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 합려의 최후
범씨 가문의 가신 왕생과 장류삭
왕기과 염유
오자서
공자, 세상을 떠나다
백공 승의 난
월앙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다

구천은 오나라의 군진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이에 사사(死: 결사대)를 두 차례나 출동시켰으나 이들 모두 포로가 되었을 뿐 오나라의 군사에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죄인들을 3항으로 열을 짓게 한 뒤 각자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제히 이같이 외치게 했다.
"양국 군주가 교전하는 중에 우리는 기고(旗 : 군령)를 어겨 두 번 다시 병사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감히 형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귀사(死: 죽음으로써 伏罪함)하고자 합니다."
이에 죄인들이 스스로 목을 베어 차례로 자진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 신기한 광경을 속(屬 : 주목하는 사이에 월나라 군사가 일제히 진공해 오나라 군사를대파했다. 이때 월나라 대부 영고부(浮)가 창으로 오왕 합려를 공격했다. 이에합려가 장지(將指:엄지발가락)에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영고부는 합려의 신발 한짝을 노획했다. 이때 오왕 합려는 급히 퇴병하던 중 취리에서 7리 떨어진 오나라의 형(經)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 P433

"지금 우리 오나라는 유과나라만 못하고, 월나라는 오히려 소강 때보다 강대합니다. 만일 월나라가 장차 이보다 더욱 강대해지면 어찌 오나라의 환난이 되지 않겠습니까. 월왕 구천은 백성들을 애호하고 은혜 베풀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는 은덕을 베풀면서도 인심을 잃지 않고, 백성을 애호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세운 공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월나라는 본래 우리와 동양 :국토가 접해 있음)하여 누대에 걸친 구수(원수)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하고도병탄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시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고 원수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비록 후회한들 불가식이(不已: 우환을 제거할 길이 없음)일 것입니다. 희성의 나라인 오나라의 쇠망은 이미 손가락을 꼽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오나라는 이들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도 적의 흥성을 조장하면서 패자가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원이 물러나와 어떤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월나라가 10년간 생취(生聚:백성을 양육하고 재물을 모음)하고, 10년간 교훈(敎訓: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킴)하면, 20년 뒤 우리 오나라 땅은 월나라에 의해 황량한 소택지로 변하고 말 것이다." - P439

이제 듣건대 오왕 부차는 한 번 출행하여 이틀 이상 숙박하게 되면 반드시 대사피지(臺池:커다란 정자와 연못을 뜻하는 말로 부차가 출행하면 늘 연못에 배를 띄워 놓고 했음을 지칭)를 갖추고, 단 하루의 숙박일지라도반드시 비장빈(妃嬪御:시침드는 여인의 총칭으로 ‘비장‘은 이들 중 귀한 자,
‘빈어‘는 천한 자를 지칭)들이 모신다고 하오. 또 1일지행(一日之行 : 당일치기 출행)일지라도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자 하여 반드시 완호(玩好:놀이 도구)를 휴대하고 진이(珍異: 귀한 물건)를 수집하여 오직 즐기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고 하오, 나아가 그는 백성들을 원수같이 대해 매일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고하니 이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이 그칠 기미가 전혀 없소. 이리하면 그는 자신이 먼저자패(敗:스스로 패망함)하고 말 터인데 어찌 우리와 싸워 이길 수 있겠소." - P442

당초 범씨 가문의 가신 왕생(王生)은 같은 가신 장류식(張柳朔)을 미워했다. 이에 범소자(것을 청했다. 그러자 범소자가 왕생에게 이같이 물었다.
"그 사람은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사구불급공(私仇不及: 사적인 원한은 공적인 일에 해를 끼칠 수 없음)입니다.
좋아하면서도 그 잘못을 지나치지 않고, 미워하면서도 그 좋은 점을 버리지 않는장유삭을 백인의 지방 장관으로 보낼사길석)에게 - P454

것이 의(義)의 근본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그 의를 어기겠습니까."
범소자가 백인을 떠나 제나라로 가려고 하자 장유삭이 자신의 아들을 불러 이같이명했다.
"너는 주인을 따라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라. 나는 장차 여기를 사수할 것이다. 여기는 왕생이 나의 사절절조를 지켜 죽음을 위해 마련해 준 곳이다.
나는 나에 대한 그의 신임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고는 드디어 사길석을 위해 진나라 군사를 저지하다가 백인에서 전사했다. - P455

