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쟁은 민족주의를 통해 정부와 국민이 하나의 목표로 굳게 단결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던 나라와 정부와 백성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따로 놀았던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전쟁에 나선 일본은 거국적인 역량을 총동원한 반면 청의 일반 백성들은전쟁과는 거의 동떨어져 있었으며 조정은 거의 전적으로 북양 함대와이홍장의 회군에게만 의지했다. 둘째, 청은 명확한 지휘 체계가 서 있지 않아서 명령이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거국적인 동원도 없었다. 총리아문, 지방 당국, 무책임한 청류파 관료들의 상충된 건의들은 청조의 우유부단함만 초래했을 뿐이다. 조선의 외교와 군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이홍장은 정책 결정권이 없었으며 자기 관할 밖에 있는 전함과 군대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다. - P188

셋째, 조정과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는 처음부터 청의 노력에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태후가 여름 별궁인 이화원 건축을위해 해군 기금에서 수백만 냥을 전용한 것, 그녀의 환관 총애, 사회전반의 도덕성 타락도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이홍장이 정직성보다는개인적 충성심과 복종심에 따라 인선한 북양 함대의 사령부에서 특히부패가 만연했다. 많은 군관들이 태감 이연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으며 공금을 빼돌려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는 이들의 불법 행위를 비호해주었다.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북양 함대는 사실상 약체였다. 이홍장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먼저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홍장의 외교는 국제 정치에 대한 이해 결여, 개인의 협상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구태의연한 이이제이 정책에의의존 등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의 중재가무산되자 이홍장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구했으나 양쪽 다 일본을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었다. - P189

의화단 운동은 만주 조정의 보수파, 보수적인 관료와 신사들, 무지몽매하고 미신을 믿는 민중의 힘이 결합해 전개된 것이었다. 이 운동은 외국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완전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 내재적으로는 애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부 다른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동기는 타당했으나 방법은 부적절했던 일종의 원시적인 애국적 농민봉기로 간주하고 있기도 하다. - P219

1905년 일본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영국과 좀더 긴밀한 동맹 관계를 재설정한 것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그것이 중국에서의 열강들 간의 경쟁을 종식시킨 것은 아니지만 1895년부터 빈사 상태의 청 제국을 위협해온 영토 분할 위협을제거한 것만은 분명했다.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거의 틀림없이 만주그리고 아마 몽골까지 합병했을 것이고, 다른 열강들로 하여금 영토배상을 요구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패전한 러시아는 발칸반도로 눈을 돌렸고,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과•충돌해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제 남만주에•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일본은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까지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 만주에 대 - P238

한 청의 통치권 회복은 비록 일본과 러시아가 소유한 특권에 의해 제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만주가 여전히 중국 땅으로 남을 것임을 보증해주었다. 1907년 4월 20일 조정은 만주족의 발상지라는 만주 지역의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종결시키고 그곳을 정식 성으로 개편하기 위한조치를 취해 쉬스창을 총독 겸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펑톈, 지린, 헤이룽장 3성에 각각 무관 순무 대신 문관 순무를 파견해 총독을보필하도록 했다. 100)아울러 주목할 만한 것은 러일 전쟁의 충격으로 인해 중국에서 입헌 운동이 등장한 것이었다. 학자 출신으로 뒤에 기업가로 변신한 장젠은 "일본의 승리와 러시아의 패배는 입헌주의의 승리와 군주제의패배를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1906년 9월 1일 조정은 마지못해 입헌정부를 세우겠다는 의향을 발표했으나 결코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는 않은 탓에 조정은 한층 더 백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으며, 혁명 운동은 새로운 동력을 얻어 가속화되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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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이 되면 청의 경제는 이미 이 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기술(기계적·조직적)로 도달할 수 있는 발전의 한계에 이르러 있었고, 1911년까지 극소수의신(‘선진적‘, ‘근대적‘)기술만이 수입되어 채택되거나 내부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부문이나 민간 부문 모두 이념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경제 발전을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할 만한 역량을갖고 있지 못했다.
다른 한편 각 부문 간의 긴장과 지방 간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종말을 맞이할 무렵까지도 이 경제 체제가 치명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거나 전복되고 폐기되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는 징 - P125

