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장

망각과기억 사이에 중간 단계가 있다면, 이 단계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진짜 이름을 찾기까지 우리가 통과하는 이런 단계적 이름들은 전부 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짜 이름에 접근하는것을 도와주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이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그것은 우리가 이름을 되찾아도 발견되지 않는, 단순한 자음의 나열에 불과하다. 게다가 무(無)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이런정신작용은 매우 신비스러워서, 이 가짜 자음도 결국은 우리가 정확한 이름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서툴게 내밀어진 예비 장대인지 모른다. - P103

성도착자는 이 우주에 자기 같은 부류는 자신이 유일하다고 믿는다. 나중에 가 - P124

서야 - 이 역시 과장된 사실이지만 ㅡ 유일한 예외적인 존-
재는 바로 정상적인 남성이라고 상상한다. - P125

스완은 예언자의 나이에 도달했다. 물론 병의 영향 때문이긴 했지만 마치 얼음덩어리가 녹으면 모서리 전체가 떨어져 나가듯 얼굴 윤곽 전체가 사라진, 상당히 변한 모습이었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그가 얼마나 변했는지 나는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P169

나는 내 마음을 일종의 진열장인 양 스스로에게열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 그토록 많은 사랑을 하나하나 바라본다네. 그리고 지금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애착을 가지는 이런 수집품에 대해, 마자랭* 이 그의 책에 대해 말한 것처럼, 게다가 어떤 고뇌도 없이 이 모든 것을 떠나는 게 조금은 귀찮을 뿐이라고 중얼거린다네. - P190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소리를 받아들이는 귀로부터그것을 세밀히 조사하고 분석하는 정신에, 또 그 정신에서 결과를 전달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이런 이중의 궤적이 너무도 빨리 전개되므로 우리는 그 지속을 지각하지 못하고 곧바로 우리 마음과 더불어 듣는다고 생각한다. - P236

적어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이라는 이 두 요소는, 그날 저녁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날 전화에서 들은 마지막 말로부터 나는 알베르틴의 삶이 내게서 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물론 물리적 거리는 아니지만) 내가 그 삶을 손안에 넣으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힘든 탐색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삶은 야전 요새처럼, 또 보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가 나중에 관습적으로 ‘위장된 요새‘라고 부르게 된 그런 종류의 것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 P240

사교계의 현상은(예술적 움직임과 정치적 위기에 비하면, 또 대중의 취향을 연이어 사상극과 인상파 회화, 독일의 복합적인 음악과 러시아의 단순한 음악, 사회 사상과 정의 사상, 종교계의 반응과 애국심의 폭발 쪽으로 이끌어 가는 그런 진화에비하면 매우 열등한) 물론 어느 정도는 개인의 흥망성쇠를, 멀리 있는 파편적이고 불확실하며 흐릿하고 변하기 쉬운 형태 - P254

로 반사한다. 따라서 살롱이 다만 인간의 성격 연구에 적합한 정태적인 부동성 속에서만 묘사된다 해도, 살롱의 성격 또한REPA거의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 속에 휩쓸리기 마련이mook다. 지적 진화를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배우고 싶은 사교계 인사들이 품은 그런 새로운 것에 대한 취향이 그들로 하여금 그진화를 좇아갈 수 있는 사회 그룹을 드나들거나, 또 그때까지알려지지 않았던, 탁월한 정신 상태에 대한 희망을 아직 신선한 상태로 지닌 어느 안주인을 향해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다.
반면 오랫동안 사교계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여인들의 경우,
이런 정신 상태에 대한 희망은 이미 시들고 퇴색해진 탓에, 그여인들의 강점과 약점을 다 아는 사교계 인사들의 상상력에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이처럼 각각의 시대는 새로운여성이나 새로운 여성들의 그룹에서 구현되며, 이런 여성들은 그 시대의 가장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과 밀접하게연관되어 있어, 마치 최근의 홍수에서 생겨난 낯선 종의 출현처럼 그들의 옷차림과 더불어 이제 막 그 순간에 나타난 듯 보이지만, 실은 새로운 통령 정부 시대나 새로운 총재 정부 시대가 시작될 때마다 나타나는 매력적인 미인인 것이다. - P255