초소왕이 이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초나라 군사가 재패(再敗:노정공 4년에 백거의 전투에서 이미 오나라에게 한 차례 패한 적이 있음)하게 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맹약을 버리고 원수를 피하는 것 또한 죽느니만못하다. 어차피 죽기는 매일반이니 원수와 싸우다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고는 곧 공자 신(申:기원전 571년에 죽은 공자 신과 별개의 인물임)에게 왕이 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공자 신이 이를 사양했다. 초소왕이 또종실인 공자 결(結: 子期)에게 사왕이 될 것을 명했으나 그 또한 이를 거절했다.
초소왕은 다시 공자 계(啓 사왕이 될 것을 명했다. 결국 공자 계는 다)에게섯 번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이를 승낙했다. - P458

이 싸움에서 공위(爲: 공무인)는 폐동(은 전차를 타고 분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이에 이들을 함께 출빈(出치소 또는 묘지로 옮김)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이같이 평했다.
"왕기는 능히 간과를 잡고 나라의 사직을 지켰으니 가히 무상(無자의 대신 성인의 장례로 장사 지냄)할만하다."
염유는 창을 들고 제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이로써 노나라 군사가 능히 제나라 군사를 공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공자가 이같이 평했다.
"염유의 행동은 참으로 의(義)에 합당하다." - P480

그러고는 곧 오왕 부차를 찾아가 이같이 간했다.
"월나라는 우리나라에게 심복(腹)의 질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접경하고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구천의 유(柔服: 유순하게 服함)은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니 월나라를 속히 도모하느니만 못합니다. 우리가 제나라를 쳐 승리를 거둘지라도 이는 석전(경작을 할수 없는 돌밭)을 얻는 것과 같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월나라를 없애 소택지로 만들지 않으면 오나라는 장차 망하고 말 것입니다." - P483

"민천(旻어진 하늘)이 부조(不吊 : 잘 대해주지 않음)하여 국로(國老: 국가원 - P510

로)를 은유(遺:잠시 세상에 더 머무르게 함)하게 하지 않도다. 그로 하여금 여일인(余一人)을 보위하게 하여 재위했는데 이제 여(余)는 경경(勞勞:고독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히 재구(在근심으로 병에 걸림)하게 되었도다. 오호애재(嗚呼哀哉 : 아, 슬프도다), 니보(尼 : 공자)여, 무자율(無自律 : 스스로 통제할 바를모름)이로다."
이를 두고 자공이 이같이 평했다.
"군주는 아마도 노나라에서 선종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공자)의 말씀에 이르기를, ‘예시즉혼: 예를 잃으면 혼합해 짐), 명실즉건(庶: 명분을 잃으면 잘못을 저지르게 됨)‘이라고 했다. 실지(志 : 뜻을 잃음)하면 혼암해지고, 실소(所 : 신분을 잃음)하면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살아 있을 때 중용치 못하고 죽은 뒤 뇌조사를 읽음)하니 이는 예가 아니다. 또한 조사( 전자가 쓰는 ‘여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명분에도 맞지 않는다. 군주는 예와 명분두 가지를 모두 잃은 셈이다." - P511

이때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의 신(愼: 안휘성 영상현 서북쪽) 땅을 침공했다. 그러자 백공 승이 군사들을 이끌고 가 이들을 격퇴했다. 이에 백공 승은 혜왕(惠王: 초소왕의 아들 章)에게 병사들의 전비(戰備: 무장)를 해제치 않은 채 곧바로돌진해 오나라 군사를 모두 포로로 잡을 수 종묘에 바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초혜왕이 이를 허락하자 백공 승은 마침내 기회를 틈타 반기를 들고 말았다.
가을 7월, 백공 승이 자서와 자기를 조정에서 죽인 뒤 초혜왕을 협박했다. 이때 자서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죽었는데 자기는 반군에게 잡혀 죽기 전에 이같이 - P514

말했다.
"지난날 나는 용력(勇力)으로 군주를 섬겼다. 이제 죽는 마당에 불종(弗終: 有始無終으로 시작만 있고 끝이 없음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고는 곧 예장(豫章:樟木으로 곧 녹나무)을 뽑아 반군들을 죽인 뒤 분전하다가 죽었다. 이때 석기가 백공 승에게 이같이 주장했다.
"창고를 불사르고 왕을 시해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백공 승이 이같이 반대했다.
"그리할 수는 없다. 시왕은 불상(不祥)이고, 분고(焚庫:부고를 불사름)하면무취(無: 비축한 물자가 없앱)하게 된다. 그리하면 장차 무엇으로 초나라를 지킬 것인가.‘
이에 석기가 반론을 제시했다.
"초나라를 차지해 백성을 다스리고, 공경히 신령을 받들면 가히 득상유취(得有聚:吉祥을 얻고 물자를 비축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백공 승은 이를 좇지 않았다. - P515

