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일본의 조선 출병에 대한 주장과 목적은 각기 상이했지만, 최초의시도는 참모본부 차장 가와카미 소로쿠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군사외교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가와카미는 독단으로 비밀리에 서울에 파견한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좌, 우에하라 유사쿠 소좌와 오토리 공사가 협력해 조선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 그에 따라 일본 군부는 혼성여단을 편성했고, 무쓰는 1882년 제물포조약을 명분으호 파병했다. - P41

일본군은 도성 내외수색과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도 차단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리훙장에게 병을 - P78

핑계로 여러 차례 귀국을 청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하했다. 그러자 전권을 탕사오이에게 일임한 후 7월 19일 비밀리에 인천으로 가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탕사오이는 아산의 청군 병력이 부족함을 감지하고 일본군이 그 기회를 이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북양대신에게 10만을추가로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훙장은 총리아문을 통해
"일본군이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함부로 3만을 일컫는가? 또한 일본군은 공사관과 상민 보호를 제외하면 결코 우리와 싸울일이 없을 것인데 너는 10만의 병사를 어디에 쓸 것인가?" 라며 이를일축했다. - P79

일본인이 지금 빈민들을 진휼하고 무너진 집들을 조사하여 은전을대가로줄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민심을 수습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범사업 수준의 인구 조사를 통해 조선의 실태를 파악하려 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울 도성 내 인적·물적·심리적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치안을 확보하고 저항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오사카아사히신문》 종군기자 니시무라 도키스케에 의하면 주민들은 미곡 - P95

을 받자마자 이를 팔아 술을 마시는 등 순식간에 소비하여 구조 목적은 허공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 P96

대황제께서 번진을 걱정하여 요청을 재가하셨다. 본 군문이 명을 받들어 토벌을 독려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건너왔다. 부대는 모두 수많은 싸움을 치른 군대로 한번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협박을 받은 백성은 시세에 떠밀리고 또한 기꺼운마음으로 적을 따른 것도 아닌데,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양인과악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마음에 실제로 차마 하지 - P125

못하고 고시를 내어 알아듣도록 타이르니, 이 고시를 여러 읍의 사람들은 잘 알아야 한다. 너희들 중에 협박을 받은 양민은 기미를 보아 해산을 했는데, 혹시라도 군영에 와서 스스로 투항하면, 본 군문은 관대하게 용서하고 결코 심하게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하고어리석은 백성 가운데 적에게 잘못 쓰이고, 진심으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만약 병기를 버리고 죄를 뉘우쳐서 투항한다면, 역시안하게 맞이하는 것 외에 은혜를 베풀 것이다. 내가 정벌을 하는데,
너희들과 약속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때에 무기와 성을 버리는 자는결코 죽이지 않지만, 무기를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은 바로 창과 포로 죽이지 않고 서서히 베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너희가 만약스스로 목숨을 돌아본다면 비도의 우두머리가 되지 마라. 공포한 것을 특별히 알리니 모두 잘 알라.
1894년 5월 11일 고시

이로써 청국군은 조선 정부로부터 인력 동원, 군수물자와 숙소·자금을 영접사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 P127

일본 정부는 1894년 6월 5일 청일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천황 직속 최고 통수기관으로 육군과 해군을 휘하에 두는 전시 대본영을 설치했다.
대본영은 한 해 전 1893년 5월 22일 칙령 제52호 <전시대본영조례>에의해 처음 법제화되었다. 대본영은 막료장인 참모총장 대장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 참모차장 중장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대신장 오야마 이와오, 육군차관 소장 고다마 겐타로兒, 해군대신 중장 사이고 츠구미치西, 해군차관 소장 이토 토시요시(伊吉, 사법대신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모여 협의하는 체제였다. - P162

가와카미 소로쿠는 이미 1893년 4월부터 6월까지 참모본부 제2국원소좌 이치지 코스케, 육군감독 사카다 겐산 등과 함께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조선과 청국을 정탐한 경험이 있었다. 부산을 경유해 해로로 인천으로 들어온 이들은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서울에 머물며 조선 국왕을 알현하고 흥선대원군과도 면담했다. 동학당 활동 탐지와 조선의 병 - P166

