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실체 - 세상의아침 시집 1
우영창 지음 / 세상의아침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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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동네 간이횟집에서 전어구이를 먹고 바로 그 옆 새로 개업한 맥주집에서 간단하게
생맥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전어구이를 먹을 때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찌저찌 동네에서 알게 된 또래의 혼자 사는 이인데 맥주나 한잔 마시자는 전화.
동생네와 함께 어울리는 자리였는지라 나는 남편의 말을 듣고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맥주집으로 장소를 옮기는데 좀전의 전화가 생각났다.
처남네 가족도 함께인데 괜찮다면 나오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잽싸게 전화를 걸었고
5분도 안 되어 그가 나왔다.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었지만 인사랍시고 고개만 끄덕하고 말았다.
맥주를 한잔 마신 후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누런 봉투를 내민다.
시집을 꺼내드는 순간 깜짝 놀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시인의 이름.
<구미시 이번 도로>의 우영창.

그는 16, 17년 전 새파란 나이에 이런 시를 썼다.


내 심장에 칼을 겨누는 자여
내가 왜 그대를 두려워 하랴
백 년 후 이 자리에 없을 우리인데
                                (詩 '無' 전문)

<사실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오랜만에 나온 시집을 들춰보니 빨리 집에 돌아가
내 침대에 드러누워 시를 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 괴로움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은 끝이 난다

이 기쁨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도 끝이 난다

우리는 다행히
끝이 있는 존재
우리의 부재 속에
태양이 뜬다 한들
우리는
사실의 실체를 알고 있다.
                                  (詩 '사실의 실체' 전문)


오래 전의 시 '無'와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 된 '사실의 실체'가 숨어서 시를 쓰는
학승이나 젊은 사제의 일기장에서 발견할 법한 시라면,  저잣거리의 꼬질꼬질한
"생활의 書"에 해당되는 여러 편의 시들은 동년배의 독자인 내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러고 보니 '동년배'라는 단어는 참 눈물겹다.

귀가길이 / 외롭다는 건 개똥도 안다 /
구두가 알고 / 담벼락이 알고 /
지나가는 자동차가 안다 /
할 수 없이 하느님이 알아준다
                                     ( 詩 '귀가' 중에서)

나는 안개에 승차하고 / 안개의 손잡이를 잡는다 /
차창에 달라붙는 생의 축축한 내음을 맡으며 /
살아가야 했던 이유가 근사한 그곳에서 /
무례하게, 늙은 몸이 하차하여야 한다
                                        (詩 '안개 속으로' 중에서)


"나의 갑옷은 올이 풀린 츄리닝으로 변했고", "사실은 더 비참" 하며
바야흐로 우리가 당도한 건
"식어가는 찻잔의 시간"이다.
그냥 그 사실을 담담하게 술회하는 시인의 시들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다.

세 남자가 일어설 줄을 모르길래, 아이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와 선물받은 시집을 읽었다.

오늘 아침 남편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럴 수가!  한창때 날리던 시인이었으며 90년대 초, 몇 차 국민대회 때
최루탄 자욱한 동대문 로터리에서 오합지졸의 우리들을 이끌던
젊은 시인의 얼굴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생각났다.

가까운 날, 직접 지은 뜨신 밥 한 그릇으로 그의 지난밤 선물에 화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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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8-1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으로 ! ^-^

에로이카 2006-08-1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여러번, 한참을 읽었습니다......

꼬투리 잡을라고...
행여 술이라도 마시고, 말씀드릴 기회가 있다면...
왜 그 식어가는 찻잔의 시간이 위로가 되는지..
공감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 스스로에게 티꺼워 하며 시비 걸고 싶습니다.

