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택리지 2 - 전라 경상편
신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지난해에 우리 땅을 많이 밟아보았다.

떠나기 전에 나는 나침반은 가져가지 않지만 지도는 챙긴다. 지도가 없다는 것은 눈을 감고 집을 나선다는 생각 때문에, 지도에 대한 애착에 나는 강렬했다. 하지만 내 이런 떠남을 애초부터 지켜 본 컴퓨터 나라 사장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한다. '지도는 엉터리다'라고. 지도가 엉터리? 나는 한동안 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구 과학이 발달한 오늘에 지도가 엉터리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 말인가?

어쨌든, 나는 지도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몇 번 들락날락했지만 이번은 본격적이다. 근 한 달 넘게 예상하고 떠난 길, 청도를 걷쳐, 포항 내연산, 청송 주왕산, 대구 김천으로 이어져, 강원도를 들어가는 여행길에 나는 항상 산을 올랐다. 우연찮게 문경에 들렀다가 시간이 남아, 박물관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나는 대동여지도를 보았다. 가지고 있는 지도에는 도로가 나열되어 있지만 산은 숨어 있었다. 즉 국립공원 몇 개만 이름이 들어나 있고, 수많은 산들이 숨어 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는 수많은 산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비로소 지도가 엉터리임을 알았다.

내가 가진 지도는 엉터리다. 맞다!!

이렇게 우리 땅에 대한 관심으로 몇 권의 책도 보고, 뿌리 깊은 나무『한국의 발견』이라는 책도 펼치곤 한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신정일씨의 『다시 쓰는 택리지』지은이는 우리 땅을 어떤 모습으로 담을까? 나는, 내가 가장 알아는 우리 동네부터 펼친다.

>백두대간의 옆 구석, 즉 백두대간의 끝자락의 낙동정맥을 끼고 있는 자리. 삼방의 기운이 여기 다 모였다고 선인이 들려주었고, 날좀 보소 날좀 보소라고 소리소리 치고서는 정든 님이 오시니, 행주치마 물고 정지에서 입맛 방긋하는 아가씨가 노래 부르는 곳, 진주 촉석루가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 아름에 달려가 누각을 늬인 동네. 넓은 땅에 인심이 후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의열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일본을 놀라게 한 이가 자라난 곳!!

『다시 쓰는 택리지』를 펼친다. 지은이는 우리 동네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조선시대 문인 변계량, 김종직, 사명대사를 모신다. 낙동강이 섞이고, 은어가 들어오는 밀양강을 풀어놓는다.
밀양 아리랑의 봄바람을 따라가는 밀양강은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일부리에서 발원한 후 북쪽으로 흐른다. 의곡리에서 서쪽으로 꺾여 ..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를 거쳐 대천리에서 무적천을 합한 수 서남쪽으로 흘러 궁천면을 지난 밀양강은 매전면 동산리와 청도군 이르러 동창천이 되며, 구촌리에서 밀양시 상동면 금산리와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경계에서 청도천으로 합해 밀양시 용평리 앞에서 활용강이 되고, 상문들을 휘돌아 삼랑진읍을 거쳐 삼랑리에서 낙동강으로 몸을 푼다.(315쪽)

낯설은 땅이름으로 밀양강을 드러내지만 낯설다. 삼랑진의 의미는 어디에도 없고, 영남대로의 첫 관문이 작원관은 숨었으며, 영남루가 왜 풍류를 풍기는지…….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재약산에서 영취산까지의 천 미터에 이르는 7개의 봉우리가 어떻게 밀양을 감싸는지 이야기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을늦이가 늦은 곳이 밀양 부북이라고 하는데 왜 인가에 대한 물음과 답이 없으며……. 수산읍에 있는 수산제의 의미가 묻혀있다. 밀양과 청도와의 관계? 청도는 행정구역상 대구인데……. 밀양 사람이나 청도 사람에게 물어보면, 밀양은 형님 동네, 청도를 동생 동네라고 생각한다. 즉 밀양과 청도는 행정 구역상 나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럴까?

