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용서

[용서의 폭력성과 가톨릭 기억 정치]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이 전 세계의 종교 지도자와 양심 있는 지식인에게 의견을 구한 일. 1942년 나치에 의해 야노프스카 강제수용소에 본인이 갇혀 있을 때 나치 친위대였던 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유대인(아무나)을 만나 사죄하고 편히 죽고 싶다는 말을 던진 것. 20년이 지나 비젠탈은 이 질문을 던졌다.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이 독일 주교단에게 보낸 사목 편지(1965.11.18) 사건: 폴란드 교회가 독일의 가톨릭 형제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메시지가 문제됨.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가 용서를 정치적 입장으로 끌고가
주교단 편지는 1966년 예정된 기독교 수용 1000주년 기념식에 서독의 가톨릭 형제들을 초대하여 폴란드와 독일 양국의 화해와 용서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으나 폴란드 교회는 이 편지로 인해 ’폴란드통합노동자당‘(가톨릭교회와 경합해왔음)이 이를 걸고 넘어지면서 가톨릭 민족적 정통성에 타격을 입었고 교회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김.
이후 냉전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폴란드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가 진전되었고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폴란드와 독일의 대화를 이끈 편지”로 주목되었고 21세기 들어서서 양국 관계를 넘어 역사적 화해의 외연을 넓혔음.

[폴란드 주교단 편지와 화해의 메타 윤리]
독일 개신교의 진보 진영이 서독 의회에 보낸 <튀빙겐 백서>(1961~1962): 서독의 핵무장 계획에 반대하고 오데르-나이세 경계를 전후 독일과 폴란드의 공식 국경선으로 인정할 것을 서독 정부에 촉구. -> 그러나 서독 거주 실향민들은 신랄하게 비난. -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동독과 동유럽 인민의 정치적 자결권을 무시하고 부정과 폭력을 찬양하는 공산주의에 동조했다!
‘독일개신교연합’이 <동방백서> 문서 공표(1965.10.14): 2차 대전 이후 오데르-나이세(독일과 폴란드 사이 국경) 국경선을 인정하고 폴란드에 할양된 독일 영토의 주권이 폴란드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 독일 실향민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나치 범죄와의 역사적 관계를 맥락화하면서 폴란드 희생자와 독일 희생자 사이에 상호 이해의 물꼬를 튼 계기. -> 폴란드의 권력기관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큰 반향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기독교의 진정한 선교 소명과 식민주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의 안전과 평화는 독일의 안전과 평화를 불러온다 암시. 적지 않은 독일인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폴란드 형제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지적.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 집합적 죄의식을 넘어서기에 가능

[독일 주교단의 답서와 수직적 화해]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에 대한 독일 주교단의 답서는 독일인이 폴란드 민족에게 가한 테러는 인정했으나 독일 실향민의 고통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동프로이센의 독일인 이주민은 해당 지역 슬라브 통치자의 초청으로 건너간 것이지 침략 의도가 없었던 그들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 게다가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발언.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신에 대한 죄이므로 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수직적 화해를 강조. 폴란드 주교단의 수평적 화해 요청에 대해 수직적 화해로 소극적 자세를 보인 것.
-> 폴란드 정부의 반가톨릭 캠페인 가속화. 독일 언론의 자기중심적 보도 더해져. 폴란드의 가톨릭 주교단은 민족 배반자라는 비난이 밧발쳐.

[가톨릭 형제애와 동아시아 평화]
일본 주교단 <평화를 위한 결의> 주교단 문서 채택(1995.2.25: 일본군이 조선, 중국, 필리핀 등 여러 지역에서 인권을 유린한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 일본인은 아시아인들에게 부과된 상처를 치유할 책임이 있으며 전후 세대 일본인도 이를 이어받아야 한다 강조. -> 한일 주교단의 정례적 만남 - 1차 ‘한일 교과서 문제’ 토론(1996),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교훈(2003), 동아시아의 탈핵/탈원전(2012) 등 쟁점을 다루며 양국의 역사 화해와 평화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역할 커져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일본 정평협)’(2019.8.15): 식민지 지배 역사에 대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자세와 분노하는 피해국, 한국인의 마음 사이에 벌어진 틈이 한일간의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라 지적. 일본 제국의 비인도적 행위의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의 역사적 도의적 정당성 강조. 일본 가톨릭 교도도 메이지 이래 일본의 침략 정책에 협력하여 부응한 측면이 있으므로 책임이 있다 성명.


Ⅹ. 부정

[부정론,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홀로코스트 학살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 하인리히 힘러는 학살을 입증하는 공문서를 파기하고 수용소의 시체소각로를 비롯해 학살 흔적을 폭파하는 등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인멸하는데 최대의 주의를 기울여.

[부정론의 스펙트럼과 담론적 지형]
단순 부정론은 공식 기억에 어긋나는 대항 기억이나 지배적 기억에 저항하는 도전적 기억을 부정하는 초기 단계에서 나타난다. 극단적인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 난징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노동의 폭력성을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 논객들, 곳곳의 제노사이드 부정론이 이것에 해당한다.: 사실의 부정. 증언의 모욕 - 가해자 집단을 물론 피해자 집단에서도 발견

‘혐의’의 부정론은 혐의가 씌워지면 그것이 사실인지 역사적 진실에 얼마나 근접해있는지 중요하지 않으며 발화되는 순간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도덕적 감정의 문제로 바꾼다. 언어적 수행성 때문에 선전만으로도 혐의를 쓴 대상에 대한 의심과 의혹,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인터넷 공간이 부정론의 새로운 산실.

실증주의적 부정론은 역사적 증거를 인멸한 사람들이 엄격한 실증주의자를 자처한다는 것에서 역설적. 이들이 외치는 ’증거‘는 ’증거‘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실증주의는 희생자의 기억이 부정확하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소환되는 이데올로기다. 증인의 기억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논지가 중심에 있다. - 히틀러에 대한 면죄 논리, 전두환의 면죄 논리,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 난징 학살에 대한 부정론, 1945년 일본군이 점령하던 베트남에 있었던 대기근 부정론
-> 어렵게 용기를 내 증언에 나선 이들을 위축시켜버리는 정치적 악의가 내포되어 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추정은 무지에 가깝다.

