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매일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가끔 나가서 육체노동에 가까운 일로
삶을 지탱할 푼돈을 벌고 세월을 서성거린다.(149쪽)
--생각하는 것만큼 삶은 간단하지 않다.
내 방에서 한 발만 벗어나도 계산이 시작된다.(160쪽)
오로지 읽고 싶은 책을 사기 위해, 주유소나 편의점, PC방 등에서 필요할 때마다 일을 하며
그 외의 시간에는 줄창 책만 읽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 나왔대서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식당 설겆이 등의 단순노동(이긴 하지만 무지 힘든!)으로 최소한의 밥벌이를 하며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만 실컷 보며 살고 싶었던 때가 나라고 어디 없었겠는가.
열흘 전인가, 모 방송 프로그램에 한 책벌레 가족이 소개되었다.
도서관이 바로 옆에 있어서 그곳으로 이사를 올 결심을 했다는 40대 초반의 주부.
초등학생인 두 아이와 그가 지난 6년 동안 읽어치운 책이 도합 1만 권.
1년에 200여 권 대출해 읽었던 두어 해를 입만 뻥긋하면 자랑했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그런데 화면을 보고 있자니 책벌레 가족이 남편이나 아빠를 대하는 태도에 짜증이 치밀었다.
아빠는 독서에 취미가 없고 축구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퇴근해 돌아온 아빠가 축구경기를 보려고 거실의 텔레비전을 켜자
거실 한복판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던 초등학생 딸이 눈을 부라리며
책을 읽고 있는데 텔레비전을 틀면 어떡하냐며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는 것이 아닌가.
저녁 준비를 하던 아내도 부엌에서 뛰어나와 남편에게 한 마디!
그집 아빠는 할 수 없이 베란다로 텔레비전을 끌고 나가 문을 꼭꼭 닫아걸고 볼륨을 줄이고
쪼그리고 앉아 축구를 보는 것이었다.
아내의 소원이 남편이 독서에 취미를 붙여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책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라고.
남편은 아내의 말에 허허 웃기만 했다.
아니, 책 몇십 만 권을 읽으면 뭐하냐고!
자신이 책 많이 읽는다는 게 무슨 특권이고 자랑인 듯 다른 사람의 취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등짝을 한 대 패주고 싶다.
독서는 인간의 수많은 취미활동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미 부여는 개개인이 알아서 할 일.
세상에 태어났더니 마음 가는 거라곤 어떻게 된 게 책밖에 없어서 줄창 책만 읽고 있지만
그 사실이 좀 겸연쩍고, 땡볕에서 열심히 일하여 일용할 양식을 버는 친구에게 뭔지 미안해서
만나면 술 한잔 사줄 용의가 있는 정도.
책이나 자신의 독서 행위에 대해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나는 좋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떨까?
"미래에 대한 어떠한 약속도 기대도 갖지 않은 채로(171쪽)" 마음의 동선을 따라
게으르게 최소한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이라 그런지 윤곽이 희미하다.
희미한 윤곽이 또 매력이 될 수도 있는 법인데, 내게는 그저 모호하기만 한 인물로 다가왔다
세상일에는 아무것도 관심없다며 단지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호랑이 아가리에라도 머리를 처박을 태세인데 뭔가 어색하고 이야기가 겉돈다는 느낌.
하루라도 가게 문을 안 열면 안 되는 줄 알고 자신의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식당에 올인하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제일 인상 깊었다.
특별히 멋진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나오는 장면도 많지 않은데......
<백수생활 백서>를 재미있게 읽으며, 아니 나는 왜 진작에 이런 글을 한 편 써볼
생각을 못했더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통을 한 대 가볍게 쥐어박아 주었다.
책 속의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의 장면과 구절들이 곳곳에 적절하게 등장하는데
좀 의외다 싶은 작가의 것들도 더러 있었지만 '나'의 서술과 대체적으로 잘 어울렸다.
삶이나 독서, 영화에 대한 그의 단상도 귀기울일 만했고.
그런데 다음 구절은 정말 의외였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컵라면에 붓는다. 그리고 그 위를 어젯밤을 함께 보낸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으로 덮었다.
두꺼운 양장본의 책은 컵라면 덮개로 아주 유용하다.(95쪽)
김이 오르는 컵라면 위에 자신이 읽던 책으로 뚜껑을 덮는 사람(독서광 중에서)이
과연 있을까? 알고보면 책이 구체적으로도 쓸모가 많다는 걸 말하려다가
이 작가 그만 오버액션을 한 게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