추억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는 우리의 상상력으로 형성되고현실로 파괴된 이미지만큼이나 그렇게 자의적이고 비좁고 포착하기 힘들다. 우리 밖에 있는 실제 장소가 몽상으로 채색된그림보다 기억 속의 장면을 더 잘 보존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새로운 현실은 우리를 떠나게 했던 욕망마저 어쩌면 망각하고 증오하게 할지도 몰랐다. - P273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까두려워 망자의 실제 모습만을 찬미하며, 당시 이미 우리의 모습이었으나 다른 것에 섞여 있던 모습을 배제하고, 오로지 망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물려받으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우리가 보통 듣는 그렇게 모호하고 거짓 의미에서가 아니라) 죽음은 헛되지 않으며, 망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망자는 산자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이유는 진정한 실재란 정신작용의 대상이기 때문에 정신을통해서만 표출되며, 우리는 나날의 삶이 감추는 것을 사유에의해 재창조할 때에야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망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의 의식에서, 우리는 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싶어 한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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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 - 백 년 전 「데파-트」 각 층별 물품 내력과 근대의 풍경
최지혜 지음 / 혜화1117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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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근대 백화점 상품들의 기원 탐방기다. 


근대 문물(상품)에 대한 기원을 알 수 있는 책은 그동안 역사, 에세이 등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원했던 것은 이 책에 특화된 부분이었고 그런 면에서 프롤로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프롤로그는 1933년 9월 대구 청년 사업가였던 이근무가 경성 백화점을 순례하는 기행문을 적어 놓았다.

그는 1920~30년대 대구에서 이미 서적과 양품을 취급하는 상점인 무영당을 운영했던 사업가였는데 경성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백화점을 보면서 대구에서도 백화점 운영해보면 어떨까를 꿈꾸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꿈은 실제로 현실이 된다. 이근무는 1937년 대구에 무영당 백화점을 열었고, 대구 3대 백화점이 될 만큼 성업했는데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이 아직도 현존한다고 한다(이 부분이 놀라웠음!). 

그런 의미에서 그가 경성 백화점을 순례한 것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사전 탐방의 성격이 컸을 것이다. 지금의 청년 사업가가 꿈을 계획하고 실현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대구 본점(오늘날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 8)에 지은 무영당 백화점 5층 건물은 1936년 11월 말 준공되었다. 당시 대구 안에서 최대 경쟁사였던 미나카이 백화점 외관과 비슷하게 지었고 그는 드디어 "고추씨 서 말을 들고 대구로 내려와 거상이 된" 것이었다. 

무영당 백화점은 원래 취급하던 서적과 잡지, 문방구부, 운동구부, 액연회구부(액자와 그림도구), 양품잡화부, 악기부에 더해 12월부터는 여행구부, 양가구부, 식료품부, 완구부, 도자기, 식기부, 사진부, 식당 등을 새로 열었다. 그밖에 휴게장, 전망대 등 설비를 완비하여 이듬해 1937년 9월 15일 본격적인 백화점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는 경성 뿐 아니라 지방에 많은 백화점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한국의 백화점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도 신세계, 롯데 등 브랜드 백화점이 대부분이라 아쉬운데 당시에는 독자적인 백화점들이 많았다. 개성의 김재현 백화점, 충북 괴산의 아모 백화점, 함흥 동양 백화점, 군산 풍천 백화점, 원산 기린야 백화점 등이다. 


이 무렵 백화점을 찾은 고객들은 안락한 환경 속에서 산책하듯 백화점 곳곳을 천천히 둘러보고 점원의 친절한 응대를 받으며 온갖 신문물을 마음껏 접해볼 수 있었다. 백화점에 머무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바깥 현실을 잊고 최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물건값을 흥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각종 먹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 백화점은 물 건너온 박래품과 유행하는 온갖 물품, 말 그대로 '백화'가 넘쳐나는 스펙터클한 공간이었다.

현대인들도 백화점에 대한 로망이 있다. 

백화점의 문턱은 지금도 꽤나 높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갖춰 입고 가야 할 것 같은 진입 장벽이 있고, 어느 매장에 들어갔을 때는 구매를 하지 않고 둘러보는 것만으로 뭔가 부담스러운 분위기 같은 것이 있다.

대부분의 백화점 1층은 화장품 코너인데 들어가자마자 확 풍기는 향내가 후각을 자극한다. 부끄럽지만 백화점에서 차마 비싼 가방, 옷을 지르지 못하고 평소 잘 사용하지도 않는 고급 향수와 립스틱을 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사실 먹는 것에 진심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백화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식품 매장에서 빵 코너다. 자칭 빵순이기 때문에 빵 냄새가 그렇게 지나치기 어려운 것이다. 다들 특정 코너 앞을 서성거린 경험이 있으실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과거 강릉에 있는 에디슨 박물관 가서 보았던 카메라, 축음기 등 근대 물품들을 보았던 기억이 스쳤고 잠시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이런 근대 박물관 구경하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여전히 지금도 쓰여지는 물건도 있고 사장된 물건도 있어서 그런 것일까. 

