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병치
[나가사키의 성자와 아우슈비츠의 성인]
홀로코스트의 책임은 공산주의에 있다는 논리는 공산주의의 정통성을 흔들고 공산주의의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끌어내는 동유럽 사회는 현재 극우 민족주의와 네오파시즘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최근에는 시민사회의 기억으로까지 일반화하는 경향
홀로코스트와 원폭 피폭의 병치 ->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기억을 구조화하는 서사적 기법이자 헤게모니적 장치 - 아우슈비츠의 성인 폴란드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와 나가사키의 성자로 추앙받는 나가이 다카시에 대한 기억의 병치
막시밀리안 콜베: 나가사키에서 선교활동 후 귀국했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다른 수감자들의 탈출을 시도하다 나치의 보복으로 처형될 폴란드인 동료 수감자 프란시셰크 가요브니체크를 대신해 죽음을 택해(1941.8.14)
나가이 다카시: 의사였던 그는 나가사키 원폭으로 부인이 사망하고 본인도 크게 다친 후 원폭 후유증으로 고생.
콜베와 다카시의 인연 - 콜베를 진찰한 다카시는 폐결핵을 진단하고 절대안정을 주문. 선교활동에 열심인 신부의 모습은 의학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묵주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 이야기 -> 가톨릭이 기억 문화의 매트릭스로 작용해
일본 진주만 기습 공격일 = 성모마리아가 잉태한 축일(1941.12.8), 나가사키 원폭일(1945.8.9)에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고해 성사 미사가 있었음
나가이 다카시는 콜베가 창간한 《성모의 기사》에 1947년부터 1951년 죽기 직전까지 <원폭 황무지의 기록>을 연재하면서 둘의 인연은 지속
나가이 다카시는 《나가사키의 종》 에세이를 출간: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의 죽음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글
[‘우라카미 홀로코스트‘와 사랑의 기적]
나가이 다카시: ‘우라카미 번제(홀로코스트)설‘의 창시자. 우카라미 번제설은 1945년 11월 23일 나카이가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원폭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추모 연설을 하면서 시작
‘홀로코스트‘: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동물을 산 채로 태워 신께 공양하는 제의를 뜻하는 성서의 용어.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 홀로코스트의 신성한 희생자이자 종전을 이끌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은 평화의 순교자가 됨
오자키 도메이 신부는 우라카미 병기 공장에서 일하다 피폭당한 후 2개월 후에 수도회에 입회하고 《나가사키의 콜베》에 책 씀
《여자의 일생 - 2부》을 쓴 엔도 슈사쿠도 콜베 신부를 널리 알린 작품. 살아남은 자의 미묘한 죄의식 그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
[반서구주의와 반유대주의]
교회는 서양 식민주의의 이미지와 겹쳐져 가톨릭에 대한 일본 사회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음.
일본의 기억 문화에서 콜베 신부는 주변부 국가로서 폴란드 출신을 갖고 있어 역설적으로 우위를 지닐 수 있었음. ->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서양 식민주의에 맞서 일제를 지지하는 콜베의 입장(주변부적 인물)은 일반적인 서양 선교사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음
소노 아야코는 《기적》이라는 다큐멘터리 전기를 통해 콜베 신부의 생애를 일본에 널리 알림. - 콜베를 애국자로 그림. 콜베의 아버지가 러시아 대항 애국주의 계열의 폴란드사회당 지도자여서 민족운동에 투신한 영향도 있었음.
수필 <콜베 신부>에서 엔도 슈사쿠는 보통 일본인에게 콜베 신부의 사랑을 알리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해. 이 수필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림.
얀 유제프 립스키는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에 의문을 제기. 콜베 신부는 작은 신문의 창립자이자 편집인이었는데 이 신문은 극단적 반유대주의에 증오와 혐오의 온상이었다는 것. 신문은 급진민족주의진영(ONR)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
NYT, WP 등 미 주요 언론이 1982년 콜베의 시성식 전후하여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가 논란화
NYT는 콜베가 자기 목숨을 희생해 구한 가요브니체크의 부고 기사에서 다시 콜베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언급(1995.3.15)
퍼트리샤 트리스의 콜베 전기에 대한 서평에서 존 그로스가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를 언급한 데 대해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져(1983.2)
콜베 신부의 반유대주의 논란에 대해 일본 가톨릭 지식인들이 지켜온 침묵의 의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들의 침묵(엔도 슈사쿠 등)은 일본 가톨릭 일반의 콜베 숭모 열기와 대조되는 것
[풀뿌리 기억과 순교의 문화]
콜베 신부의 순교가 알려진 것은 그의 시성식(1982.10.10) 이후. 엔도 슈사쿠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여자의 일생》 신문에 연재, 콜베 신부 기념관을 만드는 캠페인 시작
-> 1980년대 일본 콜베 열풍은 조국인 폴란드보다 앞섰던 것.
2007년 폴란드에서 TV 다큐멘터리 방영 후 콜베 신부 다시 회자되어. 폴란드 상원은 2011년을 성인 막시밀리안 콜베의 해로 선포.