조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최저 생활수준에 근접한, 하지만그래도 여전히 그로부터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이 점을 언급하는삶을 살고 있었다. 사회 혼란과 계급 갈등은것은 아주 중요하다-
지역적인 것으로 그쳤다. 그리고 그러한 소란은 근본적이고 체계적인악성 병폐의 징후라기보다는 범위와 강도 면에서 경제 체제 자체와는무관하게 가뭄, 홍수, 흉작, 비적 떼, 내전, 외세의 침입, 관료 부패 등과 같은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위기와 연동되어 발생했던 것처럼 보인다. 기술의 진보가 없는 상태에서 토지에 대한 심각한 인구 압력은 결국 경제 전체의 생존 능력을 위협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20세기 초에는 아직 의제로 등장하지 않았다. ‘평년‘ 에는 도시와 농촌 사람 모두 비록 형편없는 수준에서이기는 해도 옷을 입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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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용어의 탄생 - 역사의 행간에서 찾은 근대문명의 키워드
윤혜준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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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학자들이 때로는 ‘근대성’이라 부르는 대상, 즉 근대적 의식, 담론, 사상 등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근대’는 ‘담론’이기도 하지만 시대와 공간이기도 하다. - P7

이 책은 근대 문명의 키워드가 된 ‘말’의 역사를 다룬다. business, constitution, democracy, president, project, revolution, university… 현대에도 사용되는 이 말들의 기원이 되는 단어는 무엇이고, 이후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의미로 변화되었는지를 들여다본다. 한 마디로 말의 유래를 살피고 그 변화 과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말의 탄생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차례도 알파벳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America’는 첫 챕터이기도 하면서 우리와도 관련이 깊어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America’는 청나라 시절 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어 소리 ‘메이’를 표현한 글자로 한자, 아름다울 미를 써서 ‘미국’이 되었다. ‘아메리카’는 피렌체 공화국 지도자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함선을 타고 신대륙을 향해 갔으나 독일어 지리학 연구자인 발트제뮐러가 세계전도에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이름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된 ‘자본주의’는 ‘capitalism’의 번역어다. 원어는 라틴어 ‘capitals’인데 머리를 뜻하는 ‘caput’에서 따 왔다. 지금의 ‘자본’이라는 의미는 원래 ‘stock’을 주로 쓰다가 1880년 이후 경제사회체제 개념으로 ‘capitalism’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것이 사회주의에 대응하는 정치적 용어로도 확장되었다.
이처럼 키워드의 의미가 시작부터 지금까지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번역어와 영어의 의미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경쟁competition’도 라틴어 어원으로는 ‘함께 노력하다’라는 의미였는데 이것이 ‘다툼이나 경쟁’으로 변화한 것이다.
통화로 쓰이는 ‘currency’의 한자어의 부수는 책받침 부수로 ‘쉬엄쉬엄 간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currency’는 ‘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currency’는 18세기 이후 화폐 경제에 의한 경제 활동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지금의 돈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영어 ‘revolution’이나 프랑스어 ‘revolution’은 원래 어원적 의미만 따지면 획기적인 정치적 격변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라틴어 어원 ‘revolutus’를 그대로 따른다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앞으로 ‘전진’하는 혁명과는 오히려 정반대다.
‘industry’는 원래 ‘근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가 기계 산업 시대 이후가 되면서 지금의 ‘산업’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reform’은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종교 개혁 시기에 ‘과거로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변화했다가 현재의 ‘(사회 경제적인) 개혁’이라는 의미로까지 변했으니 상전벽해가 된 경우다.
물론 ‘소비consumption’은 ‘다 가져가다’로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부정적 의미로도 쓰인 경우도 있다.
또, 번역어 ‘프로젝트’, ‘리뷰’, ‘유토피아’ 등은 이제 완전히 우리말처럼 되어 버린 경우도 있어 흥미로웠다.