근대에 나온 상품을 보는 것만으로 과거로 떠나 여행을 하고 거기에 그 시절 물건에 추억이 있다면 향수를 떠올릴 수 있는 마법이 있다. 또 당시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즐거움도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이 시절 백화점에 어떤 물건들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엿볼 수 있다. 

1층 식품부·생활 잡화부, 2층 화장품부·양품잡화부, 3층 양복부, 4층 귀금속부·완구부·주방용품부·문방구부, 5층 가구부·전기 기구부·사진부·악기부 이렇게 층별로 상품이 배열되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물건을 소개하는 방식을 백화점 코너를 둘러보는 느낌을 주듯 전달했다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중 나는 식품부와 생활잡화부, 문방구부가 참새를 방앗간 못 지나간다고 관심 있는 코너라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소개된 상품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 중 3가지만 꼽아 본다. 


1. 캐러멜

당시 수입 과자로 유명한 회사는 삼영, 즉 모리나가였다. 모리나가는 미국에서 서양 과자 제조법을 배운 모리나가 다이치로가 1899년 세운 회사로 주요 상품은 밀크 캐러멜, 밀크 초콜릿, 웨하스, 비스킷 등이었다. 모리나가 캐러멜을 일약 히트 상품으로 이끈건 1914년 출시한 휴대용 포켓 사이즈 캐러멜 포장 덕분이었다(우리가 기억하는 그 제품 맞다).

캐러멜은 이후 여러 회사에서 만들었는데 오사카 하면 떠오르는 글리코에서도 캐러멜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했다(이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창업자 에자키 리이치가 굴을 끓여 추출한 글리코 겐으로 1922년에 만든 것으로, 빨간 캐러멜 상자에 넣은 '문화적 자양 과자', '한 알에 300미터'라는 카피로 유명하다(P79~80). 




2. 축음기

1920년대 미국 축음기 생산 회사가 260개가 넘을 정도로 다양한 축음기들이 쏙아져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많은 것들이 수입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축음기인 빅터, 콜럼비아를 비롯하여 일축에서 만든 '이글 B호'를 포함하여 니폰노혼 17호, 22호, 25호, 32호, 35호, 50호 등 다양한 모델들이 판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빅터 사는 밖으로 노출된 나팔 관리가 까다롭다는 주부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1906년부터 캐비닛 가구나 상자 속에 내장한 모델 빅트롤라를 출시, 이후 '그랜드형' 축음기라고 불리며 각광을 받았다. 

빅터나 콜럼비아 회사는 지금도 그 이름을 들으면 '아!'할 정도로 유명하다. 축음기 하면 나팔관부터 떠오르는데 모형을 보기도 했지만 관리는 무척 까다로웠을 것 같다. 나는 평소 고전 음악을 듣는 편이라 오디오 등 관련 장비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앱이 워낙 편해서 평상시에는 앱으로 많이 듣지만 가끔은 아날로그적으로 CD나 LP로 듣는 맛이 분명히 있다. 




3. 만년필. 

만년필은 현재도 외제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품목이다. 그런데 외제 만년필의 홍수 속에서 동원상회에서 제작, 발매한 국산 반도 만년필도 있었다. 홍보는 주로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식이었는데, 만년필 대 한가운데에 한반도 지도를 중심으로 '바 ㄴㄷ ㅗ'라고 한글을 새겨 넣었다. 또한 광고 지면에 "외국제를 방지할 반도 만년필의 일대 성명"이라는 타이틀 아래 구구절절 외쳤다(P465). 1924년 무렵 조선에 만년필 소매점은 700~800개였고 만년필 행상도 1천 명이 넘었다(놀랍지 않나). 1924년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이 한창이었던 만큼 반도 만년필의 당시 광고로 국산품 소비 장려의 일환을 엿볼 수 있다(P468). 

만년필은 미쓰코시나 조지야 3층, 화신 2층에서 판매했다. 히라타 백화점은 이미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만년필을 전면에 내세워 종류와 선택법, 그리고 관리법에 대해 신문 광고를 통해 상세히 안내했다(P469). 



