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용서
[용서의 폭력성과 가톨릭 기억 정치]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이 전 세계의 종교 지도자와 양심 있는 지식인에게 의견을 구한 일. 1942년 나치에 의해 야노프스카 강제수용소에 본인이 갇혀 있을 때 나치 친위대였던 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유대인(아무나)을 만나 사죄하고 편히 죽고 싶다는 말을 던진 것. 20년이 지나 비젠탈은 이 질문을 던졌다.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이 독일 주교단에게 보낸 사목 편지(1965.11.18) 사건: 폴란드 교회가 독일의 가톨릭 형제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메시지가 문제됨.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가 용서를 정치적 입장으로 끌고가
주교단 편지는 1966년 예정된 기독교 수용 1000주년 기념식에 서독의 가톨릭 형제들을 초대하여 폴란드와 독일 양국의 화해와 용서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으나 폴란드 교회는 이 편지로 인해 ’폴란드통합노동자당‘(가톨릭교회와 경합해왔음)이 이를 걸고 넘어지면서 가톨릭 민족적 정통성에 타격을 입었고 교회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김.
이후 냉전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폴란드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가 진전되었고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폴란드와 독일의 대화를 이끈 편지”로 주목되었고 21세기 들어서서 양국 관계를 넘어 역사적 화해의 외연을 넓혔음.
[폴란드 주교단 편지와 화해의 메타 윤리]
독일 개신교의 진보 진영이 서독 의회에 보낸 <튀빙겐 백서>(1961~1962): 서독의 핵무장 계획에 반대하고 오데르-나이세 경계를 전후 독일과 폴란드의 공식 국경선으로 인정할 것을 서독 정부에 촉구. -> 그러나 서독 거주 실향민들은 신랄하게 비난. -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동독과 동유럽 인민의 정치적 자결권을 무시하고 부정과 폭력을 찬양하는 공산주의에 동조했다!
‘독일개신교연합’이 <동방백서> 문서 공표(1965.10.14): 2차 대전 이후 오데르-나이세(독일과 폴란드 사이 국경) 국경선을 인정하고 폴란드에 할양된 독일 영토의 주권이 폴란드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 독일 실향민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나치 범죄와의 역사적 관계를 맥락화하면서 폴란드 희생자와 독일 희생자 사이에 상호 이해의 물꼬를 튼 계기. -> 폴란드의 권력기관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큰 반향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기독교의 진정한 선교 소명과 식민주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의 안전과 평화는 독일의 안전과 평화를 불러온다 암시. 적지 않은 독일인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폴란드 형제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지적.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 집합적 죄의식을 넘어서기에 가능
[독일 주교단의 답서와 수직적 화해]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에 대한 독일 주교단의 답서는 독일인이 폴란드 민족에게 가한 테러는 인정했으나 독일 실향민의 고통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동프로이센의 독일인 이주민은 해당 지역 슬라브 통치자의 초청으로 건너간 것이지 침략 의도가 없었던 그들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 게다가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발언.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신에 대한 죄이므로 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수직적 화해를 강조. 폴란드 주교단의 수평적 화해 요청에 대해 수직적 화해로 소극적 자세를 보인 것.
-> 폴란드 정부의 반가톨릭 캠페인 가속화. 독일 언론의 자기중심적 보도 더해져. 폴란드의 가톨릭 주교단은 민족 배반자라는 비난이 밧발쳐.
[가톨릭 형제애와 동아시아 평화]
일본 주교단 <평화를 위한 결의> 주교단 문서 채택(1995.2.25: 일본군이 조선, 중국, 필리핀 등 여러 지역에서 인권을 유린한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 일본인은 아시아인들에게 부과된 상처를 치유할 책임이 있으며 전후 세대 일본인도 이를 이어받아야 한다 강조. -> 한일 주교단의 정례적 만남 - 1차 ‘한일 교과서 문제’ 토론(1996),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교훈(2003), 동아시아의 탈핵/탈원전(2012) 등 쟁점을 다루며 양국의 역사 화해와 평화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역할 커져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일본 정평협)’(2019.8.15): 식민지 지배 역사에 대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자세와 분노하는 피해국, 한국인의 마음 사이에 벌어진 틈이 한일간의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라 지적. 일본 제국의 비인도적 행위의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의 역사적 도의적 정당성 강조. 일본 가톨릭 교도도 메이지 이래 일본의 침략 정책에 협력하여 부응한 측면이 있으므로 책임이 있다 성명.