대부분은 기원어가 라틴어가 많았는데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스가 기원이라는 점도 주목이 되었다. 기원어의 의미는 ‘평민, 인민에 의한 지배, 통치’로 직접 민주정을 가리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이 되면 알렉시 드 토크빌이 주장한 기회의 평등, 지성의 평준화에 의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의미로 보편화된다.

키워드와 내용을 확인하면서 눈에 머무는 것이 있다면 관심이 가는 주제일 것이다. ‘헌법constitution’도 그런 경우다. 영국이 헌법에서 말한 바와 달리 그들은 식민지를 만들고 노예를 부리며 그들의 인격을 강탈했다. 워런 헤이스팅스의 말에 분노하며 도자기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저 문구를 보니 더 착잡함이 일 수 밖에 없었다.

에드먼드 버크가 워런 헤이스팅스를 기소하는 연설에서 ‘constitution’은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워런 헤이스팅스는 탄핵 재판장에서 자신이 통치한 인도 지역의 토착 ‘constitution’이란 원래 다수의 민중을 소수의 지배자가 “저급하고 미천한” 상태에 머물도록 억압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반면 에드먼드 버크는 고유의 억압적인 정치문화가 아니라 영국인 지배자 워런 헤이스팅스가 주도한 “부패”가 “그 나라헌정질서의 모든 이득을 상실하게 한 진정한 원인”이라고 단언했다.

18세기 내내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제도(카리브해) 영국 식민지에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파는 노예무역은 영국의 중요한 ‘기간산업’ 중 하나였다.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하던 시기인 1780년대 후반에는 온갖 사업자와 투자자가 관여하던 영국의 노예무역을 법으로 금지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의회 안팎에서 터져나왔다. - P67~68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에서 만든 ‘폐지론자’ 메달에 새겨진 메시지는 “나도 사람이고 (당신의) 형제 아닌가요?”다.


노예무역 페지론자들 중 한 명인 토머스 쿠퍼는 ‘consumption’이란 말속에 인간 생명의 ‘소모’와 설탕의 ‘소비’를 다음과 같이 연결하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900만 명의 노예가 유럽인들에 의해 소비되었다. 이러한 통계도 이미 한 10년 전 것이므로 한 100만 명은 더 추가해야 한다. 노예 하나를 포획하기 위해 열 명씩은 살육해야 한다는 계산을 해보면 그렇다. 그중에서 5분의 1은 배에 실려오는 도중에 죽고, 3분의 1은 농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죽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전혀 과장하지 않은 계산을 해보아도 유럽인들의 탐욕이 보여주는 악마적인 게걸스러움은 무려 1800만 명의 우리와 같은 동료 인간에 대한 살인을 통해 채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 맙소사, 그들은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 그렇게 하는가? 깜짝 놀란 독자는 이렇게 말할 법하다. “유럽의 신사 양반들이 마시는 차에 설탕을 타기 위해서!” 독자에게 해줄 답은 이것이다. - P84

‘계몽’이라는 단어에서도 비슷한 감상을 받았다. ‘빛’에서 기원한 이 개념은 점차 서구중심주의의 문명사적 개념’으로, 시대 정신이자 사상으로 확장되었으나 과연 그들만이 문명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계몽’은 이전의 ‘가르침, 훈육’에 의미에서 이제는 너무 변질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메이지 시기 일본에 의해 번역된 ‘president’의 대응어인 대통령’도 의미가 너무 변질된 경우다. 미국의 정치 체제의 의장에서 온 것으로 ‘위임 받은 권위를 행사하는 대리자’라는 의미가 대한민국에서는 ‘권력자’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권 분립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의 흐름에서 근대 문명의 키워드를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로 번역한 말은 ‘-ism’으로 끝나지 않는데도 그렇게 번역되고 고착되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demokratia’에 부여한 기능은 무슨 ‘-주의’가 아니라 특정 유형의 정치 체제를 지목하는 것이었다. 원리와 본질을 중시하던 플라톤이었지만 그가 법률에서 ‘demokratia’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의’와는 관련성이 적다.
정치 체제에는 두 개의 모형이 있고 나머지는 다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 둘 중 하나는 왕정이고, 다른 하나는 공화정(demokratia)이지요. 전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페르시아의 정치 체제고, 후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아테네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이 둘을 조정하고 배합한 것일 뿐이지요. 어떠한 체제 속에서 자유와 박애를 지혜와 배합하려면 이 둘 중 하나의 형태를 채택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 P101