이 책은 무엇보다 사진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어서 구경하는 맛이 있다. 여름 여행기 책으로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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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8-08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캐러멜 상자 보니까 완전 익숙하네요 ㅋ 아직도 저 색상으로 있는거 같은데 ㅎㅎ

요즘 백화점은 너무 비사서 못가겠습니다 ㅋ

거리의화가 2023-08-09 09:10   좋아요 1 | URL
어릴 적 저 카라멜 먹으려면 좀 비쌌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좀 비싸지 않나요?ㅎㅎ 아무튼 저 상자에 담겨져 나오는 형태도 한결 같고 맛도 한결 같은데 여전히 나오고 사랑 받는 걸 보면 그만큼 먹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겠죠?ㅋㅋ

백화점 저도 잘 가는 편은 아니에요. 올 초였나 집 근처에 백화점이 생겨서 구경할 겸 한 번 가보기는 했습니다. 그 이후론 안 가네요.

독서괭 2023-08-08 1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책 다방면으로 읽으시는 화가님👍
저녁시간이라 배고픈데 캐러멜 보니 군침이 꼴딱 넘어가네요..

거리의화가 2023-08-09 09:12   좋아요 1 | URL
역사책도 다양하게 보면 더 즐거운 법이죠^^ 한참 무더위에 읽었는데 두꺼워도 술술 읽혀서 금방 읽었습니다.
가다가 캐러멜 사셔서 드셨나요?ㅎㅎㅎ

건수하 2023-08-08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샀는데 제 책이 아닌 책입니다. 화가님 읽으셨군요 ^^

거리의화가 2023-08-09 09:13   좋아요 1 | URL
수하님 이 책 사셨었군요^^ 네. 나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놓았었습니다. 술술 읽혀서 금방 읽었어요!ㅎㅎ

희선 2023-08-09 0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신문 헤드라인(반도 만년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군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다가 이상한 말이네 했습니다 예전에는 백화점이 많았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8-09 09:15   좋아요 1 | URL
예전 신문은 오른쪽에서 왼쪽 배열이었을 겁니다! 신문들이 한문&일본어가 많아서 읽기 힘들더군요. 표어 같은 것은 쉬운 한자를 쓰는데 내용에 섞여 있는 경우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도 백화점이 많았다는 게 신기했어요. 사람 마음은 비슷한가 봅니다.

책읽는나무 2023-08-09 0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대구에 다녀왔을 때 중구 쪽이었던가? 암튼 근대화 거리 비슷한 곳이 있었어요. 거리를 걸으며 옛 성당이랑 병원 건물을 구경한 적 있었는데(성당에선 그 때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어 들어가보진 못했었네요. 그때 드라마가 꽤 유명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ㅋㅋ) 무영당 백화점도 혹시 그 근처에 있었던 걸까? 생각만 해봅니다^^;;
그 시절 다른 지역에도 백화점이 많았었군요? 좀 놀랐습니다.
하긴...제가 어렸을 때 백화점이란 쇼핑 공간이라면 부산 도시를 나갔었어야 했는데 백화점 이름이 지금의 체인점? 백화점이 아닌 자체 백화점 이름이 여러 곳이었던 것 같아요. IMF가 직격탄이었고, 롯데 백화점이 들어선 후 모두 사라졌습니다.
만년필도 국산이 있었다는 것도 새롭네요.
바ㄴ도ㅗ....^^

거리의화가 2023-08-09 09:18   좋아요 1 | URL
대구도 근대화 도시죠^^ 무영당 건물은 중구에 있다니까 나무님이 보신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건물 자체 외관은 소박한 편인 듯 합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스쳐 지나갈 수도 있겠어요. 그냥 사무실 같은 외관이라!ㅎㅎㅎ
백화점이 엄청 많았더군요. 경성은 많을 거라 예상했는데 지방에도 많아서 놀랐어요. 인용한 백화점 말고도 많아서 몇 개만 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IMF가 지방 백화점 위기의 직격탄이었겠네요ㅠㅠ 이제는 브랜드 백화점 지점 말고는 거의 보기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국산 만년필 신기하죠!ㅎㅎㅎ 저렇게 글자를 늘여서 쓰는 것도 마케팅인가 싶었어요.

자목련 2023-08-09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안겨주는 책이네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주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기억해두었다가 알려줘야겠네요. 이미 알고 있을지도^^

거리의화가 2023-08-09 11:3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목련님.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딱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이런 주제를 좋아하신다니 아마도 평상시에 관련 책을 보거나 박물관 등에 자주 가보실 것 같네요^^ 그분께서 이 책을 읽어보신다면 흥미로워하실거예요!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아우또노미아총서 8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신지영 외 옮김 / 갈무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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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세계에 여성으로 살면서 '마녀'라는 말과 '마녀사냥'이라는 표현에 익숙하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낳게 한다. 


