정확히 예견했다. 사실은 연합국 중 어디도 유대인 구출에 별 힘을 쓰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중요한 살육 공장을 보지도 못했다.  - P651

스탈린은 그가 한때 가졌던 힘, 그가 꾸며낸 세상으로 실제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힘을 잃었다. 그는 안보 총책임자를 위협해야 하는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단지 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말이다.
그의 부하들은 스탈린이 증거로 여겨질 수 있는 자백과 우연의 일치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관료적 우선순위 문제에, 심지어 어떤 점에서는 법률에 가로막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대 반파시즘 위원회 멤버들에게 실형을 부과했던 판사 한 명은피고들에게 항소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했다. 소련 유대인들의 기소과정에서, 보안 총책임자들은 때때로 부하들과 실갱이를 벌였다(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피고들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에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문 과정은 비록 야만적이었으나 언제나 원하는 대로의 증거를 뽑아낼 순 없었다. 고문이 행해졌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스탈린이 직접 실시를 종용한 경우에만 행해졌다. - P657

사표시가 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스탈린의 죽음 뒤 약 40년을 더 지속했다. 그러나 그 보안기구는 다시는 인위적 기근이나 대량 사살을 실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도 나름대로 야만적인 인간들이었으나, 스탈린식의 대중 테러는 삼갔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탈린의 후계자가 된 니키타흐루쇼프는 예전에 그 자신이 수용소로 보낸 우크라이나 죄수들을대부분 석방했다. 대량학살을 막을 힘이 없어서 막지 못했다는 것은흐루쇼프를 두고 할 말이 아니다. 그는 1937년에서 1938년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테러를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앞장서서 우크라이나를 재정복했다. 그보다 그는 소련이 더 이상 종전처럼 굴러갈수 없음을 알았다고 봐야 하리라. 그는 심지어 1956년 당 전체 회의연설에서 스탈린의 범죄 일부를 폭로하기도 했다. 비록 공산당 간부들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더 많은 숫자의 학대받은 집단(농민, 노동자, - P658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지만 말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남았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더 이상 정치재판(1930년대 대공포의 전주곡이었던)을 넘어 대량학살로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폴란드를 제외하고) 농업을 집단화했다. 그러나 결코 농민이 소작물을 사적으로 활용할 권리를 엄금한 적은 없었다. 소련과는 달리, 위성국가에서는 인위적 기근도 없었다. 흐루쇼프 치하에서, 소련은 1956년에 공산 위성국가인 헝가리를침공했다. 비록 그곳의 내전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고, 소련의 개입으로 정권 담당자가 교체되어야 했지만, 유혈 숙청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1953년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 공산 동유럽에서의도적으로 살해당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의 ‘대량학살 시대‘, 그리고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인종 청소 시대‘에 비하면 희생자수는 미미했다. - P659

해 사실상 검토하지 않았다.
1950년대처럼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냉전기에도 이스라엘에대한 불신을 심었다. 1953년 1월 소련 언론의 기사에서 따온 주제로,
1967년 폴란드 언론은 서독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이스라엘에 심었다고 보도했다. 정치 카툰은 이스라엘군을 독일 국방군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자국의 존재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희생에 따라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뒤집어 봐야 마땅한 것이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엔,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이행하는데, 국가사회주의가 그 한 예였다. 당시 제국주의 진영의 수장은 미국이며, 이스라엘과 서독은 그 발톱이었다. 이스라엘은 민족 희생에 대한 특별한 역사적 주장거리가 있는 소국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주춧돌 가운데 하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 P662