‘계몽’이 형용사englighten로 ‘교육받은, 지식인의, 문명화된’으로 주로 쓰이던 18세기가 지나고 19세기가 된 이후로 시대정신이나 사상을 지칭하는 칸트식의 용례가 영국에서도 ‘계몽시대’ 같은 표현에 종종 등장한다. 이 단어가 이러한 뜻으로 사용될 경우 단어의 머리글자 ‘E’를 대문자로 구별했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일종의 고유명사가 된 ‘Enlightenment’를 ‘계몽주의’로 옮기지 않을 이유는 물론 전혀 없다.
‘계몽주의’를 이어받은 과학기술문명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시대”와 “잔혹함과 부당함”을 놓고 여전히 경쟁했다. 종교적 양심의 ‘계몽’에서 해방된 근대과학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위해 이성의 힘”을 숭상하는 ‘계몽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에 권력욕 및 “저급한 탐욕”과 결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P130~131

미국 헌법이 규정한 ‘아메리카의 주 연합 의장’을 ‘미합중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순간 삼권분립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온갖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견제 장치들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러한 오역의 과정을 거쳐 통용되는 ‘대통령’이라는 말에는 ‘대권’을 휘두르는 권력자의 모습이 중첩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 P200

“합리적인reasonable” 사람이라면 “쓸모없는” 질문에 매달리지 않는다. 삶의 유익한 바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존 톨런드가 인정하는 ‘합리성’의 내용이기에 존 로크가 말하는 ‘reasonableness’와 유사하다.
‘합리적 의심’은 윌리엄 블랙스톤, 에드워드 쿡 경, 존 로크, 존 톨런드가 이해한 신축적인 실천성과 실무적 감각을 법정에 적용한 법 원칙이다. 그러한 ‘합리성’은 상식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 피고인의 권리와 심지어 생명에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는 형사 판결을 비전문가 일반 시민들의 상식에 근거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배심원 재판이다. 법률 전문가들의 뒤틀린 말장난과 정치판의 편싸움에 끼어드는 기괴한 논리에 따라 사법 정의가 왜곡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한민국에서 이 표현이 나온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자세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법하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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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04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담아가요~~
리뷰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04 11:06   좋아요 1 | URL
도움을 드렸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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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영역은 폭넓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전시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회화가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서양화다. 그러다보니 미술 하면 뭔가 모르게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술은 결코 회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조각, 서예, 전각, 일상 용품 등 다양하다. 이처럼 미술품은 결코 특별하지 않으며 눈 닿는 곳에 모두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릴 적 보고 자랐던 옛 장롱, 베개 자수, 한복의 무늬 등이 지금은 미술품이 되었던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평범한 것이 위대하다’ 라는 챕터의 제목은 평소 내가 생각하는 바와 맥락이 닿아 있어서 더 공명했던 것 같다.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권은 인도의 미술 이야기다. 


