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25주년 기록을 보면서 가입 이후 경과한 기간과 활동 시간은 다를 수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재 활동을 시작하면서 짧은 기간 내 많은 책을 사들이고 읽고 써왔다. 알라딘의 긍정적 효과는 역시 '서재'와 '북플'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서재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만큼이나 읽고 쓸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다른 분들의 기록 글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도 책 읽는 분들이 많은 것인지(아이가 있는 학부모들이 많아 관련 책을 사시는 분들이 많은듯) 앞으로도 상위권에 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최근 들어 소설을 많이 읽었더니 좋아하는 분야에 소설(한국소설 2위, 영미소설 5위)이 급부상했고 이동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자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이 작년과 다른 점이다.
4월 중순 무렵부터 일이 바빠져 몸과 마음이 피로하여 읽고 쓰는 페이스를 잃어서 요즘은 스스로가 영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럼에도 상반기에 내가 무얼 읽었고 인상적인 책은 무엇이었는지 정리는 해야겠기에 결산을 해 보려고 한다.
분야로는 당연히 '역사'가 압도적이지만 근래 들어서는 '소설'을 꽤나 읽었던 것 같다. 이 중 얇은 책 시리즈는 하나로 묶어서 총 58권 읽었다. 그래도 초반에 많이 읽어뒀기에 가능한 숫자가 아닌가 싶다.
이 중 기억에 남는 책들을 몇 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945년 해방 직후사>는 해방 직후 1945년 한국 정치와 사회를 살펴봄으로써 현대 한국의 원형을 추적한다. 해방 후 조선은 탈식민, 탈제국, 탈계급 등 무수히 많은 과제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식민지 하의 근대를 과거와 제대로 된 결별을 하지 못한 상태에 제국의 탄압과 수탈, 교묘한 정책으로 계급 간의 갈등은 더 심화되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진 통념과 다른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총독부가 종전 대책 수립을 위해 여운형과만 교섭을 한 게 아니고 여운형과 한민당계가 교섭을 진행했으며 해방 후 여운형과 한민당, 총독부 간에 건준의 방향성을 둘러싼 협의와 교섭이 긴밀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초반에 개인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윌리엄스 소령이 미군정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의 공식 통역인 이묘묵, 조선총독부의 공식 영어 통역관 오다 야스마, 사상 전담 검사인 나가사키 유조 등은 여운형과 건준, 인공을 친일정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으며 한민당은 친미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민주주의자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미군정 하의 권력을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이와 비롯해 기존에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한국 현대 통사와 근래에 나온 <애국의 계보학> 같은 책과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은 기존에 알려졌던 이희승, 김두봉 등의 국문학자들 말고 새롭게 김수경이라는 인물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김수경이라는 사람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았는지, 그가 언어학자로서 어떤 성과물을 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가족사는 근현대 한국인이라면 풍문으로 들어보았을 법하다. 그래도 그는 철학을 전공하고 도쿄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로 엘리트 지식인이었으며 북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현대 조선어(북한어)의 기틀을 마련한 학자였기에 그 끝이 그나마 나았던 게 아닌가 싶다. 김수경이 지향한 조선어학은 당시 세계적으로 트렌드였던 규범화, 구조화에 기반한 국제주의의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물론 이후 김일성 유일체제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에 맞춰서 조선어도 변화의 흐름을 맞을 수 밖에 없었지만. 책의 배치가 단연코 눈에 띄는 부분은 개인사와 조선어의 역사를 교차하여 배치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어의 역사가 문법 설명이 많아서 어려울 수 있는데 문법 이론에 관한 부분이 지루한 독자들을 위해 출판사 및 편집자가 이런 배치를 결정했을 것 같은데 현명했다 보인다.