[국경을 넘는 부정론]
독일 역사가가 집합적 원죄에 대해 비판을 논해도 홀로코스트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면 반론의 주체가 나치 독일의 희생자인 폴란드 역사가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스탈린주의에 의한 희생을 강조하는 폴란드의 반공주의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독일의 기억공간으로 들어오면 나치 범죄의 역사적 평가에서 상대적 감가상각이 이루어진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희석하는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가 일본의 부정론자들에게 전유되는 것도 비슷하다. ->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가 탈영토화된 비판적 기억의 영역과 민족주의적 기억을 재영토화하는 변호론적 기억, 부정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시각적 재현(사진)의 회색지대는 실재를 조작하고 조정한다.

[증언의 진정성과 문서의 사실성]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확한 공식문서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의 부정확한 기억이 서로 다툴 때 사실과 진정성은 양립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재판은 이스라엘에 홀로코스트 증인의 청자 공동체를 만드는 계기였고 홀로코스트의 지구화와 더불어 이 공동체는 세계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본격화된 증언과 보통 사람들의 생애사는 목소리를 되찾아주고 그들의 말로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역사적 행위자의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다.
희생자의 목소리가 사회적 기억의 전면으로 등장하고 과거를 인식하는 중심이 문서에서 증언으로 옮겨갔다.
-> 21세기 역사학이 가지게 된 문제는 기억 연구가 갖는 윤리적 감수성을 수용하는 것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재현의 역설: 사실과 진실이 어긋나고 입증과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역설이 증언과 문서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시사점을 던져
부정확한 사실의 ‘깊은 기억’이 충실한 사실의 ‘지적 기억’보다 더 큰 진정성을 갖는 딜레마
미디어의 발전으로 ‘과잉’이 대중문화의 정상적 감각이 되어 비극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드라마적 미학의 소재로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져


* 연대

1978~1985년 사이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에 대한 동아시아 이웃 국가들의 예민한 반응 -> 동아시아 기억구성체의 생성으로 역사적 감수성 중요시해져
1950년대 일본 역사 교과서의 우경화 이미 시작되었으나 당시 한국 언론에 비판 기사는 전무해
“홀로코스트는 우리 땅에서 일어났지만, 우리 손은 깨끗하다”는 동유럽 민족주의자들의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 민족의 유일 책임론이 맺고 있는 기억의 공모관계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동유럽 민족주의 변호론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아



누구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논리를 떠나서 용서가 정말 위험한 것은, 그 행위가 피해자를 잊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용서가 구해지면 사람들은 화해와 용서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서둘러 가해자를 용서하고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끔찍한 행위조차도 인간성의 일부임을 아프게 인정하고, 그 끔찍한 일부가 다시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더 나은 기억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편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과거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으로 옮겨질 때, 돌연 동유럽의 과거이기를 멈추고 동아시아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1965년 주교단 편지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고 자의적으로 탈역사화하는 작업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 논문은 1965년 사목 서신의 정신을 21세기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어떻게 되살릴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019년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서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와 그 역사를 반추하는 것은,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수행성과 윤리적 의미를 넓혀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간 역사 화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와 시민사회 모두 국제정치의 세속적 규범에 매여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의 관계자들이 자유롭게 이념의 장벽과 국경을 넘어 대화한 선례는 특별히 중요하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에 대한 성찰은 화해와 용서를 동아시아의 기억 정치를 움직이는 게임 윤리로 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이될 것이다.

1965년의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화해의 아방가르드‘라는 평가도 부족할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편지의 작성자들은 독일-폴란드인의 고통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크기와 상관없이 고통은 고통일 뿐이며, 정치적 의미가 다르다 해도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폴란드의 주교단 편지는 절제된 희생자의식과 더불어 훨씬 성숙한 화해와 용서의 윤리를 제시한다. 더 큰 고통의 희생자가 자신을 가해한 작은 희생자들에게 공감과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희생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단호한 도덕적 결단이었다. 《디벨트(Die Welt)》지가 썼듯이, 적지 않은 독일인이 폴란드 주교단 편지에 감동한 것은 희생자인 폴란드가 처음으로 독일 실향민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정의를 되돌려주려는 메시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독일인의 희생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고난에 따듯한 공감을 표시한 것은 이렇게 가해자 독일 대 희생자 폴란드라는 집합적 죄의식을 넘어섰기에 가능했다.

아무도 가톨릭 주교들에게 폴란드 민족을 대표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당의 정치적

비난도 일리가 있었다. 비가톨릭 폴란드인까지 가톨릭 교회가 대변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가톨릭 내부로 눈을 돌린다 해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폴란드의 희생자 개개인을 대신해서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독일인을 교회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선언한 것도 문제였다. 독일 가해자의 속죄 의지를 확인하고 폴란드 희생자에게 용서의 윤리를 설득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폴란드 주교단 편지가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초국가적 화해의 초석을 놓았지만, 용서를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해자 일본의 회개와 반성, 사과는 물론 화해의 필요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까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초국가적 기억 주체로서 일본 사회에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탈식민주의적 비판을 견지할 수 있다. 희생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복수하려는 욕망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되었다는 회한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된다. 식민자와 피식민자, 가해자와 희생자, 지배자

와 피지배자가 서로 위치만 바꾼 채 억압과 불의가 지속되는 연쇄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식민주의적 불의는 재생산될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보면, 반식민주의적 분노가 탈식민주의적 성찰을 앞서고 있는게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폴란드의 가톨릭교회처럼 가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베풂으로써 가해자의 사과와 참회를 끌어내는 전복적 상상력을 펼치려면 먼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이념적·감정적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정론의 메타언어는 제노사이드를 고취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라 일컬어질 정도로 극히 위험한 언어적 폭력이다. 부정론이 가해자의 공식

기억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기억 문화를 규율하는 ‘서사적 표준‘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미래의 제노사이드를 위한 플랫폼이 된다. 부정론의 핵심은 기억을 죽이는 데 있다. 기억을 죽이는 것은 희생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부정론자는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당하고 비통하게죽어간 희생자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도덕적 결단으로서의 기억을 부정함으로써 응답 책임을 회피하고 ‘타자의 정의‘를 부정한다. 말살을 망각하는 것은 또 다른 말살이다. 기억의 제노사이드야말로 최후의 제노사이드다.

