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많은 대화편에서 전개했던 이야기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어렵다. 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고, 대화편마다 다양한 주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게다가 그의 사유 자체가 계속 변모를겪어나갔으며, 때때로 모순된 이야기들까지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의 대화편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그래서 그의 사유 전반을 꿰고 있다고 생각되는 테마가 존재한다. 바로 ‘이데아론‘이다. 이데아론이라는플라톤의 존재론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사유를 비로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52

플라톤 자신은 그가 "형상(相)"(‘idea‘ 또는 ‘eidos‘라는 말을 썼다)이라 부른 이런 존재의 차원이 실재한다는 가설을 제시했으며,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차원이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하는 현실적차원보다 더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후에 등장하는 이런 유형의생각들 모두에 ‘플라톤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감각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이성‘의 존재와 이성의 파악 대상인 ‘본질‘의 실재성을 믿는 각종 유형의 철학들은 모두 플라톤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들이 존재한다"고 응했고(본질주의 존재론), "존재한다 해도 알 수가 없다"에 "이성이 알 수 있다"고 응했으며(합리주의 인식론),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수가 없다"에 "우리 모두는 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응한 것이다(보편주의 윤리학). 플라톤이 최초의 위대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뜻한다. 이후에 전개되는 서양 철학사에서 누구도 이 플라톤적 울림에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 P254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가짜‘에 대한 경계심과 그반면으로서 진짜를 가려내려는 열정이었다. 그의 사유는 가짜가 판을치는 그리고 오히려 진짜는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에서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는, 사물들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달리 말해 사물들을 존재론적 위계(ontological hierarchy)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진품을 가려내려는 열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사유 전체는 모방(‘미메시스‘) 개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모든 구별, 평가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데아를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있는가가 그 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판별할 수 있게해주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들이 사물들의 실재, 진상(眞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P341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학문을 분류했으며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비로소 ‘학문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가 분류한 학문 체계는 그 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많은 변이를 겪게 되지만 그 근본 구도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학문을 분류한 후 그 분야 하나하나에 대해 저작을 썼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의 제목(또는 관련어) 자체가 바로 그 학문 분야의 이름이 되었고, 그의 학문 체계가 바로 학문의 체계가 되었다. - P353

사유의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지성과 논리를 넘어선다는 상당수의 시도들이 진정한 철학적 도약을 이루기보다는 반지성주의적 폐해들로 흐르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한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잘 보여주었듯이 이성/지성은 그 한계에 갇힐 때 얄궂게도 비이성적/비합리적인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때문에, 앙드레 랄랑드가 특히 강조했듯이, 진정한 이성/지성은 항상 스스로의 한계를 비판하고 초월해가는 이성/지성이어야 한다. 자체의 한계에 갇힌 이성도 또 그것을 빗나간 방식으로 초월하려 하는 반(反) 이성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은 이 모든 문제들의 중심축이다. 이 텍스트들이야말로 한편으로 기성 사유의 한계들을 돌파해나가려는 진지한시도들이 출발해야 할 지점이고, 또 온갖 형태의 반지성주의적 사조들을 그것으로 데려와 보어야할 지점일 것이다. - P396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질료 및 시간과 떼어서는 의미를 상실하는, 플라톤의 형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현실태로서의 형상이 잠재태로서의 질료를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구도는 그가 결국 플라톤을 잇고 있다는 점을 다시한 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형상과 질료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는 이원적 일원의 세계이며, 질료의 잠재성을 형상이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은 무엇보다 생명체들의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잇고 있지만,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색채를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플라톤주의인 것이다. - P440

인간의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이 물음은 곧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식물에게도 다른 동물에게도 없는 것,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것은 곧 이성(‘로고스‘)이다. 인간의 핵심적인 능력은 곧 이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맥락에서 본다면 인간이 그이성을 현실적으로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성 또는 이성을갖춘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아레테이며 인간의 아레테를 발휘하는 것이행복이라면, 행복이란 결국 "이성을 발휘하는 실천적 삶", "이성에 따른영혼의 활동", "인간다움/인간적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최고선/행복이란 가장 인간다운 것 즉 이성에따라 실천하는 삶이다. - P447