그렇다면 마녀의 기원은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궁금해진다. 예전에 <여성괴물>을 읽을 때였나 아니면 어떤 다른 책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기원은 꽤나 오래되었다. 16세~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종교와 가부장적 사회의 결합이 원인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마녀의 기원, 역사를 설명하고 오늘날을 진단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반성했다. 


'마녀'에 대한 박해가 가부장 권력의 표현의 일환으로 행해진 점은 원래도 이해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와 연결시킬 줄은 생각지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에서 여성은 소외적인 존재였다(이는 여성 뿐 아니라 장애인,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들로 확대 적용할 수 있다). 

그런 여성을 평가 절하하는 방식의 기제로 자본주의가 작용했고 무엇보다 마녀사냥이 식민주의 국가의 경로를 따라 확대되었다고 논지를 전개한 것에서 저자의 탁월함을 느꼈다.

과거에 식민주의를 경험했던 국가였던 제3세계 여성들은 기존의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는 것 뿐 아니라 식민주의, 현재의 자본주의와도 갈등이 맞물리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1부에서는 자본주의와 유럽의 마녀사냥의 연결고리를 확인하고 2부에서는 오늘날의 마녀사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은 페데리치의 핵심 주장이 담긴 <캘리번과 마녀>을 읽기 전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는 책이어서 '좀 궁금한데?'하면 정리한다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그러니까 맛보기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 깊은 내용은 <캘리번과 마녀>를 읽으시길. 

대부분의 마녀사냥 역사가는 가장 정치적 직관이 탁월한 학자들인 경우조차도 사회학적 분석에 머무르면서 ‘마녀들은 누구였는가? 기소된 죄목은 무엇이었는가? 어디에서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같은 질문들을 고찰했다. 또는 의료 전문직의 탄생, 기계론적 세계관의 발전, 가부장적 국가 구조의 도래 같은 주제들에 국한된 마녀사냥 분석을 전개했다. 그러나 노예무역과 ‘신세계‘ 토착민의 박멸과 마찬가지로 마녀사냥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부상하는 길을 열어젖힌 다양한 사회적 과정의 교차점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다. - P35

인클로저 개념은 토지 매·독점, 소작료 폭증, 새로운 과세 명목 등을 아우른다. 인클로저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폭력적 과정이었음은 분명하다. 호혜적 유대가 특징이었던 공동체들은 극심한 양극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귀족뿐만 아니라 부유한 농민도 담장 두르기를 했고, 적개심이 커졌다. 서로가 가까이 살았고 보복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 P42

여성에 대한 폭력, 특히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과 및 아메리카 선주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는 이유는 자본이 이 세계의 자연자원과 인간노동에 대한 압도적인 통제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재식민화 과정이 ‘지구화‘이며, 지구화는 자기 공동체의 재생산을 직접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여성들을 공격하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상업모험기업의 거점이 되고 있고 반식민주의 투쟁이 가장 강력하게 벌어져 온 지역들(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에서 더욱 극심해졌다.여성에 대한 야만적 행위는 ‘신 인클로저‘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 P97

어떤 페미니스트는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의 안전을 더욱 보장하거나, 아프리카의 농촌에서 종종 마녀사냥이나 여러 형태의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온 토지 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환상이다. 그 이유는 세계은행과 미국국제개발청이나 영국 정부 같은 다른 개발업자들이 추진하는 토지법 개정은 외국 투자자들에게만 이익을 주고 농촌에는 더 많은 부채, 더 많은 토지 양도, 그리고 빼앗긴자들끼리의 더 많은 분쟁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 P156

를 대신해서 필요한 것은 토지와 다른 공동의 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형태들이다. 여성이 자식이 없더라도,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어서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더라도, 또는 남편이 죽고 보호해줄 남자 후손이 없더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공동체주의의 형태들이 필요한것이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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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07 1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완독 축하합니다, 거리의 화가 님. 후딱 다 읽고 리뷰까지 쓰셨네요. 저는 오늘 아침 시작했습니다. 부지런히 얼른 읽도록 할게요!!
저는 실비아 페데리치를 비롯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고 연대하고 운동했던 기록에 대해 보노라니, 와 정말 다들 대단하다 새삼 감탄했어요.

