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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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대를 살다 보면 위인의 등장을 기대한다. 새로운 기운을 불러올 존재,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열어줄 거라 믿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우상이 탄생하는 배경이라고 할까. 그러나 대중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한순간 매몰차게 돌아서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알도 팔라체스키의 『연기 인간』를 통해 대중의 심리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확인한다.


제목인 『연기 인간』에서 무엇을 상상하는가? 나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상징적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소설엔 진짜 연기 인간이 등장한다. 33년 동안 굴뚝에 있다가 세 명의 노파가 불을 피우면서 생겨난 존재다. 세 명의 할머니 페나(고통), 레테(그물), 라마(창)의 이름을 따서 ‘페레라’라 불린다. 세상의 모든 관심은 그에게 향한다. 온몸이 연기로 이루어진 인간,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솔직한 그와 대화를 원하고 왕의 초대를 받기에 이르고 법전 집필이라는 임무까지 맡긴다.


“나는…… 나는…… 아주 가벼워요. 나는 아주 가벼운 사람입니다.” (11쪽)


왕과 만나기 전 그를 찾아온 이들은 그들 칭송하기에 바쁘다. 시인, 화가, 박사, 사진가, 대주교와 대화를 나누는 연기 인간은 자신은 연기로 되어 있는 가벼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대화체로 이뤄진 독특한 형식을 지닌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무대에 오른 연기 인간과 그를 보려고 모여든 관객들, 그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그를 숭배하는 격이다. 굴뚝에서 그를 꺼낸 세 노파만이 아는 게 아닐까.


유명 인사와의 만남에 이어 귀부인들의 다과회에서 그는 사랑, 시기, 열정,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귀부인 각자가 어떤 삶에 대한 고해성사 같은 것이다. 대중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정의하고 기뻐한다. 연기 인간과 나누는 대화는 철학적이고 분위기는 신비롭다. 이런 대화를 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나쁜 순간에 죽습니까, 아니면 죽음이 인생의 가장 나쁜 순간입니까?” (145쪽)


소설 속에는 이처럼 존재, 죽음, 사랑, 자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등장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 하나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며, 삶이라는 형태가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연기 인간을 따르는 군중의 모습은 마치 예수를 떠올리기에 충분한다. 그가 굴뚝에서 보낸 시간이 33년이라는 걸 기억하자.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그를 부정했던 것처럼 사람들도 페럴라를 부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궁정의 하인장인 ‘알로로’가 페럴라처럼 되려고 불을 질러 죽은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페럴라 때문이라고 믿는 딸의 울부짖음에 시민들은 동요한다. 페럴라를 숭배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를 비난하고 매도하기에 바쁘다.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여 죄를 벌하라 말한다. 그들은 페럴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환호하던 이들이다. 재판에서 그들은 페럴라가 협잡꾼, 경멸스러운, 추악하고, 무능한, 무덤에서 꺼낸 시체라고 증언한다. 페럴라의 변호는 단호하다.


“나는 가볍습니다.” (253쪽)


흥미로운 소재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1911년에 출간된 이 실험적인 소설은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를 완벽하게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대중심리와 잘못된 집단지성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모르는 사이 새로운 연기 인간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닐는지 경각심을 일깨운다. 시대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등장하는 가짜 신과 그를 맹목적으로 따른 대중의 모습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지 않은가.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우리가 놓치는 건 그 모든 게 연기처럼 가벼운 존재로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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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5-13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연기라니.. 반전인데요 ㅋㅋㅋ 당연히 상징일 줄 알았습니다.

자목련 2023-05-15 09:40   좋아요 1 | URL
저도 읽기 전에는 상징이구나 싶었어요. 근데 연기 인간, 여전히 상상은 잘...

책읽는나무 2023-05-13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연기가 그 연기가 아녔어요?ㅋㅋㅋ

자목련 2023-05-15 09:41   좋아요 1 | URL
연기에 대한 저마다의 상상과 해석!