플라톤에게 당대 현실은 어떻게든 극복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BC 399년)을 전후한 그리스의 상황은 그가 꿈꾸었던이데아의 차원과는 대극에 있는 현실이었다. 그에게 이데아란 이 현실을그쪽으로 변화시켜가야 할 방향/목적이었고 현실의 타락을 비추어주는시금석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은 현실의 사물들에 내재해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좀더 완성된 형태로 끌어주는 동력이었다. 그리스 문명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아테네에서 ‘이방인‘이었다. 때문에 그 자신 인생에서 몇 차례의 굴곡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현실을 긍정하면서 거기에 보다 높은완성도를 부여하려는 안온(安穩)한 눈길이 존재한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이 매우 세련되고 균형 잡힌 사유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정치학은 당대에 새롭게 도래하던 기운(氣運)들에 무척이나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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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공학은 개별 유기체를 모델로 삼아, 신경계를 정점에 두는 통제 위계를 구축할 방법을 찾았다. 이런 유기체적 모델은 사회를 조화롭고 기능이 적절히 분배되어 균형 잡힌 전체로 파악하기 쉽게 만들었다. 유기적 생명과 본능 그리고 성은 경영의 대상이 되었다. 유기체 피라미드 맨 위에는 정신이 놓여 있어서, 경쟁이 과도해지면 이타성이 상황을 완화할 수 있게끔 했다. 후에 사회생물학이 되는 심리생물학은 경쟁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이타성을 합리화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지배라는 기본 구조는 위협하지 않고 말이다. - P89

인간 종에 비해서는 덜 분화되어 있어도, 침팬지들에게는-"사회조직의 단위로서" 인성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인성이란기능적 전체, "유기체의 심리생물학적 속성과 능력 전체가 통합된 산물"을 뜻했다. 정상적인 인성의 경우 유전된 특징 및 기본적인 유기체적 충동은 의식적 자아와 통합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인성은 생명과 인간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핵심적인 과학적 연구대상이었다.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인성을 갖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성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개인과 정체가 조율되어 행복할 수 있었다. 여키스는 다양성과 가변성을 과소평가하기를 원치 않았다. 성과 지배처럼 핵심적인 충동과, 남성성 및 여성성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과 관련해 인성 교화는 과학적 공공서비스를 책임감 있게 제공하는 문제였다. 합리적 기준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할당할 가능성이 여기 걸려 있었다. - P102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통제 전략을 바꾸어, 운영 연구에 기반해 유기체에서 체계로, 우생학에서 인구 관리로, 인사관리에서 조직구조(사회기술적 체계와 인체공학)로 그 대상을 바꾸었다[릴리엔펠드(Lilienfeld), 1978].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자연적 대상을정보의 생산, 이전, 저장의 메커니즘을 통해 적절하게 이해할 수있는 기술적 장치로 다시 이론화하는 것을 뜻했다.
전쟁 이후 이루어진 전자공학산업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은, 축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면이 조직화된 안정적인 체계를 고안하고 관리하는 사회적, 군사적 계획 수립 전략과 점점 강한 관계를 맺었다. - P107

사회생물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체계 유형을 연구한다. 바로개체군과 사회다. 둘 모두 정보의 경계 및 에너지 흐름이라는 용어를 통해 연구된다. 정보와 에너지는 동전의 양면이다. 열역학과정보과학으로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개체군은 시간에 따른 유전자 흐름의 경계라는 측면에서 계측되며, 유전자는 정보가 물질화된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사회를 커뮤니케이션 지대와 정보교환의 용어를 통해 연구한다(윌슨, 1971, 1975). 개체는사회생물학 및 다른 생명과학 분야에 공통된 체계다.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상호작용하고, 마찬가지로 정보 및 에너지의 구조화된 흐름의 일부로서 연구된다. 그 결과 보다 높은 차원(개체군과사회)이 생겨난다. 개체는 유전자가 구성하거나 작동을 지시하는매개 구조다. - P113