영 시찰을 마친 가와카미는 5월 12일 중국 톈진으로 건너갔다.29도중에 일행과 헤어진 이치지는 이후 경성 주재 일본공사관 무관 와타나베 데스타로와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를 여행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 이들의 여행은 청국과의 전쟁 준비를 위한 일본군의상륙지와 행동 루트에 대한 사전답사 성격이 짙었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농민군과 내부 상황을 탐지한 이치지는 1894년 5월 30일 가와카미관저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된다. 다음 날인 31일 가와카미는 참모총장 타루히토 친왕에게 그 내용을 상신하여 조선 출병을 승인받았다. - P167

7월 6일 경성 주재 청국 외교관 리위센리흥장의 대리인인 성수안화이에게 전보하여, "현재 중국인으로 한국에 있는 자는 병력을 쓰지 않는 것이 상책으로 봅니다. 우매한 소견으로는 만약 병력을 사용하면 반드시 내외에 포치布해야 하기에 한 번 틈이 없으면 바야흐로능히 하수로 절대로 가볍게 한 번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현상 유지책을 견지하는 선에서 머물도록 권유했다. 7월 20일 리홍장도 예지차오에게 "일본이 힘을 다해 전쟁을 고수하려고 미리 준비했지만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저들은 헤아리고 움직이지않을 것이다. 이것은 만국의 공례로 오직 먼저 전쟁을 일으키면 이치가 군색하게 된다. 절대 명심하고 잊지 말 것이다. 너는 성급하면 안된다" 라고 당부했다. 이렇듯 청국군이 손을 놓고 있던 결과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평택 인근까지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 P174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징발 방식은 청국 관내와 조선에서 각기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통해 청국으로, 제2군 사령관 오야마 이와오는 청국으로 직접 출동했다. 그런데 제2군은 랴오둥반도 상륙 직후 군령 <제2군징발심득第二軍心得>(1894년 10월 29일)을 발령하여 점령지인 청국에서 ‘무상징발‘과 ‘유상징의 규정을 마련, 시행했다. 반면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이 필요했던 제1군이 관할하는 조선에서는 일본 국내법인<징발령>에 준거해서 강제로 징발을 실시했지만, <제2군 징발심득>보다 분명히 보상 정도가 낮거나 아니면 보상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 P183

스기무라 후카시의 술회에 따르면 평양 전투의 결과가 아직 도착하기전에 대원군이 중국에 의지하는 한편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의 남하를기다렸다가 함께 일본군을 협공함으로써 중국의 추궁도 모면하고 자신의 목적도 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그는 목적을잃고 계략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방문·초대·선물 등 겉으로는 일본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다고 판단했다.
423이에 앞서 대원군의 종손자 이준용이 - P213

일본의 힘을 빌려 왕후를 폐위하려 했지만 청군이 평양에 들어와 위세당당하다는 소식을 듣고 대원군을 비롯해 모두들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다. 이에 몰래 청국의 장군에게 환영의 뜻을 보내고 영국영사에게도 접근하는 한편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평양 점령 시 대원군이 청국군 장수에게 보낸 밀서가 제1군 사령관의 손에 들어와 다시 외무대신에게 전해졌다. 후임 공사인 이노우에가 이를 대원군을 축출할 빌미로 삼아 그를 힐문하고 결국 권좌에서 쫓아내게 된다. 원래 무쓰는 대원군 축출까지는 생각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압수한 서류는 대원군이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 보낸 서한과 이재면. 김홍집의 서한 등 3통이었다. 이를 읽어 본 무쓰는조선이 청국과 일본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내심 주저하고 있는 흔적을엿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쓰는 이노우에에게 보낸 전보에서 바야흐로 조선의 사직이 ‘위급존망지추‘에 있는 때이므로 굳이 잘못을 통렬하게 추궁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면서도 이의 정치적 활용 여부는 공사의재량에 일임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밀서를 문제 삼아 결국 대원군퇴진을 관철했다. - P214