지은이는 『다시 쓰는 택리지』라 하며,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우리 동네의 이야기는 부실하다. 몇 몇의 문인과 스님을 들려주고, 땅이 지닌 의미를 흘려보낸다. 산과 강을 비켜선다. 또한 대동여지도에 여실히 들어난 1대간 13정맥의 의미를 읽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아랫동네, [제주도]의 이야기는 말이 아니다. 관광책에 나온 삼성혈의 이야기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말하면, 뿌리 깊은 나무판에는 제주도가 한권으로 따로 논다)

우리 땅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으로서는, 뿌리 깊은 나무『한국의 발견』이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의미를 읽지 못하기에, 『태백산맥은 없다』, 『교실밖 지리 여행』을 더 읽어보길 권한다. 과연 더 읽어야 하는가? 물론 우리 동네와 아랫동네만 부실한 것이겠지. 하지만 책상에 놓인 11권의 『한국의 발견』에 눈이 간다. 어쩔 수 없나 보다.

신정일 씨의 이야기는 너무 부실하다. 위의 서평은 『다시 쓰는 택리지』2편 가운데, 밀양 편과 제주편을 읽고 쓴 글임을 밝힙니다. 왜 더 읽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내 게으름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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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1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생각하는건데요,
열린사회의적님의 별점은 넘 짠 것 같아요

狂人 2009-12-1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살려고 서평을 보다가 별점이 짜시길래 따라 들어왔습니다. ^^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윌리엄 새들러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거두절미하고…(메모한 종이를 잊어버렸음 ㅜㅜ)
꼭 짚고 넘어감!!

-이 책은 머릿말 부분과 차례, 앞부분의 인터뷰를 읽고 쓴 글임.

즉 정독(전체 정독을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이 책은 머릿말 부분과 차례, 앞부분의 인터뷰를 읽고 쓴 글임. 즉 정독(전체 정독을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신대륙을 보았다. '서드 에이지'

그 놀라움에 사로잡힌 이는 먼저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타산지석을 삼는다.

'우리도 그들처럼 되리라.'

우선 희망을!!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기존 정설 : 나이는 곡선이 아니다. 올라갔다 내려온다.
패러다임의 전환 : 나이는 상승한다. 젊음을 동반한 상승!!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음이 곧 다가오는 것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나에게 들려준다.

"퇴직은 있어도 은퇴할 생각은 없습니다.(39쪽)"

정답!

마흔이라는 나이를 넘어서서, 다시 서른. 서른은 제 인생의 시작이 되는 출발선이다. 지은이는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서, 서서히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뜀뛰기를 하여 더 낳은 자리로 나아가길 권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말을 들어야 하고,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즉 지은이가 말하는 책은 마흔 이후에 어떻게 주체적으로 다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화답인 샘이다.

나이 마흔, 하지만 미지의 이 땅에는 날씨(명퇴)도 좋지 않고 변수(오륙도)가 너무 많다. 즉 주체적으로 자리를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전전긍긍하다 짤리는 것이다. 이미 편리함과 눈치에 길들여진 이에게, 다시 시작입니다.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으로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 올라봅시다'라고 했을 때 과연... 높이 날 수가 있을까?

사회구조 속에 얽매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내 나이 마흔'라고 하는데... '너 몰랐지. 네 제2의 인생이 이제부터 시작이나 새로 태어나'라고 그럴듯한 말을 던진다.

장미빛 미래? 날려고 하는 욕심도 생기지만, 떨어지는 두려움도 안다. 비라도 오면 날개가 젖는 것도 걱정이 된다. 즉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은 두려움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듯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두려움'이라는 괴물을 내 안에서 키워왔던 것이다. 이 괴물을 스스로 죽이지 못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지은이의 세계관

위로위로 올라가, 어느 순간에 '뻥 뚫린 하늘',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라는 기계문명과 시멘트 숲 상이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퇴직은 있어도 은퇴는 없다"는 사고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진리처럼 울리는 제한적 언어이다. 즉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연에 기댄체 사는 이에게 '퇴직'과 '은퇴'라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굽은 허리를 지고 마당을 나오고, 닭이 울면 삽을 들고 논두렁을 거닐고 있다. 또한 여름이면 새벽 시가 조금 넘으면 일어나서 12시 점심 먹을 때까지 일하시고, 잠시 낮잠을 두 시간 정도 주무시고 3시가 너머서 다시 밭에 나가 일하는 삶은, 참 게을러 보일지 몰라도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낀 삶이다. 또한 삶을 두 배로 길게 사는 충실함도 숨어 있다. 새벽에 일어나 시작하는 하루는 8시에 억지로 일어나 밤 11시 열두시 까지 술 마시는 삶과 전혀 다르다.