자연은 인간의 본성을 포함해희소성과 경쟁의 기초 위에 이론화되고 구축되었다. 게다가 우리의 본성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안에서 그를 위해 구축된 생명과학을 구성함으로써 이론화되고 개발되었다. 이것은 풍요를 공동선이 아니라 사적 이해를 위해 전유하는 형태로서, 희소성 관리의일환이다. 이는 또한 가부장제에 근본적인 명령-통제 체계의 논리와 기술이 점증하는 형태로 지배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의 일부다. 이와 같은 관행이 자연을 이론화하는 우리를 이끄는 만큼 우리는 계속 무지하며, 우리는 과학의 실천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것은 투쟁의 문제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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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수문이 이미 죽고 나자 중사(中使) 가운데 바로 북방 변경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무부(武夫)와 사나운 병졸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곽수문은 봉록을 받게 되면 모두 소고기와 술을 사서 병사들에게 호군(?軍)32하였는데 죽은 뒤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탄식하고 애석해 하다가 바로 그 집에 전(錢) 5백만을 하사하고 이어서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요(遼)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침략할 것을 모의하여 북악묘(北岳廟)52에 가서 이것을 점치게 하였는데, 신(神)이 허락하지 않자 요(遼)나라 사람들이 불을 멋대로 질러 묘(廟, 북악묘)를 태워버리고 갔다.

가서 옛 서적과 기이한 그림과 선현(先賢)들의 묵적(墨跡)을 모으게 하였는데, 몇 년 사이에 도적(圖籍)을 궁궐에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사관(史館)에 조서를 내려서 천문(天文)·점후(占候)·참위(讖緯)·방술(方術) 등에 관한 책 5,010권을 다 가져오고 아울러 옛날 그림 묵적 114축(軸)을 내어서 모두 비각에 수장하였다.


8월 초하루 계묘일에 비서감인 이지(李至, 947~1001)와 우복야인 이방(李昉)·이부상서인 송기(宋琪, 917~996)·좌산기상시인 서현(徐鉉, 916~991) 그리고 한림학사·제조시랑(諸曹侍郞)·급사(給事)·간의(諫議)·사인(舍人) 등이 비각(?閣)에서 책을 보았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고, 도적(圖籍)을 크게 벌려 놓고 마음대로 보게 하였으며, 다음 날 또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인 왕화기(王化基, 944~1010)와 삼관학사에게 나란히 비각에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에 앞서서 황제가 지은 시문(詩文)을 비각에 수장(受藏)하였고 또 사자를 파견하여 여러 도(道)에

황제의 성품은 절약하고 검소하여 조회에서 물러가서는 항상 화양건을 착용하였고 베로 만든 옷과 굵은 명주로 된 띠를 맸으며 내복(內服)은 가는 명주로 만들었는데, 모두 여러 차례 세탁한 것이었고, 승여(乘輿)와 공급하는데 사용한 물건은 늘려 보탠 것이 없었다.

9월 을해일(3일)에 북여진(北女眞)54의 4부가 요(遼)에 붙기를 요청하였다.

경술일(9일)에 요(遼)에서는 이계천(李繼遷, 963~1004)을 하국왕(夏國王)로 책봉하였다.

정사일(16일)에 양주(?州, 甘肅省 寧夏)관찰사·판웅주사(判雄州事)인 하비(下?, 江蘇省 ?寧縣) 사람 유복(劉福, 928~991)이 죽었는데, 태부·충정(忠正)절도사를 증직하였다. 유복은 무인(武人)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데 아랫사람을 어거(馭車)하는 데는 방략을 갖고 있었고, 정치를 하는 것은 간단하고 쉽게 하였다. 웅주(雄州, 寧夏 中衛市)에서 5년 있었는데, 경내는 편안하고 고요하여 백성들이 전운사를 막고 〔유복의〕 정치적 업적을 추가로 진술하기를 원하여 그 상황을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서 유애비(遺愛碑)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항상 유복에게 큰 집을 세우라고 권고하였지만 유복은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받는 녹봉은 아주 후하여 충분히 집을 빌려서 스스로를 비호(庇護)한다. 너희들은 아직 한 자 만큼의 공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어찌 살 집을 지어서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는 계책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황제가 그 말을 듣고 백금 5천 량(兩)을 그 아들에게 하사하고 집을 사서 거주하게 하였다.

좌정언인 사필이 자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논하니 황제는 그 충성스러운 것을 가상히 생각하여 병진일(18일)에 우사간(右司諫)으로 발탁하고 금자(金紫)73와 아울러 전(錢) 30만을 하사하였다. 사필이 어느 날 편전(便殿)에서 응대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다시금 얼굴을 보면서 상찬(賞讚)하고 격려하니 사필이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폐하께서 간언을 좇는 것이 물 흐름 같으시니 그러므로 신은 정성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당 말(唐末)에 맹소도(孟昭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침에 간쟁하는 상소문을 올리었는데 저녁이 되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 시대에 이와 같았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감동하는 얼굴을 오래 짓고 있었다.