Ⅹ. 부정
[부정론,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홀로코스트 학살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 하인리히 힘러는 학살을 입증하는 공문서를 파기하고 수용소의 시체소각로를 비롯해 학살 흔적을 폭파하는 등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인멸하는데 최대의 주의를 기울여.
[부정론의 스펙트럼과 담론적 지형]
단순 부정론은 공식 기억에 어긋나는 대항 기억이나 지배적 기억에 저항하는 도전적 기억을 부정하는 초기 단계에서 나타난다. 극단적인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 난징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노동의 폭력성을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 논객들, 곳곳의 제노사이드 부정론이 이것에 해당한다.: 사실의 부정. 증언의 모욕 - 가해자 집단을 물론 피해자 집단에서도 발견
‘혐의’의 부정론은 혐의가 씌워지면 그것이 사실인지 역사적 진실에 얼마나 근접해있는지 중요하지 않으며 발화되는 순간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도덕적 감정의 문제로 바꾼다. 언어적 수행성 때문에 선전만으로도 혐의를 쓴 대상에 대한 의심과 의혹,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인터넷 공간이 부정론의 새로운 산실.
실증주의적 부정론은 역사적 증거를 인멸한 사람들이 엄격한 실증주의자를 자처한다는 것에서 역설적. 이들이 외치는 ’증거‘는 ’증거‘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실증주의는 희생자의 기억이 부정확하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소환되는 이데올로기다. 증인의 기억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논지가 중심에 있다. - 히틀러에 대한 면죄 논리, 전두환의 면죄 논리,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 난징 학살에 대한 부정론, 1945년 일본군이 점령하던 베트남에 있었던 대기근 부정론
-> 어렵게 용기를 내 증언에 나선 이들을 위축시켜버리는 정치적 악의가 내포되어 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추정은 무지에 가깝다.
[국경을 넘는 부정론]
독일 역사가가 집합적 원죄에 대해 비판을 논해도 홀로코스트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면 반론의 주체가 나치 독일의 희생자인 폴란드 역사가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스탈린주의에 의한 희생을 강조하는 폴란드의 반공주의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독일의 기억공간으로 들어오면 나치 범죄의 역사적 평가에서 상대적 감가상각이 이루어진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희석하는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가 일본의 부정론자들에게 전유되는 것도 비슷하다. ->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가 탈영토화된 비판적 기억의 영역과 민족주의적 기억을 재영토화하는 변호론적 기억, 부정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시각적 재현(사진)의 회색지대는 실재를 조작하고 조정한다.
[증언의 진정성과 문서의 사실성]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확한 공식문서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의 부정확한 기억이 서로 다툴 때 사실과 진정성은 양립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재판은 이스라엘에 홀로코스트 증인의 청자 공동체를 만드는 계기였고 홀로코스트의 지구화와 더불어 이 공동체는 세계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본격화된 증언과 보통 사람들의 생애사는 목소리를 되찾아주고 그들의 말로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역사적 행위자의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다.
희생자의 목소리가 사회적 기억의 전면으로 등장하고 과거를 인식하는 중심이 문서에서 증언으로 옮겨갔다.
