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eral and the Woman Pharaoh

이집트의 황금 시대 중 두 명의 파라오에 대해 소개한다. Thutmose I(투트모세 1세)와 그의 딸 Hatshepsut(하트셉수트)다. 

THUTMOSE I: THE GENERAL

파라오가 되기 전 투트모세 1세는 이집트군의 장군이었다. 그는 이집트 왕자를 도와 이집트에서 힉소스를 몰아냈고 왕자가 왕이 되자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투트모세는 이집트왕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죽자 투트모세가 왕권을 이어받아 이집트의 파라오가 된다(BC/BCE 1524). 그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황제의 권위를 더 키웠다. 그는 특히  힉소스 땅을 완전히 인수했다.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동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는데 바빌론의 전투력이 더 낫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1세는 사망하였고 이집트는 그 전보다 2배 더 커졌다.

HATSHEPSUT: THE WOMAN WHO PRETENDED TO BE A MAN

하트셉수트는 이집트 공주로 아버지인 투트모세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는 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전투 이야기를 들으며 나중에 아버지 같은 파라오가 되기를 꿈꾼다.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은 결혼을 해야 했고 아이를 가져야 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절에서 일을 하면서 신에게 봉사를 해야 했다. 아니면 여자들이 직업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했던 무용수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투트모세 1세가 죽자 다음 파라오는 그의 아들이 이어받았으나 몸이 약해 4년 재위만에 사망했다. 그는 유언으로 다음 파라오를 자신의 아들로 하게 했으나 그는 아직 아기였다. 그녀는 조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자신이 섭정하며 도와주겠다 했으나 세월이 흘러 조카가 컸지만 여전히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인 척 하기 위해 남자옷을 입고 수염을 붙이는 열의를 보였고 신이 인정하였다는 등 말을 보태어 주변을 설득했고 마침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된다. 그녀의 집권기동안 전쟁 없는 평화가 이어져 백성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Amenhotep and King Tut

AMENHOTEP: MANY GODS OR ONE GOD?

Amenhotep(아멘호테프)는 법률을 제정하고 군대를 내보내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는 이집트의 태양신인 Amun(The King of the Gods)을 숭배하며 독실하게 믿음을 행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그는 Amun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집트신은 진짜가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Polytheism(다신교)를 믿고 있었다. 아멘호테프는 유일신인 Aten을 믿기 시작했다. Amun은 사람처럼 생겼으나 Aten은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는 사원을 폐쇄하고 성직자들의 의식 행위를 중지시켰다. 그는 Amun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름도 Amenhotep가 아니라 Aten의 숭배자라는 뜻의 Akhenaten으로 개명했다. 그렇게 그는 이집트 최초의 monotheist(유일신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멘호테프가 죽자 이집트인들은 들고 일어나 자신들이 믿던 다신교 숭배로 돌아간다. 그들은 아멘호테프의 이름을 역사에서 완전히 지웠고 유일 신앙은 발 붙일 곳이 없어졌다.


THE BOY BURIED WITH TREASURE: KING TUT

TUT는 겨우 7살 때 왕위에 올랐다. 원래 이름은 Tutankhaten이었는데 나중에 Tutankhamen이라 바꾸었다.다. Amun을 숭배하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집트 사람들처럼 Aten을 숭배했고 다신교를 믿는데 열과 성의를 다했다. 다만 18살 때 사망하여 피라미드에 묻히지 못했다. 도굴꾼들이 이집트에 보물이 많다는 것을 알아서 도굴하여 보물을 많이 훔쳐갔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무덤을 언덕이나 산속으로 숨기기 시작했다. 절벽에 문을 만들어 그 안쪽에 시신과 보물을 놓는 형태였다. 이런 곳들 중 the Valley of the Kings라는 곳이 있는데 60기의 무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3천년이 지나도 Howard Carter가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하트셉수트의 무덤을 발견하고 다른 왕들의 무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어는 날 Carter는 돌무더기를 이동하다 문에 있는 상형문자 투탕카멘 글자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황금이 가득한 방을 찾고 연결된 방들을 따라 투탕카멘의 미라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무덤의 저주일까. 관련된 자들이 10년 안에 6명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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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0-01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부분 읽었어요^^ 화가님! <잃.시.찾> 12권부터 따라 읽을거예요 두근...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0-01 15:15   좋아요 1 | URL
이번 달 안에 SOW 다 읽으려면 속도를 좀 내야겠더라구요^^
일단 잃시찾 11권 연휴동안 마저 읽는 게 목표입니다. 다 읽고 나면 미미님과 함께 읽게 되겠군요. 좋습니다*^^*