서니데이 2023-05-1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100년 전에 쓴 책이지만, 아주 오래전 이야기 같은 느낌이예요.
세 노파가 불을 질러서 생겨났지만, 그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라는 설정처럼요.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05-17 09:30   좋아요 1 | URL
왕, 귀족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예수를 따올리게 한 설정도 그렇고요.
서니데이 님, 즐거운 수요일 보내세요^^
 

작약을 좋아한다. 원하는 게 아니라 좋아한다. 어제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걸 구분해야 한다는 출연자의 말을 들었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심리학자의 설명은 꽤 친절했다. 모두가 갖고 있어서 나도 가져야 하는 것, 그것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이라며 딸과 놀이공원에서의 일화를 들려줬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착각할 때가 많구나 싶었다. 원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게 있어야 삶이 풍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약과 책을 좋아하는 나는 풍요롭고 충만한다. 4월의 작약은 5월의 지금까지 나를 행복하게 만드니까. 꽃은 이미 다 졌지만 떨어진 작약 꽃잎은 따로 모아두었고 그것을 보는 시간이 나는 좋다. 좋아하는 것, 그게 무엇이든,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 나를 지탱한다.









올해 작약은 빨리 피고 빨리 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가장 먼저 핀 한 송이부터 꽃잎이 떨어지는데 그 순간 나는 어쩔줄 몰랐다. 속상한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씩 떨어지며 쌓이는 꽃잎을 보면서 언제 또 이런 모습을 지켜볼까 싶었다. 붉은 자주빛 작약 꽃잎이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기분이랄까. 어떤 의미에서 올해의 작약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작약에 이어 좋아하는 책이다. 좋아하는 작가 권여선의 단편집 『각각의 계절』이 나왔다. 양장본으로 묵직하고 단단하게 느껴진다. 단편집이다. 5월의 빛과 색이 담긴 모양새라고 할까. 권여선의 유려하고 촘촘한 문장으로 보여줄 삶의 단면을 기대한다.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는 중고가 있어서 우선은 샀다. 나의 우선이라는 말에는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있다. 좋다는 말도 있고 별로라는 말도 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 신형철의 글에 끌리지 않지만 시라서 샀다. 책장에서 잠들게 될지,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책은 예쁘다.





어쩌면 신형철의 책은 많이 언급되어서 한 번 읽어볼까 싶었는지도 모른다. 굳이 따지자면 원하는 것(타인의 시선)이 궁금했고 권여선의 단편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권여선의 단편에 대해 혹평이 있다고 해도 나는 읽을 것이다. 나는 권여선의 소설을 좋아하니까. 그 좋아함이 영원할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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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11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권여선을 좋아하네요. 장바구니 무조건 넣었으니까 그런거죠?
작약도 좋아해요~~
늦게 심은 작약이 이제 꽃을 피웠거든요~~
흠... 신형철의 책은 제 예상보단 그냥 소소~~했어요^^

자목련 2023-05-12 09:57   좋아요 2 | URL
무조건 넣고 구매하고, 즐겁게 읽고~
직접 심은 작약이라니요. 그 빛은 얼마나 고울까요!
신형철의 책에 대한 의견 참고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책먼지 2023-05-11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하라는 이야기에는 익숙했는데 (물건을 살 때 필요한 것만 사라는 맥락에서요)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도 구분할 필요가 있군요!! 하지만 저는 자목련님의 글을 원하고 좋아하는데.. (이러면 구분할 줄 모르는 거죠?) 강렬한 색 때문인지 작약이 고혹적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자목련님 글을 읽고 나니 책을 고를 때 제 마음은 어떤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어요!!!

자목련 2023-05-12 10:01   좋아요 0 | URL
필요목록은 중요합니다. 충동구매를 자제시켜주기도 하고요. 제 글을원하고 좋아하신다니, 이런 황홀한 댓글, 심장이 두근두근합니다. 저도 이 색의 작약은 처음인데 묘한 분위기가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책먼지 님은 제가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어주셔서 참 감사해요(슬쩍 전하는 마음,ㅎㅎ) 향기로운 하루 보내세요^^

공쟝쟝 2023-05-11 10: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글 곰곰 읽어보니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건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세세하게 구분해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들었어요. 그 구분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글쓰기가 필요하고 그런 종족에 바로 제가 위치해있다는 것도 읽고 쓰면서 알게 되었네요.(읽을 수록 눈이 눈만 높아져서 큰일예여ㅋㅋㅋㅋ 요즘 저의 고민)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해야할 것만 같은 상황에 놓일 때가 있어요. 약간은 희미한 자아감에 평소 생각이 많고 복잡해서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은 건 나에게도 좋다고 하면서 미끄러지듯 따라가곤 했던 것 같아요. 결국은 거기까지도 세세하게. 타인의 시선을 취하면서 나의 시선을 심문하는 것. 나에게 영향력을 지녔던 말들을 검토하면서 내 말을 내 몸에 새기는 글을 쓰는 것. (제가 어려워 보이는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랍니다..ㅋㅋ 사실은 간단한데 그렇게 살기가 어려운 부분이랄까 긁적긁적.)

