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사이보그-사이버네틱 유기체가 되었다. 그것은 혼종적기술이자 유기체적 체현과 텍스트성의 구성물이다(해러웨이,
1985). 사이보그는 텍스트, 기계, 몸 그리고 은유다. 이 모든 것들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하여 이론화되고, 실천에 참여한다. - P384

상황적 목적은 필연적으로 유한하며, 부분성에 근거하고, 동일성과 차이, 유지관리와 분해라는 미묘한 놀이 사이에 있다. 위노그라드와 플로레스의 언어학적 체계는 ‘탈자연화된 것이며, 완전히 구성주의적인 실체다. 이런 점에서 그와 같은 체계는 유기체적·기술적·텍스트적인 것들 사이에 서로 침투 불가능한 경계를설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사이보그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학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취약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체현으로부터 궁극적인 추상화를 통해 절멸주의적 병리학과 함께하는 ‘정보사회‘의 AI 사이보그와는 분명히 대립적이다. - P388

면역성은 공유된 특수성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도 있다. 즉 면여성은 타자(인간과 비인간,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와 관계속으로 반쯤 스며들 수 있는 자기와 관련하여, 언제나 한정된 결과와 관련하여, 개체화와 동일시의 상황적 가능성과 불가능성과관련하여, 부분적 융합과 위험과 관련하여, 인지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한 자기의 문제적인 다수성은 면역학의 멍울진 담론에서는 강력하게 형상화되는 동시에 억압되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다수성은 건강, 병, 개체성, 인간성, 죽음에 관해 부상 중인 다른 서구적이고 다문화적인 담론 속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 P409

사이보그 체현과 상황적 지식이라는 약속과 공포로 가득 찬이런 차이의 장을 벗어나는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가능한 자기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우리는 실현 가능한 미래의 기술자들이다. 과학은 문화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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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이슬람의 과학은 그리스 과학,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을 잇는 과학사의세 번째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과는 14세기 스콜라철학의 자연철학을 거쳐 17세기 과학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과학사저작들에서 이슬람 과학은 소략하게 다루어져 있거나 아예 빠지기까지 - P660

한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근대 과학으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슬람 과학은 좀더 많은 주목을 받을가치가 있다. - P661

서방의 종교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종교사상들도 플라톤, 아니 사실상 플로티노스의 그림자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말 그대로 천년의 세월에 걸쳐 지중해세계를 지배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어떤 사상도플로티노스 자신의 『엔네아데스』를 뛰어넘는 철학적 성취를 이루지는못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을 위한 도구였지 그 자체로서 수준 높게 추구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 P665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해석하면서 이븐 루쉬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탈해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븐 루쉬드가 볼 때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가 보다 일관적이려면 수동적 이성 역시 탈물질적이고 영원해야 한다. 이 주장에 함축되어 있는 바는 수동적 이성이 우발적이고 물질적인 개개인의 신체와 완전히 분리된 실체여야 한다는 점 - P677

이다. 그래서 능동적 이성만이 아니라 수동적 이성도 공히 개개인을 초월한 이데아적인 존재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26) 이를 이븐 루쉬드의 ‘이성 단일론‘이라 부른다. 만일 그렇다면, 불멸하는 것은 개개인의형상이 아니라 단지 단일한 보편적 이성뿐이다. 능동적 이성은 물론 수동적 이성까지도 압둘라나 마르얌의 이성은 아닌 것이다.
이븐 루쉬드의 이런 해석은 이슬람교의 교리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공히 개별자의 영혼의 부활, 나아가 경우따라서는 신체의 부활까지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보장이 있어야만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죄, 업(業), 책임, 의무 등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해서 이븐 루쉬드는 박해 당했고 그의 책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 P678

유럽에서와는 달리 이슬람세계에서는 ‘철학‘과 ‘신학‘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물론 유럽에서도 철학과 신학은 구분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었다. 반면 이슬람의 경우 신학은 어디까지나 이슬람 신학이었고, ‘철학‘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학문인 그리스 철학을 뜻했다. 이런 구도는 이슬람에서의 철학자들의 위상을 유럽에서의 그것과는다르게 만들어주었다. - P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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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날이 오락가락하더니 오늘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보니 울적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나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구나 싶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 산책 나갔다가 아파트 근처에서 발견한 꽃나무들. 참 화사하니 이뻤다!



