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을 주웠다. 빳빳한 신권으로.
그런데 그걸 어제 하루 만에 탕진해 버렸다.

3월 1일, 하루종일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다가 자다가 말다가 리뷰도 하나 올리고 하는데
저녁 무렵 갑자기 방구석에 태산처럼 쌓인 옷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 태산같은 옷무더기는 처음에 작아진 내 청바지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하루 간신히 입고 나갔다 와서 허리가 너무 끼길래 옷장 속에 넣어두기도 그렇고
세탁하기도 아깝고 해서 구석 대나무 상자 위에 우선 걸쳐 놓았다.

거기에 또 어느 날, 얼룩이 조금 묻은 흰색 '추리닝'을 좀 있다 얼룩만 빼서 입자, 하고 걸쳐 놓았다.
그렇게 하나씩 쌓이기 시작한 옷들이 두세 달 만에 엄청난 산을 이룬 것이다.
그때그때 간단하게 해결할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다 보면 문제는 꼭 저런 모습으로 드러난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 옷들을 전부 끌어내려 세탁할 옷과 장롱 속으로 들어갈 옷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침대 위가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묻었을 때 바로 지르잡아 주어야 하는 얼룩은 오래 지나면 옥시니 뭐니 하는 최강력 세제로도
깨끗이 없앨 수 없다.
그런 얼룩들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옷에 묻은 얼룩이든 마음의 얼룩이든......

옷들을 정리하다 보니 장롱과 벽 사이  20센티미터 쯤의 틈에 하나하나 쑤셔박기 시작한
침대보와 베갯잇, 얇은 이불, 담요, 그런 것들이 또 눈에 들어왔다.
그게 또 태산이었다.
마침 사둔 대용량의 쓰레기봉투가 있어서 아까워 버리지 못하던 안 쓰는 것들을
과감하게 집어넣었다.

그 다음 눈에 띈 것이 화장대 옆 옷걸이 주위를 점령한 가방들.
본래 가방은 장롱 속에 넣어놓는데 그것도 어쩌다 보니 한 개 두 개 그 구석에 쌓였다.
외출하고 돌아와 가방을 비우던 중 갑자기 요의라도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아무곳에나 집어던진 그 가방 위로 또 온갖 가방들이 쌓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가방들 중 하나에서 빳빳한 지폐가 열 장 든 봉투가 나왔다.
영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을 보러 가던 날 들었던 큰 베가방이었다.
키가 크면서 모든 바지가 깡충해진 딸아이 바지와 옷을 몇 개 사려고 비상금을 털어 나갔었다.
그리곤 깜빡한 것이다. 쇼핑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지만.......

10만 원이 든 봉투를 깜빡할 만큼 나는 타락했는가!

아무튼 책장수님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난 뒤 으시대며 한턱 내기로 했다.
늦은 점심으로 굴볶음밥을 먹고 밥생각은 없었으니 간단하게 족발을 뜯기로.

그렇게 지폐 두 장을 썼다.
그리고 어제 오전  인터넷뱅킹으로 2만 원을 내가 아는 노숙자 쉼터로 송금했다.
그리고 피부가 너무 꺼칠꺼칠해 50프로 세일한다는 에센스를 한 병 주문했다.
그리고 보관함의 책 몇 권을 함께......

인터넷뱅킹을 하며 없었던 돈이니 이 기회에 전부, 하는 생각을 안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다.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아무튼 우리 집 안방에서 돈봉투를 주워 하루 만에 탕진하는 재미는 정말 각별했다는 말씀.
(책장수님 왈, 대청소를 하니 하나님이 상을 주신 거라고!  내가 얼마나 평소  청소를 안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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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3-0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진'이라시기엔 요모조모 살뜰하게 쓰셨구만요 뭘
그런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는 재미는 언제나 각별하다는 말씀.
=3=3=3

urblue 2006-03-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10만원이 든 봉투를 깜빡하는거랑 '타락'이랑 무슨 관계여요?

진주 2006-03-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십만원 주으러 가려고 했더만..차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Mephistopheles 2006-03-0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주차장에서 220만원 수표 줏은 적 있었어요..제돈은 아니지만요..주인찾아줬죠..^^

瑚璉 2006-03-0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저는 청소를 해도 피전 한 닢 못 건지는 걸까요?

숨은아이 2006-03-0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댁도 방구석에 입다 만 옷이랑 가방이랑 무더기로 쌓여 있구나. 아이 반가워라. 하하. (전 그렇게 다른 옷이랑 가방은 방구석에 쌓아놓고 맨날 똑같은 옷이랑 가방만 입고 들고 다닌답니다.) 10만원은 참으로 알차게 쓰셨는데요?