청일전쟁 시기 일본이 강제 체결한 군사동맹인 <양국맹약>은 청국과의 전쟁에 조선군의 동원과 협조, 인부와 식량 징발의 공식화를 명문화한 것이다. 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시 협정인 <합동조관>은 경부철도와 경인철도 부설권 양도, 경부·경인 간 군용전신선 부설, 목포와 진남포 개항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한편 조선 외부대신에게각 개항장에서 일본 선박의 무관세 통관을 강요했고, <신식화폐 발행장정>을 시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화폐의 조선 내 통용은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서울-의주, 서울-원산 간 군용전신선은 명확한 협정을 체결한 바도 없고 비용 지불도 없이 사용했다. "승리를 틈타 과중한요구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의전의 본의에 맞지 않는다"는 귀족원의원 다니 다테키의 주장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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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김영민의 공부론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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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공부를 좋아하고 즐긴다. 그러나 평소 내가 하는 독서와 글쓰기가 '공부'로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다 보면 선명해지는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질문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찾아오면 불안감과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 김영민은 작년 <생각의 요새>에 언급되어서 처음 알게 된 뒤로 언젠가 한 번 그의 저작을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는 '동무공동체'로 이름이 알려져있기에 핵심 저작을 읽는다면 <동무론>, <동무와 연인>이나 <비평의 숲 공동체>를 읽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먼저 관심이 가는 주제인 공부와 관련된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전자책도 나와 있어 주저않고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에필로그 보고 피식 웃었는데 저자의 글을 읽는 이는 모두 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자폭이지만 솔직해서 좋았다. 실제 읽어보면 그럴만 하다 싶기도 한데 바탕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로 이 책을 읽는다면 말 뜻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대체 나는 왜 공부를 좋아하고 계속 이어갈까 질문한 적이 있다. 보복 심리 같은 것일까. 어릴 적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있다. 대학 전공을 취업을 위해서 선택한 탓도 있는 것 같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공부한다. 공부는 내게 읽고 사유하는 과정이다.


'공부는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변화를 하려면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질문을 하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안정적으로 아는 관념과 틀 안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탄력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일텐데 같은 방식을 답습한다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저자의 '자기체계의 안정화'라는 말에 너무나 공감했다. 더 이상 긴장 상태에 들어가려하지 않음은 공부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책이 잘 안 읽히고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 돌파구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머리를 비우고 잠시 내려놓는 것이 방법인가 고민한 적이 있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싫증이 생기면?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覺懶看書, 則且看書.)'고 말한다. 왠지 희망적이지 않나. 희망 섞인 말이라도 믿고 싶어지는 주문 같은 말이었다. 


글을 쓸 때 늘 나의 문제점만 보인다. 왜 나의 글은 특색이 없을까 고민한다.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하여 자신만의 고유적인 글쓰기를 하라 주문한다. '관념을 회집, 운용하는 재주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박자에 맞는 사유와 글쓰기의 개성을 창조하는 게 관건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겹치고 헤어지는 리듬이 박자라고 했듯이, 글쓰기의 개성적 박자 역시 각자의 삶의 양식과 그 무늬가 글과 겹치고 헤어지는 오랜 연성(練成)의 과정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 그러므로 오직, ‘사는 일’ 속으로 다 불러들일 것!' 나의 삶과 철학이 글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내 글에 삶(구체성)은 있어도 철학(이론이나 관념)은 없거나 철학은 있는데 삶이 없다면 고민해보고 변화시켜 적용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오롯이 '자신'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발을 맞추어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공부를 위한 만남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경험은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된다. 

20대 후반부터 독서 모임, 동호회, 커뮤니티를 통해서 여러 사람을 만나 공부했다. 혼자 공부할 때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과의 부딪침 속에서 착각이었음을 여러 차례 느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앎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서재는 또 다른 공부의 기회가 되지 않나 싶다. 시간을 들여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사유하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댓글까지 달면서 소통한다면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우선 이 몸의 사실에 대한 인식, 그 몸의 정치성에 대한 체감에 근거한다. 그것은 그 몸의 주변자리로 내 감성과 인식을 넓히는 일이다. 내 몸을 내 이기주의의 텃밭이자 진지로 삼기보다 타인과 세상의 메커니즘을 알아 가는 촉수이자 매개로 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쉽사리 체계의 바깥으로 외출하지 못한다고 하듯이 그 누구도 임의로 자신의 몸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몸의 주변자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전체를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게 될 때 마침내 우리의 몸은 작고 견결한 실천들을 통해 외부성의 확보에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인식의 전체성+실천의 일관성=외부성). 그러므로, 몸이 좋은 사람의 이념에 있어서, 약빠르고 반지빠른 영악과 변덕은 영영 비각이다. 내가 지원행방(知圓行方)이라는 숙어를 곧잘 호출하곤 했지만, 지원이란 곧 주변자리에 스며든 전체성의 인식을 가리킴이요, 행방이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선택한 작은 실천의 일관성이며,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위해 소용되는 외부성이란 바로 이 인식과 실천의 병진에서 가능해지는 결과인 것이다.


