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코를 빠트리며 일한 일감을 오늘아침 출근하는 남편 편에 부쳐야 하는데 깜빡했다. 알라딘 서재에만 안 들어왔어도 목요일까지 너끈히 마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금요일까지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담당 편집자가 사정사정하는 걸 하루에도 몇 번씩 서재에 들어와 노느라 어젯밤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알라딘 서재활동은 이렇게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할 수 없이 조금 전 퀵서비스 아저씨를 불렀다. 내 사는 동네에서 서울 신당동까지 2만 5천 원. 이것도 아주 싼 가격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아무래도 노느니 소일삼아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퀵서비스를 하시는 분같다. 나는 보통 일감을 출근하는 남편 편에 보내어 퀵으로 보내고, 남편이 일터에서 전해 받은 일감을 퇴근과 동시에 전해 받는다. 그런데 어쩌다 남편 출근시간까지 일을 못 마치면 퀵서비스 편으로라도 보낼 수밖에 없다. 비싼 요금을 치르고서라도.

그런데 이 아저씨 정말 퀵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이 맞는 건지......나는 최근 약속시간을 못 지키는 이상한 병에 걸려버렸다. 그러니 거짓말(?)을 밥먹듯 하게 되고 언제나 약속시간에 쫓겨 쩔쩔매는 편이다. 심지어는 퀵서비스 아저씨를 불러놓고는 소파에 잠시 앉아 기다려 달라 하고 30분 가까이나 남은 일을 해치울 때도 있다. 정신없이 일하는 와중에 "아저씨 커피 한잔 드릴까요?" 하면 이 아저씨 마다하는 법이 없다. 보면서 기다리시라고 신문을 갖다드렸더니 "한겨레신문 보시네!" 하면서 좋아하는 기색에서 그의 성향을 약간 짐작하고 반가웠전 적도 있다. 또 알고봤더니 그는 내 고향(부산) 까마귀였다. 나이도 엇비슷, 얼굴도 호탕, 그러다 보니약간 마음이 설레이려고까지. (퀵서비스 아저씨랑 이렇게 느긋하게 우정 비슷한 걸 나누는 분 또 계신가요?)

오늘 아침은 마음이 두 갈래였다.

(1)퀵 요금이면 책 두 권 내걸고 이벤트도 벌일 수 있는데......

(2) 일이 없어 몇 달 못 봤는데 퀵 아저씨 잘 지내시는가?

새해들어 처음 받은 일이니 퀵 요금 아까워하지 말고 일감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금 전 아저씨는 내 전화를 받고 아주 반가워하며 득달같이 달려오셨다. 그리고 벨을 두 번 눌렀다. 아아, 저 소탈한 웃음이라니!

그런데 아저씨에게 일감을 주어 보내고 문을 닫으면서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세수도 양치질도 하지 않았다. 사흘째 감지 않은 떡진 머리의 흉악한 몰골이라니! 그리하여 나는 비호같이 컴퓨터 앞으로 달려와 이 페이퍼를 쓴다. 무슨 경사가 났다고, 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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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5-01-1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설레일려고까지..흐미 부럽슴돠..그아저씨 여기까지 와주시나요??
일거리를 만들어볼까요??
그런데 세수도 양치도 머리 안감은것도 그 아저씨는 모르실걸요^^ 걱정마세요..

비로그인 2005-01-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시카 무비님, ㅎㅎ^^재미난 글 덕분에 기분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생활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이런 소소한 우정들은
지친 얼굴에도 미소를 반짝반짝 심어주네요^^

바람구두 2005-01-1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야한...

nemuko 2005-01-1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이 늘 로드무비님 손에서는 이렇게 재미난 글들로 변신하게 되는군요. 오늘도 님 덕분에 푸하하 웃고 갑니다^^

물만두 2005-01-1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퀵스비스를 이해를 못했답니다. 그거랑 택배가 같은 줄 알았는데 장난 아니게 비싸네요 ㅠ.ㅠ

진주 2005-01-1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인연이네요!
그리고, 퀵서비스 아자찌는 두 번 울리는군요..택배 아자찌는 한 번 울리던데 핫하 ^^*

잉크냄새 2005-01-1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글이라면 어둠속에서 벨이 울린답니다.

kleinsusun 2005-01-1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하.넘 웃겨요.
바쁜 와중에 "커피 한잔 드릴까요?" 푸하하.
지난번 조기축구 사건 때(실종 사건) 남편을 찾으러 나가면서도 마실 커피 타고,
꼬마 만두 사진 찍었다는 글 읽고도 많이 웃었거든요.
로드무비님은 에세이집을 하나 내셔도 좋을 것 같아요.넘 재미있어요!!!