이때 제나라 사람이 전에 제평이 계수 한 데 반해 노애공이 단지 하배(下拜)만 한 사실을 책하여 이를
러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노인지구(魯人之 : 노나라 사람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는 ‘쌈’의 뜻을 지니고있어 ‘구‘로 읽는 것이 옳음)를 수년이 지나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우리로 하여금화를 못 참아 펄쩍 뛰게 만드네. 노나라는 오직 유서여 두 나라 사이에 커다란 근심만 조성하네." - P529

노애공 22년 여름 4월, 주은공(隱公)"이 제나라에서 월나라로 달아난 뒤 월나라 사람에게 이같이 호소했다.
"오나라가 무도하여 아비인 나를 억류하고 내 자식을 보위에 올려놓았소."
이에 월나라 사람이 주은공을 귀국하게 하자 이번에는 태자 혁(革)이 월나라로 달아났다.
겨울 11월 27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용동(雨東:절강성 정해현 동쪽의 海島에 위치)에 거처할 것을 허용하자 오왕 부차가이같이 사양했다.
"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찌 군주를 섬길 수 있겠소.‘
그러고는 곧 목을 매어 자진했다. 월나라 군사가 오왕 부차의 시신을 이끌고 귀국했다. - P5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제 갈 거에요?"

"내일 아침 일찍 가야지."

설 명절이 코 앞이다. 시댁을 방문하는 것은 여전히 내게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른들을 만나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왜 이리 익숙해지지 않는지.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음식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 돕다가 뒷정리 돕고 어른들 이야기에 장단 맞추는 것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옆지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가기 싫다는 말을 되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수는 없는 노릇이고 간다면 좀 늦게 갔으면 하는 바람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시아버님 산소에 가봐야 하니까.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지만 늘 어떤 분이셨을까를 생각한다. 옆지기의 따뜻함과 배려가 분명 아버님께 물려받은 것일 거라고 나는 그를 만나며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나의 지나친 이기심과 탐욕을 그이기에 받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1년에 몇 차례 방문할 때 잠시 동안 아버님을 생각할 때 옆지기의 얼굴을 자연스레 보게 된다.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덤덤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는 아버님이 그리웁겠지. 이번에도 아버님을 찾아뵙고 우리를 잘 봐달라고 인사드리고 와야겠다.


책을 가져가봐야 읽을 수 없을 테니 오디오북을 들으려고 한다.

 


그리고 아마 강의도 듣지 않을까 - 정희진 쌤 매거진 남은 에피소드들과 <통감절요> 강의



그리고 책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면 중드를 볼 것 같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걸 보니 날이 심상치가 않다. 무척 추워질 거라고 하는데 어디 나갈 때는 옷깃 단단히 여미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설 연휴 되시길!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01-20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디오 북도 좋을 것 같네요. 잘 다녀오시고 평온한 명절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10:34   좋아요 0 | URL
네. 오며 가며 듣기에는 오디오북이 좋아요. 아무래도 차 안에서 종이책은 보기 어렵죠^^
자목련님도 명절 잘 보내시길!

독서괭 2023-01-20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옆지기님이 참 좋은 분이시군요! 이렇게 배우자 칭찬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데😅 멋집니다!
제 옆지기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뵙질 못했는데 저는 딱히 남편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
오늘 진짜 너무너무 추워요. 빙판 조심하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10:3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배우자 칭찬... 사실 직접적으로는 못하고 주변에 이야기할 때만 칭찬을!(귀에 들어가긴 하겠죠?ㅋㅋ)
아... 괭님 배우자님도 그러시군요ㅠㅠ 연애하기 전 썸탈 때 좀 외로워보일 때가 있었거든요? 그 모습이 짠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홀랑 넘어간 것 같은ㅋㅋㅋ
춥죠~ 목도리 칭칭 감아매고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명절도 잘 보내시길요!

stella.K 2023-01-20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댁 가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군요. 그러니 시월드겠죠? ㅋ
그래도 안전하게 잘 다녀오십시오.
명절 즐겁게 보내시구요.^^
이젠 겨울도 다 간 모양인가 보다 했는데
역시 겨울은 겨울인가 봅니다.
이 추위 지나면 뭐 또 춥겠나 싶네요. ㅎ