지지난주에 마트 근처에 갔다가 생선 구이 정식 집을 갔다.

사진에서도 느껴지겠지만 요사이 밖에서 먹은 밥 중 가격 대비 가장 만족스러웠다. 옆지기도 엄지척을 했다. 인당 14,000원인데 남는 게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반찬도 정갈하니 괜찮았고...

고등어랑 삼치를 하나씩 시켰는데 진짜 배부르게 잘 먹었다.


이건 지난 주말에 먹은 삼겹살 집. 원래 가려고 했던 삼겹살 집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다른 곳으로 갔다. 

개인적으로 웨이팅은 못하겠더라. 아무리 맛집이더라도.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제 물가가 너무 올라서 밖에서 먹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그래도 반찬들이 많아서 고기 3인분으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낮에 산책을 하며 찍었다. 올 봄 산수유를 놓치지 않고 지나가서 다행이다.





현재 이런 책들을 읽고 있다.



세계철학사 1권은 고대, 중세 시기 지중해 세계를 중심으로 나타난 철학자들을 다룬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로고스(이성)'에 대한 개념은 서양 철학의 원형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사상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그 기반은 같다고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학문 분류는 오늘날에도 그 기반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라 놀라울 따름이었다. 반면 생물학적인 성과 가부장제에 기반한 역할 정의는 역시 읽다 보면 갑갑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철학자들은 오랜만에 읽어도 재밌었는데 '데모크리토스' 이외에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원론이 아닌 다원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했던 것이 아무래도 내게 공명을 주는 것 같다. 

플라톤 철학 전체를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가짜‘에 대한 경계심과 그 반면으로서 진짜를 가려내려는 열정이었다. 그의 사유는 가짜가 판을 치는 그리고 오히려 진짜는 핍박받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는, 사물들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달리 말해 사물들을 존재론적 위계(ontological hierarchy)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진품을 가려내려는 열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의 사유 전체는 모방(‘미메시스‘) 개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모든 구별, 평가의 기준으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이데아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데아를 얼마나 잘 모방하고 있는가가 그 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을 판별할 수 있게해주는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들이 사물들의 실재, 진상(眞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감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P34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질료 및 시간과 떼어서는 의미를 상실하는, 플라톤의 형상과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이다. 그러나 현실태로서의 형상이 잠재태로서의 질료를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구도는 그가 결국 플라톤을 잇고 있다는 점을 다시한 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형상과 질료가 오로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는 이원적 일원의 세계이며, 질료의 잠재성을 형상이 이끌어가는 목적론적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은 무엇보다 생명체들의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을 잇고 있지만, 보다 경험주의적이고 유기체주의적인 색채를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플라톤주의인 것이다. - P440


자연철학들의 기본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실재는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이고 순수한 존재‘들‘이다.

2. 이 존재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무/부정 및 타자성을 매개해 운동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세계가 성립한다. - P148


엠페도클레스는 다원론을 시도한다. 영원한 것이 단지 하나(일자)가 아니라 넷이 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넷으로부터 나오고 넷으로 돌아가지만, 이 넷은 영원한 동일성이다. - P150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은 정신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되고 그것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 P173

데모크리토스는 아르케로서 원자들(atomata)을 제시한다. 각각의 원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지만, 원자들‘은 다자를 형성하며 또 운동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사유 또한 포스트-파르메니데스적 사유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을 "어떤 것(to den)", "꽉 찬 것(to naston)", "있는 것(toon)"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일자와 마찬가지로 이 원자들도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다. - P177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1~2부는 많이 어려워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었는데 그나마 3부는 기존에 읽었던 내용들이 많아서 역시 이해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페미니즘의 역사, 사이보그에 대한 이야기, 맥락적으로 세계를 보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읽었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있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 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 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 P224


인종, 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 생산해 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 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하나의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 - P327


상황적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 텅빈 스크린, 토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이자 행동가로서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객관적인‘ 지식에 실린 고유한 행위자성과 저자성으로부터 변증법을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형상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 P359


페미니즘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이제 좀 읽을 때가 된 것 같다. 특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엥겔스는 계급과 국가 사이의 매개적인 구성체로서 가족을 최우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별의 구분을 분리하여 고려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적대적인 구분에 포함시켰다[카워드(Coward), 1983]‘ 가족 형태의역사적 다양성과 여성의 종속이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토대로했기 때문에 섹스와 젠더를 역사화할 수 없었다. - P238

 



그리고 읽고 있는 원서들.



