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열몇 명을 자신의 암자에서  손수 돌보고 계신 한 젊은 스님이 텔레비전에서 선물에 관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스님은  아이들 옷 사줄 때 한 벌을 사주더라도 고급으로 사 입힌다는 것이다. 싸구려는 절대  안 사 입힌다고. 그러면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하시는 말씀.

"자기 새끼 입힐 옷이라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입히겠어요?  아이들 입으라고 더러 옷 가져다주는 분들도 계신데 뜻은 고맙지만 쓰레기 뭉치와 다름없는 옷들을 보면 이런 걸 입으라고 갖다주나 싶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 옷 문제에 다소 민감하게 구는 스님의 태도가 의외였다기보다 이해가 되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입을 옷, 그 처지를 안쓰럽게 여겨 좀 신경써서 예쁘고 좋은 옷들로 정성껏 선물했다면 도를 닦는 스님께서 그렇게 얼굴 가득 노기를 비치지 않았으리라. 그 젊은 스님은 자기 자식 입다가 작고 낡아진, 어쩌면 '갈아입을 옷' 정도에만 의의를 둔 그런 옷들을 선심 쓰는 기분으로 갖다주는 사람들의 태도에 상처를 입으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말씀.

"부모 없이 사는 것도 불쌍한데 옷이라도 좋은 걸 입혀야지요!"

스님의 말씀에서 나는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물이 아니다.' 라는 오래 전 어떤 책에선가 읽은 이 구절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꽤나 부유하고 이름 난 소설가 한 분과 여럿이 어울려 친하게 지낼 때 함께 만나던 미혼 친구들의 태도에서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는 이미 가질만큼 가졌고 옷이든 음식이든 문화든 최고급으로 향유하고 있는데 그렇게 좋은 선물을 너도나도 갖다바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내가 꼭 가지고 싶었던 음반을 그 소설가 선생님에게 드리고 나에겐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한 장 내미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 시커먼 테이프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상급자, 혹은 스승 등 자신보다 몇 배나 부자인 사람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 때 자신의 형편에 맞게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수준에 맞춰 최고급으로 선물하느라 가랭이가 찢어진다.  그리고 자기보다 가난한 친구나 후배에게 하는 선물은 또 그의 수준에 맞는 실용적이고 허름한 것을 고른다. 아니,  먹고사느라 등이 휘는 가난한 친구에게 좀더 멋지고 좋은 선물을 하면 안되나?

사실 나도 이런 말 할 입장이 못된다. 선물은 별로 안했다 쳐도 재밌는 책이 나오면 먼저 읽고 그분께 제 1착으로 빌려드린 것이 열 권도 넘으니까.  "선생님, 이 책 무지 재밌던데 읽어보실래요?" 하면서......아마도 다른 친구보다 인정받고 싶고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겠지. 그리고 그것도 뭐 그리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열 권도 넘는 책을 한 권도 돌려받지 못하니까 나중엔 성질이 좀 나더라. 두세 번 이야기했는데도 워낙 그런 데 무심한 이어서 한 번 더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겠는거.

그래서 내가 한 짓은..... 그분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책을 두 권 훔쳤다. <노란 꼽추>와 <지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는 여인>. 

쥐새끼 같은 행동이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권의 책을 볼 때마다 내가 몹시 유능한 인간인 듯하여 세상 살아갈 자신이 생기고 묘한 쾌감이 인다.

(오늘 아침 스노드롭님 '도서관' 페이퍼 읽다가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들을 페이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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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하셨어요. 열 권 잃고 두 권 얻었으면 그래도 손해인데 그래도 유능한 인간이 된 듯한 자신을 얻으신다구요 ^^ 그럼 다행인데요. 저도 어디가서 책을 몇 권 쓰리쓸쩍? 근데 와제가 일착 댓글이네요 :)

oldhand 2005-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권 더 들고오시지 그러셨어요. 열권도 넘게 책을 먹었는데, 달랑 두권에 만족하시다니.. 역시 로드무비님은 마음씨가 고우셔. ^^

oldhand 2005-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댓글 달고 보니 어느새 검정개 님이 비슷한 댓글을 달아 주셨네요.