-> 21세기 역사학이 가지게 된 문제는 기억 연구가 갖는 윤리적 감수성을 수용하는 것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재현의 역설: 사실과 진실이 어긋나고 입증과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역설이 증언과 문서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시사점을 던져
부정확한 사실의 ‘깊은 기억’이 충실한 사실의 ‘지적 기억’보다 더 큰 진정성을 갖는 딜레마
미디어의 발전으로 ‘과잉’이 대중문화의 정상적 감각이 되어 비극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드라마적 미학의 소재로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져
* 연대
1978~1985년 사이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에 대한 동아시아 이웃 국가들의 예민한 반응 -> 동아시아 기억구성체의 생성으로 역사적 감수성 중요시해져
1950년대 일본 역사 교과서의 우경화 이미 시작되었으나 당시 한국 언론에 비판 기사는 전무해
“홀로코스트는 우리 땅에서 일어났지만, 우리 손은 깨끗하다”는 동유럽 민족주의자들의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 민족의 유일 책임론이 맺고 있는 기억의 공모관계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동유럽 민족주의 변호론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아

누구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논리를 떠나서 용서가 정말 위험한 것은, 그 행위가 피해자를 잊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용서가 구해지면 사람들은 화해와 용서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서둘러 가해자를 용서하고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끔찍한 행위조차도 인간성의 일부임을 아프게 인정하고, 그 끔찍한 일부가 다시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더 나은 기억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편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과거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으로 옮겨질 때, 돌연 동유럽의 과거이기를 멈추고 동아시아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1965년 주교단 편지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고 자의적으로 탈역사화하는 작업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 논문은 1965년 사목 서신의 정신을 21세기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어떻게 되살릴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019년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서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와 그 역사를 반추하는 것은,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수행성과 윤리적 의미를 넓혀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 간 역사 화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와 시민사회 모두 국제정치의 세속적 규범에 매여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의 관계자들이 자유롭게 이념의 장벽과 국경을 넘어 대화한 선례는 특별히 중요하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에 대한 성찰은 화해와 용서를 동아시아의 기억 정치를 움직이는 게임 윤리로 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이될 것이다.
1965년의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화해의 아방가르드‘라는 평가도 부족할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편지의 작성자들은 독일-폴란드인의 고통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크기와 상관없이 고통은 고통일 뿐이며, 정치적 의미가 다르다 해도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폴란드의 주교단 편지는 절제된 희생자의식과 더불어 훨씬 성숙한 화해와 용서의 윤리를 제시한다. 더 큰 고통의 희생자가 자신을 가해한 작은 희생자들에게 공감과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희생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단호한 도덕적 결단이었다. 《디벨트(Die Welt)》지가 썼듯이, 적지 않은 독일인이 폴란드 주교단 편지에 감동한 것은 희생자인 폴란드가 처음으로 독일 실향민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정의를 되돌려주려는 메시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독일인의 희생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고난에 따듯한 공감을 표시한 것은 이렇게 가해자 독일 대 희생자 폴란드라는 집합적 죄의식을 넘어섰기에 가능했다.
아무도 가톨릭 주교들에게 폴란드 민족을 대표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당의 정치적
비난도 일리가 있었다. 비가톨릭 폴란드인까지 가톨릭 교회가 대변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가톨릭 내부로 눈을 돌린다 해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폴란드의 희생자 개개인을 대신해서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독일인을 교회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선언한 것도 문제였다. 독일 가해자의 속죄 의지를 확인하고 폴란드 희생자에게 용서의 윤리를 설득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폴란드 주교단 편지가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초국가적 화해의 초석을 놓았지만, 용서를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해자 일본의 회개와 반성, 사과는 물론 화해의 필요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까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초국가적 기억 주체로서 일본 사회에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탈식민주의적 비판을 견지할 수 있다. 희생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복수하려는 욕망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되었다는 회한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된다. 식민자와 피식민자, 가해자와 희생자, 지배자
와 피지배자가 서로 위치만 바꾼 채 억압과 불의가 지속되는 연쇄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식민주의적 불의는 재생산될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보면, 반식민주의적 분노가 탈식민주의적 성찰을 앞서고 있는게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폴란드의 가톨릭교회처럼 가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베풂으로써 가해자의 사과와 참회를 끌어내는 전복적 상상력을 펼치려면 먼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이념적·감정적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정론의 메타언어는 제노사이드를 고취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라 일컬어질 정도로 극히 위험한 언어적 폭력이다. 부정론이 가해자의 공식
기억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의 기억 문화를 규율하는 ‘서사적 표준‘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미래의 제노사이드를 위한 플랫폼이 된다. 부정론의 핵심은 기억을 죽이는 데 있다. 기억을 죽이는 것은 희생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부정론자는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당하고 비통하게죽어간 희생자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도덕적 결단으로서의 기억을 부정함으로써 응답 책임을 회피하고 ‘타자의 정의‘를 부정한다. 말살을 망각하는 것은 또 다른 말살이다. 기억의 제노사이드야말로 최후의 제노사이드다.