정해일(21일)에 병주(幷州, 山西省 太原市)에서 거란의 400여 명이 내부(內附)76하였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 때문에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국가에 만약에 밖의 걱정거리가 없다면 반드시 안의 근심거리가 있다. 밖의 근심거리는 변방 일에 불과하여 모두 미리 막을 수 있지만 오직 간사하기가 형편없는 사람들이 만약에 안에서 걱정거리를 만든다면 깊이 두려워할 만하다."

지지난 해에 북방의 군사[요의 군사]가 변경으로 들어 와서 살아있는 영혼들이 폐해를 입었습니다. 만승(萬乘, 황제)께서는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지만 많은 관리들은 도와주는 공로를 세우지 않았으니, 동료들이 함께 일을 하면서 삼가고 두려워하며 청렴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오직 대책을 바칠 때에는 조금씩 잠자코 있으니 어찌 급히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처리하겠습니까?

위로군(威虜軍, 河北省 徐水縣)의 군량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자 요인(遼人)들은 이를 엿보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정주로도부서(定州路都部署, 치소는 定州 安喜縣)인 이계륭(李繼隆, 950~1005)에게 조서를 내려서 진·정(鎭·定)의 대군을 징발하여 군량 1천여 승을 호송하게 하였다. 요(遼) 유열(于越)인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이 이 소식을 듣고 정예의 기병 수만을 인솔하여 와서 맞았는데, 북면연변도순검(北面緣邊都巡檢)인 준의(浚儀, 河南省 開封市) 사람 윤계륜(尹繼倫, 947~996)이 소속의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변새(邊塞)에서 순시를 하다가 이들을 만났지만, 야율휴격은 공격하지 아니하고 지나가면서 지름길로 대군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윤계륜이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들은 우리를 마치 어육(魚肉)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저들이 승리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이긴 기세를 타고 우리를 북쪽으로 몰아 갈 것이고, 승리를 못한다면 역시 우리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니 우리들은 씨도 안 남을 것이다!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마땅히 갑옷을 둘둘 말고 함매(銜枚)하여 그들의 뒤를 습격해야 마땅하다. 저들의 날카로운 기세는 앞으로 향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도착하는 것을 헤아리지 않을 것인데, 힘껏 싸워서 승리하면 충분이 자립(自立)할 것이고, 설사 패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찌 망하여 북쪽 땅에서 귀신이 될 수 있을까보냐?"

무리들이 분격(憤激)하여 명령을 좇았다.

윤계륜은 이어서 군중에서 말에 꼴을 먹이게 하고, 밤이 되자 사람을 파견하여 짧은 무기를 가지고 몰래 그들의 뒤를 밟게 하였다. 수십 리를 가서 당하(唐河, 장강지류)의 서하(徐河, 河北 徐水의 南쪽)에 도착하였는데19 날이 아직 밝지 않았지만 야율휴격은 대군에서 45리20 떨어졌으며 윤계륜은 성의 북쪽에 진을 늘어놓고 그를 기다렸다. 적들은 바야흐로 모여서 식사를 하였는데, 이미 밥을 다 먹고 곧 나아가 싸우려고 하자, 윤계륜은 그들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서 급히 그들을 쳐서 그들의 대장 한 명을 죽이자 무리들은 드디어 놀라서 혼란에 빠졌다.

야율휴격은 식사를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가 수저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짧은 무기에 그의 팔을 맞아 상처가 심하였으며 좋은 말에 올라 먼저 숨어버렸다. 요의 군사들은 멀리 대군을 바라보고는 드디어 붕궤되니 서로 짓밟으니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계륭이 진주부도부서(鎭州副都部署)인 범정소(范廷召, 927~1001)와 더불어 뒤를 쫓아 달려가서 서하를 넘어 10여 리를 갔는데 포로로 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주부도부서(定州副都部署)인 공수정(孔守正)이 또 요나라 사람들과 조하(曹河)의 사촌(斜邨)에서 싸워서 그 장수 대영(大盈) 등의 목을 베었다. 요나라 사람들은 이로부터 수년 동안 대거(大擧) 남하하는 일이 없었으며 윤계륜의 얼굴이 검었으므로 서로 경계하여 말하였다.