시... 참 좋습니다.. ^^

로드무비 2006-08-1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과 치니님께 이 시집 한 권씩 선물하고 싶습니다.
좋은 시집은 나눠 읽어야 한다는 생각.
살짜쿵 주소 남겨 주세요.
거절하지 마시고요.^^

중퇴전문 2006-08-1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 년 후 이 자리에 없을 우리인데

케인즈의 경구를 연상케 하지만, 느낌은 참 다르군요..

mong 2006-08-1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동년배'라는 단어는 참 눈물겹다...
아 참 와닿는 말씀인데요...^^

건우와 연우 2006-08-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시기를 비슷한 마음으로 지나왔을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시, 좋네요...^^

2006-08-16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16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리포터7 2006-08-16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시 참 좋군여^^

2006-08-16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6-08-1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가 참 좋아요. 無,라는 시. 접수합니다. ^^

플레져 2006-08-1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읽어주시는 시들마다
알콜 지수도 조금 희석되어 있는 것 같아요.
괜스레 짠해지거든요...

달팽이 2006-08-1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가 좋군요...찾아봐야지...우영창

nada 2006-08-17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사연도 참 뜨신 밥처럼 정다워요. 앞으로 음주 멤버 한 명 더 느는 건가요?

로드무비 2006-08-1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죠, 또 제 남동생이랑 눈이 맞았는지도.
새벽 두 시에 들어왔더라고요.
꽃양배추님, 음주 멤버는 더 늘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ㅎㅎ

달팽이님, 이 시인의 시들을 좋아하실 듯합니다.^^

플레져님,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시집이었으니까요.
안 그래도 올리고 맥주 한잔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그럴 처지가 아니어 꾹 참았지만......^^

FTA반대 하루님, 아아, 이런 풍의 시를 좋아하시는군요.^^

웃으실 또 한 분 님, 오늘아침 주문했답니다.
기다려주시와요.
그리고, 이름 이쁘기만 한데요?^^

해리포터 7님, 좋아해 주셔서 저도 기쁩니다.^^

청량음료 백 개님, 제가 더 즐거운걸요.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듯합니다요.^^

새삼 반갑다는 님, 저도 새삼 반갑다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네요.^^

건우와 연우님, 비슷한 시기를 비슷한 마음으로......
정말 그런 것 같죠?^^

mong님, 님의 동년배는 아직 새파란 청춘이라
눈물겨울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3=3=3

중퇴전문님, 이 비슷한 케인즈의 경구가 있나요?
궁금합니다.^^

중퇴전문 2006-08-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 are all dead in the long run, 장기적으론 우리 모두가 죽는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로드무비 2006-08-1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그랬군요.
'장기적'으로는 '언젠가는'으로 고쳐도 시적으로는 무방하겠군요.^^

2006-08-17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6-08-1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가을인가 봅니다. 전어구이라니^^
맥주 한캔 들고 혼자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시집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kleinsusun 2006-08-18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인님, 참 예의 바르신 분인 것 같아요.
5분도 안되어 나오시면서, 로드무비님이 시를 좋아한다고 시집을 챙겨 나오는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 참 좋은 분인 것 같아요.
담에 꼭 맛난 저녁 대접하시길...^^

로드무비 2006-08-2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뭐라도 하나 주고 싶어하는 마음.ㅎㅎ
어질고 좋아보였습니다만 또 모르죠.
저도 어질어 보인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못하거든요.
좀더 선선해지면 저녁 초대 한 번 하려고요.^^

나무님, 시를 읽는데 그 다음 페이지의 시도, 그 다음 페이지도,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경우 사실 흔치는 않잖아요.
우리 동네는 전어가 한달 전에 나와서 벌써 네 번쯤 먹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 더 먹을지는 몰라요.
이 시집의 시들이 나무님 마음에도 드실지 궁금하네요.^^

삶은 무거운데 님, 그러셨군요.
반가이 댓글 읽었습니다.
누구를 의식하고 글을 쓰지는 않는데 어떤 때는 님의 말간(!) 눈빛을
떠올리게 됩니다.
얼마전에도 무슨 페이퍼에 사족을 달았는데 그런 종류랍니다.
아무튼 반갑고요, 가끔 뵐 수 있었음 좋겠습니다.
건강 챙기시고요.^^



릴케 현상 2008-11-1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이전 시집들도 함께 구해봐야겠네요.절판인가 뜨지도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