거리의화가 2023-01-20 13:13   좋아요 1 | URL
이번에도 유연하게 잘 처신하고 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대한인 만큼 막판 추위가 기승인 모양이에요. 스텔라님도 명절 즐겁게 잘 보내시길요^^

페넬로페 2023-01-20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아버님을 뵌 적이 없는데 시댁 식구들 전체가 자상하고 정이 많아 가정을 무척 따뜻하게 하셨던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상하게 시댁 간다는건 부담이 있죠^^
한파가 온다고 합니다.
화가님, 시댁 잘 다녀오시고 따뜻하고 자상한 남편분과 설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14:52   좋아요 2 | URL
가끔 직접 뵈었으면 어땠을까 그럴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남편 모습을 보며 시아버님이 이랬겠구나 떠올려보곤 하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도 그러시겠죠. 희한하게 시댁 가는 건 왜 부담이 되는 걸까요?ㅎㅎㅎ
모쪼록 행복한 설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라로 2023-01-20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아버님이 몇 년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주 동안 우리가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눠서 그런가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요,, 거리의 화가님 아버님도 남펴분에 대한 것을 읽으니 그런 분인 것 같아요. 이번 설 잘 다녀오시고 가족분들과 (시댁) 좋은 추억 만들고 오시기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0 15:09   좋아요 0 | URL
라로님 그 시간이 참 소중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님 생각이 나시는 거겠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안겨주고 떠나간다는 건 그 사람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삶을 살고 가신 것 같네요.
라로님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1-20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님 돌아가신지가 올 해 10 년쯤 되었네요. 10 년 조금 넘게 뵈었구요.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말 맞는 것 같아요.
저도 남편을 지켜보면서 한 번씩 ˝당신, 아버님 많이 닮아가는 것 같네˝ 라고 야기해 주면 남편은 썩~ 좋아하진 않던데(남편은 아버님보다 어머님을 더 좋아하거든요ㅋㅋ) 그래도 제겐 제가 기억하는 아버님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문득문득 생각하는 방식이나 말투가 비슷하다~ 아들은 닮는구나! 생각하곤 합니다. 아마 화가님의 남편 분도 시아버님 많이 닮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께 인사 잘 드리시고, 설 연휴 평안하게 계시다 오시길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2023-01-20 21:40   좋아요 1 | URL
남편 분은 어머니를 더 좋아하시는군요!ㅎㅎ 그래도 어쨌든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본인도 갈수록 그걸 느끼지 않을런지~^^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남편은 막상 시아버님 생각이 점점 드문드문 나겠지만... 또 그 빈자리는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다녀올게요. 나무님도 설 연휴 무사히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3-01-20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안해도 부담스럽죠^^
저도 남편 보며 시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생각해보곤 해요^^

날씨가 많이 춥네요
명절 잘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3-01-20 21:41   좋아요 1 | URL
그쵸. 아무 것도 안해도 뭔가 불편한 그 느낌!
어쨌든 아들과 아버지는 특별하다는 생각이에요. 딸과 엄마의 관계처럼요.

날이 너무 춥습니다. 명절 따뜻하게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3-01-20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여전히 명절날 시댁을 가는건 전쟁을 치르러 가는 기분입니다. 이건 뭐 안 바뀌는거 같고요.
완전히 편해질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분위기에서(심지어 tv도 나 보고 싶은거 못보잖아요. 저는 미스터트롯 너무 싫어하는데 명절날 가면 눈 뜨 있는 시간은 계속 그거 보고 듣고 해야 합니다. ㅠ.ㅠ) 긴 시간을 있어야 하니까 그런거 같아요. 일종의 수련, 봉사정신 이런걸로 버틴다고 생각해요. ㅎㅎ
무사히 잘 다녀 오세요. 저는 가까워서 내일 아침에 갈건데 마음은 똑같습니다. ㅎㅎ 명절 잘 보내시고요.

