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 갇힌 여인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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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연성의 세계에 더 많이 열려 있던 내게 이런일은 그만큼 더 위험했다. 가능성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만, 개인에게 속을 위험이 있다. 내 질투는 가능성이 아닌 이미지에서,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다. - P38


어느덧 잃시찾 시리즈 9권까지 왔다. 특히 5~8권이 읽기가 힘들어서 진도도 잘 안 나가고 이해도 된 건지 아리송함만 더 커졌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권부터 4권까지도 아리송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8권까지 읽고 지치는 것 같아 거의 한 달 정도 쉬었다가 추석 연휴를 이용해 9권과 10권을 읽었다. 


알베르틴은 크루즈 여행을 떠나지 않는 대신 내가 사는 파리 집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찜찜한’ 허락이라고나 할까. 다 큰 어른을 말린다고 들을까 싶은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알베르틴에게 ‘권태로운 집착’을 이어간다. 알베르틴에게 조금도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하루 일과에 몰두(열중)한다. 그마저도 타인에게 그녀에 대한 감시를 맡기고 스스로를 집안에 가둔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단계에서 질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단조로운 습관이 침묵하게 한 악기와도 같은 우리라는 존재 안에서, 노래는 모든 음악의 원천, 다시 말해 어떤 날의 날씨가 우리로 하여금 금방 하나의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가게 하는 이런 악기의 차이와 변화에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학적 필연성으로 예측할 수 있었지만, 처음 순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노래하는 그 망각했던 곡을 되찾는다. 밖에서 온 변화지만, 이런 내적 변화만이 외부 세계를 새롭게 했다. 오래전부터 닫혀 있던 사잇문이 내 머릿속에서 다시 열렸다. 몇몇 도시에서의 삶이, 몇몇 산책의 즐거움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았다. 바이올린의 진동하는 현 주위에서 온몸을 떨면서, 나는 이런 특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습관이라는 지우개로 지워 버린 내 퇴색한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을 기꺼이 포기했을 것이다. - P40~41


모렐(샤를=샤를리)은 샤를뤼스 남작에게 쥐피엥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싶다 말한다. 쥐피엥은 샤를뤼스의 심복이었고 남작과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에 허락을 요청한 것이다. 모렐은 바이올리니스트로의 자부심이 있지만 권력 지향적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서기보다는 권력자들(대귀족 등)의 힘을 이용하려한다. 샤를뤼스는 모렐의 결혼을 기쁘게 생각했는데 이는 그를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서다. 샤를뤼스는 모렐을 자신의 눈 언저리에 두면서 언제라도 그를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다.  


모든 이에게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감추는 자들은, 대개는 그 소중한 대상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이렇게 침묵을 지키려는 조심성으로 인해 감소한다. - P85


모렐은 가진 돈을 탕진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꾸러 다닌다. 쥐피엥의 조카딸은 자신이 모렐과 후원자를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앙드레와 알베르틴을 자신의 틀에 규정짓고 판단하려 한다. 나는 알베르틴이 자신의 요구에 응할 뿐이라 무료함을 느낀다.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by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언제나 인물(주체)에만 집중되어 있다. 나무는 배경 속의 한 객체일 뿐이다. 그의 그림에서 나무는 살아 있지 못하다. 알베르틴을 바라보는 관점이 라파엘로의 그림 속 나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찾고, 휴식을 취하고, 그에 기대어 죽고 싶은 이미지는 더 이상 미지의 삶을 사는 알베르틴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내게 그 실체가 완전히 알려진 알베르틴이었다.(바로 그런 이유로 이 사랑은, 내가 불행하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이 본래 가지는 신비로움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 세계를 투영하지 않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며 사실 그렇게 여겨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오로지 나와 함께 있으며, 나와 비슷해지기를 바라는 알베르틴, 미지의 것이 아닌 바로 내 것으로서의 이미지인 알베르틴이었다. - P123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좋아하는 글도 쓰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메가 알베르틴을 발베크에서 봤다며 어떤 소녀들과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되짚어보니 그날 알베르틴은 자신의 성적 접촉을 거부했었다. 그순간 나는 알베르틴이 자신에게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내게 그동안 한 말과 행동들이 진실일까를 생각하며 의혹에 빠진다. 그러다 알베르틴이 베르뒤랭 댁에 간다고 하자 나는 자연스레 경계를 내비친다. 

반대로 알베르틴은 잠결에 ‘앙드레!’를 외치기도 하고 내가 앙드레를 만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질투는 마귀를 불러들이고 둘 사이에 생기는 불만은 상상의 간극을 키워간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육체 안에 갇혀 우리 눈앞에 누워 있는 존재일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랑은 이 존재가 과거에 차지했던, 또 앞으로 차지할 공간과시간 속의 모든 지점으로의 확대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존재가 접촉했던 장소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면, 존재를 소유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이 모든 지점에 이를 수는 없다.
그 지점이 어디인지 지적되기만 해도, 어쩌면 그곳까지 손을뻗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더듬을 뿐이다. 거기서 불신과 질투와 박해가 연유한다. 우리는 엉뚱한 길에서 찾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곁에 있는줄도 모르고 진실을 지나친다. - P162


나는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의혹은 의혹을 불러올 따름이며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맞추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인형과 사는 것이지 그게 어디 사람과 사는 것인가. 알베르틴은 발베크에서 자유로운 소녀였고 나는 그것에 반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손에 들어오니 그녀의 삶을 틀어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 삶과 관련해서 우리가 모르는 온갖 것에 대해 우리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도 모두망각한다. 따라서 훗날 그 동일한 사람들로 인해 질투가 유발되는 경우, 그 질투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우리 애인이 그토록 서둘러 외출하려고 한 것도, 우리가 너무 일찍 귀가해서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해 불만의 표정을 지은 것도 그들과 관계된일은 아닌지 하고, 우리의 질투심은 과거를 뒤지면서 어떤 사실을 유추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언제나 회고적인 질투는 자료 하나 없이 역사책을 쓰는 사학자와도 같다. - P241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까. 내가 상대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그렇게 판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임을 확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외관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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