거리의화가 2023-08-07 10:57   좋아요 2 | URL
네. 얇아서 금방 읽을 수는 있는데 안의 내용은 사실 굉장히 많은 것을 담고 있더군요. 캘리번과 마녀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청아 2023-08-07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캘리번의 마녀>도 역시 후딱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서는 독서 자극이 엄청나서 (화가님은 두꺼운 책까지!)
매일매일 읽고 싶은 책들이 늘어나는데다 각각의 책들이 또 스스로 가지를 뻗어나가니 쉴틈이 없습니다. ㅎㅎㅎ

2023-08-07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3-08-07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이렇게 금방 읽고 후기까지 쓰셨으니 <캘리번과 마녀>도 잘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긴 좀더 촘촘한 근거가 들어가 있답니다.

거리의화가 2023-08-07 13:07   좋아요 1 | URL
촘촘한 근거가 궁금하여 <캘리번과 마녀> 읽어보려구요^^ 이번 달 책을 읽었으니 짬이 생겨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 지나면 또 안 읽게 되니 이번엔 꼭! 감사합니다.
 
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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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오대 십국의 혼란기를 겪은 후 송 왕조가 들어섰다. 송은 이전 왕조와는 색채가 확연히 다르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제도 등을 많이 이어받았고 사회적 분위기 등도 비슷했으나 송나라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송도 초반까지는 당 말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에는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는데 이는 유교적 국가 체제로 변화된 것이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된다.

송대 왕조는 공자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조상 숭배와 국가 제사와 같은 유교적 규범을 이상화하여 국가 정교로 받아들였다. 송대 이후로 변화한 유교 중심의 사회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문화적 기반 특성을 유지하는 견고한 중심이 되었다. ‘유교국가‘라는 용어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 또는 유토피아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상고시대에서 차용해온 유교적 통치의상적인 구조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지성의 전통을 이끌어온 사상과 지배적인 행정 체제인 관료정치가 역사의 무대에서 긴밀히 결합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고대 경서에 뿌리를 둔 유교는 도덕, 즉인, 의, 예, 효, 충 그리고 무武보다 우선하는 문의 원리와 의례등에 기초한 윤리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교양 있는 상류 계층, 즉 계층적인 구조의 사회에서 다른 모든 계층이 제공하는 봉사를 필요로 하는 지식인 지도층의 행동지침으로 간주되었다(P68).

송은 외교 정책으로 '공존'을 택한다. 중국은 자신의 우위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형제애'라는 허구에 합의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요, 서하와의 맹약으로 평화를 가장하고 있었으나 11세기에 들어오면 송나라는 군비 지출이 급증하여 재정적 위기가 초래되면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된다. 인종 때 범중엄 등이 1차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인종이 개혁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고 보수파들이 개혁을 반대하면서 실패하였다. 그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가 신종 때 왕안석이 경제, 군사, 교육 등 전반적인 개혁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 이 때도 반대파들은 왕안석의 개혁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다며 그의 사퇴를 이끈다. 이후 조정 대신들은 서하에 대한 대규모 전쟁을 강행함으로써 정국을 바꾸어 보려고 했지만 전쟁에 패했다. 개혁파 사이의 투쟁은 북송 말까지 계속되었으나, 왕안석의 뒤를 따른다고 선언한 자들도 왕안석만큼 넓은 식견과 수양을 갖지 못했다. 휘종은 선친 신종과 형 철종의 뒤를 이어 철저한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휘종은 채경蔡京(1046~1126)이나 동관(1054~1126)과 같은 용렬하고 부패한 관리와 환관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했으며, 이들이 이끄는 사이비 개혁당이 원한 것은 고작해야 황제를 즐겁게 해주어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것이었다(P129).
1123년 송과 금은 국가 간 계약을 하며 평화 체제를 유지하는 듯 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금은 1125년 송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한다. 1127 년 개봉과 북송이 붕괴된 이후, 희생양을 찾던 남송의 학자들은 왕안석을 실패한 개혁을 주도한 단독 인물로 지목했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 후의 사이비 개혁가들이 보인 떳떳치 못한 행동들까지 왕안석과 연관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P123). 왕안석의 개혁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할 필요가 있겠으나 이후 북송이 무너지므로써 그는 북송의 멸망의 희생양이 된 측면이 컸던 것 같다.