누구도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정론자는 실증주의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즉, 문서가 아니라 기억에 토대한 상대방의 증언이 지닌 허점을 파고들어 기억의 진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용한다. 부정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이나 과학이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부정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소환될때만 필요한 도구적 실증주의일 뿐이다.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돈‘을 노린 거짓이며, 그 배후에는 일본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일 세력‘이 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음모론을 실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이들의 실증주의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증언의 진정성을 깎아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 중심적 관점은 궁극적으로 역사 인식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인권의 강조는 희생자에 대한 공감을 낳고, 그 공감은 과거를 재현할때 문서 자료 못지않게 목소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술사의 증언 채집은 개개 희생자를 익명의 숫자에서 구출하여 이름과 얼굴을 찾아주고 내밀한 역사를 되살리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희생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자 역사는 여러 개개인의 이야기로 나뉘었고, 내밀한 역사의 추구는 역사의 정치적 범주를 심리적 범주로 바꾸어놓았다. 구술사의 등장은 단순히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구술자료를 통해 과거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보완 이상의 의미였다. 가해자가 지배하고 있는 공식 역사와 문서보관소에 맞서 힘없는 희생자의 목소리에 주목한다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었다. ‘역사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공식 역사의 단일화된 목소리에 삭제된 밑으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를 복원한다는 것은 과거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공식 서사에서 무시되어온 하위주체들의 행위 주체성과 역사적 의의를 온전히 평가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홀로코스트나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같은 국가적 폭력의 피해자/생존자 들은 가해자들의 잔혹함을 입증하여 진실을 확립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는 한없이 불쌍해지고 비참해져야만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소비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일본군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만행을 듣고 싶어 하는 욕망과 ‘장기수 선생님‘들에게서 자랑스러운 투쟁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다르다. ‘장기

수 선생님‘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적 행위성을 청취하는 반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희생자로 대상화하고 일제의 끔찍한 가학행위를 짜내는 증언의 청취 방식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자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이용수의 항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믿을 수 없는 만행을 폭로하는 증인의 위치에 고정해온 한국 사회의 기억 문화에 대한 절규였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입니까?"라는 이용수의 반문에 한국 사회는아직 답을 못하고 있다.

자기 변호적인 일본의 기억 문화와 마찬가지로 자기 비판적인 독일의기억 문화가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저해하는 모순된 상황이 시사해주는 바는 분명하다. 일국적 기억 공간 내에서 변명적 기억과 비판적 기억을 구분하고 그 간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구적 기억구성체에 배치하여 기억의 탈영토성과 재영토성을 초국가적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이든 독일과 동유럽의 홀로코스트 논쟁이든,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점령지 식민이주 논쟁이든,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은 침묵보다 바람직하다. 국경에 갇혀 있던 기억이 국경을 넘으면서 내는 파열음은 자신과 다른 기억을 지각하면서 나타나는 건강한 긴장의 신호이기도하다.
*********************

서로 경합하는 기억의 연대는 특정한 기억 아래 다른 기억을 위계적으로 줄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억의 연대는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서로 다른 기억이 만나고 얽히면서 생성되는 불협화음을 비판적 긴장 관계로 유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희생의 기억을 탈영토화하여 ‘제로섬 게임‘적 경쟁체제에서 벗어날 때,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

화에서 벗어날 때, 그래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시킬 때, 기억의 연대를 막고 있는 장벽이 터지면서 지구적 기억구성체는 삐걱거리면서도 다양한 기억이 합류하여 흐르는 연대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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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2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일단 좋아요 누릅니다 대단한 밑줄긋기 짝짝짝

거리의화가 2022-11-21 13:2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더 열심히 밑줄긋기했습니다ㅋㅋㅋ

2022-11-23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3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Ⅷ. 병치

[나가사키의 성자와 아우슈비츠의 성인]
홀로코스트의 책임은 공산주의에 있다는 논리는 공산주의의 정통성을 흔들고 공산주의의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끌어내는 동유럽 사회는 현재 극우 민족주의와 네오파시즘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최근에는 시민사회의 기억으로까지 일반화하는 경향
홀로코스트와 원폭 피폭의 병치 ->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기억을 구조화하는 서사적 기법이자 헤게모니적 장치 - 아우슈비츠의 성인 폴란드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와 나가사키의 성자로 추앙받는 나가이 다카시에 대한 기억의 병치
막시밀리안 콜베: 나가사키에서 선교활동 후 귀국했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다른 수감자들의 탈출을 시도하다 나치의 보복으로 처형될 폴란드인 동료 수감자 프란시셰크 가요브니체크를 대신해 죽음을 택해(1941.8.14)
나가이 다카시: 의사였던 그는 나가사키 원폭으로 부인이 사망하고 본인도 크게 다친 후 원폭 후유증으로 고생.
콜베와 다카시의 인연 - 콜베를 진찰한 다카시는 폐결핵을 진단하고 절대안정을 주문. 선교활동에 열심인 신부의 모습은 의학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묵주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 이야기 -> 가톨릭이 기억 문화의 매트릭스로 작용해
일본 진주만 기습 공격일 = 성모마리아가 잉태한 축일(1941.12.8), 나가사키 원폭일(1945.8.9)에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고해 성사 미사가 있었음
나가이 다카시는 콜베가 창간한 《성모의 기사》에 1947년부터 1951년 죽기 직전까지 <원폭 황무지의 기록>을 연재하면서 둘의 인연은 지속
나가이 다카시는 《나가사키의 종》 에세이를 출간: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의 죽음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글

[‘우라카미 홀로코스트‘와 사랑의 기적]
나가이 다카시: ‘우라카미 번제(홀로코스트)설‘의 창시자. 우카라미 번제설은 1945년 11월 23일 나카이가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원폭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추모 연설을 하면서 시작
‘홀로코스트‘: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동물을 산 채로 태워 신께 공양하는 제의를 뜻하는 성서의 용어.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 홀로코스트의 신성한 희생자이자 종전을 이끌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은 평화의 순교자가 됨
오자키 도메이 신부는 우라카미 병기 공장에서 일하다 피폭당한 후 2개월 후에 수도회에 입회하고 《나가사키의 콜베》에 책 씀
《여자의 일생 - 2부》을 쓴 엔도 슈사쿠도 콜베 신부를 널리 알린 작품. 살아남은 자의 미묘한 죄의식 그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

