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일본의 조선 출병에 대한 주장과 목적은 각기 상이했지만, 최초의시도는 참모본부 차장 가와카미 소로쿠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군사외교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가와카미는 독단으로 비밀리에 서울에 파견한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좌, 우에하라 유사쿠 소좌와 오토리 공사가 협력해 조선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 그에 따라 일본 군부는 혼성여단을 편성했고, 무쓰는 1882년 제물포조약을 명분으호 파병했다. - P41

일본군은 도성 내외수색과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도 차단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리훙장에게 병을 - P78

핑계로 여러 차례 귀국을 청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하했다. 그러자 전권을 탕사오이에게 일임한 후 7월 19일 비밀리에 인천으로 가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탕사오이는 아산의 청군 병력이 부족함을 감지하고 일본군이 그 기회를 이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북양대신에게 10만을추가로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훙장은 총리아문을 통해
"일본군이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함부로 3만을 일컫는가? 또한 일본군은 공사관과 상민 보호를 제외하면 결코 우리와 싸울일이 없을 것인데 너는 10만의 병사를 어디에 쓸 것인가?" 라며 이를일축했다. - P79

일본인이 지금 빈민들을 진휼하고 무너진 집들을 조사하여 은전을대가로줄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민심을 수습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범사업 수준의 인구 조사를 통해 조선의 실태를 파악하려 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울 도성 내 인적·물적·심리적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치안을 확보하고 저항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오사카아사히신문》 종군기자 니시무라 도키스케에 의하면 주민들은 미곡 - P95

을 받자마자 이를 팔아 술을 마시는 등 순식간에 소비하여 구조 목적은 허공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 P96

대황제께서 번진을 걱정하여 요청을 재가하셨다. 본 군문이 명을 받들어 토벌을 독려하여 밤에도 쉬지 않고 건너왔다. 부대는 모두 수많은 싸움을 치른 군대로 한번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협박을 받은 백성은 시세에 떠밀리고 또한 기꺼운마음으로 적을 따른 것도 아닌데,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양인과악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마음에 실제로 차마 하지 - P125

못하고 고시를 내어 알아듣도록 타이르니, 이 고시를 여러 읍의 사람들은 잘 알아야 한다. 너희들 중에 협박을 받은 양민은 기미를 보아 해산을 했는데, 혹시라도 군영에 와서 스스로 투항하면, 본 군문은 관대하게 용서하고 결코 심하게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하고어리석은 백성 가운데 적에게 잘못 쓰이고, 진심으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만약 병기를 버리고 죄를 뉘우쳐서 투항한다면, 역시안하게 맞이하는 것 외에 은혜를 베풀 것이다. 내가 정벌을 하는데,
너희들과 약속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때에 무기와 성을 버리는 자는결코 죽이지 않지만, 무기를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은 바로 창과 포로 죽이지 않고 서서히 베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다. 너희가 만약스스로 목숨을 돌아본다면 비도의 우두머리가 되지 마라. 공포한 것을 특별히 알리니 모두 잘 알라.
1894년 5월 11일 고시

이로써 청국군은 조선 정부로부터 인력 동원, 군수물자와 숙소·자금을 영접사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 P127

일본 정부는 1894년 6월 5일 청일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천황 직속 최고 통수기관으로 육군과 해군을 휘하에 두는 전시 대본영을 설치했다.
대본영은 한 해 전 1893년 5월 22일 칙령 제52호 <전시대본영조례>에의해 처음 법제화되었다. 대본영은 막료장인 참모총장 대장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 참모차장 중장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대신장 오야마 이와오, 육군차관 소장 고다마 겐타로兒, 해군대신 중장 사이고 츠구미치西, 해군차관 소장 이토 토시요시(伊吉, 사법대신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모여 협의하는 체제였다. - P162

가와카미 소로쿠는 이미 1893년 4월부터 6월까지 참모본부 제2국원소좌 이치지 코스케, 육군감독 사카다 겐산 등과 함께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조선과 청국을 정탐한 경험이 있었다. 부산을 경유해 해로로 인천으로 들어온 이들은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서울에 머물며 조선 국왕을 알현하고 흥선대원군과도 면담했다. 동학당 활동 탐지와 조선의 병 - P166

영 시찰을 마친 가와카미는 5월 12일 중국 톈진으로 건너갔다.29도중에 일행과 헤어진 이치지는 이후 경성 주재 일본공사관 무관 와타나베 데스타로와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를 여행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 이들의 여행은 청국과의 전쟁 준비를 위한 일본군의상륙지와 행동 루트에 대한 사전답사 성격이 짙었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농민군과 내부 상황을 탐지한 이치지는 1894년 5월 30일 가와카미관저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된다. 다음 날인 31일 가와카미는 참모총장 타루히토 친왕에게 그 내용을 상신하여 조선 출병을 승인받았다. - P167

