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소설 전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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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중단편 소설들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루쉰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지만 정작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거나 나처럼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정도만 읽은 이도 많을 것 같다. 루쉰은 중국의 대표적인 문학 작가이지만 그는 단순히 그 타이틀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신해 혁명 후 스스로가 근대 중국을 여는 길을 주도했기 때문에 근대의 포문을 연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엇보다 자국 뿐 아니라 일본,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던 사람이었다.


주안 평전을 읽고 나서 이제는 루쉰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고 기왕이면 제대로 읽어보자 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어 있어 읽기 참 수월했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이름도 중국어를 한자로 표기했을 때의 발음이 아니라 중국어 발음을 한국어로 소리나는 대로 옮겨 놓아서 현실감이 더 있었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더 감정 이입이 잘 되었던 것 같다.


시기별로 제1소설집에서부터 제3소설집까지 실려 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증상은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 만난 사람에게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옳은 거요?” 묻는다. 

자신이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 하면서 또 남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서, 모두가 지극히 의심이 깊은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핀다. 그런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안심하고 일을 하고, 길을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을 테니 얼마나 편안하겠는가. 이는 단지 문지방이요, 문턱일 뿐이다. 그들은 정녕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스승과 원수 관계이며, 또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도 모두가 한 패거리가 되어 서로 이끌어주거나 서로 견제하면서, 죽어도 이 한 걸음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 P30

먹고 먹히는 관계. 자본주의 사회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는 비단 개인들 간의 관계 뿐 아니라 나라 대 나라, 당시의 국제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광인일기는 충격도와 강렬함 면에서는 그의 작품 중 단연 최고이지 않을까 싶다.


<고향>의 주인공은 어릴 때 함께 생활했던 친구와 계급적 차이로 인해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비단 이것이 근대 중국의 일 뿐일까. 현대에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계급은 만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차이가 존재한다. 상위 계급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시하며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지를 쳐낸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거대한 꿈이 희망일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이 길 위에 존재한다.

“부자들은 있으면 있을수록 한 푼도 풀려고 하지 않고, 한 푼도 풀려고 하지 않으니 더욱 부자가 될 수밖에.” - P106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지만 법적으로는 평등사회가 되었음에도 그는 “나으리”라는 말로 친구를 호칭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두터운 장벽으로 막혀 있으며 나도 말이 편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친구는 멀어졌다 해도 나는 미래의 세대가 괴로움을 덜 갖기를 원하며 마땅히 새로운 생활을 가질 수 있길 꿈꾼다. 하지만 그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 P113

지금 우리는 그가 꿈꾼 이상을 실현 중인가.


도시에 살던 <복을 비는 제사>의 주인공은 섣달 그믐 고향의 숙부댁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그는 듣자마자 며칠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여자를 떠올리는데 죽으면 영혼이 사라지느냐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 자신을 당혹시켰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단시간 내에 답을 얻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 때문에 곤혹스러워했고 상황을 빨리 피하고 싶어했다. 결국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사실이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나는 정확하게는 몰라요.”라고 답하는데 이 대답이 최선이지 않았을까. 물론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다른 도화선이 된다.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은 매우 쓸모 있는 말이다. 세상경험이 없는 용감한 청년은 때로 타인을 위해서 의문을 풀어 주기도 하고, 의사를 불러다 주기도 하지만 만일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대개는 도리어 원한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정확히 말할수는 없다‘는 한마디로 결말을 지어 두면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이 한마디 말의 필요를 실감하였다. - P243

그녀는 무척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듭되는 불행에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올 때 어디에라도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녀는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참한 이야기를 했고, 항상 너덧 명이 그녀의 이야기에 이끌려 듣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안 되어 모든 사람들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가장 자비심 많고 부처를 잘 믿는 노부인네들의 눈에서조차 한 방울의 눈물도 볼 수없게 되었다. 나중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외울정도가 되었고, 마침내는 듣는 것조차 넌더리치게 되었다. - P258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 하나 없고 자신의 상황을 타개해나갈 방법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은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고독한 사람>의 웨이렌수는 서양식 학문을 공부하고 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며 이상을 펼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는 자신의 미래를 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구습에 얽매인 학교를 보며 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느낀다.  어느 날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고향에 갔다가 서양식 공부를 한 손자의 행동을 주시하는 어른들을 만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스스로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 손자 편을 들어주지 못하고 어른들의 장단에 맞춰준다. 그는 학교에 돌아오지만 결국 교원으로 적응하지 못한 채 그만두고 먹고 살기 위해 군벌의 고문으로 취직하게 된다. 

내게는 아직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걸 위해 구걸하고, 그걸 위해서 굶주리고, 그것을 위해서 추위에 떨고, 그것을 위해서 쓸쓸해 하고, 그것을 위하여 쓰라린 고생도 기꺼이 감수했소. 다만 멸망하는 것만은 원하지 않았소. 보시오. 내가 좀 더 살아 있기를 바라는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도 컸소. 그러나 지금은 없소. 한 사람도 없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소. 다른 사람이오?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나 자신은 또한 내가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 인간들을 위하여 고집으로라도 살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소. - P378

하지만 현실과 타협해버린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파멸하고 만다. 


<이혼>의 주인공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봉건사회가 굳건했던 당시의 농촌에서 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그 부정행위를 안 부인은 저항하다가 부당하게 이혼을 당한다. 

“나는 화가 나서 그래요. 생각해 보세요. 짐승 같은 아들놈은 젊은 과부와 눈이 맞아서 나를 싫다고 하니, 일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겠어요? ‘짐승 같은 아비는 자식 놈의 편만 들면서 나보고 필요 없다고 하니, 쉽게 되겠냐구! …” - P441

일이 커져서 마을의 어른이 나서서 이 일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게 어디 중재한다고 될 일인가. 그는 여전히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이혼은 당연한 것이라며 당당히 맞선다. 

“다 저들 ‘지승 같은 늙은이’와 ‘짐승 같은 놈’들이 미리 꾸며 놓은 대로 되는 거죠. 그들은 마치 초상을 알리러 가듯이 서둘러 개구멍으로 빠져 나가려나 하구, 약아빠진 인간들… 

그러는 그는 어디 점잖은 데가 있습니까? 입을 열었다 하면 ‘천한 종자’라느니, ‘어미를 잡아먹을 년’이라느니, 그 잡년과 사귄 뒤로는 저희 조상까지 들먹거렸답니다….” - P450, 451

비록 욕은 들어먹었을지언정 남은 그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속이 다 시원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제3소설집은 과거 중국의 신화와 전설, 대학자들의 작품과 이야기를 끌어왔으나 이를 루쉰만의 방식으로 개편하여 내놓는다. 여와의 이야기가 담긴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 물을 다스린 곤와 우의 이야기가 담긴 <치수>, 노자와 공자의 학설을 비교한 <출경>, 묵자의 학설을 담은 <전쟁 반대>, 장자의 학설이 담긴 <죽은 자 살리기>가 있다. 

사실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공간과 물체를 가져다 쓴 것이 많아 좀 난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고사리를 캐는 사람>은 백이, 숙제가 나오는데 현대의 양로원이 배경이어서 결코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특히 <전쟁 반대> 같은 작품은 제목도 그렇고 묵자의 학설을 평소에 좋아하기 때문에 호기심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루쉰 소설을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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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10-01 2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일월서각에서 나온 아주 오래된 노신전집이 있습니다. 이걸로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10-03 07:55   좋아요 2 | URL
최신판으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죠. 번역이 훌륭하더라구요^^

2023-10-07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