[반서구주의와 반유대주의]
교회는 서양 식민주의의 이미지와 겹쳐져 가톨릭에 대한 일본 사회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음.
일본의 기억 문화에서 콜베 신부는 주변부 국가로서 폴란드 출신을 갖고 있어 역설적으로 우위를 지닐 수 있었음. ->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서양 식민주의에 맞서 일제를 지지하는 콜베의 입장(주변부적 인물)은 일반적인 서양 선교사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음
소노 아야코는 《기적》이라는 다큐멘터리 전기를 통해 콜베 신부의 생애를 일본에 널리 알림. - 콜베를 애국자로 그림. 콜베의 아버지가 러시아 대항 애국주의 계열의 폴란드사회당 지도자여서 민족운동에 투신한 영향도 있었음.
수필 <콜베 신부>에서 엔도 슈사쿠는 보통 일본인에게 콜베 신부의 사랑을 알리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해. 이 수필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림.
얀 유제프 립스키는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에 의문을 제기. 콜베 신부는 작은 신문의 창립자이자 편집인이었는데 이 신문은 극단적 반유대주의에 증오와 혐오의 온상이었다는 것. 신문은 급진민족주의진영(ONR)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
NYT, WP 등 미 주요 언론이 1982년 콜베의 시성식 전후하여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가 논란화
NYT는 콜베가 자기 목숨을 희생해 구한 가요브니체크의 부고 기사에서 다시 콜베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언급(1995.3.15)
퍼트리샤 트리스의 콜베 전기에 대한 서평에서 존 그로스가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를 언급한 데 대해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져(1983.2)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 논란에 대해 일본 가톨릭 지식인들이 지켜온 침묵의 의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들의 침묵(엔도 슈사쿠 등)은 일본 가톨릭 일반의 콜베 숭모 열기와 대조되는 것

[풀뿌리 기억과 순교의 문화]
콜베 신부의 순교가 알려진 것은 그의 시성식(1982.10.10) 이후. 엔도 슈사쿠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여자의 일생》 신문에 연재, 콜베 신부 기념관을 만드는 캠페인 시작
-> 1980년대 일본 콜베 열풍은 조국인 폴란드보다 앞섰던 것.
2007년 폴란드에서 TV 다큐멘터리 방영 후 콜베 신부 다시 회자되어. 폴란드 상원은 2011년을 성인 막시밀리안 콜베의 해로 선포.
카우코프-고두프 교회가 콜베 신부에게 최초의 교구 교회로 헌정됨(1983년 성당 1층 완공. 1986년 ‘폴란드 민족의 골고다‘ 명칭 얻어)




엔도 슈사쿠의 작품 <여자의 일생>은 번역된 것이 1986년이라 절판되었고 이후 출간된 게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여자의 일생>은 모파상, 이광수의 작품이 유명해서 슈사쿠도 이런 작품을 쓴 줄 몰랐다. 아무튼 지금은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겠구나.(찾아보니 중고로는 있으나 흠... 2만원부터 시작해서 9만원까지 가격 스펙트럼이 넓네)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누가 더 많이 고통을 받았으며 누구의 고통이보편적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경쟁 구도는 기억의 병치를 전제한다. 기억의 병치는 정교한 이론적 서사나 감성에호소하는 장치를 수고스럽게 만들지 않고도 비교적 쉽게 자기 나라의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본질화하고 정당화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비교의 도구로 이용되는 병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할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억의 병치가 항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의 몽타주를 통해 의도하지않은 공통성을 드러내되, 기억의 선형적 질서를 교란하고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병치(radical juxtaposition)‘의 방법도 있다.

제노사이드 용어의 창안자 라파엘 렘킨은 나가사키의가톨릭 박해가 독일의 헤레로 부족 학살, 벨기에령 콩고의 식민주의학살, 집시·미국 인디언 · 아즈텍·잉카·아르메니아·유럽 유대인의 대학살 등과 함께 제노사이드의 세계사를 구성한다고 썼다. 원폭 투하는 나가사키의 가톨릭 박해에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제노사이드의 비극성을 강화했다.

나가사키의 원폭 기억은 콜베 신부를 통해 아우슈비츠의기억과 얽힘으로써 전쟁과 제노사이드의 고통을 성찰하면서 평화를향한 보편적 기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연대를 강조하는 나가사키의 기억 문화는 그 대신 원폭의 비극을 낳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탈역사화된 나가사키의 피폭 기억은 일본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나가이 다카시의 우라카미 번제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천황의 전쟁책임과 미국의 원폭 투하 책임을 지워버리는 ‘이중의 면책‘ 담론이라는 데 있었다. 나가사키의 피폭자이자 시인 야마다칸(山田加人)은 번제설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으로 향해야 할 "민중의 원한을 ‘신의 섭리‘라는 말로 달래는 친미적 허위 선전이라고 비난했다.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井上UL)도 ‘신의 섭리‘는 원폭 투하의 책임 소재를흐리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효과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신의 섭리‘를 통해 원자폭탄의 무고한희생자를 세계평화를 위한 거룩한 희생자로 승화시킨 나가이의 연설은 나가사키의 비극을 탈역사화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원폭 투하라는미증유의 역사적 비극을 탈역사화하고 종교적 본질로 환원한다면, 원폭 희생자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나가사키 피폭자의 희생자의식이 탈역사화되면 그에 입각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도 다시 탈역사화라는 기억 정치의 덫에 빠져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기쿠의 희생적인 사랑과 동료 수인을 대신해서 목숨을 바친 콜베 신부의 순교자적 사랑은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깨닫게 하고, 또 대신 속죄해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죄이며, 그에 대한 죄의식을 느낄 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엔도 슈사쿠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의 소설에서 아우슈비츠의 성인 콜베와 나가사키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나가사키와 깊은 인연을가진 콜베 신부의 아우슈비츠 순교는 우라카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가톨릭 신자의 죄의식을 성찰하고 정화하는 데 최상의 재료였다.