‘만남’이 주는 비대칭의 체험은 물질의 문제, 무엇보다도 피와 살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사들, 혹은 몸공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모른다’. 아니, 차라리 몰라야만 한다는 게 옳다. 반복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쳐 말하자면, 무사들은 모든 ‘타자’의 대접에 (그들의 실력과 운신을 전혀 ‘모르는 듯’) 극진할 때라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


저자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층과 문화에 대해 비판하는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 사회의 대화문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먹통인 남성 기득권자들의 체계적 반(反)대화성은 우리 사회의 농축·급속·편파의 남성적 근대화나 군사주의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이른바 심층 근대화의 과제에서 우선순위다. 각종의 통계는, 특히 남자들의 비(非)대화성과 이와 관련된 여자들의 불만을 지목한다. 나는 1990년대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운동을 벌이면서 ‘여자의 말을 배우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생활인문학적 실천의 진장(振張)에 미력을 보탠 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화문화의 파행을 속으로부터 고쳐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가령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지식인들의 다수는 "언제 언제면 이런 글을 쓰겠다"거나 "이런저런 일을 끝내면 저 책을 읽겠다"는 따위의 말을 자주 하면서 버릇처럼 연기하는데, 내가 실천해 오고 또 후학들에게 권한 방식은 오직 현재 속에 직입하는 것으로 공부의 실천을 쉼 없이, 곧장, 당장 하는 데에, 그리고 그 버릇을 자신의 몸(무의식) 속에 기입하는 데 있다.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을 만한 내용들이 많다. 곱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뭉근한 말들이 녹아 있어서 재독, 삼독해도 좋을 만한 책이라 생각했다. 

기성의 체제를 확인하고, 그 네트워크 속에서 안돈(安頓)하고, 그 교조(敎條)를 복창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만남과 사귐이라는 것조차도 거친 술어들(차이들)의 순치나 체계내적 사회화를 위한 알리바이로 저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 굳이 화이부동인 것. 그러므로 불화는 진정한 불화이어야 하며 차이는 진정한 차이(real differences)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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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열이 없는 공부’는 신체와 정신, 무의식과 의식, 육감과 오감, 지혜와 지성, 그리고 의욕과 욕심의 근대적 분화와 물화를 깨고 새로운 몸(삶의 양식과 버릇)을 얻고 길러 인간의 통전적 성숙을 위해 그 몸을 경첩으로 삼아 갖은 이치들을 융통케 하는 데 있다.

‘마음이 일면 만물이 따라 인다(心生則種種法生)’는 식의 사유는, 이른바 존재 중의 존재인 신을 초월적으로 대상화하는 유일신교적 태도와 달리, 이른바 해석학 너머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반방편주의의 한 극처(極處)를 보여 준다. 부정성의 반방편주의에 의하면, "도를 닦아 얻는 열반이 진리가 아니라 마음이 본래부터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참 열반(修道證滅,是亦非眞也. 心法本寂, 乃眞滅也)"이다.

가령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지식인들의 다수는 "언제 언제면 이런 글을 쓰겠다"거나 "이런저런 일을 끝내면 저 책을 읽겠다"는 따위의 말을 자주 하면서 버릇처럼 연기하는데, 내가 실천해 오고 또 후학들에게 권한 방식은 오직 현재 속에 직입하는 것으로 공부의 실천을 쉼 없이, 곧장, 당장 하는 데에, 그리고 그 버릇을 자신의 몸(무의식) 속에 기입하는 데 있다.