기계문명과 시멘트 숲, 피라미드 구조의 경쟁논리체제(제로섬 게임)에서-숨막힐 듯 꽉 쪼여지고 좇기는 곳에서 지은이가 던지는 화두는 입맛을 당길 것이지만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또한 이제 막 나이와 삶에 대한 시선을 옮겼기에 몇 백년 전 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지천명(知天命)이나 이순(耳順)이라는 개념은 그가 이해하기에는 아직 낯설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사고라고 나뉘면, 너무 일반화하는 것일까? 하지만 전혀 새롭지 않을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도 치우친 시선이며, 스스로의 물음으로 답을 찾지 못하는 해태눈을 지닌 것임에는 분명하다.

지은이의 사고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으며, 마흔을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과 몇몇 젊음을 유지하는 이를 보여 주지만 두려움을 이기는 연습부터 하는게 중요하다. 도서관에 살짝 가 봐라. 나이 마흔이 걱정이 되어 벌써부터 고개 숙이며, 알아서 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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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 거상 김만덕
정창권 지음 / 푸른숲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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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하다.
김만덕의 인물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라기보다 '이런 이도 있는데, 왜 우리는 여태 몰랐나?'라며 혀를 차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흥분된 글쓰기는 김만덕의 생애를 담아내지 못하고, 일화성 이야기만 몇 가지 건져 올린다. 어떻게 무엇을 하며 돈 벌었는가에 대한 답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즉 삶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장면만 대화체로 엮에 낸다. 묘사는 역사 속에 잠겼다.

"현재로서는 만덕의 독특한 장사 수완에 대해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낮이를 잘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했다는 체제공의 기록과 또 갖가지 물건을 벌여놓고 짧은 시간 내에 사고 팔기를 거듭했던 당시 상인들의 장사법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과 허구사이

지은이의 연출력은 단순하다. 그리고 기록이 없다는 변명으로 갈무리 한다. 즉 또하나의 장금이가 태어나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그의 장사수완은 알려지지 않았고 지은이의 장사수완은 바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사 수완의 시시비비를 굳이 가리지 않는다.

손자는 병법에 이렇게 말했다.

지는 싸움은 전장에서 승리를 갈구하고, 이기는 싸움은 이겨놓고 싸운다. 즉슨 지은이에 그려진 김만덕의 상술은 지는 싸움으로 보여진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고 그의 자세는 겁모르고 날 뛰는 닭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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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2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3
노암 촘스키 지음, 이종인 옮김, 장봉군 그림 / 시대의창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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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읽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읽는 방법이 중요하다.(219쪽)

책을 읽는 내용의 중요성이 아닌, ‘읽는 방법’의 중요성을 말하는 촘스키는, 그 읽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즉 책, 언론, 권력, 국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을 생각없이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비판적인 독서(219쪽)”를 하듯 끊임없이 비판적인 방법으로 읽어내길 바란다. 그는 사상의 무슨 주의를 경계한다. 역사의 필연적 과정도 믿지 않는다. 이러한 경계는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 영웅시하며, 민중을 맑스의 우상화시켜 권력을 잡은 지식인을 비판한다. 아울러 역사의 펼연적 과정,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를 결쳐 도래하게 될 ‘공산주의’ 를 확언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 지식인에 노릿개감이 되어, 민중의 자유의지와 사고를 무개념으로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바쿠닌’의 말을 빌려, 지식인을 두 계층으로 본다. 먼저 좌파 지식인으로 “민중 운동에 편승하여 권력을 잡으려”하는 무리. 다음은 권력을 잡을 수가 없기에 ‘국가 자본주의의 봉사자’로 낯선 이들이라 한다. 즉 바쿠닌의 눈을 통해 말하는 촘스키의 지식인 인식은 ‘권력’과 집결된다. 지식인의 권력욕에 대한 집착,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소유를 날마다 외치는 스님의 말씀은 스스로 무소유의 언어에 갇힌 딜레마를 안고, 지식인을 권력의 동질성으로 보는 촘스키 역시, 그의 언어가 지식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가 없는 자리에 있다고 보여진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화두(話頭)가 아닐까?

마르크스 주의 프로이드 주의 등은 내가 보기에 비합리적인 숭배입니다.(204쪽)”

한 사람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절대시 하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역사는 멈춰선 것이 아니기에, 그 사상가의 좋은 점은 삼켜먹고 모자란 부분은 실험을 통해 발전시켜나아갸 한다.