도스토옙스키 전집도 이어서 읽어야 하는데... NOON 세트를 더 빨리 읽을 것 같았지만 역시나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책들이 많다보니 쉽지가 않구나. NOON 세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와 추리소설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눈 깜짝할 새 3월 말이 다 되어 간다. 주말에 책을 몰아 읽기는 하는데 쑥쑥 읽히지는 않아서 간혹 졸기도 하고 안되겠다 싶으면 눈도 붙이고, 드라마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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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27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밖에 나갔는데 하늘이 맑더군요 구름도 떠다니고... 오랜만에 맑은 하늘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매화 산수유는 핀 건 보고 목련은 조금 핀 것과 활짝 핀 거 다 봤어요 꽃이 피니 조금 밝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삼월 마지막 주네요 이번주가 가면 사월이라니... 거리의화가 님 삼월 남은 날 동안 읽고 싶은 책 자주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27 16:29   좋아요 1 | URL
오늘도 다행히 날이 맑네요^^ 여기는 이제 막 목련과 개나리가 올라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매화는 만개를 지나서 꺾였고 산수유는 만개더군요^^ 말씀처럼 꽃이 피니 봄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희선님 일교차가 큰데 건강 관리 잘하시고 독서 생활도 즐겁게 하시길요!

새파랑 2024-03-2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읽기를 응원합니다~!! 요새 물가가 비싸서 밥 한번 먹는데 최소 만원이더라구요. 쫌만 보태면 책이 한권인디... 한끼를 굶으면 책 한권을 살 수 있다~!!

요새 꽃들 피는걸 보니 봄이 온게 실감이 납니다 ㅋ

거리의화가 2024-03-27 16:31   좋아요 1 | URL
ㅎㅎ 네^^ 아무래도 상반기에 다 읽기는 힘들 것 같지만 어쨌든 전집은 꼭 올해 안에 읽으려고 합니다. 너무 미루면 전집에게 미안해서라도?ㅋㅋ
어쩌면 책 값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소비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뭐든 집기가 무서워요ㅠㅠ 마트 한 번 가면 30만원은 우습습니다.
일교차는 크지만 따뜻한 봄 햇살과 꽃들을 보니 봄 기운이 느껴지죠? 이 봄 만끽하시길!

그레이스 2024-04-04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영어, 중국어, 역사, 사상, 문학이 총망라된 리스트네요!

거리의화가 2024-04-04 11:05   좋아요 1 | URL
작년보다 좀 더 다양하게 읽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9장

객관적 시각이야말로 모든 시각적 실천의 생성력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종결시킨다기보다 다시 촉발한다. 부분적 시점은 유망한 괴물과 파괴적 괴물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 객관성에 관한 모든 서구의 문화적 서사들은, 페미니스트 과학의 문제에 각인되어 있는 우리가 정신과 몸, 거리 유지와 책임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맺는 관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레고리다.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한정된 위치(location)와 상황적 지식에 관한 것이지, 주체와 대상의 초월과 분「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보는 방법을 통해배운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 P343

상대주의는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동시에모든 곳에 똑같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입장의 ‘동등성‘은 책임과비판적 탐구를 부인하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객관성 이데올로기에 나타난 총체화와 완벽한 쌍둥이 거울이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모두 위치, 체현, 부분적 시점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부인한다. 양자 모두 잘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는 동등하고 완벽하게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신적 요술‘이 약속하는 시각이자 동시에 대문자 과학을 둘러싼수사학에 공통된 신화다. 하지만 다름 아닌 이 부분적 시점의 정치학과 인식론이야말로 꾸준히 지속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구의 가능성이 자리한 곳이다. - P346

