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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사랑 노래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평점 :
한 사나흘 깊은 몸살을 앓다 / 며칠 참았던 담배를 사러 /
뒷마당에 쓰러져 있던 자전거를 / 겨우 일으켜 세운다 //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데 / 웬 여인이 불쑥 나타나 /
양조간장 한 병을 사오란다 / 깻잎장아찌를 담아야 한다고
(이창기 詩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중에서)
'문학과 지성 시인선' 300호 특집으로 문학평론가 박혜경, 이광호가 201번부터 299번까지의
문지 시집 중 사랑 시들을 한 자리에 묶어 발췌했다.
한때 , 아니 꽤 오래 문지 시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 이벤트중이라기에 망설이지 않고
시집을 주문했다. 이벤트가 없었다면 나는 이 시집을 주문하지 않았을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나는 시집도 잘 사지 않고 '사랑 노래'를 '사랑 타령'으로
마음속에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으니......
1백여 편 수록된 시들을 살펴보면 '달콤한 사랑'(유진택), ' 저돌적인 사랑'(이정록), '자욱한 사랑'(김혜순),
쨍한 사랑 노래'(황동규), '8월의 사랑'(김행숙) 등 사랑을 수식하는 제목만 해도 가지가지다.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황동규 詩 '쨍한 사랑 노래' 중에서)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마음 없이 살고 싶다' 니, 시인은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읊고 있는 것일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사랑의 기쁨과 설렘과 환희보다는 사랑의 쓸쓸함과 상처,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회한을 노래하고 있다. 아주 낮은 음성으로 때로는 축축하게, 때로는 건조한 음성으로......
언젠가 내게도 / 뿌리 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 내 고통은 그곳에서 / 샘물처럼 올라온다
(조은 詩 '따뜻한 흙' 중에서)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 사랑은 바닥이 없다 //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 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 사랑은 그렇게 갔다.
(채호기 詩 '수련' 중에서)
그런가 하면 이렇게 뻔뻔스러운 어조로 사랑의 끝장을 노래하는 시인도 있다.
'서로 폐 끼치며 사는 거다, 이 화상아!'라는 구절로 오래 전 나를 잠시 까무러치게 했던
시인 함성호. 역시, 함성호 시인이다!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함성호 詩 '낙화유수' 중에서)
' 한때 너를 사랑했고 이렇게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며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나는 죄없다! '라는 뜻이다. 솔직히 나는 사랑의 이상과 껍데기를
붙잡고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냉정하지만 솔직한 이런 시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그리고 이렇게 매몰차게 말하지만 어디 그 마음이 그 뜻이겠는가!
최소한의 감상도 남기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 표명이겠지.
곱추 여자와 절름발이 남편이 서로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김중이라는 시인의
다소 충격적인 '사랑' 이란 시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시집을 통털어 내가 제일 재밌게 읽은 시는
맨 앞에 소개한 이창기 시인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이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이다.(리와인드)
한 사나흘 깊은 몸살을 앓다 / 며칠 참았던 담배를 사러 /
뒷마당에 쓰러져 있던 자전거를 / 일으켜 세운다 //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데 / 웬 여인이 불쑥 나타나 /
양조간장 한 병을 사오란다 / 깻잎장아찌를 담가야 한다고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등 쟁쟁한 시들도 많이 수록되었는데 이 시가 왜 특히 좋으냐고?
약한 불 위에서 자작하게 졸이는 그 짭조롬하고 물씬한 간장깻잎 장아찌 향기가 물씬 맡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이 확실하고, "이미 오래 전에 한 사내를 소화시킨 듯한 여인"이
왠지 남 같지 않고 아주 낯이 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