누구도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정론자는 실증주의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즉, 문서가 아니라 기억에 토대한 상대방의 증언이 지닌 허점을 파고들어 기억의 진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용한다. 부정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이나 과학이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부정론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소환될때만 필요한 도구적 실증주의일 뿐이다.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돈‘을 노린 거짓이며, 그 배후에는 일본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일 세력‘이 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음모론을 실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이들의 실증주의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증언의 진정성을 깎아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 중심적 관점은 궁극적으로 역사 인식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인권의 강조는 희생자에 대한 공감을 낳고, 그 공감은 과거를 재현할때 문서 자료 못지않게 목소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술사의 증언 채집은 개개 희생자를 익명의 숫자에서 구출하여 이름과 얼굴을 찾아주고 내밀한 역사를 되살리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희생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자 역사는 여러 개개인의 이야기로 나뉘었고, 내밀한 역사의 추구는 역사의 정치적 범주를 심리적 범주로 바꾸어놓았다. 구술사의 등장은 단순히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구술자료를 통해 과거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보완 이상의 의미였다. 가해자가 지배하고 있는 공식 역사와 문서보관소에 맞서 힘없는 희생자의 목소리에 주목한다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었다. ‘역사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공식 역사의 단일화된 목소리에 삭제된 밑으로부터의 다양한 목소리를 복원한다는 것은 과거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공식 서사에서 무시되어온 하위주체들의 행위 주체성과 역사적 의의를 온전히 평가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홀로코스트나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같은 국가적 폭력의 피해자/생존자 들은 가해자들의 잔혹함을 입증하여 진실을 확립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는 한없이 불쌍해지고 비참해져야만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소비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일본군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만행을 듣고 싶어 하는 욕망과 ‘장기수 선생님‘들에게서 자랑스러운 투쟁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다르다. ‘장기
수 선생님‘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적 행위성을 청취하는 반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희생자로 대상화하고 일제의 끔찍한 가학행위를 짜내는 증언의 청취 방식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자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인권운동가라는 이용수의 항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믿을 수 없는 만행을 폭로하는 증인의 위치에 고정해온 한국 사회의 기억 문화에 대한 절규였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입니까?"라는 이용수의 반문에 한국 사회는아직 답을 못하고 있다.
자기 변호적인 일본의 기억 문화와 마찬가지로 자기 비판적인 독일의기억 문화가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저해하는 모순된 상황이 시사해주는 바는 분명하다. 일국적 기억 공간 내에서 변명적 기억과 비판적 기억을 구분하고 그 간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구적 기억구성체에 배치하여 기억의 탈영토성과 재영토성을 초국가적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이든 독일과 동유럽의 홀로코스트 논쟁이든,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점령지 식민이주 논쟁이든,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것은 침묵보다 바람직하다. 국경에 갇혀 있던 기억이 국경을 넘으면서 내는 파열음은 자신과 다른 기억을 지각하면서 나타나는 건강한 긴장의 신호이기도하다. *********************
서로 경합하는 기억의 연대는 특정한 기억 아래 다른 기억을 위계적으로 줄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억의 연대는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서로 다른 기억이 만나고 얽히면서 생성되는 불협화음을 비판적 긴장 관계로 유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희생의 기억을 탈영토화하여 ‘제로섬 게임‘적 경쟁체제에서 벗어날 때,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
화에서 벗어날 때, 그래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시킬 때, 기억의 연대를 막고 있는 장벽이 터지면서 지구적 기억구성체는 삐걱거리면서도 다양한 기억이 합류하여 흐르는 연대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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