"마땅히 흑면대왕(黑面大王)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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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무오일(4일)에 요의 군사가 사퇴역(沙堆驛)을 깨뜨렸다. 경오일(16일)에는 항복한 군사를 나누어 7지휘(指揮)에 배치하고 귀성군(歸聖軍)이라고 불렀다. 행군참모(行軍參謀)인 마득신(馬得臣, ?~989)이 말하였다.

"송의 군사에게 항복하라고 유시하였지만 아마도 끝내 써 먹을 수가 없을까 걱정되니 청컨대 풀어주어 돌려보내십시오."

요주(遼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신사일(27일)에 해왕인 주녕(籌寧)이 남쪽의 군사를 익진관(益津關, 송·요 분계선에 위치)에서 패배시켰다. 계미일(29일)에 군사를 장성(長城) 입구로 내 보내니 정주(定州, 河北省, 保定市와 石家莊市의 사이)의 수장(守將)인 이흥(李興)이 이를 쳤지만 야율휴격(耶律休格, 休哥)에게 패배하였다.

요(遼)의 군사가 당하(唐河, 하북 중부)의 북쪽에 도착하니 〔송의〕 제장들은 조서를 좇아서 일을 하려고 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들을 깨끗이 하고 더불어 싸우지 않으려 하였는데, 정주(定州)감군인 원계충(袁繼忠, 938~992)이 말하였다.

"적의 기병이 가까이에 있고 성 안에는 많은 군사를 주둔하고 있으면서 목을 베어 없앨 수 없다면 멀리 말을 달려 깊이 들어갈 것인데, 어찌 잘라 충격을 주어 모욕을 막는데 쓰겠는가! 내가 곧 자신이 사졸의 앞에 나아가서 적에게 죽을 것이다!"

말씨와 기세가 강개(?慨)하니 무리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역주(易州)의 정새(靜塞)에 있는 기병(騎兵)은 특히 날래고 과감하였는데, 이계륭이 가져다가 자기 휘하에 예속시키면서 그들의 처자를 성 안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원계충이 이계륭에게 말하였다.

"이 정예의 병졸이 단지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에 그치게 하였는데 만일에 구적(寇賊)이 이르게 되면 성 안에서 누가 더불어 적을 막을 것인가!"

이계륭이 좇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하였는데 과연 요의 군사가 이르렀고, 역주는 드디어 함락되었으며 병졸들의 처자는 모두 노략되었다. 이계륭이 병졸을 나누어 제군(諸軍)에 예속시키려고 하니 원계충이 말하였다.

"아니 된다. 그러나 상주하여 그 군사의 명수(名數)를 올려주고 늠급(?給)을 우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절개(節槪)를 다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이계륭이 그 말을 좇으니 무리들이 모두 감격하여 기뻐하여 이계륭은 이어서 자기 예하에 예속시키기를 빌었다. 이에 이르러 먼저 들어온 사람들의 예봉을 꺾으니 요의 군사들은 크게 붕궤되었고 추격하여 조하(曹河)에 이르렀다.

호부랑중인 장계(張?, 934~997)가 주문(奏文)을 올려서 말하였다.

"유·계(幽·?)에서 군사 활동을 하면서부터 여기까지 여러 해가 쌓였는데 그 연고는 무엇입니까? 대개 중국(中國, 중원지역에 있는 나라 즉 宋)은 지세(地勢)의 이로움을 잃었고, 군사력을 분산되었는데 장수는 중앙(中央, 조정)에서 통제하며 병사들이 명령을 다 사용하지 않는 연고입니다.

중국이 믿는 것은 험한 지형뿐입니다. 삭방(朔方, 북방)에 있는 요새의 남쪽은 지형이 거듭하여 험하고 깊은 산과 큰 골짜기가 만 리에 이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안팎을 한계 짓고 있습니다.

국가가 통제하고 어거하는 길52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살펴 관찰하여 만 가지가 다 안전한 계략을 채택해야 합니다.