합리적인 사람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작업 중에서 어떤 것을 보존하며 수정하고, 또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까?(205쪽)”

이러한 물음에 끊임없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촘스키는 비판적 성찰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문화라든가 모둠은 그려내지 않는다. 또한 지식인의 권력욕에 대한 경계와 왜곡된 언론과 권력 등을 말하면서, 민중의 사고 세계관에 대해서는 물러서 있다. 즉 사회구조라는 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사람을 놓고 하나 일 (一人)때, 열 일(十人) 때, 만 명 일 때 그들의 사고가 어떻게 진행되며, 뭉쳐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건내지 않는다. 잘못을 저지른 문화는 권력과 야합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이라 할 때 불특정인이 나오고, 실존적 객체 즉 이름을 가진 이는 숨어버린다.

촘스키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깊이 베이지 않고, 그의 줄(線)은 어디까지인지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무엇보다 촘스키의 언어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잠정은 있지만, 원인을 분석, 대안으로 이어지는 연결성은 숨어 있다. 또한 지인이의 인터뷰의 엉뚱함은 재미 있을는지 몰라도 비판과 경계가 없음을 드러내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우상화된 촘스키를 읽고 있다. 이런 덴장…

들판에 나가서, 뱀의 뒷다리를 보았다.. 뒷다리가 쪼옥, 앞다리가 쪼옥~~

““위대한 사상”을 배치해 놓고서, 똑똑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선택해 놓았으니 어리석은 당신들은 우리한테서 그것을 배워라. 또는 배울 능력이 안되면 암기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당신이 플라톤의 저서를 읽어보겠다고 생각한다면, 플라톤을 읽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 플라톤 책의 어떤 점을 옳고 그런지,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더 좋은지, 플라톤이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여기에 왜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지 따위를 생각해가며 읽어야 합니다. 학문하는 방법도 그렇지만,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작품을 제대로 읽는 방식입니다.(219쪽)”

티비 책을 말하다]에서, 티비는 책을 경청하고 있다. 말하는 것은 사회자가 앞에 ‘모셔진’ 지은이다. 즉 ‘위대한 사상’을 모셔놓고 들어라고 말한다. 한 보기로 이어령씨를 모셔놓고 사회자의 칭찬 일색은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 즉 ‘티비 책을 말하다’가 지향하는 점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책을 많이 혹은 비판적으로 읽거나 사회에선 일반인이 아닌 무수한 ‘비평자’라는 직함을 달고 나온 이들을 불러온다. 사회자는 이들을 모셔놓고 나 혹은 우리에게 보고 듣어라고 한다. 나는 촘스키의 언어를 통해, 티비 책을 말하다를 읽어낸다.

인터넷은 무수한 언어를 토해내는 광장이다. 예전에는 혼자만의 기록이였다면 지금은, 온라인 광장에 기록한다. 과연 이들의 언어는 경청할 것이 못되는가? 너무 앞선 생각이거나 하늘에 뜬 생각일까…. 아무래도 내 눈에는 촘스키의 언어가 [티비 책을 말하다]에 계속 겹쳐진다.

촘스키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만듭니다.(44쪽)”

일전에 걸프만 전쟁을 통해 한 국가를 초전박살 낼 때, CNN이라는 언론은 미국의 최신 미사일 패트리어트의 명중률을 살상과는 무관하게, 명중률만 높이 평가를 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무기는 이렇게 정확하다는 정부의 대변인이 되어 현장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난 뒤 신문의 조그마한 구석에 명중률이 반에 반 밖에 안된다고 정정 보도아닌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패트리어트의 명중률을 반에 반을 겹친 높이라고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언어와 반복을 통해 거짓을 말하고, 나중에 조그맣게 ‘아이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 이야기는 관심 밖이였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혹은 언론의 비판적인 시선은,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의 선진국의 무역실태, 정경모씨의『찢겨진 산하』에 비춰진 미국의 모습, 강준만 교수의 언론 비평, 그리고 옥중에서 19년을 살고 나온 지은이가 인터뷰를 하고 난 다음의 소감이 잠시 담겨진 『옥중 19년』의 뒷부분 등…에서 많이 보여진다. 과연 신문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는 공부와 비판적 읽기 밖에 없지 않을까?