단발머리 2023-10-01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연휴에도 아름다운 열공의 현장, 너무 멋지네요!!
유일신을 믿었던 아멘호테프 이야기를 프로이트의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렇게 연결이 되네요.
다음 편도 기다릴게요!!

거리의화가 2023-10-03 07:56   좋아요 0 | URL
ㅋㅋ 한동안 안 읽다 다시 읽으려니 잘 안 읽히더군요^^; 다음편도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3-10-01 2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이름만 들어본 투탕카멘이 여기에 나오는군요!!

거리의화가 2023-10-03 07:5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투탕카멘의 저주!ㅎㅎ
 
루쉰 소설 전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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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중단편 소설들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루쉰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지만 정작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거나 나처럼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정도만 읽은 이도 많을 것 같다. 루쉰은 중국의 대표적인 문학 작가이지만 그는 단순히 그 타이틀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신해 혁명 후 스스로가 근대 중국을 여는 길을 주도했기 때문에 근대의 포문을 연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엇보다 자국 뿐 아니라 일본,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던 사람이었다.


주안 평전을 읽고 나서 이제는 루쉰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고 기왕이면 제대로 읽어보자 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어 있어 읽기 참 수월했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이름도 중국어를 한자로 표기했을 때의 발음이 아니라 중국어 발음을 한국어로 소리나는 대로 옮겨 놓아서 현실감이 더 있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더 감정 이입이 잘 되었던 것 같다.


시기별로 제1소설집에서부터 제3소설집까지 실려 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 만난 사람에게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옳은 거요?” 묻는다. 

자신이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 하면서 또 남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서, 모두가 지극히 의심이 깊은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핀다. 그런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안심하고 일을 하고, 길을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을 테니 얼마나 편안하겠는가. 이는 단지 문지방이요, 문턱일 뿐이다. 그들은 정녕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스승과 원수 관계이며, 또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도 모두가 한 패거리가 되어 서로 이끌어주거나 서로 견제하면서, 죽어도 이 한 걸음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 P30

먹고 먹히는 관계. 자본주의 사회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는 비단 개인들 간의 관계 뿐 아니라 나라 대 나라, 당시의 국제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광인일기는 충격도와 강렬함 면에서는 그의 작품 중 단연 최고이지 않을까 싶다.


<고향>의 주인공은 어릴 때 함께 생활했던 친구와 계급적 차이로 인해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비단 이것이 근대 중국의 일 뿐일까. 현대에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계급은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차이가 존재한다. 상위 계급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시하며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지를 쳐낸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거대한 꿈이 희망일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이 길 위에 존재한다.

“부자들은 있으면 있을수록 한 푼도 풀려고 하지 않고, 한 푼도 풀려고 하지 않으니 더욱 부자가 될 수밖에.” - P106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지만 법적으로는 평등사회가 되었음에도 그는 “나으리”라는 말로 친구를 호칭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두터운 장벽으로 막혀 있으며 나도 말이 편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친구는 멀어졌다 해도 나는 미래의 세대가 괴로움을 덜 갖기를 원하며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질 수 있길 꿈꾼다. 하지만 그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 P113

지금 우리는 그가 꿈꾼 이상을 실현 중인가.