인도에 대해서는 책의 질문자처럼 나도 IT가 발달된 곳, 바라나시, 소, 갠지스 강(에서의 목욕) 정도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도는 불교가 시작된 곳이니 불교 관련 미술이 있을 거야 하는 생각 정도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인도는 파키스탄의 지명인 ‘신드’에서 유래한 말로 짐작할 수 있듯 인도 미술의 범위는 오늘날의 ‘인도’만이 아닌, 아프가니스탄 일부와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미술까지 포함한 지역이다. 과거에는 인도가 이 모든 지역들을 커버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흔히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1974년 인더스 강 유역에서 메르가르 유적이 발굴되면서 인더스 문명보다 더 앞선 문명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나도 앞선 문명이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었는데 충격적이었다. 선인더스와 인더스 문명의 유적을 통해서 사실적인 신체 동작과 살의 촉각을 생생하게 표현하려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인장을 저렇게 입체적으로 새긴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특히 ‘춤추는 소녀’는 당시 어떻게 저런 아름다움을 갖춘 조각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BC 322년 인도에 마우리아 제국이 세워진다.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왕이었던 아쇼카 왕은 인도 남단을 제외한 대륙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석가모니를 의미하는 사자 조각을 통해 석가모니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작업을 한다. 현재 인도를 대표하는 공식 국장에는 네 마리 사자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의 사자 조각에서 기원한 것이다. 


불교는 인도의 아쇼카 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기본이 되는 종교 중 하나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용어 중에서도 불교에서 온 용어가 많다고 하는 것에 놀랐다. 예를 들어 ‘기특하다’, ‘불가사의하다’ 같은 말이나 관념, 대중, 살림, 심지어 지식이라는 말이 인도에서 왔다고 한다. 또 ‘주인공’이라는 단어는 불교 경전에서 깨달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왠지 ‘주인공’이라는 단어가 달리 보이지 않나.  


아쇼카 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칭했어요. 성왕은 성스러운 왕, 전륜은 구를 전(轉)에 바퀴 륜(輪)을 써서 바퀴를 굴리는 성스러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바퀴는 당연히 법륜이죠. 아쇼카 왕은 석주를 통해 자기가 우주의 진리이자 불교의 법을 전파하는 위대한 왕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주장하는 겁니다. 

이후 전륜성왕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대명사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에 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불교를 수용해 나라를 정비하면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칭했습니다. - P242


일찍부터 마연한 조각과 토기를 만들다가 마우리아 제국 때 와선 돌이 들어가는 데는 모조리 마연하죠. 궁전 기둥도 그랬고요. 

우리나라 돌은 대부분 입자가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이거든요. 세밀하게 조각하기 어려운 돌이죠. 하지만 ‘석탑이 마멸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거의 못 들어봤을 거예요. 화강암이 조각하긴 어려워도 내구성 하나는 끝내줘요. - P254~255


인도의 조각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세밀한 게 특징인데 이는 무른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만큼 바람에 잘 날아가기 때문에 형태 보존이 어려워 ‘마연(갈고 닦아서 반질반질하게 하는 것)’을 한 것이라고. 우리는 화강암을 쓰기 때문에 단단한 대신에 상대적으로 세밀한 조각은 어려웠던 것 같다.


석가모니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감흥을 주었다. 석가모니 사후 여덟 개 나라의 왕들이 유골을 팔 등분 한 다음에 각각 돌아가서 스투파를 세운 것이 스투파의 시작이었다(근본8탑). 그러나 보통 사람이 그 탑들을 직접 찾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쇼카 왕은 사리를 나눠 전국 곳곳에 8만 4천 기에 이르는 스투파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8만 4천기라니, 지금도 그 정도의 숫자가 세워진다고 하면 놀랄 만한데 당시에는 진짜 어마어마한 숫자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석가모니의 복음의 위세가 강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거기에 독실한 불교 신자인 아쇼카 왕이 있어서 스투카가 곳곳에 세워질 수 있었다. 

사실 스투파는 납골당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불교의 위세가 커지자 석가모니의 무덤만을 가리키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스투파는 나중에 투파, 탑파, 솔도파 등으로 불리다 중국을 거치면서 우리가 아는 ‘탑’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스투파는 차트라(산개), 야슈티(찰주), 하르미카, 안다(복발), 토라나(문), 베디카(외곽 울타리)로 구성된다. 복발의 둥근 형태는 알을 뜻하며 생명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스투파는 다양한 조각을 끼워넣을 수 있도록 울타리나 문에 홈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조각에는 석가모니의 이야기가 포함되면서 자연스레 그의 생애와 불교의 교리가 전파될 수 있었다. 