거리의화가 2023-01-23 22:19   좋아요 0 | URL
명절 전날 시댁에 내려갔는데 어찌나 피곤하던지 밤 9시를 못 넘기고 잠들었습니다^^;;; 채널은 포기한지 오래됐구요ㅋㅋ 저는 생긋 생긋 웃는게 힘들더라구요. 뭐 그렇지만 다년간의 사회 생활로 쌓인 노하우로 버티고 돌아왔습니다! 바람돌이님도 연휴 잘 보내셨길 바라요~*^^*

희선 2023-01-22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이면 시집에 갈 일이 걱정스럽겠습니다 마음 편하게 먹으려 해도 잘 안 될 것 같네요 그래도 편안하게 조심해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추위가 설연휴에도 이어지는군요 거리의화가 님 명절 잘 쇠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23 22:21   좋아요 0 | URL
마음처럼 그렇게 실상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어른들께 사근사근 하는것을 잘 못해서 음... 시간이 지나도 이건 잘 안되는 것 같네요. 그래도 점점 나아지는 것 같긴 합니다만^^;
희선님도 명절 잘 보내셨길 바랍니다. 내일 날이 엄청 춥다던데 건강 유의하시구요^^
 

【癸亥】十七年秦王聞孟嘗君之賢使涇陽君爲質於齊以請孟嘗君來入秦 秦王以爲丞相或謂秦王曰孟嘗君相秦必先齊而後秦秦其危哉秦王乃以樓緩爲相囚孟嘗君欲殺之孟嘗君使人求解於秦王幸姬姬曰願得君狐白裘孟嘗君有狐白裘已獻之秦王無以應姬求客有善爲狗盜者 入秦藏中盜狐白裘以獻姬姬乃爲之言於王而遣之王後悔使追之孟嘗君至關 關法鷄鳴而出客時尙早追者將至客有善爲鷄鳴者野鷄聞之皆鳴孟嘗君乃得脫歸

○ 趙王封其弟勝爲平原君平原君好士食客常數千人

진왕이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양군(동생)을 제나라에 볼모로 있게 하고 맹상군에게 요청하여 진나라에 맹상군이 들어온다. 진왕이 맹상군을 승상으로 삼았는데 어떤 이가 ˝맹상군이 진나라에 재상이 된다면 반드시 제나라를 먼저 하고 진나라를 나중으로 할 것이니 진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에 진왕은 누완을 재상으로 삼은 뒤 맹상군을 가두고 죽이고자 했다. 맹상군은 탈출을 위해 사람을 시켜 진왕에게 총애받는 여인을 이용해 자신을 풀어줄 것을 구했다. 마침 객 중에 손 수완이 좋은 사람이 있어서 진나라 창고로 들어가 훔친 호백구는 진왕의 여인으로부터 최종 진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하지만 훔친 것이 탄로나 쫓기게 된 맹상군은 성문을 통과못할 뻔 하다가 닭 울음 소리를 잘하는 자가 닭 소리를 내어 무사히 성문이 열려 탈출할 수 있었다(성문은 닭 소리가 울려야 열렸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때 채소공(蔡昭公: 채도공의 아들 채후 申)이 패옥(佩玉) 두 개와 갖옷 두 벌을마련해 초나라로 가 패옥 하나와 갖옷 한 벌을 초소왕에게 바쳤다. 초소왕이 이를착용하고 채소공을 위해 향례를 베풀었다. 마침 채소공도 나머지 갖옷과 패옥을착용하고 향례에 참석했다. 이를 본 초나라 영윤 자상(子常)이 이를 갖고 싶어 했

으나 채소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이 채소공을 3년 동안이나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마침 이때 당성공(成公)도 초나라에 왔는데 그는 숙상마(馬) 두 필을 갖고있었다. 이에 자상이 이를 갖고 싶어 했으나 당성공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상은당성공 역시 3년 동안 초나라에 억류해 두었다. 이때 당나라 사람들이 서로 숙의한 뒤 우선 초나라에 전에 당성공을 수종하던 자들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초나라가 이를 허락하자 교대 차 간 사람들이 이전의 수종자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만든 뒤 당성공의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쳤다. 그러자 자상이 당성공을 귀환시켰다.
당성공이 귀국하자 말을 훔쳐 자상에게 바친 자들이 스스로 몸을 묶은 뒤 자진해서 사패(敗:사구)에게 나아가 이같이 말했다.
"군주가 농마(馬 : 말을 애호함)로 인해 곤경에 빠지고 나라와 군신들을 버리게되었습니다. 청컨대 저희들이 말을 키우는 자를 도와 장차 말을 배상할 수 있도록해주기 바랍니다. 그리되면 두 마리의 숙상마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은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당성공이 이같이 후회했다.
"이는 모두 과인의 잘못이었소. 그대들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그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다.