소노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억 속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순교한 콜베와 게라마 제도 섬주민의 강요된 집단 자결이성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으로죽은 사람들‘로 같이 배치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군 수비대장의 죄를 인간의 관점에서 비판했음을 재천명하고, 소노처럼 이렇게 말하는 자야말로 인간을 더럽히고 있다고 대응했다.
나라를 위해 아름다운 마음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소노의 애착은전후 일본 민족주의의 시민종교적 집단 심성을 대변한다.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콜베 신부가 《시온의정서>를 사실로 믿었으며, 프리메이슨 마피아가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부채질하고 국제시온주의가 그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콜베신부가 창간한 《작은 신문》이 강한 반유대주의적 논조를 띤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콜베 신부는 유대인의 개종을 승인하고 또 독려했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개종이나 동화를 허용하지 않는 급진적 인종주의자는아니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니예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숨고자 했던 1,500여 명의 유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숨겨주었던 일화에서 보듯이, 콜베 신부는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자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1971년 시복 이후 공산주의 정권 아래 폴란드에서 콜베 신부는 이처럼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폴란드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콜베 신부의 반프리메이슨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반공주의의 사상적 뿌리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1984년 10월 19일 연대노조의 예지 포피에우슈코(Jerzy Popictuszko) 신부가공산정권의 보안경찰에게 피랍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자, 콜베 신부의반공 순교자적 상징성은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1984년 이후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기억 문화에서는 포피에우슈코 신부가 콜베 신부를제치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희생된 순교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나치의 박해가 이미 희미해진 먼 기억이라면, 공산주의의 박해는 생생하게살아 있는 가까운 기억이었다. 연대노조 운동 이후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더 급했던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는 콜베 신부라기보다 포피에우슈코 신부였다. 20세기 말까지 폴란드보다 일본에서콜베 숭배가 더 컸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와 나가사키의 희생이 진정한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 2019년 11월 24일 방일 중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한 연설은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바람직한 기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히로시마의 원폭 희생자에 관해 "여러 장소에서 모여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이 장소의 모든 희생자를 기억에 남긴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히로시마시 소재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평화 기원 행사에서 재일 한국인 가톨릭 피폭자 박남주 씨와 악수하고 대화하는 등 비일본계 타민족 피폭자들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적과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원폭 희생자를 추모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일 행적은 콜베 신부의 기억에 많은 관심을 표명한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일 메시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암시한 것처럼, ‘희생‘을 희생시킬 때 비로소 그 희생의 의미가 살아나는 역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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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1-19 0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가 쓴 여자의 일생이기는 하지만 신앙은 빠지지 않는군요 1부는 막부말기에서 메이지고, 2부는 2차 세계 전쟁이 일어난 나가사키군요 《침묵》에서 200년 뒤, 300년 뒤... 이건 한번 한국말로 나왔다 다시 나오지 않아서 예전에 나온 책이 아주 비싸게 팔리기도 하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20 09:34   좋아요 0 | URL
네. 슈사쿠의 문학을 아직 제대로 읽은 게 없지만 역시 그의 작품에서 신앙의 문제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2부의 내용입니다. 중고로 사기에는 비싸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근데 다시 나오면 책값이 오르겠죠?ㅎㅎㅎ
 

최남선 <소년> 4호에 등장한 권두시: 신민회의 망명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3.1운동 후 망명
심훈 <동방의 애인>: 박헌영, 주세죽, 김단야의 망명

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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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1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국 문단 보다 작품들이 풍성 했던 시절인것 같습니다
자칫 한국어가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시절 ㅜ.ㅜ

거리의화가 2022-11-17 11:31   좋아요 1 | URL
시대 상황이 스펙타클이여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다양한 소재와 주제, 배경의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 근대소설도 읽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어요.
한국어만큼 말맛을 잘 살리는 글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그레이스 2022-11-28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주일 전에 아이들하고 압록강은 흐른다 읽고 토론했어요.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이번달 서재 활동 많이 안했던니 그사이 엄청나게 올리셨네요 ^^;;

거리의화가 2022-11-28 10:40   좋아요 1 | URL
아이들의 논리력이 쑥쑥 클 것 같습니다. 저도 못 읽어본 책을 아이들이 읽었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ㅎㅎㅎ 읽고 정리하지 않으면 잊어버려서 최대한 읽은 건 기록하는 의미로 올렸는데 본의아니게 많아졌네요^^;
 

Ⅶ. 과잉역사화

[집합적 무죄와 예드바브네]
예드바브네에서 유대인 이웃들을 살해한 죄로 전후 공산주의 법정에서 각각 15년과 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라우단스키 형제는 2000년 12월 폴란드 자유주의 일간지에 자신들은 무죄라고 변명. -> 자신들은 유대인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유대인 빨갱이‘라는 고정관념은 폴란드인이 유대인 공산주의자의 희생자였다는 기억을 정당화하는 것
이념과 체제에 따른 기회주의(유연한 실용주의?)(자)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한나 아렌트의 ‘집합적 유죄‘와 ‘집합적 무죄‘ -> 집합적 유죄: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자기네 집단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일에 죄가 있다고 가정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범주적 사고방식, 집합적 무죄: 집합적 유죄의 반대에 있으나 무죄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 - 양자는 서로를 떠받치고 정당화한다
가해자들에게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자신의 죄의식을 숨기고 분노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기억의 자산이다.
키엘체 포그롬에 대한 폴란드 민족주의 우파의 부정론(1946.7.4): 유대인에게 납치되어 종교의식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는 8살 소년의 거짓말로 촉발되어 40명의 유대인과 2명의 폴란드인의 사상자 발생(나치 지배로부터 해방된 폴란드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적 공격의 절정 -> 유대인 망명 가속화). 키엘체 학살 이후에도 폴란드에서 유대인이 학살은 이어짐. 문제는 학살의 주체가 평범한 폴란드 민중이었다는 사실.
폴란드의 극우 민족주의는 나치 점령군과 홀로코스트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적 정통성을 고수하여 반유대주의가 나치의 협력자가 아니라 폴란드 애국을 위한 것이라는 상징성으로 남아
여성 레지스탕스의 상징성 ‘조피아 코사트-슈추츠카‘: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가톨릭 폴란드인의 의무임을 제시하면서도 유대인이 폴란드의 적이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반유대주의)이라 단언
유대인을 숨겨주다 목숨을 잃은 울마 가족(1944.3.24) -> 울마 가족 기념관 만들어져(2016.3): 폴란드의 집합적 무죄 상징하는 기억의 터
‘민족기억연구소‘ 수정 법령(2018.1.26): 폴란드 민족이 나치에 협력했다거나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주장은 처벌 대상.-> 얀 그로스 처벌 대상되(폴란드 이웃이 유대인 이웃을 학살한 역사를 기록)
비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적 조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구한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5세 전후 모로코 민족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역설적으로 비시 프랑스 정부가 세운 강제노동수용소에는 모하메드 5세의 이야기 없어.