도시에 살던 <복을 비는 제사>의 주인공은 섣달 그믐 고향의 숙부댁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그는 듣자마자 며칠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여자를 떠올리는데 죽으면 영혼이 사라지느냐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 자신을 당혹시켰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단시간 내에 답을 얻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 때문에 곤혹스러워했고 상황을 빨리 피하고 싶어했다. 결국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사실이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나는 정확하게는 몰라요.”라고 답하는데 이 대답이 최선이지 않았을까. 물론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다른 도화선이 된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은 매우 쓸모 있는 말이다. 세상경험이 없는 용감한 청년은 때로 타인을 위해서 의문을 풀어 주기도 하고, 의사를 불러다 주기도 하지만 만일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대개는 도리어 원한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정확히 말할수는 없다‘는 한마디로 결말을 지어 두면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이 한마디 말의 필요를 실감하였다. - P243

그녀는 무척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듭되는 불행에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올 때 어디에라도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녀는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참한 이야기를 했고, 항상 너덧 명이 그녀의 이야기에 이끌려 듣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안 되어 모든 사람들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가장 자비심 많고 부처를 잘 믿는 노부인네들의 눈에서조차 한 방울의 눈물도 볼 수없게 되었다. 나중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외울정도가 되었고, 마침내는 듣는 것조차 넌더리치게 되었다. - P258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 하나 없고 자신의 상황을 타개해나갈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은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고독한 사람>의 웨이렌수는 서양식 학문을 공부하고 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이상을 펼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는 자신의 미래를 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구습에 얽매인 학교를 보며 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느낀다.  어느 날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고향에 갔다가 서양식 공부를 한 손자의 행동을 주시하는 어른들을 만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 손자 편을 들어주지 못하고 어른들의 장단에 맞춰준다. 그는 학교에 돌아오지만 결국 교원으로 적응하지 못한 채 그만두고 먹고 살기 위해 군벌의 고문으로 취직하게 된다. 

내게는 아직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걸 위해 구걸하고, 그걸 위해서 굶주리고, 그것을 위해서 추위에 떨고, 그것을 위해서 쓸쓸해 하고, 그것을 위하여 쓰라린 고생도 기꺼이 감수했소. 다만 멸망하는 것만은 원하지 않았소. 보시오. 내가 좀 더 살아 있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도 컸소. 그러나 지금은 없소. 한 사람도 없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소. 다른 사람이오?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나 자신은 또한 내가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인간들을 위하여 고집으로라도 살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소. - P378

하지만 현실과 타협해버린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파멸하고 만다. 


<이혼>의 주인공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봉건사회가 굳건했던 당시의 농촌에서 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부정행위를 안 부인은 저항하다가 부당하게 이혼을 당한다. 

“나는 화가 나서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짐승 같은 아들놈은 젊은 과부와 눈이 맞아서 나를 싫다고 하니, 일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겠어요? ‘짐승 같은 아비는 자식 놈의 편만 들면서 나보고 필요 없다고 하니, 쉽게 되겠냐구! …” - P441

일이 커져서 마을의 어른이 나서서 이 일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게 어디 중재한다고 될 일인가. 그는 여전히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이혼은 당연한 것이라며 당당히 맞선다. 

“다 저들 ‘지승 같은 늙은이’와 ‘짐승 같은 놈’들이 미리 꾸며 놓은 대로 되는 거죠. 그들은 마치 초상을 알리러 가듯이 서둘러 개구멍으로 빠져 나가려나 하구, 약아빠진 인간들… 

그러는 그는 어디 점잖은 데가 있습니까? 입을 열었다 하면 ‘천한 종자’라느니, ‘어미를 잡아먹을 년’이라느니, 그 잡년과 사귄 뒤로는 저희 조상까지 들먹거렸답니다….” - P450, 451

비록 욕은 들어먹었을지언정 남은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제3소설집은 과거 중국의 신화와 전설, 대학자들의 작품과 이야기를 끌어왔으나 이를 루쉰만의 방식으로 개편하여 내놓는다. 여와의 이야기가 담긴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 물을 다스린 곤와 우의 이야기가 담긴 <치수>, 노자와 공자의 학설을 비교한 <출경>, 묵자의 학설을 담은 <전쟁 반대>, 장자의 학설이 담긴 <죽은 자 살리기>가 있다. 