불교가 인도를 넘어 아시아에 전파되면서 스투파가 곳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다만 인도와 거리상으로 교류가 쉽지 않았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인도의 스투파의 형태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제작되었다. 처음에는 목탑부터 시작되었다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을 본떠서 만든 석탑이라고 하는 것이 신기했다. 입구가 있는 것, 찰주, 배흘림 기둥, 처마처럼 높이 올라간 지붕 모서리에서 스투파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문을 만들었다는 게 바로 목탑을 본떴다는 증거예요. 동북아시아의 탑은 애당초 목조 건물을 본떠 만들었으니 오히려 문이 없으면 더 이상하지요. 이 문만 봐도 우리나라 탑이 인도 스투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인도의 스투파는 바깥 울타리에 문이 있긴 해도 복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를 화장해 몇 겹짜리 사리함에 넣어 꽁꽁 싸맨 다음 묻었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달 이유가 없지요. - P419

돌을 툭툭 쌓아 올린 돌기둥이 보일 겁니다. 이 돌기둥이 야슈티, 즉 찰주예요. 인도 스투파에도 찰주가 있었습니다. 우산처럼 생긴 산개가 있고, 그걸 받치는 우산대 같은 게 찰주였지요.

스투파에서 찰주는 특별한 기능이 없었어요. 그냥 복발 꼭대기에 꽂은 기둥 정도였죠. 동북아시아에서는 탑 층수가 높아지면서 찰주가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돼요. 쉽게 샌드위치에 꽂은 이쑤시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찰주의 존재는 동북아시아 목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에요. - P420


신장위구르 지역에 모여 살던 월지족은 흉노족의 강성함에 밀려 인도 북부 지역까지 이동하였고 기존에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제국을 물리치고 1세기 경 쿠샨 제국을 세운다. 쿠샨 제국의 영토는 지금의 인도 북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부에 걸쳐져 있었다. 통일을 이룩한 인물은 3대 왕인 카니슈카 왕이다. 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왕처럼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최초로 불상을 탄생시키면서 지금의 불상의 표식을 정형화시켰다.    특히나 쿠샨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한반도에는 삼국 시대 불교가 수입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책은 장점이 많다. 우선, 질문자와 대답자가 말을 주고 받으며 궁금증을 풀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독자가 자연스레 그 과정에 동참하게 한다. 두 번째로, 챕터별로 핵심 정리를 해 놓아서 독자로서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세 번째로, 시기별로 역사를 도표상으로 나열하고 이를 미술품과 같이 배치함으로써 그림과 도표로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다. 


분량이 많았다 싶었는데 쉽게 읽혀서 이틀이면 너끈히 다 읽을 수 있었다. 아시아 문화권은 불교 문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만큼 인도 미술의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는 동양 미술을 더 자주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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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3 0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미술 범위가 넓네요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지도... 그런 것도 거의 잊고 사는군요 불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중국이나 한국하고 다른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불교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3 08:57   좋아요 1 | URL
같은 불교권 문화라도 유물이나 유적의 형태가 달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맞아요. 불교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는 삼국 시대 무렵 들어왔죠. 벌써 천 년 넘게 이 땅에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종교라기보다는 마음의 수양을 쌓는 하나의 방편이 된 것 아닐지요^^
 
[세트] 520번의 금요일 +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 전3권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 온다프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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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주년기를 맞아 지금까지의 기록, 인터뷰집, 낭독집을 담았다. 10대였던 아이들이 20대가 되었지만 ‘이미 10년이나 지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음을 절감하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차별과 낙인은 여전히 계속되고, 또 다른 사회적 참사는 계속되기에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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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3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로 열해라니, 시간이 참 빨리도 가네요 다섯해 지났을 때도 벌써 그렇게 되다니 했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3 08:56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런데 여전히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보니 마음이 여전히 무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