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용 없을 것 같은 아이들 장난감 같은 것에 아직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나는
마이 도러가 제일 좋아하는 곰인형 '베이지'를 위해 세일중인 애견용 티셔츠를 사서
깜짝선물한다든지, 인형들에게 미니어처 살림을 장만해 준다든지, 그러고 놀면서(!)
정작 청소상태랄지 주방상태랄지 내 살림은 개판 오분 전이다.
쓰고 있는 프라이팬들이 낡아서 코팅이 다 벗겨져 계란프라이 하나를 해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데 왜 새 프라이팬 살 생각을 못했는지.
쇼핑과 관련하여서는 나의 정신연령이 초등 저학년 정도라고 판단한 나는,
3주 전 큰맘먹고 홈쇼핑에서 절찬리에 판매중인 마블 양면프라이팬 세트를 구입했다.
중국집 주방장이 쓰는 것 같은 크고 우묵한 프라이팬을 비롯해
계란말이를 끝내주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각 프라이팬, 그리고 둥근 프라이팬,
거기다 찜 겸용 국수 삶는 참한 솥에, 깜찍한 사이즈의 양면마블냄비까지,
택배로 도착한 상자를 풀 때 탄성이 절로 나왔다.
--때로 인생은 커피 한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잔이 가능하게 해주는
따스함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소설에서 인용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저 얄궂은 구절에
프라이팬을 그대로 대입해 보면,
때로 인생은 새 프라이팬 하나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리집 식생활에 일대혁명이 일어났으니......
그동안은 대충 식은밥을 레인지에 데워 있는 국에 한 숟가락 말아서
아침에 아이들 먹여 내보냈는데, 깜찍한 양면마블냄비가 너무 좋아서
때때마다 2, 3인분의 뜨신 밥을 짓게 된다.
그리고 우묵하고 큼직한 전골냄비형 프라이팬에는 버리지 않고 간직해둔 파뿌리와
멸치와 표고버섯 기둥과 무와 양파와 다시마를 넣어 펄펄 끓여 국물을 내어놓고
된장국을 끓이고 카레에도 넣고 어묵을 볶고 생선을 조릴 때도 자작하니 넣어준다.
생선을 구워도 뜨거운 물로 한 번 씻어주면 말짱하게 새 얼굴로 돌아오는 신기함이라니!
밥에 뜸이 들고 된장국이 펄펄 끓으니 어느 집 아침이 부럽지 않다.
새 프라이팬 세트를 사지 않았더라면 솜씨가 신통찮은 목수처럼 연장 탓만 하며
계속해서 주방 근처엔 얼씬도 안했겠지.
과장해서 말하면 새 프라이팬이 생기자 인생이 바뀐 듯한 기분이 든다.
프라이팬으로 크게 필을 받은 나는 내친김에 더욱 알뜰주부가 되기로 했다.
지난주 토요일, 모 홈쇼핑을 보다가 콘크리트 벽을 뚫고 철판에 구멍을 내는
전동드릴의 묘기에 매료되어 블랙&데커 전동공구 풀세트를 주문했으니.....
전동공구 풀세트는 평소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모르는 변변찮은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가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