로드무비 2005-01-17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저도 언젠가 에세이집 한 권쯤 내게 될까요?ㅎㅎ
(전 사실 이런 시시껄렁한 글 쓸 때가 제일 즐거워요.)
제 글 읽고 수선님이 웃으셨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잉크냄새님, 어둠 속에 벨~ 어쩌고 하시니 시드니 포에티에가 생각 나잖아요.^^
박찬미님, 전 택배 아저씨들과도 친해요.(언젠가 글 하나 써서 올릴까요?^^)

로드무비 2005-01-1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다른 데는 3만 5천원을 부르더군요.
운좋게 이 아저씨와 인연이 닿았답니다.(퀵 요금 좀 비싸죠?)
네무코님, 아침부터 저 때문에 푸하하 웃으셨다니 행복합니다.
마치 착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바람구두님, 야하다니, 도대체 무신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난니님, 제시카 무비라니 너무 근사하네요.
앞으로도 꼭 그렇게 불러주세요.^^
(소소한 일들에서 미소를 짓게 되죠.)
수니나라님, 전화번호 알려드릴까요? ㅎㅎ
오늘은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답니다.
그나저나 몰골이 정말 최악이었어요.ㅠ.ㅠ

숨은아이 2005-01-1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만만 퀵 아저씨! *.* 멋져요. 서울 퀵서비스 아저씨들은 살벌하던데... 미처 포장 못해놔서 잠시만 기다리라 하면 안절부절못하며 서성대고... 수익은 떨어지고 고객들은 "빨리빨리"만 외치니까 그렇겠지만요.

날개 2005-01-17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이집 내라는 말에 적극 찬성입니다.. 꼭 사볼께요.. 호호~^^

깍두기 2005-01-1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인가 친정아버지가 심심하시다고 실버퀵을 하신 적 있는데(실버퀵은 전철, 버스로만 왔다갔다 해요) 아마 우리 아버지도 이렇게 멋진 퀵서비스 할아버지 였을 듯.(기다려도 주시고 한겨레신문도 보시고 ㅎㅎ)

urblue 2005-01-1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니면 절대 쓸 수 없는 글. ㅎㅎ 너무 재미있다니까요.

조선인 2005-01-1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나는 비호같이 컴퓨터 앞으로 달려와 이 페이퍼를 쓴다. 무슨 경사가 났다고, 내 참!"
->서재폐인다운 자세입니다. 추천 한 방!

로드무비 2005-01-17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퀵 요금이 무지 올랐다네요.
가까운 거리도 7, 8천원이라니, 택배가 최고예요.^^
따우님, 사실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습니까!
퀵을 불러놓고 그제야 일을 하고 앉았다니!ㅋㅋ
그러고보니 한번도 세수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네요.^^;;;
조선인님, 저 서재 폐인 벗어나려고 얼마전 몸부림쳐봤거든요.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닷새 만에 항복!^^
블루님, 제가 아니면 누가 퀵아저씨 30분씩 붙잡아놓고 일을 하겠습니까!
참 한심한데 그래도 조금 귀엽죠?ㅎㅎ
깍두기님, 실버퀵 참 좋아보이던데요.
아버지께서는 건강 회복하셨습니까?
(그런데 제가 언제 퀵아저씨가 할아버지라고 했나요? 흥=3)

로드무비 2005-01-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님의 응원에 힘입어 언젠가 꼭 에세이집 한 권 내볼게요. 불끈=3
숨은아이님, 그렇죠? 서울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죠?
어리숙한 퀵아저씨와 뻔뻔한 고객이 참 잘 만났습니다.^^

하얀마녀 2005-01-1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만 생기면, 무슨 생각만 떠오르면 서재에 올리고야 마는 이 기쁨... ^^

로드무비 2005-01-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 님도 그 기쁨과 보람을 아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