"채군(蔡君)이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머문 것은 그대들이 전별의 예물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예물이 완비되지 못할 경우 그대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
이에 채소공이 귀국하게 되었다. 채소공이 귀국 도중 한수에 이르러 옥을 꺼내 강물에 내던지며 맹서했다.
"내가 다시 이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 대천(大川)이 내 다짐의 증거가

될 것이다."
얼마 후 채소공이 진나라로 가 아들 원(元)과 대부의 자제들을 인질로 바치면서 초나라 공벌을 청했다.

초소왕이 수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 구원병을 청하면서이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봉시(封: 덩치 큰 멧돼지)와 장사(長蛇큰뱀처럼 욕심을 부려 중원의 제후국들을 천식(食: 병탄)하고 있으니 초나라가 가장 먼저 그 침해(害)를 입었습니다. 과군은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현재 재초망(越在草: 원래는 잡초가 우거진 곳으로 몸을 옮긴다는 뜻으로 민간의 궁벽지로 피해 다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에 과군이 하신을 시켜 고급(告急)하게 하기를, ‘이덕무염(夷德無厭: 오랑캐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뜻으로 夷는 오나라, 德은 탐욕, 厭은 만족을 의미)하니 만일 오나라가 초나라를 점령해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 진나

라의 변경도 그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나라가 아직 우리 초나라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즉시 출병하여 초나라 땅의 일부를 점거하십시오. 만일초나라가 멸망하면 그 땅은 곧 군주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만일 군령(君: 군주의 은덕)에 기대어 초나라를 무사히 안정시키게 되면 초나라는 반드시 대를 이어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애공(아들)은 사람을 보내 완곡한 어조로 이같이 사절景公의하게 했다.
"그대가 걸사(師)하는 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대는 우선 잠시 객관으로 가쉬도록 하오. 우리가 잘 생각한 뒤 회답하도록 하겠소."
그러자 신포서가 이같이 말했다.
"과군은 월재초망 중이어서 안신(身)할 곳조차 찾지 못한 형편입니다. 어찌 감히하신인 제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궁정 담장에 기대어 밤낮으로 통곡하며 작음(飮: 물 한모금)조차 입에 넣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7일 동안 계속되자 이에 감동한 진애공이 <시경> <진풍·무의(無衣참전 용사를 칭송하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그러자 신포서가 진애공에게 9돈수(九首: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댄 채 조아리며 극도의 사의를 표시함)한 뒤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진나라 군사가 드디어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 대부 자기가 균 땅에 화공을 펴려고 하자 자서가 만류했다.
"작년에 오초 양군이 교전할 때 전사한 초나라 부형의 친속들이 아직 균 땅에 폭골(暴骨:뼈가 들판에 나뒹굴고 있음)되어 있소. 우리는 이를 수습조차 못하고 있는데 또 이곳에 불을 질러 뼈까지 태우려 하니 이는 안 될 일이오."
그러자 자기가 반박했다.
"나라가 장차 망할 지경이오. 만일 우리의 부형의 친속들이 죽은 뒤에도 지각이 있다면 적을 이겨야만 흠구사 : 자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는다는 뜻으로 ‘흠’은 ‘후‘, ‘구사‘는 전래의 제사를 의미)할 수 있게 되니 어찌 불에 타는 것을 두려워하겠소."
그러고는 곧 불을 지르면서 오나라 군사와 싸웠다. 이에 오나라 군사가 패하게 되었다.

"대덕(大德)을 베풀고자 하면 응당 소원(怨 작은 원한)은 괘념치 말아야 하오.
이것이 옳은 도리요."
그러자 신포서가 주위 사람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진나라에 걸사(師)한 것은 군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내가 상을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군주의 자리가 안정되었으니 내가 더 이상 무엇을바랄 것인가. 게다가 나는 전에 자기(子: 투성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어찌 내가 그와 똑같은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초소왕이 내리는 상을 받지 않으려고 몸을 피했다.