로드무비 2006-03-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do님, 없었던 돈 생긴 걸 모두 후원금으로 보내지 못하는 거나
갖고 싶었던 10만 원짜리 물건을 턱 사버리는 정도의 호기가 없어서
사는 게 요 모양 요 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그럭저럭 만족은 합니다만......
(그런데 지대열공이 뭐죠?^^;)

숨은아이님, 어머 너무 반가워요. 저도......
저만 이러고 사는 건가 싶어 가슴이 답답했는데
동지가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그리고, 너무 알차게 쓴 게 불만입니다.
나의 쫀쫀함이 드러나서......^^

호리님, 피전이라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그런데 피전 한 닢 건지시려면 건망증이 좀 있어야 하는데
너무 총기가 많으신 것 아닙니까!^^


로드무비 2006-03-0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현금이었다면 좀 갈등하셨을라나?
저 같으면 그랬을 것 같은데요. 헤헤~
착한 일 하셨네요.^^

진주님, 우아한 분께서 어울리지 않게......
전 건망증이 부쩍 심해져서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할 것 같아요.
그럼 또, 이렇게 낄낄거리며 탕진하는 거죠.^^

블루님, 5만 원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래도록 하고 살았거든요.
그 생각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저 방만해진 것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mong님, 요즘은 페이퍼 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나는데
님의 음악 선물로 원기충전하고 있습니다.
줄줄이 올릴깝쇼?^^

비로그인 2006-03-0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기분 정말 끝내주죠.
근데 글을 읽다보니 전 로드무비님 댁이 혹 대궐같이 넓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ㅎㅎ

Mephistopheles 2006-03-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등안하고 인 마이 포켓 했을 껍니다...^^

로드무비 2006-03-0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갈등 안하고?
저도 어쩌면...ㅋㅋ

사야님, 대궐은 무신.....님이 사시는 집 생각하면 안되지요오.
좀 있다 페이퍼 하나 올릴게요.
정리한 방구석 사진과 좀전 찍은 주하 사진.^^

아영엄마 2006-03-03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 꼭 공돈 생긴 것 같은 흐뭇한 기분으로 홀라당~ 다 써버리셨군요. ^^

로드무비 2006-03-0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꼭 그게 공돈인 것 같더라니까요.^^

비로그인 2006-03-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보랑께요!! 이 뻬빠 좀 보시랑께요!! 제가 말임돠! 컴터 하드가 나가버려 거금 십만원이 개작살나게 생겼다고 엊저녁부터 울부짖고 있었다구요!! 안방 장판을 다 까보구 댕겼어요, 제가..혹시나 눈 먼 천원짜리라도 장판밑에 달라붙어 있나, 하구..
캬..생굴밥에, 책주문에, 후원금에..때깔나게 쓰셨습니다!! ^^b

어룸 2006-03-0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엣!! 진짜 그게 뭐 '탕진'이예요!! >ㅁ< 그렇게 알차고 쓸모있게말고요 좀 제대로 '흥청망청'해주셔야 읽는사람도 보람(?)이....ㅋㅋㅋ

날개 2006-03-0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 1일날 님도 대청소를 하셨군요.. 저도 방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근데, 전 왜 침대밑에서 100원짜리 하나 못 주은걸까요...ㅠ.ㅠ

로드무비 2006-03-0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대청소는 아니고 중청소쯤 될까요?ㅎㅎ
그러게 평소 경제관념이 좀 희박한 사람이 공돈을 얻는다고...^^

투풀님, 전 왜 이르케 착실한 인간일까요?
저도 제가 지겨워 죽겠습니다.=3=3=3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지송!^^

복돌이님, 아이참, 5만 원은 남겨놓고 쓰는 건데!
안방 장판을 다 까보고 댕기셨다니 저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어디서 눈먼 돈 한 뭉치가 복돌이님께 떨어지길 빕니다요.^^

반딧불,, 2006-03-0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노숙잔데(3===3333333)

kleinsusun 2006-03-0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드무비님, 노숙자 쉼터에 20%를 보내셨군요. 선물같이 찾아온 비상금을...
복 받으실꺼예요.^^

로드무비 2006-03-0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20프로라는 개념 없이, 기분이 좋아서.ㅎㅎ
공돈도 전부 쾌척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요?
20프로의 축복이라도...헤헤.^^

반딧불님, 집 나오셨어요?ㅎㅎ
며칠 재워드릴까요오?^^


하루(春) 2006-03-0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탕진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돈이 길에서 주은 거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네요. ^^

로드무비 2006-03-04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전 탕진이라고 생각했는데
페이퍼로 쓰고봤더니 탕진이 아니더군요.^^

인터라겐 2006-03-0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꽁으로 (?)생긴돈은 언능 탕진해야 제맛입니다.. 아 지도 한번 집안을 발칵 뒤집으면 눈 먼 돈이 나올까요? 지금부터 뒤지러 갑니다

로드무비 2006-03-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뭐가 좀 나왔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