정중동, 동중정을 윤환(輪環)시키며 안팎을 동시에 융통하는 기술은 내가 오래전부터 ‘수동적 긴장’이라고 이름붙인 심신의 조율방식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긴장이 강직으로 흐르지 않고 유연한 탄력성을 얻어 가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수동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수동성이란, 긴장된 집중이 직절한 법식으로 빠지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생산성을 얻는 ‘준비 없는 준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노자가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살 것(柔弱者, 生之道)"이라고 했을 때, 그 유약자의 ‘태세 없는 태세’와 닮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이나 박자라는 것이 있는데, 특히 병법에서는 박자가 중요하다"(오륜).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사물을 선용하는 것 속에 선비의 길이 있다’는 이치와 그 넓은 맥락을 같이 나눈다. 박자라는 것은 결국 타감(他感)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겹치고 헤어지는 리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칼이 글에 비해 ‘냉혹한 실용주의’로 흐를 것은 자명하다. 포퍼 식으로 말하자면, 글의 경우 문장이나 이론은 작가의 잘못을 대신해서 한량없이 죽어줄 수 있기에 거꾸로 작가는 영영 죽지 않을 수 있는 반면, 병법자의 실수는 곧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냉혹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고래로 문사의 논쟁이 지리멸렬하게 흐르는 것은, 잘라 말해서, 글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평하자면, ‘글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대화와 논쟁이 그 정당한 권위와 가치를 회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이치의 일단을 ‘죽어주기로서의 인문학’이라는 개념으로 해명한 바 있다

관념을 회집, 운용하는 재주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박자에 맞는 사유와 글쓰기의 개성을 창조하는 게 관건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겹치고 헤어지는 리듬이 박자라고 했듯이, 글쓰기의 개성적 박자 역시 각자의 삶의 양식과 그 무늬가 글과 겹치고 헤어지는 오랜 연성(練成)의 과정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 그러므로 오직, ‘사는 일’ 속으로 다 불러들일 것!

‘낯설게 보기’가 불가능해질 때에는 이른바 ‘비평적 거리(critical distance)’를 잃게 되면서 타성의 기계로 변신하거나 죽음에 이른다는 말은 글이나 칼, 어느 쪽의 이치에서도 확인된다. 특별히 철학적·인문학적 사유와 글쓰기야말로 낯설게 하기의 미덕이 십분 발휘되어야 하는 마당이라는 점은 재론할 나위도 없다.

책을 읽다가 싫증이 생기면?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覺懶看書, 則且看書.)

하나인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우선 이 몸의 사실에 대한 인식, 그 몸의 정치성에 대한 체감에 근거한다.

그것은 그 몸의 주변자리로 내 감성과 인식을 넓히는 일이다. 내 몸을 내 이기주의의 텃밭이자 진지로 삼기보다 타인과 세상의 메커니즘을 알아 가는 촉수이자 매개로 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쉽사리 체계의 바깥으로 외출하지 못한다고 하듯이 그 누구도 임의로 자신의 몸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몸의 주변자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전체를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게 될 때 마침내 우리의 몸은 작고 견결한 실천들을 통해 외부성의 확보에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인식의 전체성+실천의 일관성=외부성). 그러므로, 몸이 좋은 사람의 이념에 있어서, 약빠르고 반지빠른 영악과 변덕은 영영 비각이다. 내가 지원행방(知圓行方)이라는 숙어를 곧잘 호출하곤 했지만, 지원이란 곧 주변자리에 스며든 전체성의 인식을 가리킴이요, 행방이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선택한 작은 실천의 일관성이며,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위해 소용되는 외부성이란 바로 이 인식과 실천의 병진에서 가능해지는 결과인 것이다.

그들에게 ‘만남’이 주는 비대칭의 체험은 물질의 문제, 무엇보다도 피와 살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사들, 혹은 몸공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모른다’. 아니, 차라리 몰라야만 한다는 게 옳다. 반복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쳐 말하자면, 무사들은 모든 ‘타자’의 대접에 (그들의 실력과 운신을 전혀 ‘모르는 듯’) 극진할 때라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

기성의 체제를 확인하고, 그 네트워크 속에서 안돈(安頓)하고, 그 교조(敎條)를 복창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만남과 사귐이라는 것조차도 거친 술어들(차이들)의 순치나 체계내적 사회화를 위한 알리바이로 저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 굳이 화이부동인 것. 그러므로 불화는 진정한 불화이어야 하며 차이는 진정한 차이(real differences)여야 한다.