신은 얼마 전에 탁주에서의 전투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융(元戎, 主將)은 장교들의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고 장교는 삼군 가운데 용감한 사람과 겁먹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각기 서로 관할(管轄)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고 삼가는 것으로 자임(自任)하며 아직 상을 주어 효과 있게 쓰인 것과 명령을 배반한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최근에 듣기로는 탁주의 싸움에서 적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만 개의 강노(强弩)가 일제히 발사되었고, 적의 기병이 이미 돌아갔는데, 화살이 산처

럼 쌓였다고 합니다. 이에 과극(戈戟)과 도검(刀劍)은 그 쓰인 것이 모두 그러함을 알겠으며, 이는 천병(天兵, 천자의 변사, 즉 송의 군대)을 몰아서 빈주먹을 휘둘러서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신이 최근에 듣기로는 탁주(?州)의 전투에서 진지(陣地)의 전장(戰場)이 이미 포진(布陣)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병장기(兵仗器)를 가지려고 찾고 어떤 사람은 부대(部隊)를 옮겨가며 수많은 사람들이 전하고 부르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비등(沸騰)하여 마침내 수레가 혼란에 빠지고 놀라며 먼지가 일어나 갈 곳을 알지 못하여서 시석(矢石)은 아직 교차되지 않았는데, 기정(奇正)55은 먼저 혼란에 빠졌다고 합니다. 군정(軍政)이 이와 같은데 누가 패망하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우정언·직사관인 왕우칭(王禹?, 954~1001)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변방에 대한 대비책은 밖으로 그에 적당한 사람에게 맡기고 안으로는 그 덕을 닦는데 있습니다. 밖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군사 세력의 걱정거리가 합쳐지지 않는데 있고, 장수인 신하의 걱정거리는 권한이 없는데 있습니다.

둘째로는 변방을 정탐(偵探)하며 순라(巡邏)를 도는 일에서는 소인(小人)인 신하를 채용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오래된 신하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채용하시어서 왕래하며 펼쳐서 위무하면서 온화한 안색을 내려 주시고 모든 마음을 숨김이 없게 하신다면 변방의 업무는 해결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간첩(間諜)을 운영하여 그들[적]을 떼어 놓고 틈새를 이용하여 그것을 빼앗습니다.

의당 두터운 이익을 덜어내어 그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먹여서 그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공격을 하게 하는 것이 중국(中國)의 이로움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애통(哀痛)하는 조서를 내리시어서 변방에 사는 백성들을 감격하게 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의당 애통하는 조서를 내리어서 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 고유(告諭)하여 하나의 수급을 얻는 사람에게는 백(帛)을 하사하고 말 한 필을 얻는 사람에게는 그 값을 돌려주며 부수(部帥)를 얻는 사람에게는 산관(散官)을 준다고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사람들은 그 용기를 백배하고 병사들은 그 마음을 하나로 할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은 관리를 살피고 뽑아 올리는 것을 신중히 하며 대신을 믿고 쓰며 놀고 게으른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지제고인 전석(田錫, 940~1004)이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오늘날 적을 막는 것에서는 장수를 선발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며, 이미 장수를 찾고 나서는 청하여 책임을 맡기고 성공하기를 책임 지우는데, 진지의 계획을 내려 줄 필요가 없고 방략(方略)을 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기회에 따라서 변화를 만들게 하며 틈을 관찰하고 마땅하게 통제하도록 하면 성공 못할 것이 없습니다.

거란은 스스로 여러 나라[우호국]를 소유하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일찍이 탐색하신 것 가운데 무릇 몇 개의 나라가 그들과 더불어 원수를 맺고 있는지

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모두 이를 알았다면 무거운 상을 이용하고 간첩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간첩이 만약에 가게 된다면 거란은 스스로 혼란해 질 것이니 변방의 시골은 스스로 편안할 것입니다.

조서를 내려서 〔황제가〕 자기에게 죄를 주었다.

당시에 진사 17명이 집안 식구를 데리고 요(遼)에 귀부하였는데, 요주(遼主)가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그 중에 급제한 사람에게 시험을 치게 하여 국학관(國學官)으로 보임하고 나머지는 현(縣)의 주부(主簿)와 현위(縣尉)로 하였다.

황제가 조보에게 유시(諭示)하여 말하였다.