예초에 미국이라는 ‘독수리 오형제’니, ‘민주주의의 경찰’이라는 개념은 고등학교 졸업장에 달아 놓았기에 촘스키의 시선이 가슴 깊숙이 찌르지는 않는다. 앞에 나온 쿠바에 대한 입장은 내가 모르는 부분이기에 새롭게 읽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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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4-0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읽는 방법이 문제란 지적에 공감합니다. 우상만들기도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황우석,노무현,김정일 아니 자본주의의 미국이라는 개념들 모두 일종의 환상이겠죠. 정말 중요한 것은 비판하려는 마음이라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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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이들이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회 사업이라는 것은 설 땅을 잃고 모세에 태어날 당시의 역사적 조건 속으로 사라져버리겠죠. 정신장애자의 공급이 끊겨서 상담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공황에 빠지겠죠. 사람들이 제 멋대로 노는 방법을 다시 익힘에 따라 텔레비전을 비롯한 상업 오락과 흥행들은 말라죽어 버리겠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심고 따고 썰고 요리하는 일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면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전문 음식 사업이 대폭 위축되겠죠. 근대 법학과 의학, 공학의 상당 부분도 사라져 버릴겁니다. 의류 산업과 학교 산업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두가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존성 가진 사람들 덕분에 존재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37쪽)

의존성? 의존성이 무엇이고, 누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심어준단 말인가? 의존성에 기댄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모습이 오늘날인가? 왜냐하면 오늘은 상업 오락과 넘쳐나고, 패스트푸드점이 읍내에 까지 터를 잡고,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무수한 언어가 병이라며 '은유로서의 질병'을 구축한다. 의존성, 이는 무엇이며 이런 헤게모니를 만들어내는 이는 누구이며, 왜 이런 헤게모니가 존재해야 하는가?

지은이는 학교의 병을 실제적으로 접근하여, 어린이들이 자라나서 의존성을 지니게 될 수 밖에 없으며, 누군가가 만든 패러다임 속으로 이끌려간다고 말한다. 오늘 학교 공부를 받은 아이들은, 당신네들은 행복한가라고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우리는 행복한가?

학교는 이렇게 태어났다.
학교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는 나폴레옹의 전쟁에 진 프러시아가 국민(!)을 일치단결(!)하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 즉 학교를 만들어 중앙통제의 교육을 통해, 일사분란한 사고를 만들기 위함이였다.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지 않나요. 왠지 전체주의가 겹쳐지지 않나요?)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한 현대 의무교육은 중앙 집권화한 학교가 어떤 사람들을 길러낼 것인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55쪽)
1)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2)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
3)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4)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5)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태어난 근대 교육은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그 전에 있던 독립된 인간 대신에 국가 사회주의의 이념에 충실한 인간을 길러낸다. 지은이는 미국의 정신-독립된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프러시아의 교육을 받아들이면서 의존성으로 변질 되었다고 한다.

"프러시아의 국민학교 목표는 '지성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56쪽)

현장에 가 보니.

그는 기존의 교육 체계-국가 사회주의의 실현에 충실한 교육의 선각자로서, 학생의 수준을 산모양(山)으로 그려 천재는 몇 몇 선택 받은 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6년을 현장에서 지켜본 그는 천재의 분포가 산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죠. 아이들은 모두가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先生)은 아이들의 이런 천재성을 가둔다. 즉 『바보만들기』라는 헤게모니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은이는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고, 그가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가 본 교육, 즉 그가 행한 스무 여섯해 동안의 교육이라는 헤게모니는…

1. 혼란.
저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파편화하는 것입니다.

2. 교실에 갇혀 있기.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있는 곳은 교실 안이니 그곳에서 나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3. 종소리.
종소리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어떤 일도 끝낼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4. 정서적 의존성.
동그라미 곱표, 미소와 찌푸림,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저는 아이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고 박탈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5. 지적 의존성.

6. 조건부 자신감
시험과 성정, 통치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가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 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7. 숨을 곳이 아무데도 없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항상 감시되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이 끊임없이 너희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른쪽을 걷다 왼쪽을 보게 되니, 전혀 새로운 모습이 다가왔고 그는 하나하나 무엇이 문제인가 살피게 된다. 즉 미국의 오늘날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인 셈이죠.