그나 저나 봄날의 작약은 저도 좋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도 피어나는 것도 너무 극적인 식물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권여선은 저도 좋아합니다. 역시 좋아하는 걸 함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은 네배! 싫어하는 걸 함께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은 여덟배 ㅋㅋㅋ!!

2023-05-12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3-05-11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약은, 비싼 꽃, 큰 꽃....저는 딱 소비자 입장에서만 작약을 봐왔나봐요. 자목련님 닉넴과도 친한 걸 같은 작약을 대상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다니^^

작약도 아름다운데 풍요로우시다니 그걸로 이미 OK^^

그런데, 작약 꽃이 커서, 꽃잎 떨어져도 클 줄 알았는데 떨어진 꽃잎은 분쇄기에 넣은 것 같은 모양새네요...그럼 그건 *술,*술 요 부분일까요?^^ 꽃알못이라 귀찮게 해드립니다 ㅎ

레삭매냐 2023-05-11 11:26   좋아요 1 | URL
저도 작약 사볼라고 했는데
말씀하신 대로 비싸더라구요 -

특히나 코랄 작약, 멋진 만큼
가격도. 그래서 치자나무로
퉁~쳤답니다.

자목련 2023-05-12 10:11   좋아요 1 | URL
일반 화원이나 꽃가게에서 작약을 구매한 적이 없어서 가격을 잘 모르겠어요. 온라인 생화 주문을 하는데 저는 만족하거든요. 말씀하신 부분은 수술이 많은 것 같아요. 좋아하는데 잘 모르네요. ㅎ

레삭매냐 2023-05-11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에도 작약이 흐드러
지게 피었더라구요 :>

나중에 씨가 나면 받아 보려고
했는데, 구근이라고 하대요.

권여선 작가의 책은 저도 어제
주문해서 오늘 도착할 예정이
라고 하더군요.

자목련 2023-05-12 10:1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작약은 튤립처럼 구근이라 한 번 심으면 매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비싸다고 말씀하신 건 화분일까요?
치자나무 들이셨군요, 기대됩니다.

권여선의 단편집은 도착헸겠네요. 실물이 더 예쁘죠?
즐겁게 읽는 일만 남았네요, 매냐 님도 저도^^

망고 2023-05-11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권여선 작가 좋아해요ㅎㅎㅎ아껴 읽으려고 그래서 사놓고 아직 들춰보지도 않았어요ㅋㅋㅋㅋㅋ책 안 읽고 있는 핑계가 거창하죠?ㅋㅋㅋ작약도 좋아해요 오늘 저희집에도 한송이 폈어요^^커다란 얼굴이 방글방글 웃고 있는거 같아서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져요😄

자목련 2023-05-12 10:14   좋아요 1 | URL
아껴 읽는 마음, 저도 알아요!
망고 님 마당에 핀 작약은 얼마나 고울까요. 환하게 웃는 작약 보여주실꺼죠?

물감 2023-05-1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여선은 <레몬>,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 이렇게 한 권씩만 읽었는데 사실 좋다고는 느끼지 못했어요. 다른 작품을 읽었어야 했나봐요. 원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싶었는데 <인생의 역사>를 읽고보니 저랑 안맞는 작가더라고요.. ㅎㅎ

자목련 2023-05-12 10:18   좋아요 1 | URL
물감 님이 읽으신 <레몬>은 기존의 권여선의 느낌과는 달랐어요. 단편집을 강력 추천합니다. 도서관에서 한 번 보시고 결정하셔도 좋을 듯해요. <인생의 역사>만나셨군요. 안맞는(?) 작가, 기억하고 참고하겠습니다. ㅎ

