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판사에 다닐 때 사장님의 친구분 대학원 졸업논문을 급히 며칠 만에 만들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안기부 직원이었다.
2,3일 만에 만들라고 직원들을 족친 것이 미안했는지, 논문이 마음에 들게 나왔는지,
그는 직원들 모두를  고급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었다.
그런데 밥과 술을 먹다 말고 갑자기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로드무비 씨는 학교 다닐 때 운동권이었죠? 냄새가 나는데!"

"아닌데요?"(진짜 아니었다.)

"에잇,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에 딱 써 있구만."

화장을 하는 둥 마는 둥 화사하지 못한 얼굴과 허름한 차림에 밥을 많이 먹고
술을 주는 대로 받아마시면  '운동권'으로 오인받던 시절이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입으시던 누르끼리한 나일론 점퍼(옷장에서 발견하는 순간 너무 좋아서
서울에 가지고 와 가끔 꺼내 입었다. 특히 기분이 몹시 안 좋은 날.  그러니 오죽했겠는가!)에
무릎 툭 튀어나온 청바지 차림이었다.
거기다  그때만 해도 눈이 얼마나 초롱초롱했는지 그런 말을 들을 법도 했다.


                  2.

오래 전 우리 사무실의 고문 격인 중견 여성 소설가와 계열사인 k일보 문화부 기자랑 일이 있어
k대학을 방문했다.
국문과 교수 c에게 볼일이 있었던 것.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기자를 무지 싫어했다는 것.
우리 사무실에만 들어오면 제 집에 온 것마냥 '아이스 티'를 한잔 부탁한다고 말하며 윙크를 하는데
그 모습이 밥맛이었던  것이다.  내 또래이기도 했고.
그런데 c교수가 우리가 들어서니 일어나서 반갑게 맞아주고는 금방 나온 자신의 평론집을
소설가와 기자에게만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조금 무안했지만 딴청을 부리고  앉아 있었다. 속으로 애꿎은 점퍼 차림을 탓하며......

그런데 그 기자 유들유들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교수님, 이 숙녀분께는 안 주십니까?"

그러자 그 평론가 겸 교수, 허허허 웃으며 몇 년 전에 나온 자신의 시집을 한 권 빼내어 내게 준다.

"책이 마침 몇 권 없어서 말이오. 시 좋아하실 것 같은데?"

사무실에 돌아와 그 시집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얼마 전 소문으로만 듣던 아주  멋진 책을 한 권 선물받았는데 그 책의 역자가 c교수였다.
책을 내게 선물하신 분은 그가 누군지 아시리라.ㅎㅎ)

며칠 후 마포구 용강동에 있는 모 출판사에 일이 있어 갔을 때 나는 시집을 사서
편집부의 두 시인에게서 사인을 받았다.
한 시인은 내가 열광하는 시인이었고 한 시인은 사실 그때만 해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의 경험이 나를 사려깊게(!) 한 것이다.

'마음에 없는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지만 별것 아닌 것으로 사람을 무안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그날의 깨달음이었다.
마음 상하는 일에서 소중한 경험을 얻었으니 지금은 도리어 c교수도 고맙게 생각한다. (
이 연륜이라니!)
그런데 이상한 건 그가 무슨 대단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마음이 따라가질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 눈으로만 하는 독서!
그는 그날 치사하게 평론집 한 권 아끼려다가 정말 소중한 독자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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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2-0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만 해도 눈이 얼마나 초롱초롱했는지...와 이 연륜이라니!
만 눈에 들어와요~~~
아싸 로드무비님 만세!

로드무비 2005-12-0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이제 다 나으셨죠?
만세 부르는 걸 보니 그렇군요 뭘.^^

물만두 2005-12-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연륜이라니! 오오~

코마개 2005-12-09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많이 평가하죠. 저 같은 경우 목소리와 나이가 잘 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법률문제를 물어보러 전화해서는 "아가씨 말고 누구 없어요?"라는 식의 말을 종종 하죠. 그럼 전 "네. 없어요." , "저 그런거 모르는데요"그럼서 끊습니다. 내가 아쉽나, 지가 아쉽지.

urblue 2005-12-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독자를 잃은 그 C 교수는 누구일까~요? (이런 것만 궁금해해요. ㅎㅎ)

blowup 2005-12-0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로드무비 님의 이니셜 처리는 어찌나 감질난지.... 궁금하게 만들지나 말든지. 헹.

sudan 2005-12-0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기자와 로드무비 님과의 관계가 어찌 됐는지가 궁금해요.

로드무비 2005-12-09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dan님, ㅋㅋ 뭘 기대하시는 겁니까?
싫어하는 기자 앞에서 그런 대우 받은 것 때문에 더 존심 상했는디요.^^;;

namu님, 제 글의 모든 이니셜 등장 인물을 실명으로 전환하면
무지 재밌겠죠? (우리끼리는?!ㅎㅎ)
제가 워낙 사려깊은 인간이라 그 이상은!=3=3=3

블루님, 제 기분이 몹시 안 좋은 날 슬쩍 귀띔해 드릴게.ㅎㅎ
(복수하는 기분으로다가!)