7월 6일 경성 주재 청국 외교관 리위센리흥장의 대리인인 성수안화이에게 전보하여, "현재 중국인으로 한국에 있는 자는 병력을 쓰지 않는 것이 상책으로 봅니다. 우매한 소견으로는 만약 병력을 사용하면 반드시 내외에 포치布해야 하기에 한 번 틈이 없으면 바야흐로능히 하수로 절대로 가볍게 한 번 시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현상 유지책을 견지하는 선에서 머물도록 권유했다. 7월 20일 리홍장도 예지차오에게 "일본이 힘을 다해 전쟁을 고수하려고 미리 준비했지만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저들은 헤아리고 움직이지않을 것이다. 이것은 만국의 공례로 오직 먼저 전쟁을 일으키면 이치가 군색하게 된다. 절대 명심하고 잊지 말 것이다. 너는 성급하면 안된다" 라고 당부했다. 이렇듯 청국군이 손을 놓고 있던 결과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평택 인근까지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 P174

청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징발 방식은 청국 관내와 조선에서 각기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을 통해 청국으로, 제2군 사령관 오야마 이와오는 청국으로 직접 출동했다. 그런데 제2군은 랴오둥반도 상륙 직후 군령 <제2군징발심득第二軍心得>(1894년 10월 29일)을 발령하여 점령지인 청국에서 ‘무상징발‘과 ‘유상징의 규정을 마련, 시행했다. 반면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이 필요했던 제1군이 관할하는 조선에서는 일본 국내법인<징발령>에 준거해서 강제로 징발을 실시했지만, <제2군 징발심득>보다 분명히 보상 정도가 낮거나 아니면 보상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 P183

스기무라 후카시의 술회에 따르면 평양 전투의 결과가 아직 도착하기전에 대원군이 중국에 의지하는 한편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의 남하를기다렸다가 함께 일본군을 협공함으로써 중국의 추궁도 모면하고 자신의 목적도 달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그는 목적을잃고 계략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방문·초대·선물 등 겉으로는 일본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다고 판단했다.
423이에 앞서 대원군의 종손자 이준용이 - P213

일본의 힘을 빌려 왕후를 폐위하려 했지만 청군이 평양에 들어와 위세당당하다는 소식을 듣고 대원군을 비롯해 모두들 일본군이 반드시 패배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다. 이에 몰래 청국의 장군에게 환영의 뜻을 보내고 영국영사에게도 접근하는 한편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학당을 선동하여 청군이 남하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본군을 협공하려는 계획을 꾸미고있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평양 점령 시 대원군이 청국군 장수에게 보낸 밀서가 제1군 사령관의 손에 들어와 다시 외무대신에게 전해졌다. 후임 공사인 이노우에가 이를 대원군을 축출할 빌미로 삼아 그를 힐문하고 결국 권좌에서 쫓아내게 된다. 원래 무쓰는 대원군 축출까지는 생각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압수한 서류는 대원군이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 보낸 서한과 이재면. 김홍집의 서한 등 3통이었다. 이를 읽어 본 무쓰는조선이 청국과 일본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내심 주저하고 있는 흔적을엿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쓰는 이노우에에게 보낸 전보에서 바야흐로 조선의 사직이 ‘위급존망지추‘에 있는 때이므로 굳이 잘못을 통렬하게 추궁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면서도 이의 정치적 활용 여부는 공사의재량에 일임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밀서를 문제 삼아 결국 대원군퇴진을 관철했다. - P214

청일전쟁 시기 일본이 강제 체결한 군사동맹인 <양국맹약>은 청국과의 전쟁에 조선군의 동원과 협조, 인부와 식량 징발의 공식화를 명문화한 것이다. 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시 협정인 <합동조관>은 경부철도와 경인철도 부설권 양도, 경부·경인 간 군용전신선 부설, 목포와 진남포 개항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한편 조선 외부대신에게각 개항장에서 일본 선박의 무관세 통관을 강요했고, <신식화폐 발행장정>을 시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화폐의 조선 내 통용은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서울-의주, 서울-원산 간 군용전신선은 명확한 협정을 체결한 바도 없고 비용 지불도 없이 사용했다. "승리를 틈타 과중한요구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의전의 본의에 맞지 않는다"는 귀족원의원 다니 다테키의 주장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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