카우코프-고두프 교회가 콜베 신부에게 최초의 교구 교회로 헌정됨(1983년 성당 1층 완공. 1986년 ‘폴란드 민족의 골고다‘ 명칭 얻어)
엔도 슈사쿠의 작품 <여자의 일생>은 번역된 것이 1986년이라 절판되었고 이후 출간된 게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여자의 일생>은 모파상, 이광수의 작품이 유명해서 슈사쿠도 이런 작품을 쓴 줄 몰랐다. 아무튼 지금은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겠구나.(찾아보니 중고로는 있으나 흠... 2만원부터 시작해서 9만원까지 가격 스펙트럼이 넓네)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누가 더 많이 고통을 받았으며 누구의 고통이보편적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경쟁 구도는 기억의 병치를 전제한다. 기억의 병치는 정교한 이론적 서사나 감성에호소하는 장치를 수고스럽게 만들지 않고도 비교적 쉽게 자기 나라의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본질화하고 정당화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비교의 도구로 이용되는 병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할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억의 병치가 항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의 몽타주를 통해 의도하지않은 공통성을 드러내되, 기억의 선형적 질서를 교란하고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병치(radical juxtaposition)‘의 방법도 있다.
제노사이드 용어의 창안자 라파엘 렘킨은 나가사키의가톨릭 박해가 독일의 헤레로 부족 학살, 벨기에령 콩고의 식민주의학살, 집시·미국 인디언 · 아즈텍·잉카·아르메니아·유럽 유대인의 대학살 등과 함께 제노사이드의 세계사를 구성한다고 썼다. 원폭 투하는 나가사키의 가톨릭 박해에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제노사이드의 비극성을 강화했다.
나가사키의 원폭 기억은 콜베 신부를 통해 아우슈비츠의기억과 얽힘으로써 전쟁과 제노사이드의 고통을 성찰하면서 평화를향한 보편적 기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연대를 강조하는 나가사키의 기억 문화는 그 대신 원폭의 비극을 낳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탈역사화된 나가사키의 피폭 기억은 일본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나가이 다카시의 우라카미 번제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천황의 전쟁책임과 미국의 원폭 투하 책임을 지워버리는 ‘이중의 면책‘ 담론이라는 데 있었다. 나가사키의 피폭자이자 시인 야마다칸(山田加人)은 번제설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으로 향해야 할 "민중의 원한을 ‘신의 섭리‘라는 말로 달래는 친미적 허위 선전이라고 비난했다.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井上UL)도 ‘신의 섭리‘는 원폭 투하의 책임 소재를흐리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효과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들의비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신의 섭리‘를 통해 원자폭탄의 무고한희생자를 세계평화를 위한 거룩한 희생자로 승화시킨 나가이의 연설은 나가사키의 비극을 탈역사화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원폭 투하라는미증유의 역사적 비극을 탈역사화하고 종교적 본질로 환원한다면, 원폭 희생자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나가사키 피폭자의 희생자의식이 탈역사화되면 그에 입각한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도 다시 탈역사화라는 기억 정치의 덫에 빠져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기쿠의 희생적인 사랑과 동료 수인을 대신해서 목숨을 바친 콜베 신부의 순교자적 사랑은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깨닫게 하고, 또 대신 속죄해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죄이며, 그에 대한 죄의식을 느낄 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엔도 슈사쿠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의 소설에서 아우슈비츠의 성인 콜베와 나가사키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나가사키와 깊은 인연을가진 콜베 신부의 아우슈비츠 순교는 우라카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가톨릭 신자의 죄의식을 성찰하고 정화하는 데 최상의 재료였다.
소노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억 속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순교한 콜베와 게라마 제도 섬주민의 강요된 집단 자결이성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으로죽은 사람들‘로 같이 배치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군 수비대장의 죄를 인간의 관점에서 비판했음을 재천명하고, 소노처럼 이렇게 말하는 자야말로 인간을 더럽히고 있다고 대응했다. 나라를 위해 아름다운 마음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소노의 애착은전후 일본 민족주의의 시민종교적 집단 심성을 대변한다.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콜베 신부가 《시온의정서>를 사실로 믿었으며, 프리메이슨 마피아가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부채질하고 국제시온주의가 그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콜베신부가 창간한 《작은 신문》이 강한 반유대주의적 논조를 띤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콜베 신부는 유대인의 개종을 승인하고 또 독려했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개종이나 동화를 허용하지 않는 급진적 인종주의자는아니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니예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숨고자 했던 1,500여 명의 유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숨겨주었던 일화에서 보듯이, 콜베 신부는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자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1971년 시복 이후 공산주의 정권 아래 폴란드에서 콜베 신부는 이처럼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폴란드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콜베 신부의 반프리메이슨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반공주의의 사상적 뿌리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1984년 10월 19일 연대노조의 예지 포피에우슈코(Jerzy Popictuszko) 신부가공산정권의 보안경찰에게 피랍되어 잔인하게 살해되자, 콜베 신부의반공 순교자적 상징성은 상대적으로 빛이 바랬다. 1984년 이후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기억 문화에서는 포피에우슈코 신부가 콜베 신부를제치고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희생된 순교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나치의 박해가 이미 희미해진 먼 기억이라면, 공산주의의 박해는 생생하게살아 있는 가까운 기억이었다. 연대노조 운동 이후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더 급했던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는 콜베 신부라기보다 포피에우슈코 신부였다. 20세기 말까지 폴란드보다 일본에서콜베 숭배가 더 컸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와 나가사키의 희생이 진정한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 2019년 11월 24일 방일 중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한 연설은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바람직한 기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히로시마의 원폭 희생자에 관해 "여러 장소에서 모여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이 장소의 모든 희생자를 기억에 남긴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히로시마시 소재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평화 기원 행사에서 재일 한국인 가톨릭 피폭자 박남주 씨와 악수하고 대화하는 등 비일본계 타민족 피폭자들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적과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원폭 희생자를 추모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일 행적은 콜베 신부의 기억에 많은 관심을 표명한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일 메시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암시한 것처럼, ‘희생‘을 희생시킬 때 비로소 그 희생의 의미가 살아나는 역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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