물만두님, 저 센스 있죠?(점입가경!ㅎㅎ)



깍두기 2005-12-09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도 성깔 있으시네!(쓰레기통에...ㅎㅎㅎ)
저라도 그랬을 것 같지만!

oldhand 2005-12-0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어서는 초롱초롱이요, 세월이 흘러 연륜이로다. 로드무비님 멋져요. >_<

로드무비 2005-12-0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 부끄럽사와요.> _ <

깍두기님, 어머 모르셨어요?ㅎㅎ

비로그인 2005-12-0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이 글 읽고 나가서 계속 저도 어떤 여자가 생각났어요
뭐 같은 얘기는 아니지만 로드무비님 따라 이니셜로 올려볼까봐요..ㅎㅎ

이 글을 읽고 나니 더 로드무비님이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라죠.
안만나주시면 어느 날 한국에 갔을때 그 아파트 앞에 가서 죽치고 있어볼 생각이예요 무섭죠? 하하

플레져 2005-12-09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일단 악수!
모 시인이 제게 아주 잘난척 하면서 시집을 한 권 주더라구요.
그러기만 했으면 양반이죠. 제게 뭐 자기 타입이 아니라는 둥 어쩌구 저쩌구...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모 선배를 쫓아갔다 그런 봉변을 당한거라
전철역 화장실에 버리고 왔어요. 나쁜 시키...
추억속의 로드무비님, 잘 만나고 갑니다 ^^ (여전하시지만...=3)

라주미힌 2005-12-0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 제 위치로 제대로 갔네요... ^^

숨은아이 2005-12-0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친필 사인까지 받아다가 황학동 시장에서 팔아먹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하는 사악한 숨은아이... =3=3=3)

히나 2005-12-09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왠지 '시를 좋아하실 거 같은데요' 도 별로 좋은 소리처럼 안 들리네요.
그런 식으로 이상한 소리를 저도 좀 들은 터라.. ㅜㅜ
암튼 저도 그런 의미없는 친절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인간입니다.
어떤 시인 교수님은 찾아갈 때마다 (두어 번 정도였지만) 자신에게 날라온
시집이나 시 월간지 등을 주곤 해서 감격했지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 걸 보낸 사람은 기분나빠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아아.. 이니셜 처리하신 분들 너무 궁금.. 기분 나쁜 날 살짜쿵 좀 알려주셔요

날개 2005-12-0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무지 공감하고 갑니다..(뭐에? ^^)

rainy 2005-12-10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연륜은 사려깊고 당당해서 저도 좋은 기운을 얻게 되요..
저는 마음이 가난한 날은.. 행색이 초라하면 어디 나가고 싶지도 않아져요..
그래서 매일 집에만 있나? ㅋㅋㅋ 멋진 페이퍼에 김빠지는 댓글..

산사춘 2005-12-10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롱초롱 무비님이랑 플레져님, 역시~세요.

로드무비 2005-12-10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지금은 흐리멍텅 무비랍니다.

rainy님, 좋은 기운을 얻으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날개님이 공감하시는 부분이 뭔지 무지 궁금하네요.

따우님, 내가 홀딱 반한 기자 얘기 한번 쓸게요.

스노드롭님, 유아블루님과 함께 기록해 둘게요.^^

숨은아이님, 그 정도에 '사악하다'고 스스로를 표현하시다니!^^

라주미힌님, 그렇죠?ㅋㅋ

플레져님, 그 인간이 누군지 가르쳐주면 저도 가르쳐드릴 텐데...ㅎㅎ

사야님, 초롱초롱 때문에요?
지금은 흐리멍텅이라니까요.^^
(생각났다는 여자 이야기나 풀어주시구랴.)


비로그인 2005-12-10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자꾸 강조하시는 그 행색이 궁금해서요..ㅎㅎ
넵 씻고 먹고 치우고 나서 풀어볼게요..^^

야클 2005-12-10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없는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지만 별것 아닌 것으로 사람을 무안하게 할 필요는 없다.'
당근입니다. ^^

로드무비 2005-12-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오늘은 조금 한가하신 거예요?
댓글보다 그게 반갑네요.^^

사야님, 제가 댓글을 자꾸 놓쳐요. 이상하게......
강조하니까 이런 폐단이 또 생기는군요.^^

야클 2005-12-10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이번달엔 일요일까지 강행군해야 합니다. 지금도 야근중이에요. 그냥 무료할때(거의 10분 간격 -_-;;)마다 한번씩 들러요 ^^

로드무비 2005-12-1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우짭니까!
주말 쉬지 않고 일하면 주중에는 좀 쉴 수 있는 건지요?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데......

플라시보 2005-12-1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에 드는 글입니다. ^^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구요.

로드무비 2005-12-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