모든 계몽이 결국 무지로 드러나는 자기부정의 경험은 공부론이 뿌리내리고 있는 터전의 범위와 그 중층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 지혜와 용기는, 공부의 밑절미 아래 지옥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그 무토대를 버텨야 하는 위기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합체를 이룬다. 근현대적 전문성의 놀라운 성취에 가려진 허영 속에서 학(學)이 배각(排却)한 술(術)을 잊어버리고, 관념이 배각한 몸을 잊어버리고, 지성이 배각한 영혼을 잊어버리고, 하늘이 배각한 땅을 잊어버리고, 남성성이 배각한 여성성을 잊어버리고, 논리가 배각한 미립과 지릅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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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4-05 0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는 말을 음미해 봅니다. 싫증이 생기는 이유도 여럿 있을텐데 난해에서 그런 마음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돌아가신 어버님 말씀 중에 자꾸 하다보면 ‘물미가 트인다‘는 가르침이 있었는데 나중에 배우다 보니 ‘독서백편의자현‘이란 말에 와 닿았지요. 이런 깨달음이 지금도 내가 고전을 즐겨 읽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05 08:27   좋아요 0 | URL
저도 저 문장은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책이 잘 안 읽히는 경우에는 슬럼프인가 해서 좀 쉬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계속 읽으라니...! 읽고 쓰는 것이 결국 사유를 만들어내는 길인가봅니다.
 

3월에는 총 12권의 책을 완독했다. 월초에 여행을 다녀오고, 복귀하자마자 바빠져서 주말이 아니면 책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다행히 3월은 평년보다 우중충한 날들이 많았고 꽃도 피지 않아서 주말에는 대부분 집에서 보냈기에 중후반 힘을 내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심적인 스트레스를 거두지 못했을 것 같다. 책에 빠져 있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현재의 일을 내려둘 수가 있었다.

<속자치통감 12권에서 15권은 송이 주변의 10국을 통합하고, 송-거란 간의 전투(기구간/서하 전투)와 협상 과정이 그려진다. 더불어 송은 내치를 통해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모든 것의 이야기>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을 바탕으로 그려진 소설들이어서 눈길이 갔다. 차별과 혐오가 비일비재한 세상에서 작가는 기본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기와 장소의 폭이 넓어서 읽는 재미도 있었고 특히나 작가의 역사적 이해에 바탕한 접근이 특징적이었다.

<캠브리지 중국사 10>은 19세기 초중반까지의 중국의 대내외적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 눈에 띄는 사건은 아편전쟁과 태평 천국의 난, 중국과 러시아 간의 국경 분쟁, 종교 수입에 의한 갈등 등이 있겠다. 특히 개인적으로 아편 전쟁 전 광저우 무역에 대한 진행 과정과 종교와의 갈등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청나라의 역사에 대한 큰 흐름을 알고 있을 때 특히나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개인적으로도 읽고 싶은 책이기는 했으나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급박하게 읽었다. 좀 여유를 두고 세세하게 읽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평전이라 개인의 역사를 담고 있으면서도 현재 북한에서 사용하는 조선어에 대한 이론의 기초의 전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주시경, 김두봉이라는 인물만이 아닌 김수경이라는 언어 학자를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역시 도나 해러웨이 책은 쉽지 않다. 3장의 내용은 <사이보그 선언문>, 현대의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전개 과정이 포함되어 있어 그나마 읽을만했지만 마지막 장도 어려웠다는 건 함정. 과학과 자연을 반대로 두지 않고 잘 이용하자라는 접근 정도만 확인하고 간다.

<세계철학사 1>은 지중해를 둘러싸고 고대부터 중세까지 서양 철학의 원류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철학부터 자연 철학, 신 플라톤주의, 스토아 철학, 스콜라 철학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서양 철학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이 이 때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삶을 중요시여기는 철학들에 눈길이 아무래도 더 가는 것 같다.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와 지리, 인물에 대한 이해와 더해져서 이루어져야함을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근대 용어의 탄생>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확인한다. 처음 만들어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쓰이는 용어도 있는 반면 비슷한 의미지만 조금씩 덧붙여가며 확장된 경우도 있었다. 같은 용어라도 한국에 들어오면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은 인도 미술을 다루고 있다. 무른 돌을 이용하여 토기나 석상을 만들기 시작했던 그들은 석가모니 이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왕과 쿠샨 제국의 카니슈카 왕은 인도의 불교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스투파로 대표되는 인도 미술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탑 등의 다른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스투파 전시회를 가기 위한 사전 작업차 읽었다.