사실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공간과 물체를 가져다 쓴 것이 많아 좀 난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고사리를 캐는 사람>은 백이, 숙제가 나오는데 현대의 양로원이 배경이어서 결코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특히 <전쟁 반대> 같은 작품은 제목도 그렇고 묵자의 학설을 평소에 좋아하기 때문에 호기심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루쉰 소설을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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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10-01 2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일월서각에서 나온 아주 오래된 노신전집이 있습니다. 이걸로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10-03 07:55   좋아요 2 | URL
최신판으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죠. 번역이 훌륭하더라구요^^

2023-10-07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신 B.C.73

대장군 곽광이 머리를 조아리고 정권을 돌려주니, 임금이 겸양하여 받지 않고 매사 모두 곽광에게 먼저 보고한 뒤에야 임금에게 아뢰게 하였다. 소제 때부터 곽광의 무리와 친척들이 조정에서 기반이 있었는데, 창읍왕이 폐위되자 곽광의 권력이 더욱 커졌다. 매번 조회에 나올 때마다 임금은 자신을 예우하고 낮춤이 너무 심하였다. - P11

嚴酷: 엄혹
痛繩(통승): 바로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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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 갇힌 여인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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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특히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과 가졌던 관계며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행동 동기에 대한 완벽한 거짓말,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것, 또 우리를 사랑하고 또 우리를 하루 종일 포옹하고 있어 우리를 자신과 닮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거짓말, 이런 거짓말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향한 전망을 열고, 또 마비된 감각을 일깨워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을 세계를 관조하도록 하는, 이 세상에서 드문 것 중 하나이다. - P42


브리쇼는 내게 베르뒤랭 살롱에서 주최하는 음악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전해준다. 샤를뤼스는 브리쇼가 젊은 남자와 산책한다는 이유로 소르본대학에 협박성 고발장을 날린다(이런 면에서 보면 샤를뤼스는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다). 샤를뤼스는 실수로 레아가 보낸 모렐의 편지를 열어봤다가 큰 충격을 받는데 이는 모렐이 남성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매력을 받는 존재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동시에 불안을 느낀 것이 아닐까. 


베르뒤랭 부인은 자신의 살롱이 공연 프로그램과 공연단을 일류로 꾸리며 관객들을 끌어모으려 노력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살롱이 일류였기에 자신도 그에 견주어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를뤼스 남작이 살롱 모임에 귀부인들에 해당하는 참석자들을 배제시키자 베르뒤랭 부인은 크게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베르뒤랭 부인은 샤를뤼스와 모렐의 관계를 이용하여 브리쇼로 하여금 샤를뤼스를 철저히 매장시킬 것을 주문한다. 


내 연로한 대화 상대자에게만 존재하여 내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빛깔을 가진,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 된 그 부분은, 외부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리의 영혼 속으로 피신하여, 영혼에 더 많은 가치를 주고, 또 영혼의 일상적인 실체에 동화되어, 영혼 속에서 추억의 반투명한 설화 석고로 변하면서 기억 속에 떠올리는 파괴된 집들이며, 옛사람들이며, 야식용 과일을 담은 굽다리 접시며 오직 우리에게만 보이는그 빛깔을 우리는 결코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으며, 그래서그들이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는 이런 지나간 물건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그들이 보아 왔던 것과 전혀 닮지 않으며, 또 우리 자신도 어떤 감동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고, 마음속에 꺼진 등불의 그림자나 더 이상 꽃피지 않을 소사나무의 향기가얼마 동안 존속하는 것도 바로 우리 사유의 존재에 달렸다고생각하면서,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다. - P161


모렐은 베르뒤랭 부인의 계획을 눈치채고 샤를뤼스에게 절교 선언을 한다(그는 철저한 권력 지향주의자다). 그러나 베르뒤랭 부인은 겉으로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하면서도 샤를뤼스가 그에게 세심함이나 배려는 부족했다며 은근한 비난조를 덧붙인다. 샤를뤼스는 이후 베르뒤랭 네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 세계에 더 이상 발을 못 붙이게 되었고 병까지 깊어진다.