[B·C급 전범과 조선 화교 포그롬]
포그롬: 대 박해, 러시아 말. 러시아 제국 내 유대인에 대한 비유대인의 폭력을 가리키는 용어
《세계일주기: 붕정십만리》(1949): 작자 안동원. 런던에서 한 영국인이 ˝유, 코리안?˝ 물어보니 ˝빠가야로˝ 하며 때릴 듯 달려들었다. 한국인이라 항변하니 한국인이 더 나쁘다며 응수. 알고 보니 그 영국인은 일본군의 싱가포르 함락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보냄. 그의 분노는 일본군에 배속된 식민지 조선인 간수들에게 향해 있던 것.
《인도기행:》: 작자 고황경. 아시아의 이웃들에게 악랄한 조선인의 인상이 박힌 데 대한 경험
뉴델리의 범아시아대회(1947):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확인하고 전후 아시아의 새로운 단결을 도모하고자 개최되었으나 일제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이 아시아 이웃에게는 가해자임이 드러나는 계기도 되었음
타이-미얀마 철도 부설사업에 동원된 전쟁포로 관련 학대 전범 재판에서 조선인 군무원 수가 전체 120명 중 35명. 그 중 33명이 유죄 판결 받아. 대한민국 탈식민주의 공적 기억에서는 희생자로 남아.
KBS 다큐멘터리 <전범이 된 조선 청년들>: 조선인 포로감시원+연합군 포로 희생자 대립구도 확인돼. -> 보자
‘매개 행위‘: 가해자가 자신의 무고함을 변호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논리 - ex) 아돌프 아이히만: 가해자의 행위 주체성은 어디로 갔는가?
정부가 발간한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는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하게 된 것은 일제 침략전에 강제 동원되었기 때문˝으로 주장. 1차 가해자는 일제. 2차 가해자는 연합군 군사재판. 전범 당사자는 사죄의 제스처를 취했으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이중의 피해자로 규정.
양칠성은 식민지 조선인, 일본군 군무원, 친일협력자, 일본군 전범, 인도네시아 민족해방군,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힌 사형수 포로 생활을 하며 여러 공간을 넘나드는 기억의 경계인.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완바오산 사건(1931.4)‘: 학계 공식 용어 -> 조선 화교 포그롬(저자가 주장하는 용어 - 한반도에서 벌어진 화교에 대한 학살과 약탈 사건 은폐할 우려): 만주 창춘 완바오산(만보산) 부근 황무지 개간과정에서 수로 공사를 둘러싸고 불거진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 조선일보 만주 지국의 오보로 한반도에서 조선인이 화교를 학살.
2003년 고등학교 국사 검인정 교과서 ‘완바오산 사건‘ 최초 기술하여 공식 기억의 영역으로 들어가.
한국인의 집합적 무죄에 대한 확신은 일본인의 집합적 유죄에 대한 폭력적 단죄론을 낳아

[세습적 희생자의식과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기억 문화는 ‘홀로코스트‘ 전후 세대에게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는 지위 세습
이스라엘 건국 후 공식 기억은 시온주의적 영웅 vs 허약하고 수동적인 유대인 디아스포라 희생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 시온주의적 헤게모니에 입각한 역사 담론 강조
미국 유대인 사회도 자신들이 승리한 영웅에 속해야 한다는 것을 문화적으로 공유. 희생된 유대인에 대한 기억을 강제로 없애거나 줄여야 하는 것 공유.(냉전 체제도 영향을 주었음)
체코슬로바키아의 루돌프 슬란스키 재판 이후 미국 유대인은 스탈린과 공산주의 진영의 반유대주의를 강조하기 시작
유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전쟁 영웅이 지배하는 기억 문화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는 주변화
이스라엘 독립선언서: 유럽 유대인의 학살은 디아스포라의 과거를 청산하고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시급한 과제임을 일깨워주었다 적시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공개도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계 여론 들끓어.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의견 높아져. -> 이스라엘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 승인받아

역사의 가해자가 기억의 희생자로 변신할 때는 공통된 현상이 하나있다. 연루된 개개인이 행위의 주체성을 반납하고 역사의 구조 뒤로숨는 것이다.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선 개인은 상황의 압도적인힘 앞에서 초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억의 영역에서 행위 주체성을 반납한다는 것이 반드시 무기력의 표현만은 아니다. 폭력의 구조와역사적 상황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일방적 강조는 개개인의 주체적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도망가는 편리한 변명의 기제이기도하다.

아렌트의 비판에 따르면, 조상이나 아버지 세대의 죄를 민족의 이름으로 뒤집어쓰는 ‘집합적 유죄‘나 개개인이 저지른 죄를 민족의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집합적 무죄‘는 집합 내의 모든 사람을 유죄나 무죄로 단정함으로써 결국 아무한테도 죄를 물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유대인 이웃을 학살한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실존적 책임을 지는 대신,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인 폴란드 민족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희생자로 간주하는 라우단스키 형제는 ‘집합적 무죄‘의 사유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이면서도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걸고 유대인 이웃을 구한 폴란드인은결코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따라갈 때만 단 하나뿐인 출구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한 ‘의인‘ 울마 가족의 기억이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학살자 라우단스키 형제의 기억과 만나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선량한 희생자 폴란드 민족의 집합적 무죄가 폴란드 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구성하는 프레임으로 자리 잡으면, 나치 점령기의 예드바브네 학살뿐만 아니라 전후의 키엘체 학살 부정론도 고개를 내민다. 이들에 따르면, 학살은 폴란드 민족주의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스탈린의 비밀경찰 또는 폴란드 공산당 공안기관의 음모로 환원되고, 폴란드인 가해자는 음모의 무고한 희생자가 된다.

폴란드의 경험은 민족의 집합적 무죄에 기초한 사회적 기억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억 정치의 도덕주의는 도덕적이지 못하다. 과잉 역사화된 집합적 무죄의 도덕적 정당성에 안주하기보다 개개인의실존적 책임을 묻는 양심의 목소리가 훨씬 더 소중하다는 모순어법이야말로 바람직한 기억의 정치를 추동하는 문법이다.