"경은 자리가 높은 것을 가지고 스스로 방종하지 말고 권력이 무겁다고 스스로 교만하지 말며 다만 상을 주고 벌을 주는데 삼가 〔사사롭게〕 아끼고 미워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군사와 국가의 일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겠소!"

여몽정은 바탕이 후덕하고 관대하며 간편하여 두터운 명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였으며 일을 만나서는 과감하게 말을 하였으며 매번 정사를 논의하면서 아직 마땅하지 않다면 반드시 굳게 안 된다고 하였다. 황제는 그가 감추지 않는 것을 가상(嘉賞)히 여겼으니 그러므로 조보와 함께 명령을 내려서 조보의 옛날 은덕에 의거하여 그를 위한 모범으로 삼게 하였다. 여몽정은 후배이지만 빨리 나아가서 조보와 같은 지위에 있게 되었는데 조보는 아주 그를 밀어서 허락하였다.

개봉윤인 진왕(陳王) 조원희(趙元僖)의 봉작(封爵)을 올려서 허왕(許王)으로 삼고, 한왕(韓王) 조원간(趙元侃)의 봉작을 올려서 양왕(襄王)으로 삼았으며, 기왕(冀王) 조원빈(趙元?)의 봉작을 올려서 월왕(越王)으로 삼았다. 황제가 손수 조서를 내려서 조원희 등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깊은 궁궐에서 낳아서 자랐으니 반드시 자기를 이기도록 힘쓰고 자세히 하며 낮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라. 매번 한 벌의 옷을 입을 적마다 누에치는 여인을 가엽게 여기고 매번 한 그릇 밥을 먹을 적마다 밭가는 농부를 생각하라.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는 시점에 이르면 그에 대한 기쁘거나 화내는 것을 신중히 하여 멋대로 하지 말라. 짐은 매번 여러 신하를 예로 접하면서 계옥(啓沃)10하기를 요구하는데, 너희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의 단점을 천시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을 믿지 말아서야 마침내 부귀함을 영원히 지키고 아름다운 끝을 보존할 것이다. 먼저 계셨던 현인들이 말하였다. ‘나를 거스르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고, 나에게 순응하는 사람은 나의 도적이다.’ 이것은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5월 신유일(5일)에 비각(秘閣)을 숭문원(崇文院)에 두고 세 관(館)으로 나누어 책 1만여 권으로 그 안을 채웠다. 이부시랑인 이지(李至, 947~1001)에게 비서감(秘書監)을 겸직하도록 명령하고 황제가 이지에게 말하였다.

"인군(人君)이란 마땅히 담담하고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고 좋아하는 것을 밖에 형체로 보이게 해서는 안 되니 간사하고 망령된 것이 스스로 들어오는 일이 없다. 짐은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책 읽기는 좋아하여 고금(古今)의 성패(成敗)를 많이 보아서 좋은 것은 이를 좇고 좋지 않은 것은 이를 고치니 이처럼 할 뿐이다."

이지 등이 전각(殿閣)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황제는 반드시 사자를 파견하여 연회를 내려주었고, 또 삼관의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참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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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과거는 논쟁지대다

우리가 재생산과 생산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이중적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지배의 자연적·문화적 필요성의 전망을 강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을 실천하는 다른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즉, 이론의 범주 및 통제와 적대의 실천에 압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우리 자신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현재로서는 단편적인 가능성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줄 수 있다. - P44

과학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과거의 규칙성과 진행과정을 알게 되면, 사건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우리의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이론화하도록 훈련하는 활동이며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데에 보태어) 세계 속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고 구성하며, 미래를 만드는 전략을 개발한다. - P46

밀러와 주커먼은 인간가족(이른바 지속적인 여성 수용성)의 생물학적 핵심에 해당하는특성이, 포유류가 번식을 위해 이루는 집단에서 모두 발견된다는의견을 피력했다. 단지 주커먼은 그로써 형성되는 영장류의 사회형태에 대한 분석으로 시야를 넓혀 나갔을 뿐이다. - P54

주커먼에게 사회 진화에서 중심적인 사건은 극단적인 계절성과 암컷의 지속적인 성적 ‘수용성‘에 토대를 둔 장기간의 유대(association)가 도입되는 사건이었다. 우선 발정기가 도입되었고, 그 뒤를 따라 생리주기가 도입되면서 성교에 몰두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월 주기가 계절 주기를 대체했고 사회적 혁명이 그 뒤를 따랐다. 동물들이 지속적인 유대에서 살아남으려면강력한 통제장치가 필요했다. 그에 따라 ‘하렘‘이 발전한 것이다. - P56