평화에의 의지를 꽃피우기 위해 사람들이 권하는 가장 잘못된 격언인 전쟁 준비는, 이와는 반대로 각각의 적들에게 상대방이 결별을 바란다는 믿음을 야기하며, 이 믿음이 결별을 가져오고, 그래서 결별이 실제로 일어날 때면, 둘 중 하나에게 결별을 원한 것은 바로 상대방이라는 또 다른 믿음을 야기한다. 비록 진심이 아니었다 해도, 일단 협박이 성공하면 그것은 또 다른 협박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허풍이 어디까지 성공할지, 그 정확한 지점을 결정하기란 어렵다. 허풍은 진지함과 혼동되거나 교차할 수 있는데, 어제는 단순히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내일은 현실이 되는 수가 있다. 끝으로 적들 중에 어느 한쪽이 실제로 전쟁을 결심하고, 이를테면 알베르틴의 경우에는 머잖아 더이상 이런 삶을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또는 반대로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한 번도 떠오른 적이 없으며 그저 내 상상력이 송두리째 지어낸 것일수도 있다. - P296~297


나는 계속하여 칩거 생활중이었으나 알베르틴과 ‘헤어질 결심’만 반복한 채 결별을 미루고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녀를 놓지 못한다. 자유로웠던 발베크의 소녀가 따분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수인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지켜보자 그녀를 갇힌 여자라고 생각한다. 정작 갇혀 있는 것은 나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알베르틴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발베크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며, 또 친구들과 함께 자러 간 수많은 작은 해변들 때문에 찾을 수 없었고, 게다가 그녀의 거짓말로 인해 더욱 포착하기 어려웠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 집에 온순하게 홀로 갇힌 그녀는, 발베크에서 내가 그녀를 발견했을때 해변에서 보았던 그런 도망치는 신중하고 교활한 존재가아니었으며, 그 존재가 능숙하게 감출 줄 알았던 수많은 밀회로, 그토록 나를 고통스럽게 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게 했던 밀회로 길게 이어지면서, 다른 이들을 대할 때면 그토록 냉정한태도와 진부한 답변 아래 전날과 내일의 밀회가 느껴지고, 또내게는 멸시와 술수로 에워싸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바람이 불어도 옷이 부풀지 않고, 특히 내가 날개를 잘라 버린 탓에 더 이상 승리의 여인이기를 멈춘, 오히려내가 떨쳐 버리기만을 바라는 귀찮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 P311


‘예술의 실재’와 ‘실재’는 서로 다르다. 예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이 보는 대로 예술성이 전달된다. 나는 예술도 사랑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주체인 내가 보는 상대, 상대가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자연스레 서로 같은 비율일 수도 없을 뿐더러 각자의 모양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옆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좋아한 것은 그였다. 이후 어느샌가 나도 스며들어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둘의 시간은 다르다. 그리고 공간도 마찬가지, 내가 특별하게 느끼는 장소와 그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장소가 다른 적이 많았다. 우리의 사랑은 각자가 저장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알베르틴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얼마나 많은 장소들을(그녀와 직접 관계없는 장소라 할지라도, 그녀가 맛볼지도 모르는 쾌락의 어렴풋한 장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몸을 스치는 장소),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과 장소에 관심이 없던 내 상상력이나 추억의 문턱으로부터 ㅡ 마치 개표구에서 수행원이나 한 무리의 친구들을 자신보다 먼저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는 누군가처럼 - 내 마음속으로 이제 그런 사람들이나 장소에 관한 나의 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고통이 되었다. 사랑이란 우리의 마음에서 지각되는 공간과 시간이다. - P337


나는 이별의 순간을 상상하고 열망했다. 베네치아를 가고 싶었는데 그녀가 방해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의 부재이다. 출발한다고 하면 그제서야 절박해지는 아이러니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떠나려 했지만 결국 그녀가 떠났다. 