1127년 송 왕조의 붕괴는 북송시대의 끝을 의미했다. 화북 지역을 금에게 빼앗긴 후송 조정과 행정 부서들이 서둘러 남쪽으로 떠나면서 송 왕조 역사의 두 번째 단계, 즉 1279년까지 152년간 지속되는 남송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송과 남송이라는 용어는 물론 송대에는 사용되지 않은 역사학적 명칭이다. 사건을 목격한 동시대 사람들 중에는, 1127년 송 왕조의 와해로 송의 연속성이 훼손되었고 왕조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견해를 일부 보이기도 했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한 왕조가 서한(전한)과 동한(한)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송의 역사도 1127년을 기준으로 하여 양분된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P139).
1130년 금 기병대가 항주를 함락하고 압박을 가하자 송 정부는 고종과 신하들은 도주하여 소흥에 자리를 잡았다. 금의 기병대는 중원을 거듭 습격했으나 송의 지방군이 금의 군대에 끊임없이 대항하면서 고전하게 된다. 이 때 악비를 비롯한 유명한 장수들이 주전파로 활약하였다(주화파 중 유명한 이는 진회가 있다. 그는 악비 독살을 명령하였다). 금은 송을 정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평화 회담을 벌여 결국 1141년 양국 간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로써 송은 회수를 경계로 인정함으로써 중원과 호북성의 두 개의 주를 잃게 되었다.

송대에는 불교와 도교의 영향 아래, 유학 사상가들이 고대의 중국사상을 재편하고 ‘도학道學‘으로 알려진 철학 체계의 기초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결코 한가지의 철학학파였다고 할수 없는 이 사상적 운동은 서구 사회에서 대개 ‘신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일차적으로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신유학은 합리주의적 인식론이나 근본주의 도덕론 같은 중국적인 가치 체계를 규정하고 재평가하였으며, 이것이 공공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까지도 송문화의 중심축으로 작용했다(P193). 신유학 사상가들은 전통과 개인의 사회적 책임 문제와는 무관하게 개인만을 위한 독립적인 철학이나 구원을 위한 교리를 창조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동에 꼭 필요한 현실적인 답을 제공해주고자 노력했다. 유교 사회라고 해서 유학만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사회로 오해하기 쉬운데 기존의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유학'이 아니라 '신유학'이라고 따로 명명했다 생각된다. '신유학'은 남송 시기 제대로 자리를 잡는데 국가 이념 뿐 아니라 사회 구조의 틀을 전반적으로 바꾼다.

송 왕조는 교육과 시험을 통해서 자기 영속이 가능한 관료 혈통을 이루는 문신 가문의 시대가 되었다. 지배층은 특권을 누렸으나 관료 집단 대열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이 유일한 길이 되었다. 송사회에서 결혼은 조상 숭배를 이어가는 것을 최고의 의무로 삼는 합법적인 후손을 생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송대의 혼례 의식에는 기원전 주 왕조시대의 유교와 가족 연대를 구축하여 특권과 영향력 또 경제적 번영을 확보하려는 사대부 계층의 이익이 융합되어 있었다. 송에서는 지속적이고도 의식적으로 올바른 행동의 모범을 탐구하던 송대 사대부들의 정신이 상고시대 주나라의 경전에 서술된 소박한 매장 관습을 부활시켰다. 고대의 문화를 존중하는 송대인들의 관념이 신유학 사상운동의 지지를 받아 타당하며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한족 중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더욱 강화되었다(P302). 송대에 시는 어떤 상황과 변화에 내재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였고, 위태로운 정치 영역을 포함한 인식과 존재의 모든 방면을 다루었다. 다양한 유형으로 훌륭한 시를 지을 만큼 재능이 있다는 것은 뛰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송대 작가들에게는, 내면세계의 본질이 시에 응축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본질은 외부세계와 자연의 현상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도 복잡다단하게 연관되었다(P308). 시는 당 이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송 시대부터 과거 제도에 '시'가 과목으로 선정되면서 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본다.

송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특히 개봉은 국제적인 상업 도시였다(대규모의 교외, 24시간 깨어 있는 도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동네들, 도시 의식을 지닌 주민들을 특징으로 한 개방 도시). 송대의 뛰어난 경제적 성취는 몇 가지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조세 등 기상의 농업 경작지가 크게 증가한 것이 송대의 번영을 보장해준 요인이었다. 토지 등록은 과세 호구에 대한 개혁과 함께 추진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자영농이 송대 농업의 중추가 될 수 있었다. 농업 경제의 번창에는 모든 종류의 기술적 개선, 특히 새로운 도구의 사용이 필요했고, 이것은 다시 더욱 효율적인 채광 방법과 철, 구리의 높은 생산을 요구했다. 이러한 금속의 이용이 쉬워지면서 막대한 규모로 화폐를 주조할 수 있었다(P427). 양송 시대에는 상업, 금전대출, 조세제도 그리고 대외 정책에도 현금 통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P431).