문제에 대해 전전긍긍하다, 그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답을 찾는다. 즉 우리가 자연스레 몸에 익혔지만 학교라는 울타리가 아닌 곳에서 배웠기에, 공부라고 인지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이어져 온 곳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 마음은 모농가헬라를 영원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자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어린아이들 때부터 제몫의 의무를 책임지는 습관을 통해 일하는 법을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그 창과 그 강가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한 일상적인 환경에서 스스로 모험을 빚어내고 찾아낼 줄 알게 되었던 곳" (87쪽)

즉 지은이는 스스로 알지 못하지만, 모농가헬라에서 사람 사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을 들어가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자립성과 주체성 대신에 의존성을 배우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에서 익히는 법은 공부가 아니며, 학교가 있는 담장 안에서 배우는 것 만이 공부라는 이분법 만이 존재한다. 우스개소리로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사회에서 잘 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은 웃음 속에 가시가 있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공부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가? 학교를 움직이는 헤게모니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지은이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의 의존성이라는 틀을 벗어나 아이들의 재능을 인지하고, 스스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체성을 가지도록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연설문을 기초로 한 것이기에, 연구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지만 자칫, 감정이 앞서는 것이 아닐까라는 조바심이 든다. 교육 이데올로기를 넘기 위해서는 그 실체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 해 전 늙은 선생 한 명 자르면, Œ은 선생 두 명 쓸 수 있다는 것과 작은 시골 학교는 한 군데로 뭉쳐야 한다는 시장 논리는, 교육을 돈과 맞바꿨다는 것 외에 중앙통제를 통한 의존성의 강화, 이를 통해 지배계급의 장기 집권화라는 헤게모니가 숨어있다. 시골 학교의 공기, 늙은 선생의 혜안은 몇 푼의 지식과 돈으로 바꿀 수가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화는 중앙시멘트이다. 서울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모든 문제는 서울에 향하고, 모든 길은 시멘트로 뒤덮어 버린다. 즉 풀 한 포기 심을 공간을 주지 않고,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율성을 저버리는 사회화. 이렇게 미친듯이 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큰 일을 앞장서고 있다고 하면 비약이 심할 것일까?

지은이의 모농가헬라는 이미 몇 군데에서 비춰졌다. 『오래된 미래』 라다크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작은 나무가 사는 동네, 『산골마을 작은학교』에 숨어 있는 산골 동네, 하지만 힘의 논리에 밀리는 그 작음이 쉬리 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 스무여섯해를 가르치면서 느낀 감정과 비판이기에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의존성을 통한 중앙집권화라는 헤게모니는 공통점을 지닌다. 스스로에 대한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어느 나라에, 공무원 시험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소리가 봄바람에 날리더라.

그렇군, 의존성의 획득, 중앙 집권화, 공무원이라는 삼박자의 순환구조. 과연 이 나라를 비판하고 견제할 젊은 머리는 어디로 가는가? 의존성의 마지막 종점은 중앙 집권화와 공무원의 양성인가?

점심에 뱀다리(蛇足)를 탕으로 먹었더니…. 말이 많아 지네요.

학교에서 번호가 지배하는 힘은 강하다. 오늘 며칠이지.. 3번, 3번 읽어봐!!

쉰 명의 아이를 모아놓고 선생은 개개인의 인격체를 인식하지 않고 콩나물의 숫자 세듯 한다. 그네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 학습을 이해하고 따라오는, 즉 선생으로서의 일을 다 함에 있다. 내가 먼저 간 길이기에 너희는 따라와야 한다는 논리. 한 숭고한 생명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의 말에 대한 이해를 잘 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높이 평가하고, 피그말리온 효과를 던져주는 학습은 공부를 못 하는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즉 스스로 삶에 대한 책임성을 키워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다. 아울러 이 번호의 편리성은 공통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반을 가든 2반을 가든, 1학년을 가든 2학년을 가든 오늘의 날짜는 몇 일이지로 다 해결된다. 오늘도 열심히 부르는 선생은 아이들의 개성을 익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려 하지 않고 쉽게 번호를 부른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번호는 관료와 중앙 통제 집권에 아주 효율적인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홀로 떠들면서, 지방 정부의 비리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지방 정부의 모순과 힘겨움 등을 지가 살아서 하겠다는 논리는 『바보 반들기』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 즉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물론 여기에는 옆 당에 대한, 정략적 발언일 수 있지만 그의 세계관은 좁다.

이미 대한민국은 1국가 2공화국이 아닌가! 선생의 자리와 대통령의 자리는 언뜻 닮은 곳이 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같도록 하는 점에 대해서… 그렇기에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였다. 대통령의 자리도, 먼 미래와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들과의 조우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보 만들기』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 즉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지는 강압적 암기가 현 교육체계에 존재한다고 말하면… 나는 『멋진 신세계』의 모습을 오늘날의 교육을 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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