물만두 2005-06-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

로드무비 2005-06-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 두 권 챙기는데도 심장이 몹시 뛰고 다리가 후들거리더이다.^^
검정개님, 우리 집엔 절대 오지 마세요.ㅎㅎㅎ

hanicare 2005-06-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꼽추.정말 오랫만에 들어보네요.얇은 책이었죠.유별난 아빠꼽추가 나왔던 걸로 기억나요.저도 그 말을 들었고 공감해요. 자기에게 필요없는 것을 주는 건 진정한 선물은 아니라는 것.그리고 저는 부자에겐 선물 안 합니다.님이 말씀하신 선물의 빈익빈 부익부에 한 삽 더 보태기 싫거든요.^^제 원칙은 자기가 사기엔 사치스러운,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걸 선물하는 것이었지요.피천득옹이 예전에 쓰셨더라구요.광목 한 필보다는 와이셔츠가 와이셔츠보다는 넥타이가 선물에 더 가깝다고.
어제는 부자의 단점만 떠올랐는데 장점도 있군요. 허름하게 입고다니면 남들이 검소하다고 할 것이요 비싸게 걸치고 다니면 부러워하겠죠? 히히히.

로드무비 2005-06-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 시아일합운빈현님이 올린 책 사진.^^

hanicare 2005-06-2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 책. 제 기억대로 세계사였군요. 크기가 두께가 김화영이 번역한 그르니에의 섬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줄리 2005-06-2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예리하신 선물에 대한 분석글이라고 봅니다. 저두 그 예리한 날에 맞을 만한 짓을 했던것 같아요. 전 늘 선물 주고 받고 하는게 부담스러워요. 제대로된 선물보다 뭔가 사심이 있었던 선물을 사버릇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반성합니다.

로드무비 2005-06-2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케어님은 역시 멋지시네요.
저, 그러니 불우한 저에게 무슨 선물을 하나 하심이 어떨지요?ㅎㅎ

로드무비 2005-06-24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님, 빈부를 의식하며 산다는 거 자체가 사실 골아픈데...
그래도 이런 글 하나 쓰면서 선물의 의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죠?
하니케어님, 님은 아마 허름한 걸 걸쳐도 무지 비싼 브랜드로 보이지 않을까.
막연한 느낌!^^

조선인 2005-06-2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로는 끄덕이면서, 한편으로는 좀 의아. 난 마로에게 옷 물려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운데. 히히

2005-06-24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5-06-24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수입이 좋은 친구에게는 맨날 얻어먹는 저의 빈대정신이 조금 위로를 받습니다. 헤헤.

hanicare 2005-06-2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인간이란 참 복잡미묘하죠? 돈투성이 여자의 털투성이 밍크는 역겨운데 착한 자녀가 아껴 모아서 어머니 사드리는 밍크는 흐뭇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인에 박혀야 할 스님이 고아아이들이기 때문에 비싼 옷을 입히고 싶어하구.(하지만 그런 스님이 도리어 인간적이네요. 향유를 발에 발라준 여자를 보고 그 돈이면 뭐가 얼만데 하고 유다가 돈으로 환산해 비난하는 것에 대비, 예수님이 그 여자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는 것이 멋지듯이)

파란여우 2005-06-24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명 : 어니언스-사랑의 진실


히피드림~ 2005-06-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케하는 글이네요.
저두 로드무비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위에서 스님이 키우는 아이들에게 헌옷을 갖다준 사람들은 그렇게 누더기를 갖다 주고도 자신이 대단한 선행이라도 한듯 우쭐해 지겠죠. 자기에게 필요없는, 혹은 소용이 다한 물건들을 주면서도 생색내는 사람들... 그리고 읽은 책을 돌려주는 않는 소설가. 그저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을텐데.

히나 2005-06-2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물이 아니다..
로드무비님 페이퍼 읽고 양심이 찔립니다 저는 먹던 홍차나 안 입는 옷이나 재미 없는 책 따위를 주면서 있는대로 생색을 내는 타입이라.. ^^;
돈 없는 시절에 선물할 일 생기면 나도 좋아하고 그 친구도 좋아할 책을 사서 먼저 읽어보고 잠깐 소유의 기쁨을 맛본 다음 선물하는 치사한 짓도 많이 했죠.. ㅡ_ㅡ
암튼 로드무비님 같은 유능한 인간을 알고지내는 게 저도 몹시 자랑스럽습니다 부는 당연히 가난한 이와 나눠야죠.. ㅎㅎ

날개 2005-06-2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로는, 내게는 필요없지만 그 사람에겐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내게 필요가 없어 선물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상대방에게 필요하느냐를 따져서 선물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흑흑~ 제가 필요없어도 다른 사람에게 필요할것 같아 선물한거 많단 말예요~~ㅠ.ㅠ

클리오 2005-06-2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하셨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미 다들 하셨군요.. 선물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어요...