책읽는나무 2023-05-12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약 참 좋아합니다^^
저도 원해서 몇 년 전부터 봄에 작약을 한 송이 정도 샀었는데 넘 비싸고 귀해서 아예 작약 꽃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림 속 작약은 지지 않으나, 생동감이 없더군요.
그래서 작년부터 다시 작약 꽃을!! ㅋㅋ
코랄 작약은 아찔하더군요. 사가지고 들고 온 순간부터 꽃이 피고 있었던지 꽃병에 꽂자마자 화알짝! 하루 사이에 색이 옅어지고 또 자고 나면 꽃잎이 떨어지고...ㅜ
꽃잎이 떨어질 때 어쩔 줄 모르는 안타까운 자목련 님의 모습이 저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지는 게 안타까워 올 해는 작약을 세 번이나 사서 감상 중입니다ㅋㅋㅋ
작약 꽃 처음 산 녀석들은 꽃이 안 피고 시들기도 했구요. 며칠 전에 산 녀석들은 이제 피려고 합니다. 코랄 작약은 삼 일만에...ㅜㅜ
동네에 좀 저렴하게 판매하는 무인 꽃가게 덕분에 늘 눈이 호강하고 있어요.
권여선 작가님 신간 내셨군요?
저는 책 제목도 <작약의 계절>로 읽었네요ㅋㅋㅋ
신형철 작가님 책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만 읽었는데 넘 좋았어요. 그래서 <인생의 역사>도 읽어보려 생각 중인데 반응들이 호불호가 있군요?

자목련 2023-05-12 10:39   좋아요 1 | URL
작약을 좋아하는 우리가 되어 좋습니다!
작약을 세 번이나, 매년 의식처럼 한 번만 구매하는 저는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수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ㅋ (수채화로 수국을 그리면 좋을 거 같아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요)
무인 꽃가게가 있다면 꽃을 보는 재미를 맘껏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하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좋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인생의 역사>를 읽은 지인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좋았다고 해서 우선은 곁에 두었는데 언제 읽게 될지 모르겠어요.

blanca 2023-05-2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약 정말 이쁜 붉음이네요. 권여선 작가 단편집 다 읽으셨나요? 저 가슴이 찡 울렸어요. <분홍 리본~>도 찾아 읽어보고 싶었어요. 제가 말로 정리하지 못했던 청춘, 젊음을 권여선 작가의 언어로 다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자목련 2023-05-23 10:45   좋아요 0 | URL
올해는 평소와 다른 색을 주문했는데 참 예뻤어요. 내년에는 코랄 작약을 주문할까 싶어요.
권여선의 단편집은 아껴서 읽고 있어요. <분홍 리본의 시절> 강렬했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쓴 리뷰를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ㅎ

하리 2023-06-07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약을 합천 핫들공원에서 보고나서 반했어요 어마어마한 작약밭이었거든요 꽃은 언제든 기분좋게 해요. 저도 이번에 권여선작가님 책을 다 읽었습니다. 공감가지 못하는 단편도 있었지만 역시 좋았습니다. 플래그 덕지덕지라 필사하고 있어요🤭

자목련 2023-06-08 09:41   좋아요 1 | URL
공원에 작약밭이라니. 정말 근사할 것 같아요. 기분 좋은 꽃과 소설, 참 좋은 조합입니다. 권여선 단편집도 넘 좋고요^^
 
모든 열정이 다하고 쏜살 문고
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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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들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할 때, 자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 생과 사의 순간을 경험할 때가 그렇다. 그러나 곧 잊고 만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주어진 일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울며 살아간다.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다 또 드는 생각, 사는 게 별거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 사는가?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휩쓸리듯 사는 게 맞나 싶은 거다. 버지니아 울프와 20세기 영국 문단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는 비타 색빌웨스트(근데 나는 왜 처음 듣는 작가인가)의 『모든 열정이 다하고』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남은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설을 읽는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 레이디 슬레인은 노년이지 않냐고, 아흔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자식들의 편에 설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남편이 죽고 아들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다른 지역에서 혼자 지내는 할머니 이야기다. 영국 총리까지 지낸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고 레이디 슬레인은 여섯 명의 자식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싱글은 케이와 이디스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어머니의 부양과 유산을 셈하며 서로 충돌하다.


레이디 슬레인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30년 전에 본 집과 중개인 이름까지 기억한다며 그 집으로 향한다. 원하던 집을 계약하고 하녀 제누와 단둘이 살기로 한다. 자식들의 방문도 최대한 금지했다. 거대한 저택과 자식들의 돌봄도 거부하는 할머니라니. 이상한 할머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주변을 의식하고 살아가니까. 총리의 아내였던 레이디 슬레인이라면 그 가족들에겐 얼마나 많은 시선이 따라오겠는가.