"양호는 노나라에서 계손씨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오히려 계손씨를 죽이려 했고, 이제 또 노나라를 불리하게 만들려고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유한 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어진 사람은 멀리하는데 군주는 어찌하여 그를 쓰려는 것입니까. 군주가 계손씨보다 부유하고 제나라가 노나라보다 강대하자 양호는 이를 뒤엎으려는 것입니다. 노나라는 이제 그의해를 면하게 되었는데 군주가 오히려 그를 거두게 되면 장차 그 해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제경공이 양호를 체포해 동쪽 변경에 수금하려 하자 양호는 스스로 동쪽 변경으로 가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러자 제나라에서는 오히려 그를 서쪽 변경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읍내 사람의 수레를 모두 빌려 계축(軸:바퀴의 축을 칼로 깎아 망가뜨림)한 뒤 이를 삼끈으로 묶어 돌려주었다. 이어 총령(옷가지를 싣는 수레에다 짐을 가득 실은 뒤 짐 속에 몸을 숨겨 달아났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이 곧바로 그를 추격해 잡아서는 제나라 도성에 수금했다. 이에 양호는 다시 총령에 몸을 숨겨 마침내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진나라로 가 조씨趙氏조간자)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를 두고 중니가 말했다.
"장차 조씨 집안에 대대로 화란이 있을 것이다."

위나라 군사가 회군할 때 대부 활라(羅)가 전군교郊 :(殿軍:후군)이 되었다. 그러나 조나라 국경을 넘어서기 전에 활라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어자가 이같이 말했다.
"후군이 되어 대열 속에 있으면 어찌 용기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활라가 이같이 대답했다.
"소려(素厲:헛된 勇名)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무용(無勇: 용기가 없음)이 낫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지 10 - 3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0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0권을 읽으면서 머릿 속을 비집고 들어온 역사적 배경은 다름 아닌 '물산장려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의 중요성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것쯤으로 간단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헌데 토지 10권에서는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시각과 방향이 당시 무산자 계급 운동과 맞물려 있었던 만큼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이상현과 선우일은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물산장려운동이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 한한 것이야? (...) 인도식이다, 중국식이다, 남의 형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에게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겠느냐, 그 말이야. 중국과 다르다 하며 반대하는 놈들, 별 무소득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설사 일본놈 자본에 눌리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가정하더라도 3.1운동 이후, 이 시기에, 어떻게 일으킨 불꽃인데? 그걸 끄려고 덤비는 놈들은 다 반역자다! 몇 사람의 기업가가 돈 좀 벌게 된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구. 새 발의 피라구. 그걸 못 새겨서, 아 그래 초가삼간 타는 것보다 빈대 타 죽는 것이 시원하다는 심보 아니고 뭐겠냐 말이야. 일본놈이건 조선놈이건 착취당하기론 마찬가지라구. 길가에 쫓겨 나앉아서 집 찾을 생각은 않고 싸움질하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 말이다. 계급투쟁을 나쁘다 하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 그 자체도 투쟁대상은 일본이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시기엔 말이야."
"(...) 물산장려운동을 방해하고 비난을 퍼붓는 이곳 좌파 과격분자들의 이론과 의돈형님의 이론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형님 말씀이 영세한 자본, 불리한 조건으로 풍부한 자본, 유리한 조건, 그리고 뿌리를 깊이 내린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고 존립하는 것조차 그들 뜻대론데 자본이 최소한도 유통을 유지하려면 노동자들 임금에서 재주부릴밖에 달리 길이 있겠느냐는 거지. 일본인 업체나 일본인에게 고용되면 일자리 잘 얻었다 하는 것이 일반의 인심 아니야? 왜냐, 든든하고 조선인들보다 임금이 후한 때문이 아니겠어? 일자리는 모자라고 노동력은 많고 결국 남아나는 노동력은 임금이 싸도 흡수되게 마련인데, 불평불만은 싼 곳에 있지. 비싼 곳은 적어도 싼 곳이 쓰러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 아냐? 장차 노사문제로 혼란을 겪게 될 때 제일 먼저 칼끝에 올려지는 것이 조선인 기업가인 것은 뻔한 일이지. 그러니 몇 사람을 살찌우는 대신 그들은 일본자본가의 방패로 삼는 동시 민족분열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나는 의돈형님이 말한 중에서 이 한가지만은 경청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착취하는 데 일본놈 조선놈 다를 것이 없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란 말이야. 일본이 지금 사회주의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골머릴 썩이는 것도 사실이지." (P332~335)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여파로 유화 정책(물론 기만이지만?)으로 정책을 전환한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고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철폐문제가 가시화되자 한국인 자본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은 같아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홍보가 진행, 확산되며 물산장려운동은 대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을 쓰자는 운동은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었던 만큼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측면이 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1923년 이후 물산장려운동은 쇠퇴하는 흐름을 보인다. 한국인 지주들은 물산장려운동 초반만 해도 그것이 자신의 밥그릇을 지켜줄 수 있다 생각했지만 일본 자본에 비해 규모나 기술 면으로 취약했던 국내 자본은 수요를 따라갈 생산력과 기반을 애초에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가와 상인은 수요를 맞추어야 했던 데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값을 터무니 없이 올리기도 하면서 국내 경제는 대혼란이 초래되었다. 또 이 때 러시아 혁명 이후 국내에도 공산주의 비밀결사 단체들이 속속들이 만들어지는 상태였다.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조선은 현재 일본 제국주의이자 자본주의의 노예이기 때문에 이를 깨부수어야만 민족 해방 및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다 주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물산장려운동이 자본가와 중산층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기심을 조장한다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났던 것이다.