로드무비 2005-06-24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사랑과 진실 틀어놓고 답글 씁니다.
꿈속에서 만나던 아름다운 그녀가~~ 너무 좋네요.^^
클리오님, 문득 생각난 이야기 그냥 썼어요.
빈부 나누는 것도 좀 재미없긴 하지만 워낙 세상이 각박하니 말이죠.^^
날개님, 아이 참, 물론 내게는 크게 소용없는 것 다른 소용있는 이에게 주는 건
멋진 일이죠. 여기서 말하는 건 선물의 다른 의미라니까요.
(날개님, 앞으로도 그런 선물 많이많이 부탁해요!^^)
스노드롭님도 참, 님의 선물은 기분좋기만 하구만.
괜히 하시는 반성의 모션의 시추에이션이죠?
저와 같은 유능한 인간을 알고 지내시는 것도 알고보면 님의 안목인 거죠.ㅎㅎ
파란여우님, 고새 음원이 끊어졌습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2005-06-2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누더기에 진배없는 걸 대단한 선행을 하는 듯한 얼굴로 갖다주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무심함을 이길 천하장사는 세상에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하니케어님, 전 그 스님이 인간적으로 여겨져 되려 좋았어요.^^
숨은아이님, 저도 꿋꿋하게 그런 정신으로 삽니다.^^
속삭이신 님, 히히히, 당장 님 방으로 갈게요.^^
조선인님, 저도 아이 옷 많이 얻어입히고 또 입던 거 주기도 하는데요.
스님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자기 딸 시집 가면 고생할 텐데 미리 손에 물 묻힐 것 없다고 아끼는
엄마의 심정 같은 게 아닐까요?^^

로드무비 2005-06-2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이제보니 물만두님 댓글을 빠트렸다. 추천까지 해주셨는데......
만두님,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니 고맙기 한량없습니다.^^

2005-06-24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5-06-2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갖고 싶은 것이 없는건가 모르겠어요.
그까이껏 대충,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이것도 병인가 봐요. 로드무비님

내가없는 이 안 2005-06-25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댓글이 출렁거리며 넘치는 집에 댓글 보태는 것도 선물의 빈익빈 부익부 같다는. ^^ 그래도 마음이 동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호호.

로드무비 2005-06-2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호호 댓글 부자.
다행히 마음이 동하셨다니 기쁩니다.
댓글 많다고 그냥 가시는 분들 미워요.^^
니르바나님, 병 아닙니다.
그 세계가 제가 바라는 거랍니다.^^

조선인 2005-06-2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하니케어님과 로드무비님의 댓글이 예술입니다. ㅠ.ㅠ

얼룩말 2005-06-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식 부조같은 것도 그런 것 같아요. 부자 결혼식엔 오히려 부조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 결혼식엔 조금하구...그것 참^^;;;

balmas 2005-06-2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역시 로드무비님다운 페이퍼!
재미 있는 일화에 독특한 분석, 장난꾸러기 같은 행동까지!!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뻔뻔함 ... ㅋㅋㅋ
그러니 추천 하나 없을소냐!!!

로드무비 2005-06-27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역시 발마스님다운 댓글!
껄렁한 페이퍼 하나에도 저리 조목조목 칭찬해 주시다니!
그리고 절대 빠트리시지 않는 추천!!
고마워요, 발마스님.^^
얼룩말님, 맞아요. 부조할 때도 그렇죠?
하나하나 짚어보면 이 세상은 이상하지 않은 구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조선인님, 하니케어님과의 수다가 장난 아니었죠?ㅎㅎㅎ

마냐 2005-06-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뚱맞은 뒷북이지만...저거 아동학대 스캔들 휘말린 수경사 스토리 아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