이제 레이디 슬레인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헌신적인 아내로 여섯 자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증손자까지 둔 그녀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남편인 헨리 홀랜드는 좋은 사람이었다. 부모님도 그와 결혼을 원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인도, 중국 등 여러 곳을 다니며 만찬과 파티를 열고 사람들을 만났다. 남편이 사랑의 증표로 끼워주는 반지를 주렁주렁 달고서. 하지만 이제 아니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과 같이 사는 일도 총리의 부인으로 사는 일도 원하지 않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말이 통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살고 싶었다.


집은 자기만의 생을 지니고 있다. 마치 어디선가 불어온 화합의 숨결이 네모난 벽돌 상자 안으로 흘러들어, 감옥 같은 벽을 무너뜨리고 온 세상에 그 내부를 내보일 때까지 머무는 듯했다. 집이란 아주 사적인 것이었다. (66쪽)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숨겨진 탐욕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들을 떠나 런던이 아닌 나만의 집에서 레이디 슬레인이 아닌 ‘데버라’로 살기로 한다. 집주인 ‘벅트라우트’ 씨와 수리를 맡아준 ‘고셔론’ 씨의 방문 만으로 충분했다. 그들과 나누는 작은 대화, 농담은 편안했다. 언제나 자신과 모든 걸 같이하고 걱정하는 든든한 ‘제누’도 함께. 가만히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는 시간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인생은 호수야. 레이디 슬레인은 복숭아 향기가 풍기는 따뜻한 남쪽 벽 아래 앉아서 생각했다. 그 잔잔한 표면 위로 풍기는 따뜻한 벽 아래 앉아서 생각했다. 그 잔잔한 표면 위로 수많은 형체를 반사해 내는 호수, 태양이 금빛으로, 달이 은빛으로 물들이는 호수, 가끔 구름이 어둠을 드리우고 파동이 물결을 이루지만 결국에는 잔잔함을 되찾는 호수. 넘치지 않는 수면. 호수, 즉 인생은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으며 단단하게 압축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질문하면서 삶을 압축해 버린다. (126쪽)


새로운 인물 ‘피츠’의 등장도 나쁘지 않았다. 아들 케이의 나이 많은 친구였던 그는 혼자 사는 수집가 노인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레이디 슬레인은 처음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인도에서 만찬에서 본 사람이라는걸, 그때 둘 사이에 떨림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떠올렸다. 피츠는 레이디 슬레인이 아닌 ‘데버라’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이었다. 내면의 목소리,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 말이다. 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던 건 아니다. 은밀한 만남이나 연락조차 없었다. 헨리의 아내로 아이들의 어머니로 레이디 슬레인으로 살았던 시절은 끝났으니 노신사의 방문과 담소는 즐거웠다. 그 사실을 모르는 케이만이 피츠와의 약속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케이가 목도 피츠의 죽음. 놀라운 건 수많은 소장품을 박물관이 아닌 레이디 슬레인에게 남겼다는 것이다.


남편 헨리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시선과 자식들은 레이디 슬레인을 주목한다. 그 많은 유산을 어떻게 할지 말이다. 하녀 제누도 내심 기대한다. 그 돈이면 마님을 더 잘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디 슬레인은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했고 돈은 병원에 기부했다. 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멋진 결정. 피츠 역시 그랬을 거라 레이디 슬레인은 믿었다. 자식과 손주의 방문은 막았지만 증손녀의 소식은 기껍게 받아들였다. 파혼을 하고 자신을 찾아와 음악가가 될 거라는 증손녀와의 대화는 영혼이 통하는 것 같다고 할까. 증손녀도 같은 걸 느꼈다. 증손녀가 떠나고 맞이한 죽음.


100년 전 소설 속 모습이 현재 우리와 다르지 않아 새삼 놀란다. 그러니 『모든 열정이 다하고』는 단순히 노년의 이야기로 말할 수 없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방을 가졌는가 묻는다. 타인과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산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설령 너무 늦게 인식하더라도 그 순간을 느끼며 사는 게 인생이라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 독립적이야 할 관계를 생각한다. 성장한 자식의 독립을 인정하듯 부모의 그것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 속 레이디 슬레인의 말처럼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인생은 “참 피곤하고, 단편적이고, 고루하고, 허무하지.” (200쪽)라는 걸 깨달으며 그 여정이 끝난다면 다행이다. 피곤하고, 고루하고, 재미없고 허무하지만 각자 인생의 주어진 몫만큼 열정을 다해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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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은 이는 많지만 실천하는 이는 적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 그 행위가 어려운 게 아니라 집중이 힘들고 무엇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쓸 수 없다고 누군가는 쓰다가 막혀서 진행이 안되다고 절규할지도 모른다. 쓴다는 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토록 쓰고자 애쓰는 것일까.