근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송대 사람들은 중세의 다른 사회에 비하여 보기 드물 정도로 사적 영역에서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천자에게 순종적인 신민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이론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 만큼 잘 알려져 있는 규칙과 제재를 따랐으며 이러한 규율은 유교적인 행동 규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주택 건축과 의상에서의 기호부터 위생, 오락, 자선의 범주까지 사적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되는 방임적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말 몽골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이 누리던 자기결정적인 생활방식의 편안함은 끝나버렸다(P503).

남송 시대부터 이후 제국시대의 여성들은 제약을 받고 가내 공간에 갇혀 있게 된다. 이제 완벽한 여성상은 남자보다 작고 날씬하고 부드럽고 연약하며, 집안에 머물면서 부모와 남편, 가족들에게 봉사하고 어린 자녀들을 교육하는 여성이 된다. 이상적인 상류층 남성상 역시 송대를 지나면서 변화하여 호리호리한 체구와 여성적으로 나긋하게 행동하는 세련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P482~483). 이를 비롯하여 유교가 중국의 발전을 방해한 족쇄였다는 부정적 평가는 19~20세기 들어 강해졌는데 이는 고려 말, 조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나도 유교 이념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사회가 경직화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은 앞으로도 더 자료를 찾아 보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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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당연하게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상업적모험기업commercial venture의 거점이 되고 있고 반식민주의투쟁이 가장 강력하게 벌어져 온 지역들(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에서 더욱 극심해졌다. 여성에 대한 야만적 행위는 신 인클로저new enclo-sures가 기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그리고 수년간 전 지역을 초토화한 토지 횡령, 사유화, 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 P97

쥘 팔케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한 명을 시중드는 것에서 요리, 청소, 성적 서비스 제공 등으로) 다수 남성의 시중을 들게 되면서, 전통적인 제약 형태가 무너지고 여성은 학대에 더욱 취약해졌다. 개별 남성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여성들이 점점 더 적극적으로 자율성과 경제적 독립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부상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backlash이다. - P104

여성에 대한 폭력은 물리적physical 폭력이다. 그러나 사회경제 정책과 재생산의 시장화가 자행한 폭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복지, 고용, 사회서비스의 삭감으로 인한 빈곤을 그 자체로 폭력의 한가지 형태로 간주하여야 하고, 새로운 노예 농장들인낄라스maquilas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비인도적인 노동조건도 그러하다. 극심한 형태의 폭력은 더 있다. 의료 보장의 부족, 임신중지 접근권 부정, 여아 선별 임신중지, ‘인구조절‘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된 아프리카·인도·라틴아메리카 여성의 강제불임화, 그리고 특히 대출을 상환할 수 없는 이들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마이크로크레딧‘등이 있다. 여기에 우리는 일상에 만연한 군사화를 추가해야 한다. - P108

오늘날 아프리카의 ‘마녀‘들이 고발당하는 범죄에는 유럽의 마녀사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다. 이 범죄들은종종 유럽의 악마신앙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며, 복음화evangelization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야반도주, 변신, 식인, 여성 불임화, 영아 살해 그리고 농작물 파괴 등이다. 또 두 사례에서 모두 ‘마녀‘는 주로 나이 든 여자나 가난한 농부이고, 종종 혼자살며, 또는 남자와 경쟁한다고 여겨지는 여자들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유럽의 마녀사냥처럼 아프리카의 새로운 마 - P143

녀사냥은 ‘시초축적‘ 과정을 겪는 사회에서 일어난다. 그런사회에서는 많은 농민이 자기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새로운 재산 관계와 새로운 가치 창출의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공동체적 연대감이 경제적 갈등의 영향 아래 파괴되어 간다. - P144

어떤 페미니스트는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의 안전을 더욱 보장하거나, 아프리카의 농촌에서 종종 마녀사냥이나 여러 형태의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온 토지 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환상이다. 그 이유는 세계은행과 미국국제개발청이나 영국 정부 같은 다른 개발업자들이 추진하는 토지법 개정은 외국 투자자들에게만 이익을 주고 농촌에는 더 많은 부채, 더 많은 토지 양도, 그리고 빼앗긴자들끼리의 더 많은 분쟁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 P156

를 대신해서 필요한 것은 토지와 다른 공동의 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형태들이다. 여성이 자식이 없더라도,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어서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더라도, 또는 남편이 죽고 보호해줄 남자 후손이 없더라도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공동체주의의 형태들이 필요한것이다. - P157

여성의 신체는 자본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유일한 최후의 프런티어 frontier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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