조선인 전범의 변론과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옹호론적 기억은 ‘집합적 무죄‘와 ‘매개 행위(mediation of action)’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포로감시원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한민족 전체와 더불어 무죄라는 식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행위가 엄연한 전쟁범죄라고 할지라도 행위 자체의 폭력성 이면에 식민지 민중에게 ‘강요‘ 가해의 ‘완장‘을 단순한 범법행위로 처벌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것은 집합적 무죄론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편 ‘매개 행위‘는 가해자가 자신의 무고함을 읍소할 때 자주 사용하는 논리다. 유대인의 뺨 한번 때린 적 없는 자신은 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며, 단지나치독일의 관료로서 상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무죄를 강변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대표적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책상 위의 가해자‘인 명령권자는 자신은 실제로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명령 체계 말단의 가해자는 자신은 강요된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모두 무죄가 된다. 가해자의 행위 주체성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포로 학대가 상관의 명령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이학래 씨의 말은 자신이 ‘불가피한‘ 가해자였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별 행위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유대인이므로 유죄라는 발상의 극단이 홀로코스트였다는 점에서, 국적이나 민족이 무엇이냐에 따라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기억의 코드는 위험천만하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식민지 조선인이기 때문에 피해자였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라,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같은 가해자인데도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원호를 거부해온 일본 정부의 국제적 책임을 어떻게 묻고 기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한다. *********

한국과 중국을 이간질하여 만주 침략을 옹호하고 유리하게 만들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이간책이라는 음모론이 ‘조선 화교 포그롬‘에 대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기억을 지배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조선 총독부 형사들이 ‘조선인 지게꾼‘들을 매수하여 중국인 상점과 중국인을 습격하게 했고, 이들은 일본경찰의 방조 아래 중국인에 대한 방화와 약탈, 파괴를 자행했다. 심지어는 식민지 시대가 주요 배경인 대하소설 《토지》에서 작가는 "한복으로 변장한 일본인이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폴란드 공안 장교가 군중을 진두지휘한 키엘체 학살은 폴란드 공산당의 음모였다거나, 이 학살에서 군중을 이끌던 인물이 1960년대 텔아비브의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한 스탈린의 비밀경찰 간부였다는 폴란드 우익의 스탈린주의 음모론을 연상시킨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하고 동화를 주장하면서 유럽에 남은 유대인에게 닥친 대재앙은 이스라엘 땅에 독립된 국가를 재건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시온주의적 전망이 옳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대부분 유럽에 남아 있던 동화주의자였던 것이다. 민족은 시민적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동화주의의 패배는 이스라엘에서 시온주의자의 혈통적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이주를 강조한 시온주의적 민족주의 노선이 옳다는 증거라고 받아들여졌다. 시온주의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옛 땅에 독립된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는 것은유대 민족에게 부과된 태생적 운명이자 유일한 대안이었다. 이런 역사 담론에 홀로코스트가 들어설 여지는 별반 없었을 것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전제하는 가해자와 희생자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는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등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 그것은 식민주의와 홀로코스트를 낳은 세계사의 규칙을비판하고 바꾸기보다, 규칙은 그대로 둔 채 패자의 자리에서 승자의자리로, 희생자의 자리에서 가해자의 자리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낳기 쉽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희생자가 된 역사에대한 회한과 비판에서 출발하지만, 자리를 바꾸어 승자나 가해자가 될수 있다면 식민주의와 홀로코스트의 규칙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식이다. ‘세습적 희생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성찰이 21세기 문화적 기억의 서사적 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희생자 민족‘의 집단적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세습적 희생자라는 지위는 잠재적인 또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식민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을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 홀로코스트가 주는 섬찟한 교훈은 또다시 그런 일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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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1-17 0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쪽에서 일한 친일파도 있고, 강제 동원으로 전쟁에 나간 사람도 있군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안 좋았다는 말도 있네요 한국이 늘 피해자는 아니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2-11-17 09:43   좋아요 0 | URL
네. 한국도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고 참 복잡한 문제입니다. 들여다볼수록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겠구나 싶습니다.
 

5장 제인 오스틴의 겉 이야기(와 비밀 요원들)

* 상상력과 창의성의 관점에서
<레이디 수전>: 여성의 창의성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 상상력이 악과 관련
<이성과 감성>: 상상력이 자기 파괴와 밀접
<오만과 편견>: 상상력의 위험함을 자기주장과 이기심, 섹슈얼리티의 함정과 관련지음
<에마>: 상상력에 대한 양가성. 자신 이외엔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주인공 내놓아
<맨스필드 파크>: 이중성과 심리적 분열의 극대화. 자아와 타자의 갈등 폭발 - 자기 창조의 정신을 ‘매혹적인’ ‘감염병’이라 정의


<에마>: 여성의 본보기 그려
<설득>: 권위에 대한 복종과 삶의 이야기에 대한 포기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탐색. 숙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여주인공 그려

설득은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

글자 그대로 아버지의 책을 쓰는 일은 생애 내내 그녀가 했던일, 즉 아버지의 이론을 설명하고 권위적인 남성 인물의 현명한자비심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썼던 일이었다. 적어도 한 비평가는 마리아가 아버지의 기준과 자신의 개인적 도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소설에서도덕적인 표면과 상징적인 저항의 대화를 유지함으로써)" 아버지의 가치와 다른 자신의 의견을 암암리에 표현했다 하더라도, 이 정신분열적인 해결은 가정이라는 전선에서 그녀에게 책상을 내준 일에 대한 아버지의 선심 쓰는 듯한 글을 남겼을 뿐이다. - P305

만일 여성이 글을 썼다면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응접실에서써야 했을 것입니다. […] 여성은 항상 방해받았습니다. […] 제인 오스틴은 마지막까지 그런 환경에서 글을 썼습니다. 오스틴의 조카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생각해보면 고모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고모는 독립된 서재가 없어서 작품을 대체로 공동응접실에서 썼는데, 보통 응접실은 모든 종류의 일상사로 방해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고모는 하인들이나 방문객,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자신이 글을 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했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원고를 숨기거나 압지로 덮어두었습니다. […][오스틴은] 문의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 들어오기 전에 원고를 감출 수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 P306

오스틴은 (여성은 항상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거부할 필요가 있다는) 자기 이야기가 품고 있는 억압 덕분에 역설적으로 자신이 여자 주인공의 운명으로 규정하고 옹호한 감금을 피할 수 있었다. - P307

오스틴의 예의 바름은 그녀가 가르치기 시작한 모든 후기 소설 속 공공연한 교훈에서 가장 또렷하게 나타난다. 왜 그리고어떻게 여성의 생존이 남성의 승인과 보호에 의존하고 있는지극화시킬 때, 오스틴은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허구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남성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힘을 존중한다. 부적절한 아버지를 거부하는 모든 여자 주인공은 더 훌륭하고 더 섬세한 남자들을 찾아나서지만, 그 남자들도 여전히 권위를 대표한다. - P308