내가 어두운 방에 있다 해도, 지금 내 양옆으로 수레국화와 개양귀비와 선홍색 클로버를 피어나게 하여 전원의 냄새처럼 나를 취하게 했으며, 그러나 산사나무에 부착되어 끈적거리는 짙은 요소에 붙들린 채 울타리 앞에서 뭔가 안정적으로 감도는 냄새처럼 한정되고 고정된 냄새가 아니라, 그 앞에서 길들이 사라지고, 지형이 달라지며, 성들이 달려가고, 하늘빛이 희미해지고, 우리가 가진 힘을 열 배로 커지게 하는 힘과 도약의 상징과도 같은, 내가 발베크에서 느꼈던, 그 크리스털과 강철로 만든 우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되살아나게 하는 냄새였다. 그 욕망은 낯선 고장에서 미지의 여인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것이었다. "파리지앵,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늘 아래로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점심 먹으러 가요, 강으로 보트를 타러 가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리고 이 모든 몽상은 너무도 즐거웠으므로, 내가 부르지 않으면 프랑수아건 알베르틴이건, 어떤 '소심한 인간'도 나를 방해하러 '궁중 깊은 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준엄한 율법'을 정해 놓은 일을 스스로 칭찬했다. - P37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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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9-30 14: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르뒤랭 부인을 보면서 그 세계가 무척 매정하다는 생각을 했고
모렐은 정말 나쁜놈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화자가 알베르틴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았어요.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을까요~~

거리의화가 2023-10-01 09:30   좋아요 2 | URL
사교계는 지금의 정치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된 모습이 악귀처럼 느껴져서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화자가 알베르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어떠한 정형화된 이미지나 사물을 보는 느낌이어서 결국 알베르틴이 아니더라도 그 이미지에 맞는 사람에게는 동요를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희선 2023-10-03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고 마음이 바뀌다니... 잘 모를 때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겠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달라질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이 책 앞으로 세권 남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03 07:58   좋아요 0 | URL
한 권 마무리해서 이제 2권 남았는데 진짜 이 책은 한 번에 쭉 읽기가 너무 힘든 책입니다ㅠㅠ 이달에 다 읽어버리고 싶긴 한데 어찌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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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연성의 세계에 더 많이 열려 있던 내게 이런일은 그만큼 더 위험했다. 가능성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만, 개인에게 속을 위험이 있다. 내 질투는 가능성이 아닌 이미지에서,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 P38


어느덧 잃시찾 시리즈 9권까지 왔다. 특히 5~8권이 읽기가 힘들어서 진도도 잘 안 나가고 이해도 된 건지 아리송함만 더 커졌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권부터 4권까지도 아리송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8권까지 읽고 지치는 것 같아 거의 한 달 정도 쉬었다가 추석 연휴를 이용해 9권과 10권을 읽었다. 


알베르틴은 크루즈 여행을 떠나지 않는 대신 내가 사는 파리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찜찜한’ 허락이라고나 할까. 다 큰 어른을 말린다고 들을까 싶은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권태로운 집착’을 이어간다. 알베르틴에게 조금도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하루 일과에 몰두(열중)한다. 그마저도 타인에게 그녀에 대한 감시를 맡기고 스스로를 집안에 가둔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단계에서 질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단조로운 습관이 침묵하게 한 악기와도 같은 우리라는 존재 안에서, 노래는 모든 음악의 원천, 다시 말해 어떤 날의 날씨가 우리로 하여금 금방 하나의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가게 하는 이런 악기의 차이와 변화에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학적 필연성으로 예측할 수 있었지만, 처음 순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노래하는 그 망각했던 곡을 되찾는다. 밖에서 온 변화지만, 이런 내적 변화만이 외부 세계를 새롭게 했다. 오래전부터 닫혀 있던 사잇문이 내 머릿속에서 다시 열렸다. 몇몇 도시에서의 삶이, 몇몇 산책의 즐거움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았다. 바이올린의 진동하는 현 주위에서 온몸을 떨면서, 나는 이런 특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라는 지우개로 지워 버린 내 퇴색한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을 기꺼이 포기했을 것이다. - P40~41


모렐(샤를=샤를리)은 샤를뤼스 남작에게 쥐피엥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싶다 말한다. 쥐피엥은 샤를뤼스의 심복이었고 남작과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에 허락을 요청한 것이다. 모렐은 바이올리니스트로의 자부심이 있지만 권력 지향적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서기보다는 권력자들(대귀족 등)의 힘을 이용하려한다. 샤를뤼스는 모렐의 결혼을 기쁘게 생각했는데 이는 그를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서다. 샤를뤼스는 모렐을 자신의 눈 언저리에 두면서 언제라도 그를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다.  