읽고 있는 책들이 점점 많아지지만 전집 종류가 많아 그렇지 단행본은 몇 권 없다. 그렇지만 신경 안 쓰면 계속 쌓일테니 등한시하면 안 될 것 같다.
특히 멈춤 상태인 도스토옙스키 시리즈를 다시 시작해야지.

이번 달에도 독서 모임이 예정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은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다. ‘행위자 네트워크’라는 용어가 처음이라 읽기 전 영상으로 간략하게 확인하고 책에 뛰어들어야할 것 같다.


이번 달은 꽃도 피고 날도 좋아 아무래도 책을 덜 읽을 것 같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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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4-04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역시 어마어마한 화가님의 독서목록!
Three keys도 끝나가시죠? 저도 4 월엔 크리스틴 델피 도전~!

거리의화가 2024-04-05 08:23   좋아요 1 | URL
Three Keys 매일 한 챕터씩 읽고 있어서 4월 마지막 날 끝날 것 같은데요? 크리스틴 델피 받았는데 책 사이즈는 엄청 작지만 안에 글씨는 나름 커서 다행이었던! 얇은 책이 더 어려울 것 같아 쫄립니다ㅋㅋ 괭님도 이 달 즐독하세요^^

자목련 2024-04-04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이 읽으실 4월의 책도 기대가 되지만 산책에서 만날 하늘과 꽃들의 사진도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05 08:24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도 꽃을 만날 수 있는 4월을 좋아하시죠? 이 곳에 벚꽃이 만개했는데 하필 어제, 오늘 날이 흐려서 아쉽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오며 가며 찍고 있어요. 이 계절에 만날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이죠^^ 공유하겠습니다. 봄날 일상도, 독서도 응원합니다^^

희선 2024-04-05 0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안 좋은 마음을 달래셨다니, 사월에도 책 즐겁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사월 건강하게 잘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5 08:26   좋아요 1 | URL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긴 한데 스트레스를 뿌리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걷기와 독서가 있어 힐링이 되네요. 희선님도 행복한 4월 되시길 바라요!

새파랑 2024-04-05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철학 역사 미술 하면 화가님~!!
3월에 12권이니 4월에는 16권?

도스토예프스키 저 전집도 소장하고 싶네요 ㅜㅜ

거리의화가 2024-04-05 15:58   좋아요 1 | URL
ㅋㅋ 4월에 16권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아요. 꽃구경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하려면?ㅎㅎ
그나저나 도스토옙스키 마니아시라 전집 장만하셨어야하는데 제가 다 아쉽습니다ㅠㅠ 새파랑님 4월에도 독서 생활 즐겁게 이어가셔요^^
 

비록 1840~1860년 사이의 시기에 미미하게나마 서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긴 했지만 서구와의 관계에 대한 중국인들의 견해는 여전히 오해와 사상적·제도적 타성으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외국의 현실을 고려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훨씬 더 강력한 충격이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왕국을 아연실색게 할 때까지 중국은 전 국민적인 절박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근대적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에서 20년의 세월을 완전히 ‘허송해버리는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다. - P263

서구와의 관계에 대한 중국의 관점은 1840~1895년 사이에 계속변화했는데, 1860년 이후 그러한 변화는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는 1840년대의 쇄국‘ 정책에서1860년대에는 유가의 성과 신에 기초한 ‘수신‘ 정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근대적 외교술, 특히 국제법 사상은 이후 20년 동안 계속강조되었다. 1880~1890년대에는 권력 정치, 특히 세력 균형론과 강대국과의 동맹론이 한때를 풍미했다. 다른 한편 1860년대 중반에는민족의식이 등장해 날로 강력해져갔다. 1840~1860년 사이에는 상업을 이용해 오랑캐들을 견제하자는 원칙이 인기를 끌었으나 1860~1870년대에 그것은 ‘상전‘이라는 좀더 역동적인 관념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들은 유교의 이상주의적 태도에서 실용주의적 태도로의 전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 P327

근대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화를 의미했다. 많은 사대부들이 ‘양무‘ 운동에 찬성했던 것은 그것이 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을 망국의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서구적이라는이유로 ‘양무‘ 운동에 반대했다. 그것이 유가 학설을 대체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중국을 구하는 동시에 중국 고유의 방식을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한 그들은 모순적인 태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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