오스틴의 책상 위 원고를 덮고있는 압지와 마찬가지로, 침묵과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오스틴의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이야기는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를 강화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관습법이 이시기에 ‘엄호물‘이라고 불렀던 것은 실제로 결혼한 여자의 지위를 유예되고 ‘덮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성의 존재 자체나여성의 법적 지위는 결혼 동안 유예되거나 적어도 남편의 존재안으로 통합되어 합체된다. 그의 날개와 보호와 덮개 아래서 여성은 모든 것을 수행한다‘고 윌리엄 블랙스톤 경은 쓴다. 오스틴이 꿈꾸었던 가장 행복한 결말은 (적어도 그녀의 마지막 소설까지) 무엇인가를 해내려는 여자 주인공들에게 보호와 덮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P309

‘기절하기‘와 ‘미쳐버리기‘라는 양극단은 여성을 유혹하지만 또한 파괴하는 극단이기 때문에, 오스틴이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변증법적인 자아의식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여성 의식의 양극단은 수많은 여성들을 정신분열로 내몰았지만, 오스틴의 여자 주인공들은 살아남아 번영을 누린다. 바로 서로 대립되는 투사 때문이다. - P322

오스틴이 쓴 총 여섯 권의 소설에서 자기규정의 수단을 박탈당한 여자들은 분장과 위장이라는 위험한 즐거움에 치명적으로이끌리는 모습을 보인다. 오스틴의 직업은 바로 이런 가장에 의존하고 있다. 분장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위장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플롯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 모든 소설에서 화자의 목소리는 재치 있고확신에 차 있으며 활기 넘치고 독립적이다. - P330

오스틴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이여성 인물들에게 부여한 구속에서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오스틴은 전형적인 듯하다. 소설이란 작가의 주체성을 유지하고 숨기면서도 효과적으로 대상화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들이 소설에 지대하게 공헌해왔다고 볼 수 있기때문이다. 달리 말해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본인의 미학적 풍자적 감수성에 의문을 던지고 비판하는 동시에, 예술의 엄격성에 의해 규율이 잡히지 않은 상상력의 한계를 언급하며 그위험을 주장하고 있다. - P331

오스틴은 전형적 여자 주인공과의 동일시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화를 반항적으로 이탈한 오스틴을 재연하는) 덜 두드러지지만 더 심술궂고 더 발랄하고 활동적인 여성 인물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가능성‘ 속에 머무른다. - P332

이미 많은 비평가는 오스틴 소설의 ‘행복한 결말’이내포하는 이중성을 주목해왔다. 이 결말에서 오스틴은 매우 서둘러서, 또는 있음직하지 않은 우연의 일치로, 또는 모든 메시지를 약화시켜버릴 정도의 빈정거림으로 연인들을 축복의 가장자리로 데려온다. 34 호의적인 화자의 도움이 없다면 소녀는 결코 치욕감이나 부모의 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시가 여전히남아 있는 것이다.
오스틴의 이중성이 좀 더 모호하게 나타나는 것은 극도로 강력한 여자들을 재현할 경우다. 이런 여자들은 여자 주인공이나작가가 억누르고 있는 반항적인 분노를 매우 성공적으로 재연한다. 분노한 여자들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자신의 목소리로말하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에 플롯에서 비밀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플롯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미미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소설 마지막에 가서는 스토리의끝에 묻혀버리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한다), 자신들이 매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징벌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 P333

오스틴 소설의 모든분노에 찬 귀족 과부들은 남성 신의 계몽적 이성을 위협하며, 남성 신은 결국 여성의 섹슈얼리티, 변덕, 수다의 힘을 추방함으로써만 여자 주인공을 얻는다. 밤의 여왕이 여전히 격렬한 저항의 노래를 열광적으로 부르면서 무대 뒤로 사라지는 <마술피리>처럼, 노리스 이모 같은 여자들은 결코 완전히 억압될 수 없다. 『이성과 감성』에서 멸시당하는 페라스 부인이 좋은 예다. - P337

이 마지막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남자들도 가정생활을 중시하고 참여하는 한편, 여자들은 공적인 행사에 공헌하는 평등한 사회를 발견한다.
이것은 평등한 성적 이데올로기의 출현을 예견하는 상호 보완적인 이상이다. 38 앤은 오스틴의 소설과 편지에서 위험하고 따분한 행위로 묘사하는 출산과 양육의 여성 공동체에 더 이상 갇히지 않고, 39 전통적인 남성 영역과 여성 영역의 통합을 상징하는 결혼에 성공한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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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5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설득>을 읽어야 한다고.... 그래서 읽으려구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11-16 09:17   좋아요 1 | URL
그런데 설득 읽을 시간이... 다른 책 대신 읽는 것으로 해야할까요ㅠㅠ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 2022-11-16 10:31   좋아요 1 | URL
저도 설득만 갖춰놓았지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2-11-16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설득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거리의 화가 님!! ㅎㅎ

거리의화가 2022-11-16 09:17   좋아요 1 | URL
오~ 다락방님 읽어보셨군요. 재미있다니 기대되네요. 에마는 한참으로 미루고 설득이라도 올해 안에 읽는 걸 목표로 해봐야겠습니다!ㅎㅎ

다락방 2022-11-16 09:19   좋아요 2 | URL
저는 에마는 너무 싫었어요, 거리의화가 님. 제가 에마를 읽으면서 엄청 욕해놓은 페이퍼도 있을 거예요. 에마 성격이 진짜 너무 제 타입 아니라서요. 완전 슈퍼 오지라퍼에 저여자랑 저남자랑 잘 어울려~ 해놓고 그 남자가 자기 좋아한다니까 ‘감히 나를?‘ 막 이러는데 ㅋㅋ 와 너무 싫었어요 ㅋㅋㅋㅋ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는 에마에 대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네요.

scott 2022-11-16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득>
영드도 재밌습니다
남주가 좀 멋지게 나와여 ㅎㅎㅎ
에마는 영화는 비추!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11-16 10:59   좋아요 1 | URL
스콧님 영드 추천 감사드립니다~ 에마는 책본다고 해도 한참 뒤로 미루려구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