모든 이에게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감추는 자들은, 대개는 그 소중한 대상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이렇게 침묵을 지키려는 조심성으로 인해 감소한다. - P85


모렐은 가진 돈을 탕진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꾸러 다닌다. 쥐피엥의 조카딸은 자신이 모렐과 후원자를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앙드레와 알베르틴을 자신의 틀에 규정짓고 판단하려 한다. 나는 알베르틴이 자신의 요구에 응할 뿐이라 무료함을 느낀다.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by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언제나 인물(주체)에만 집중되어 있다. 나무는 배경 속의 한 객체일 뿐이다. 그의 그림에서 나무는 살아 있지 못하다. 알베르틴을 바라보는 관점이 라파엘로의 그림 속 나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찾고, 휴식을 취하고, 그에 기대어 죽고 싶은 이미지는 더 이상 미지의 삶을 사는 알베르틴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내게 그 실체가 완전히 알려진 알베르틴이었다.(바로 그런 이유로 이 사랑은, 내가 불행하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이 본래 가지는 신비로움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 세계를 투영하지 않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며 사실 그렇게 여겨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오로지 나와 함께 있으며, 나와 비슷해지기를 바라는 알베르틴, 미지의 것이 아닌 바로 내 것으로서의 이미지인 알베르틴이었다. - P123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좋아하는 글도 쓰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메가 알베르틴을 발베크에서 봤다며 어떤 소녀들과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되짚어보니 그날 알베르틴은 자신의 성적 접촉을 거부했었다. 그순간 나는 알베르틴이 자신에게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내게 그동안 한 말과 행동들이 진실일까를 생각하며 의혹에 빠진다. 그러다 알베르틴이 베르뒤랭 댁에 간다고 하자 나는 자연스레 경계를 내비친다. 

반대로 알베르틴은 잠결에 ‘앙드레!’를 외치기도 하고 내가 앙드레를 만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질투는 마귀를 불러들이고 둘 사이에 생기는 불만은 상상의 간극을 키워간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육체 안에 갇혀 우리 눈앞에 누워 있는 존재일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랑은 이 존재가 과거에 차지했던, 또 앞으로 차지할 공간과시간 속의 모든 지점으로의 확대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존재가 접촉했던 장소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면, 존재를 소유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이 모든 지점에 이를 수는 없다.
그 지점이 어디인지 지적되기만 해도, 어쩌면 그곳까지 손을뻗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더듬을 뿐이다. 거기서 불신과 질투와 박해가 연유한다. 우리는 엉뚱한 길에서 찾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곁에 있는줄도 모르고 진실을 지나친다. - P162


나는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의혹은 의혹을 불러올 따름이며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맞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인형과 사는 것이지 그게 어디 사람과 사는 것인가. 알베르틴은 발베크에서 자유로운 소녀였고 나는 그것에 반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손에 들어오니 그녀의 삶을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 삶과 관련해서 우리가 모르는 온갖 것에 대해 우리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도 모두망각한다. 따라서 훗날 그 동일한 사람들로 인해 질투가 유발되는 경우, 그 질투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우리 애인이 그토록 서둘러 외출하려고 한 것도, 우리가 너무 일찍 귀가해서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해 불만의 표정을 지은 것도 그들과 관계된일은 아닌지 하고, 우리의 질투심은 과거를 뒤지면서 어떤 사실을 유추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언제나 회고적인 질투는 자료 하나 없이 역사책을 쓰는 사학자와도 같다. - P241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까.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그렇게 판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임을 확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외관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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