대니 샤피로를 알지 못한다.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를 선택한 건 오롯이 제목 때문이다. 어떤 글쓰기 노하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단어’를 생각하고 꼽아볼 수 있기를 바랐다. 책을 읽어가면서 대니 샤피로의 일상을 그리며 글쓰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 위에 덧칠한다. 글이 잘 써지는 공간과 최적의 시간을 찾는 일,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에서 만났던 작가들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 카페를 찾고, 누군가 서재에서, 일정한 작업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 대니 샤피로로 다르지 않았다. 전화, 집안일, 인터넷 검색, 잡다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글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책은 80개의 이야기 조각으로 엮은 책이다. 80개의 단어, 제목이 있다. 자신의 유년 시절과 성장과정에 영향을 끼진 부모, 이웃, 학교, 가족, 아이에 대한 것들과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 자신이 소설을 어떻게 썼는지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단문을 쓰고, 부사를 쓰지 말라는 조언을 강하게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한 단어, 한 문장, 소설의 중반에서 다시 엎고 몇 년 동안 인물을 묘사하는 방법은 자신이 글을 쓰면서 느끼고 경험하면서 것들을 안내하는 정도다. 그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작가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기존 작가들을 위한 글처럼 여겨 기지도 한다. 소설을 쓰고, 마감이 있고, 편집자가 있는 이들이 공감하고 수긍할 글 말이다. 그게 나쁘진 않다. 뭔가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목표를 만들고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말처럼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두면 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하면 된다고.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나만의 단어를 나열하다가, 나의 일기장이나 비밀글에만 적용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주춤한다. 그러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답에 이른다. 쓴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내가 얻는 위로와 위안이 있으니까. 한 명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라는 글에, 그 한 명은 누구일까 골몰하기를 그만둔다. 어떤 공간이든 비공개가 아닌 이상 독자는 존재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피드백(댓글을 통한 조언, 비평)이 따라온다는 걸 알기에.


한 권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일까. 누군가 우연한 동기, 혹은 강렬한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누군가 책장에 참고도서로 남겨둘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문장을 꼽는다. 대단하고 거창한 글쓰기가 아닌 나를 쓰는 일, 나만의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패를 마주하는 일, 그래도 쓰는 마음은 쉬이 시들지 않기에 낫게 실패한다는 말이 주는 감동을 오래 간직하려 한다.


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15쪽)

언어를 찾는 것, 우리가 바라는 건 바로 그것이다. (46쪽)

몰두는 필멸, 우울, 수치, 불운, 무기력을 불러일으키는 슬픔에 대한 대비책이다. (197쪽)


글을 쓰려는 마음은 쌓아두지 말고 실천을 해야만 자랄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아무리 좋은 계획과 목표라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까. 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필요한 게 글이구나 싶다. 삶이 계속되는 것처럼 쓰기도 계속되어야 한다. 나만의 언어를 찾을 때까지, 언어가 살아 움직일 때까지 계속 쓰고 써야 한다.


대체 무엇이 글쓰기를 숨쉬기처럼 필수적이게 할까? 우리가 노력하고, 실패하고, 앉아 있고, 생각하고, 저항하고, 꿈꾸고, 복잡하게 하고, 풀어내는, 우리를 깊이 연루시키고, 기민하고 하고, 살아 있게 하는 수많은 나날이다. 시간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몸이 무관해진다.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것처럼 의식에 가까워져 있다. (129쪽)


이 책이 어떤 마음을 다잡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대학에서 국문학과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정희모 교수의 『문장의 비결』은 실전을 위한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문장 쓰기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하다는 첫 문장, 그 문장 쓰기에 대해 배우고 수정하다 보면 좋은 글이 완성된다고 안내한다.


쓰는 일에 급급해서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던가. 우선은 쓰고 보자는 마음에 수정은 나중으로 미루고 결국엔 글을 완성하다. 수정은 오타나, 맞춤법이 나닌 맥락, 문장의 오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글 쓰는 이가 모두 소설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가 읽는 이(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해야 좋은 글이다.