무엇이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인가에 관한 투쟁은 보는 방법에 관한 투쟁이다. 그것은 시각의조건들인 식민주의에서 과학의 문제, 절멸주의(exterminism)에서과학의 문제(소풀리스, 1988) 그리고 페미니즘에서 과학의 문제등에 관한 투쟁이다.
정치적으로 다양한 경험주의, 환원주의 혹은 다른 과학적 권위를 가진 해석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는 문제는 상대주의적으로접근하기보다 위치로 보아야 한다. - P351

상황적 지식은 지식의 대상이 텅빈 스크린, 토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이자 행동가로서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며, ‘객관적인‘ 지식에 실린 고유한 행위자성과 저자성으로부터 변증법을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주인과노예의 관계로 형상화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 P359

객관성은 탈참여(dis-engagement)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그리고 대체로 불공평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며, 세계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히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마지막‘ 통제는 불가능하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분명하고 뚜렷한 아이디어를 가지지 못한다. 다양하게 투쟁하는 생물학적인 몸은 생물학적인 연구조사와 글쓰기, 의료사업, 다른 사업 실천, 테크놀로지, 즉 이장에서 은유로 열거했던 시각화 기술의 교차로에서 출현한다. 하지만 교차로의 마디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은 생생한 언어로 들어가는 것에 비견된다. 그런 언어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에 적극적으로얽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치 있는 행위자와 행동가로서코요테와 프로테우스처럼 변화무쌍한 세계의 체현으로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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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종교/신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위계(位階=hierarchy)의 사회이다. 초월적 신들과 그들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사제들 및 귀족들,
그리고 평민들, 그 아래에 천민들이 피라미드를 형성한다. 지중해세계에종교는 항상 존재해왔지만, 우리는 로마 제국에서 이런 위계가 점차 두드러지고 또 철학사의 흐름과 일정 대목에서 교차함을 볼 수 있다.
AD 2세기 서구사상사에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환이 도래한다. 이흐름은 ‘스토아주의에서 플라톤주의로‘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플라톤주의는 사실상 철저히 종교적인 플라톤주의였다. - P587

지중해세계에서는 여러 형태의 일신교들이 명멸했지만, 후대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유대교의 일신교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유일신에 대한 표상은 매우 작은 종족이었던 유대의 문화맥락에서 점차 확대되어 후에는 지중해세계 전반, 적어도 그 절반으로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런 확장은 유대교 자체로써가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의 형태로 바뀜으로써 가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650

기독교 서사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데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런비극의 정조(情)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게는 논리적 설득력이나 학문적 사실성, 엄밀성보다는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 (현대식으로 말해 ‘스토리텔링‘)나 감각적인 이미지 등이 더 호소력 있는 법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학적 해석은 이런 비극성과 이율배반적 관계를 형성했다. 만일 이 모두가 신의 각본이라면, 즉 예수가 많은 고난을 겪는다해도 결국 그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미 정해져 있는것이라면, 역사적 예수의 진실성과 감동은 현저하게 증발해버릴 수밖에없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한 기획에의해 연출된 것일 뿐,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경모하고 사랑하고 그처럼되기를 즉 예수-되기(becoming-Jesus)를 희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 P652

사건이기를 그쳐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정통은 그노시스학파의 SF와도 같은 예수 해석을 거부하고 보다 역사성 있는 예수상을 수립했지만,
그 상은 결국 역사적 진실성이 휘발된 신학적 예수상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이런 예수상이 아니라 깨달음과 고난과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이 그것 ‘되기‘를 꿈꿀 수 있는 그런 예수상이아닐까.

서구에서 종교는 특정한 한 심급(審級)이지만,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교는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에의해 기획되고 모색되고 성취된 것이다. 예수는 사랑받을 수 있는 인물이지만, 무함마드는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삶에대한 추후적인 음미를 통해 그의 사후에 조금씩 형성되어간 것이라면, 이슬람교는 무함마드가 그의 생전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알라와 무함마드의 거리는 야훼와예수의 거리보다는 물론이고 야훼와 모세의 거리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크다.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일 뿐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와는 격차가 큰 셈이다. -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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