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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2 ㅣ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3
노암 촘스키 지음, 이종인 옮김, 장봉군 그림 / 시대의창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 읽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읽는 방법이 중요하다.(219쪽)
책을 읽는 내용의 중요성이 아닌, ‘읽는 방법’의 중요성을 말하는 촘스키는, 그 읽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즉 책, 언론, 권력, 국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을 생각없이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비판적인 독서(219쪽)”를 하듯 끊임없이 비판적인 방법으로 읽어내길 바란다. 그는 사상의 무슨 주의를 경계한다. 역사의 필연적 과정도 믿지 않는다. 이러한 경계는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 영웅시하며, 민중을 맑스의 우상화시켜 권력을 잡은 지식인을 비판한다. 아울러 역사의 펼연적 과정,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를 결쳐 도래하게 될 ‘공산주의’ 를 확언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 지식인에 노릿개감이 되어, 민중의 자유의지와 사고를 무개념으로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바쿠닌’의 말을 빌려, 지식인을 두 계층으로 본다. 먼저 좌파 지식인으로 “민중 운동에 편승하여 권력을 잡으려”하는 무리. 다음은 권력을 잡을 수가 없기에 ‘국가 자본주의의 봉사자’로 낯선 이들이라 한다. 즉 바쿠닌의 눈을 통해 말하는 촘스키의 지식인 인식은 ‘권력’과 집결된다. 지식인의 권력욕에 대한 집착,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소유를 날마다 외치는 스님의 말씀은 스스로 무소유의 언어에 갇힌 딜레마를 안고, 지식인을 권력의 동질성으로 보는 촘스키 역시, 그의 언어가 지식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가 없는 자리에 있다고 보여진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화두(話頭)가 아닐까?
“마르크스 주의 프로이드 주의 등은 내가 보기에 비합리적인 숭배입니다.(204쪽)”
한 사람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절대시 하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역사는 멈춰선 것이 아니기에, 그 사상가의 좋은 점은 삼켜먹고 모자란 부분은 실험을 통해 발전시켜나아갸 한다.
“합리적인 사람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작업 중에서 어떤 것을 보존하며 수정하고, 또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까?(205쪽)”
이러한 물음에 끊임없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촘스키는 비판적 성찰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문화라든가 모둠은 그려내지 않는다. 또한 지식인의 권력욕에 대한 경계와 왜곡된 언론과 권력 등을 말하면서, 민중의 사고 세계관에 대해서는 물러서 있다. 즉 사회구조라는 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사람을 놓고 하나 일 (一人)때, 열 일(十人) 때, 만 명 일 때 그들의 사고가 어떻게 진행되며, 뭉쳐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건내지 않는다. 잘못을 저지른 문화는 권력과 야합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이라 할 때 불특정인이 나오고, 실존적 객체 즉 이름을 가진 이는 숨어버린다.
촘스키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깊이 베이지 않고, 그의 줄(線)은 어디까지인지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무엇보다 촘스키의 언어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잠정은 있지만, 원인을 분석, 대안으로 이어지는 연결성은 숨어 있다. 또한 지인이의 인터뷰의 엉뚱함은 재미 있을는지 몰라도 비판과 경계가 없음을 드러내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우상화된 촘스키를 읽고 있다. 이런 덴장…
들판에 나가서, 뱀의 뒷다리를 보았다.. 뒷다리가 쪼옥, 앞다리가 쪼옥~~
““위대한 사상”을 배치해 놓고서, 똑똑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선택해 놓았으니 어리석은 당신들은 우리한테서 그것을 배워라. 또는 배울 능력이 안되면 암기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당신이 플라톤의 저서를 읽어보겠다고 생각한다면, 플라톤을 읽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 플라톤 책의 어떤 점을 옳고 그런지,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더 좋은지, 플라톤이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여기에 왜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지 따위를 생각해가며 읽어야 합니다. 학문하는 방법도 그렇지만,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작품을 제대로 읽는 방식입니다.(219쪽)”
티비 책을 말하다]에서, 티비는 책을 경청하고 있다. 말하는 것은 사회자가 앞에 ‘모셔진’ 지은이다. 즉 ‘위대한 사상’을 모셔놓고 들어라고 말한다. 한 보기로 이어령씨를 모셔놓고 사회자의 칭찬 일색은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 즉 ‘티비 책을 말하다’가 지향하는 점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책을 많이 혹은 비판적으로 읽거나 사회에선 일반인이 아닌 무수한 ‘비평자’라는 직함을 달고 나온 이들을 불러온다. 사회자는 이들을 모셔놓고 나 혹은 우리에게 보고 듣어라고 한다. 나는 촘스키의 언어를 통해, 티비 책을 말하다를 읽어낸다.
인터넷은 무수한 언어를 토해내는 광장이다. 예전에는 혼자만의 기록이였다면 지금은, 온라인 광장에 기록한다. 과연 이들의 언어는 경청할 것이 못되는가? 너무 앞선 생각이거나 하늘에 뜬 생각일까…. 아무래도 내 눈에는 촘스키의 언어가 [티비 책을 말하다]에 계속 겹쳐진다.
촘스키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만듭니다.(44쪽)”
일전에 걸프만 전쟁을 통해 한 국가를 초전박살 낼 때, CNN이라는 언론은 미국의 최신 미사일 패트리어트의 명중률을 살상과는 무관하게, 명중률만 높이 평가를 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무기는 이렇게 정확하다는 정부의 대변인이 되어 현장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난 뒤 신문의 조그마한 구석에 명중률이 반에 반 밖에 안된다고 정정 보도아닌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패트리어트의 명중률을 반에 반을 겹친 높이라고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언어와 반복을 통해 거짓을 말하고, 나중에 조그맣게 ‘아이다’라고 말할 때에는 그 이야기는 관심 밖이였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혹은 언론의 비판적인 시선은,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의 선진국의 무역실태, 정경모씨의『찢겨진 산하』에 비춰진 미국의 모습, 강준만 교수의 언론 비평, 그리고 옥중에서 19년을 살고 나온 지은이가 인터뷰를 하고 난 다음의 소감이 잠시 담겨진 『옥중 19년』의 뒷부분 등…에서 많이 보여진다. 과연 신문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는 공부와 비판적 읽기 밖에 없지 않을까?
예초에 미국이라는 ‘독수리 오형제’니, ‘민주주의의 경찰’이라는 개념은 고등학교 졸업장에 달아 놓았기에 촘스키의 시선이 가슴 깊숙이 찌르지는 않는다. 앞에 나온 쿠바에 대한 입장은 내가 모르는 부분이기에 새롭게 읽힐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