3.1운동으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반향은 컸다. 이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가 생겨났으나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구를 비롯하여 각종 파들의 내분과 갈등으로 체계적인 정부 운영 및 독립 운동 지원이 이어지지 못했다. 또 러시아에 가 있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코민테른에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공산당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로 나누어 대립하였고 거기에 러시아 내전(볼셰비키 적군 VS 민족주의 백군)에 일본군이 참여하여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이 발생하면서 그 곳에서도 더 이상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국내에서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 변경으로 일부 지식인들 중 개량주의자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친일의 길을 걷는 사람이 생겨났다.


10권에 특히나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야무네와 딸인 푸건의 이야기였다. 시집 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자신이 들어와서 남편이 아프게 되었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또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된 홍이와 명희도 있었다.
수녀가 되었어야 했나 생각하던 명희도 마음이 아팠고 끝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앉은 홍이와 장이도 있었다.

'어째서 우리 조선여자들은 결혼 못하는 것을 그렇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걸까. 독신주의를 이단시하며 모멸과 조롱으로 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몽달귀신이니 처녀귀신이들 하고 사후까지 액신으로 처우하는 것은 결국 독신자를 사악한 존재로 보기 때문일 게야. 중을 보고 흔히 중놈이라 하는 것도 독신자를 경멸하는 의식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P456)

"저는 저 나름대로 복음전도에 있어서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는가 많이 생각해보았고, 또 체험에서 얻어진 것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애국사상과 복음을 함께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간벽촌에 있어서 기독교란 아주 생소하고 서양사람 종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으로 믿어지는 불교며 무당들, 점쟁이를 통한 귀신신앙도 뿌리깊은 것입니다. 유교에서 오는 조상숭배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무리 몽매무지한 사람에게도 내 나라를 잃었다,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심정적으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독립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전도정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P460)

종교는 인간을 향한 구원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사회 개혁을 위한 목소리는 낼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여옥이 말했던 것처럼 종교가 개인의 구원만을 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나라는 뺏겼는데 신에게 빌어 자신만 구원받으면 무얼 하겠나?

당시 종교계에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친일에 몸담은 자들도 많았기에 뼈아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3-01-19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독립운동가도 있고 친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겠죠 그래도 종교인은 좀 낫기를 바라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1-19 09:01   좋아요 0 | URL
종교 노선들도 분열과 갈등이 존재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종교로 인하여 여전히 세계는 갈등 중이잖아요. 당시에도 기독교 내부에서 폭력 노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나라가 이 모양인데 종교인이라고 신에게 귀의하는 전도 운동만으로 되겠느냐, 그런 독립운동을 하는 대중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구요.

독서괭 2023-01-19 04: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부분 들으면서 물산장려운동, 화가님이 나중에 써주시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반갑습니다😆 이리저리 복잡한 역사적 상황들이 펼쳐지는데 운전하며 듣다보니 가끔 흐름을 놓치기도 하고;; 그냥 박경리선생님의 깊은 공부와 입체적인 논쟁 묘사에 감탄할 뿐입니다.
저도 아무네 너무 맘 아팠어요 ㅠㅠㅠㅠ 그 시대 딸 가진 어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에효 ㅠㅠ
덕분에 역사 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3-01-19 09:01   좋아요 2 | URL
읽으면 바로 써야 하는데 한 번 놓치니까 계속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저도 이번 편은 꼭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썼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뻐요^^
저도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에 감탄하고 놀라곤 합니다. 들으면서도 소름이 돋을 때가 몇 번씩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을 마치 지금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처럼 적어놓으셨을까 싶은 생각이요. 덕분에 저도 역사, 사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진짜 푸건이 시어머니 너무했어요ㅜㅜ 자기 자식만 소중한지 쩝!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