생각과 의도를 전달하게 위해 글을 쓴다. 한 문장으로 전달은 불가능하다. 문장이 연결되면서 전체 주제를 형성한다. 세부 내용들이 하나씩 모여 전체 주제가 만들어진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문장의 의미 연결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문장 화제와 초점을 따라가며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수정이 최고인가.


한 편의 글은 일관된 스토리로 지속되어 적절한 메시지를 형성해야 한다. 문장이 일관된 화제로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현상은 문장의 연결 흐름을 따르지 않고 필자의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문장의 흐름이 단절될 때는 문장을 수정하고 이를 고쳐야 한다. (258쪽, 「문장의 연결 1」)


좋은 문장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처럼 죽은 문장이 아닌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다. 그런 문장을 쓰는 건 요원하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마다 한 문장을 쓸 때마다 기억하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업을 받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공부하고 실천하다면 나만의 살아 있는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과 연관을 맺고 때로는 숨을 죽이다가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늦게 가다가 때로는 빨리 가기도 한다. 우리가 문장을 쓸 때 앞뒤 문장과의 관계를 보고, 단락 내의 위치도 보며, 전체 주제와의 관계를 따져봐야 하는 것도 문장이 생명체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장 학습의 책이지만 엄밀히 보면 텍스트 내의 문장의 흐름, 즉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글의 흐름을 살피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 중에서, 5쪽)


결국 우리가 글쓰기에 대한 글을 찾고,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를 쓰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어떤 형태가 됐든 나를 쓰는 일은 나를 아는 방법 중 가장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두렵고 쓰는 건 어렵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낫게 실패하는 일이다. 실패를 반복하며 더 괜찮은 글을 마주하고 싶다. 아름다운 글, 살아 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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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04 2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는 정말이지 왜 이리 어려운지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내시는 자목련님이 대단하시다고 매번 생각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게 어려우니 글을 쓰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아요.
쓰는 일에 급급해 고치는 연습을 게을리하는 저를 때리는군요^^

자목련 2023-05-07 15:43   좋아요 2 | URL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쓰는것에 집중하면 될 텐데 말이에요.
이 책이 제목처럼 계속 쓰기가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독서괭 2023-05-04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더 낫게 실패한다”라는 말이 좋네요^^ 생소하게 느껴지면서도 좋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보다요!

자목련 2023-05-07 15:42   좋아요 1 | URL
이 책에 좋은 말이 참 많았는데요, 가장 와 닿고 기억하고 싶은 말이 더 낫게 실패한다는 말이었어요. 실패가 얼마나 좋은 경험이고 좋은 일인가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얄라알라 2023-05-0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는 일에 급급해서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던가.˝
저는, 종일 놀다가 밤에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자판 두드릴 때가 자주 있는데 졸려서 일단 저장하고 보자 심정으로 마무리를 안 할 때가 많아요. (뜨끔뜨끔....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목련님 글은 잡다한 양념 걷어내고 담백한 재료 그대로의 맛을 주는 음식같다는 생각 가끔 하는데‘오늘 글의 메시지도 결국, 비슷한 것 같습니다. 도움 크게 얻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자목련 2023-05-08 12:27   좋아요 1 | URL
오타를 발견했을 때, 정말 숨어버리고 싶은데 수정을 해야지 하면서 잊어버리곤 해요. 그냥 그게 글의 운명인가 싶고요. ㅎ 담백한 재료의 맛이 주는 음식 같다는 칭찬,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맛난 점심 드시고요!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셸비 반 펠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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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식물에게 말을 건다. 오랜만에 본 화분 속 식물에게 말이다. “안녕, 잘 지냈어?” 그럼 잎사귀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 같다. 사실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물을 주고 잎사귀를 매만지는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다. 셸비 반 펠트의 장편소설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을 읽으면서 그 식물들이 생각났다. 식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냐고? 전혀 아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수족관이 등장한다. 다양한 바다 생물, 그중에서도 똑똑한 문어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문어, 당신이 떠올리는 축구와 문어, 그 문어 말이다.


문어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과 세상, 그리고 상실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 뭔가 재미와 감동이 기대된다면 맞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처음부터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스포일러겠지만 뭐 당신이 읽지 않는 한 이 감동을 느낄 수 없으니 괜찮다. 그냥 이 소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 소웰베이 아쿠아리움의 수조에 갇힌 문어 ‘마셀러스’, 그와 우정을 나누는 아쿠아리움의 70세 청소부 할머니 ‘토바’. 인간과 문어의 우정은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고 본다. 식물과의 우정도. 참고로 나와 식물 사이의 우정은 조금 더 깊어져야 한다.