<근대 용어의 탄생>은 근대 문명의 키워드가 된 ‘말’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business, constitution, democracy, president, project, revolution, university 등.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말들의 기원이 되는 단어는 무엇이고, 이후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의미로 변화되었는지를 들여다본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재밌게 읽었고 무엇보다 잘 읽히는 책이었다. 대부분의 말은 어원과 현재 쓰고 있는 의미가 달라진 경우가 많아서 어원과 현재의 의미가 같은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근대 용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어의 의미와 달라져 오류처럼 혼선을 주게 된 말들도 있다. 라틴어나 그리스 원어에서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또 그것이 한국어로 번역되기까지 과정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역할이 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번역된 말이 아예 우리말처럼 현대에 굳어져 버린 말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서양사정>, <평생공부가이드>, <개념어 해석> 등과 함께 읽어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은 청일전쟁을 좁은 시점이 아니라 확장해서 들여다볼 수 있게 도움을 준 책이었다. 청일전쟁의 장소가 주로 한반도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선인들의 피해와 목소리가 담긴 책은 드물었던 것 같다. 기존에 재야 사학사들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중점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관련 책들이 나온 바 있으나 오히려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서술들만 지배적이어서 아쉬움이 많았다. 현대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청일전쟁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저자는 이런 기존 연구나 사료들을 바탕으로 최신 트렌드까지 확인하여 청일전쟁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잡아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전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고 개전 후 청과 일본이 전쟁에서 보인 모습이 각각 어떠했는지, 그 과정에서 일본 언론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주목하게 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일전쟁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가 생각하면 회의적이라 느껴진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러 사료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책들이 계속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해지는 고마운 책이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중세와 근대의 산업 혁명 이전까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문명사에는 관심이 있지만 경제가 너무 재미 없어서 이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그동안 미루고 읽지 못하고 있었다. 펀딩을 했으니 망정이지 안 했으면 아마 읽는 시기가 훨씬 뒤로 미뤄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막상 읽어 보니 거시적 흐름을 다루면서도 언급되는 내용은 실제 사례에 기반한 미시사적 내용이 많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재미로만 따지면 1권이 일상적 공간에서 다루는 소비물들이라 흥미로웠다. 2권은 유럽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흐름을 통해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론이 발표되기 이전 유럽은 정기시를 비롯한 시장, 신용 대출, 이자, 스톡 등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가 태동하여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3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도하는 지역별로 거시적인 경제사를 다룬다. 북부 이탈리아인 베네치아, 피렌체에서 안트베르펜, 제노바, 암스테르담 등 중북부 유럽으로 세계 경제 흐름이 바뀌어가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현대 중국의 탄생>은 청 제국부터 지금의 시진핑 시기까지 아주 넓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시작이 16세기부터인 이유는 현대 중국의 기원을 청 제국부터 바라보기 때문이다. 최근의 범위까지 역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근현대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입문서 떼고 전문적으로 들어갈 때 이만한 책이 없다 생각한다. 특히 과거의 민족주의나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적 흐름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도 아니고 신중국사적 흐름도 아닌 중립 지향적 기술이 돋보였다.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국이 쇠퇴했던 까닭을 비롯하여 20세기 혁명의 물결을 지나 현대의 중국이 발전해올 때까지 압축적인 역사를 확인해볼 수 있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 있는 국가인데다가 최근 들어 북한과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정세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근현대 중국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필수라고 여겨진다. 최근에 <마오주의>를 읽었는데 이 책을 미리 읽어둔 덕분에 비교적 더 친숙하게 읽을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는 열린책들 35주년 기념 세트에 들어 있는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랑한 이야기도 쓸 수 있다고?' 그래서인지 신선하고 놀라웠다. 앞서 읽은 '가난한 사람들'은 초기작인데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감성과 날카로운 시선 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면 백야는 결이 정말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물론 배경은 음울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지만). 주인공이 하는 행동 중 유일하게 나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산책을 하며 주변에 시선을 주는 것 정도? 주인공은 현실가라기보다는 이상가나 몽상가 쪽에 더 가까웠다. 소설을 보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캐릭터를 보는 묘미에 있는 것 같다. 뻬쩨르부르그의 골목의 구석구석을 누빈다는 느낌으로 읽고 있다가 주인공이 한 여인에 눈길을 준 뒤로는 그 마음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읽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성공률이 극히 희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꼽아 보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우리가 충분히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고 상황도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닌 우리 근처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평범해서 진부함이 떨어질까봐 우려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연애와 결혼 제도, 교육, 엔터테인먼트 등 현대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다양한 주제를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 이상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된 체제를 강요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음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로 구성원 간에 갈등이 깊어져가고 있다. 물론 이를 깨부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이어지고 있으므로 희망적이라 할 수는 있는데 그나마 문학이 가진 힘이라면 조금씩 틀을 깨려는 노력이 아닐까. 보편화된 평범함이 아닌 다양한 색깔을 지닌 평범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김기태 작가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작품들을 써서 내주기를 독자로서 바란다.
시리즈 중 상반기에 끝내지 못한 책들은 '도스토옙스키 전집'과 '세계철학사'인데 하반기 안에는 꼭 읽는 것으로 해야겠다. 사실 작년 말 집안의 묵은 책들을 털어내자는 계획이었는데 이는 역시 과도한 계획이었던 것 같다. 일부 책을 정리했음에도 구입한 책들로 책장이 채워지고 있어서(그나마도 책장을 또 하나 더 샀음) 이제는 그냥 끌리는 대로 읽는 것이 답인가 싶기도 하다. 모쪼록 하반기에는 덜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면 하지만 함부로 예단할 수 없겠지.
참! 영어와 중국어 책을 계속 읽어나가고 있는 것이(영어는 함달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 크다)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중국어는 자주 나오는 일상 속 단어들이 들릴 정도가 되었으나 여전히 읽는 것은 답보인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