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아저씨, 향미장을 기억하시나요?
거기서 일하던 박화자 씨 큰딸입니다. (...)
부디 옛정을 생각하시어 내 가엾은 동생을 도와주십시오.
청와대로 덜컥 편지를 보내고 찾아온 경찰관에게 미친년 소릴 듣고.
그 일을 겪은 뒤 정인은 깨달았다.
사는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벌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 살아야 한다!
그니는 당장 의욕을 추스리고 다시 맥주집에 나갔다. 여름 치마를 입고.
(윤정모 <고삐> 중에서)
'나의 문주文酒 40년'이라는 제목으로 어딘가에 연재된 적 있는
언론인이자 정치인 남재희 선생의 <언론 정치 풍속사>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 대통령들과의 교유를 비롯하여
요정이며 고급 살롱이며 대폿집에서 벌어진 온갖 이야기들은
술과 각종 요리, 안주, 여인의 분냄새가 한데 섞인 가운데
우리 현대사 이면의 고린내를 전한다.
제2부에서는 '현대의 황진이들'이라고 하여 정재계 거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살롱계의 여왕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민음사 박맹호 사장의 호의로 출판사 건물 1층에
'사슴'이란 술집을 낸 '낭만'의 미스 리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난데없이 소설가 윤정모의 이름이 나온다.
--윤정모 소설가가 어디에 쓴 것을 보니까 그녀도 초년에 한때 맥주홀에 나갔는데
틈틈이 상 위에 있는 땅콩을 요령껏 집어먹었다고 털어놓고 있다.(<언론 정치 풍속사> 73쪽)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고민 끝에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기는커녕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할 수 없이 엄동설한에 여름치마를 입고
맥주집에 나간 건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알고 있다.
1989년에 <고삐>를 읽고 그 대목이 좋아서 수첩에 옮겨 적었다.
남재희 선생은 홍대앞 단골 헌책방 '온고당'에서 몇 번 마주친 일이 있다.
장관까지 지낸 분인 건 서점 직원에게 들어서 알았지만 책벌레에 엄청난 장서가라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런데 그가 고은 시인의 <만인보> 제11권에도 나왔다는 건 미처 몰랐다.
그 시가 또 재미있어서 소개한다.
의식은 야에 있으나 / 현실은 여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 술 취해 집에 돌아가면
3만 권의 책이 있었다. / 법과대학 동기인
아내와 /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고은 <만인보> 중)
그로서는 참 풍요롭게 잘 살아온 인생이겠는데, 책장을 덮으며 드는 생각, 얄.밉.다!
어쩜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았냐?(아니 뭐, 잘 살았다니 좋습니다만.)
조선일보 기자로, 여당의 국회의원으로, 장관으로 오랜 세월 유유자적 살아놓고도,
시인에게서, "의식은 야에 있고 꿈은 진보에 있었다"는 칭송씩이나 받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