바르샤바 거주민들은 움슐락플라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기차역에서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움슐락플라츠, 그곳은 바르샤바 유대인들이 겨우 26년 전에 트레블린카로 떠나가야 했던 곳이다. 적어도 300만 명의 유대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폴란드를 떠났다. 이러한 공산주의 반유대주의의 에피소드 이후에는 약 3만 명이 남았다. 폴란드 공산당과 그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은 1968년이나 그 이전 시기의 희생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폴란드인들을 올바른 주장(인종적 순수성과 영웅주의)에서 엇나가게하려는 자들이었다.
1968년 폴란드의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수만 명의 삶을 바꿨으며, 많은 지적인 동유럽 남녀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를 끝장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에는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그 당시스탈린주의 경제 모델의 잠재력은 공산 폴란드에서 소진되었으며, 이는 다른 공산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단화는 농업경제를 전혀 촉진시키지 못했다. 빠른 성장은 오직 강제적인 산업화 가능했다. - P665

비록 1968년 3월 폴란드 학생들이 휘두르는 경찰봉에 쓰러졌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동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개혁하려고시도했다. ‘프라하의 봄‘ 동안 공산정권은 언론의 자유를 매우 높은수준까지 허용했으며, 그에 따라 경제개혁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측 가능했다시피, 민간의 논의는 정권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났다. 소련의 압력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르 둡체크 체코 공산당 서기장은 집회와 토론이 계속되도록 했다. 그해 8월, 소련군(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헝가리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소련의 선전 내용은 폴란드 지도부의 반유대주의 실험이 원칙에벗어난 게 아니라고 확정했다. 소련 언론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개혁가들이 실제로 또는 허구로 유대인 핏줄이라는 데 크게 주목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비밀경찰이 저항운동 멤버들가운데 유대인 혈통인 사람들을 특히 예의주시했다. 1985년 미하일 - P666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개혁자로 권좌에 올랐을 때, 그의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은 구체제를 지키는 데 러시아 민족주의-반유대주의를 동원하려 했다."스탈린주의는 동유럽 유대인들을 독일의 희생자라는역사적 위치에서 끌어내고 공산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음모가 그들의배경에 있는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음모의 주역들로 못 박는 일은 아주 쉬웠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히틀러의주된 범죄를 구별해내고 정의하기를 꺼린 까닭은 수십 년 뒤 그들이히틀러의 세계관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 P667

모스크바, 프라하, 바르샤바의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별로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과거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는 소련 인민들의 고통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러시아인과 슬라브족이야말로 최대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충성스러운 슬라브족(그리고 다른 민족들 추종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와희생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슬라브족의 무죄와 서방의침략이라는 구도는 냉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물론 그것은 서방제국주의 진영의 이스라엘과 미국에 유대인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역사에서 침략자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필요로 했지만 말이다.
공산당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한, 홀로코스트는 그 실체를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수백만 명의 비유대 동유럽인이 전장에서, - P667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포위된 도시에서, 촌락과 시골에서 죽어간바로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비유대인의 고난에 역점을 두는 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스탈린에서 시작해 사회주의권이 끝날 때까지,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서방 세계에서 독일 육군을무찌르는 데 붉은 군대가 세운 공을, 또한 독일 점령기에 동유럽 인민이 겪은 고통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 만했다. 여기에 한가지만수정이 가해졌다. 홀로코스트를 일반적인 고난 속에 묻어버리고, 동유럽에서 한때 중심적이던 유대 문명을 외적인 것으로 몰아내는 것. 냉전기 동안, 서방 세계에서의 자연스런 반응은 스탈린주의의 막대한고난이 소련 국민의 몫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역시 사실이었다. - P668

그러나 소련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유일한 진실, 또는 완전한 진실이라고 할 순 없었다. 이러한 기억의 경쟁 가운데, 또 다른독일의 대량학살 정책이었던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주의적 대량학살은 서로 다른 역사로 분기되었다. 비록 시간과 공간에 있어 서로 공통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소련 체제가 저지른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과 같이, 홀로코스트 역시 블러드랜드에서 자행되었다. 대전 이후 유럽 유대인들의오랜 고향은 공산국가의 영토가 되었고, 죽음의 공장과 킬링필드 역시 그리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집단 기억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 아우슈비츠(학살된 유대인 중 겨우 6명에 1명 정도와 관련 있던)에 집 - P668

중되었다.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장막은 서방과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 P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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