주커먼은 남성 경쟁은 자연스럽고 여성 성욕은 위험하다고 강조하는 과학적 믿음을 의심하는 연구자까지도 따라야만 하는 질문 형식을 설정했다. 성욕을 지배에 묶어 두는 그의 관점은 1930년대의 생리학과 행동과학이 수용할 수 있는 형태였고 지배 상태를 개념보다는 속성 내지는 사실로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영장류학은 계속해서 지배 행동의 선택적 이득에 대해 줄곧 질문했고, 번식상의 이득과 지배라 일컬어지는 무엇 사이의 관계를, 검증하기보다는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1965년 셔우드 워시번의 학생 두 명이 논문 한 편을 발표해서연중 지속되는 암컷의 성욕을 영장류 사회의 기원으로 보는 그의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 그의 이론은 확신 속에 지탱되었다. 잠복한 프로이트주의, 생화학적 메커니즘, 사회적 행동 연구를 혼합하는 주커먼의 방식은 장기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 P59

1974년 로웰은 사회구조를 이해할 때 지배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론을 요약했다. 로웰에 따르면 두 가지 핵심 접근법이 있다. 첫째, 잠정적으로 지배로 간주되는 행동 전체를 학습된 반응으로 봄으로써 현대 동물심리학 이론이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둘째, 지배를 선택압에 종속된 특징이나 적응적복합체로 간주하게 만드는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 다시 말하면, 이른바 지배 행동은 번식 성공과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 P62

스트레스 반응의 차이 배후에 있는 개체군의 유전적 다양성은 진화 과정에서 보존될 것이다. 체계 전반의 균형에 대한 사회적 역할의기능주의적 관념, 생화학적 호르몬 기능에 대한 유전적 개념, 그리고 지배 - 종속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법은 모두 스트레스라는중심 개념에서 수렴된다. - P64

생물학적 특성은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젯거리가 되었다. 점점 빨라지는 기술적 진보 탓에 오적응이 되는 일이 빈번한 것이다. 옛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의 몸은, 언를 통한 새로운 기술의 문화적 전수 속도에 발을 맞추지 못했ㄷ그렇다면 이제 사회통제가 와해될 때, 병리적 파괴가 뒤따를이라고 예상해야만 한다. 여기서 햄버그와 워시번이 제공하는례는 나치 독일, 콩고, 알제리, 베트남의 사례다! 교훈은, 우리우리의 본성을 통제하려면 우선 그 본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난점은, 영장류가 현대의 인간 집단을 이끈다는 사실이다. 영장류의 진화사는 생물학적·사회적 전수를 통해 위계ㄷ대한 강한 선호를 낳았다". 이 논리는 정보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과학 이전의 관습을 합리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진보된 세계에서 과학전의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공격적인 종은, 대인 갈등과 국제 전쟁을 통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특정한 사회질서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건 정치와 가치의 문제다) 모든진보된 사회를 위한 선결 조건을 수립하는 것, 즉 이제는 실효성이 없고 오적응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생물학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 P68

주커먼과 워시번의 수렵 논변을 추적해 온 독자의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로, 암컷 수용성은 암컷 선택이라는 다른 이름을 얻었고 그 유전적 결과 또한 컸다는 점이다.
둘째로, 송곳니의 축소라는 해부학적 현상은 다른 행동과 다른 기능이 가정될 때 재해석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 P79

각 설화의 목표는 인간 보편성과 문화의 기초로서간 본성을 그려 내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즘에 유용한 인간 본성의 재구성은 사회주의페미니즘의 사유에서 가장 경멸당하는 두 이론에서 도출되었다. 기능주의와 사회생물학이로 그것이다. 이 두 분야는 불평등한 경제와 정치적 구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한다고, 신체와 정체의 현재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을 합리화한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분명 로웰, 태너, 질먼이 보여 준 것처럼, 이 이론들은 다른 목표에 기여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가변성과 복잡성, 변화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바로 과학 내부로부터 생명사회적 논쟁에 진지하게참여할 수 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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