토바는 마셀러스가 수조를 탈출하는 걸 알면서 관장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 수조로 들어가게 도와준다. 마셀러스가 수족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심심하고 답답하고, 호기심이 많아서다. 8개의 팔로 흥미로운 것들을 몰래 가져오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마셀러스는 수조 안에서 아쿠아리움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지만 그가 관심을 갖는 이는 오직 토바뿐이다.


바다가 깊숙이 간직한 비밀이란 이런 것들이다. 내가 다시는 탐험할 수 없는 것들.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스니커즈 밑창과 끈, 단추, 복제 열쇠를 모두 챙길 것이다. 전부 다 그녀에게 전해줄 것이다. 그녀의 상실에 위로를 전한다. 이 열쇠를 돌려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155쪽)


토바는 혼자다. 어린 시절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주 후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남편은 암에 걸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아들 에릭이 세상을 떠났다. 30년 전, 십 대의 아들 에릭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토바에게는 그랬다. 현재 토바의 삶에는 아무런 희망도 즐거움도 없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동네 친구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마음, 호의와 배려가 조금은 불편하다. 마트를 운영하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선도 마찬가지다. 아쿠아리움에서 청소를 하는 일, 어린 아들이 올라탔던 동상을 닦는 일, 바다 생물에게 인사를 건네는 반복된 일상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 하나뿐인 오빠의 죽음에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 오래전 교류가 끊겼고 물건을 챙기러 요양원에 방문할 뿐이다. 그런데 입소 신청서를 쓰고 집을 팔기로 결정한다. 아버지, 남편, 아들의 흔적이 가득한 집을 말이다. 청소를 하다가 팔을 다친 후 집 정리를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결정한 일이다. 토마에게 더 이상 소웰베이엔 남은 게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토바의 인생에 캐머런이 등장하곤 달라졌다. 캘리포니아에서 생부를 찾아 소웰베이로 온 캐머런. 약물중독의 엄마 대신 이모가 캐머런을 키웠다. 엄마의 돌봄을 기대하기는커녕 연락도 되지 않았다. 서른이 되었지만 일자리도 살 곳도 없다. 여자 친구의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대책이라곤 이모에게 받은 엄마의 물건에서 발견한 패물과 졸업 반지와 사진으로 생부를 찾는 것이다. 그 모든 단서가 소웰베이로 오게 만들었다. 캐머런이 생부라 여기는 남자는 부동산 재벌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지만 소웰베이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외부인에 대한 모든 걸 공유하는 이들이었다.


간신히 얻은 아쿠아리움의 일자리는 힘들고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준다는 마트 사장 이선은 간섭이 심하고 선배 청소부 할머니는 잔소리가 많다. 패들 숍을 운영하는 에이버리의 친절은 이상하다. 그 모든 게 자신을 향한 애정이라는 걸 캐머런은 알지 못한다. 이모 외에는 어떤 이에게도 그런 마음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쿠아리움의 문어 때문에 토바 할머니와 자주 만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문어를 대하는 토바 할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태도.


대체로 나는 구멍을 좋아한다. 내 수조 위에 있는 구멍이 내게 자유를 준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에 생긴 구멍은 싫다. 심장이 세 개인 나와 달리 그녀의 심장은 하나뿐이다. 토바의 심장. 그 구멍이 메워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368쪽)


마셀러스는 캐머런과 토바의 관계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그 둘 사이를 자신이 연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쯤 되면 모두가 짐작했을 것이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네 인생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많다. 그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는 순간 삶은 충만해지는 게 아닐까. 너무 늦게 알아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비밀에 다가가는 일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절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은 그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명민한 화자는 따뜻함에 신선함과 재미를 더한다. 상실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네 삶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그 치유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의 대단한 화자 마셀러스는 이미 알고 있는 그것 말이다.


비밀은 어디에나 있다. 어떤 인간들은 비밀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폭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최악의 의사소통 능력, 그것이 인간이란 종의 특징인 듯하다. 다른 종이라고 훨씬 나은 건 아니지만, 청어조차 자신이 속한 무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며 그에 따라 헤엄쳐 나간다. 그런데 왜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에게 속 시원히 말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수백만 개의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걸까? (80쪽)


문어를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최초의 소설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디서든 문어를 보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인사를 전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니 한동안은 문어숙회의 맛은 잊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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