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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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흐릿한 기억과 풍경이라고 할까. 새 학년, 새 학교에서 느꼈던 설렘과 불안. 친해질만한 아이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며 서먹한 공기의 흐름을 읽느라 정신없던 학기 초의 모습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다를 바 없다. 어느 시절, 어느 반이든 모두가 친구로 지내고 싶은 존재 곁에는 어떤 무리가 있었다. 반대로 아무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는 존재도 있었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아이는 뭔가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에 등장하는 ‘고요’가 그러하다. 평범한 고등학생 ‘수현’과 다르게 고요는 그런 존재였다.


고요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아이들과 거리를 두었고 결국엔 그 아이 무리에게 왕따를 당한다. 책상을 더럽히고 사물함의 체육복까지 입지 못하게 만든다. 고요는 신경을 쓰지 않고 공부를 할 뿐이다. 수현은 그런 고요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 반장인 ‘정후’가 항상 고요를 챙기는 모습에 수현은 더욱 정후가 좋아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후만큼 자꾸 관심이 가는 아이가 있다. 항상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 조용한 성격의 ‘우연’이다. 오랫동안 정후를 짝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데 왜 우연을 살피는 것일까. 그러다 우연이 보고 있는 sns 계정을 알게 된다.


비공개 계정으로 사용자가 승인을 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이디는 ‘고요의 바다’로 프로필의 보름달은 미술 시간에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달의 뒷모습을 그렸던 우연을 떠올리게 한다. 고요의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소수였고 달과 관련된 아이디를 지녔다. 수현은 그 계정이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으로 친구를 신청한 수현은 수현이 아닌 익명의 존재로 고요의 바다와 마음을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현은 고요의 바다가 고요라는 걸 확신한다. 그리고 고요의 바다와 친하게 지내는 계정을 둘러보다 정후와 우연의 계정에 댓글을 단다.


정후와 우연은 학교에서 보고 알았던 모습과 달랐다. 항상 모든 일에 앞장서고 모범적인 인기를 얻는 정후에게는 아픈 누나가 있었고 우연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을 접고 힘들어했다. 고요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지만 sns에서는 아주 솔직하고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같은 존재였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는 다른 모습이었다. 수현도 다르지 않았다. 소심하고 주저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정후, 우연, 고요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위로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오프라인인 교실에서는 여전히 먼 존재였다. 정후, 우연, 고요에게 자신이 그 계정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관계가 끊어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찍 등교해서 고요의 책상을 정리하거나 우연이 돌보는 길냥이를 산책하며 찾아보고 정후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익명으로 존재해야만 관계를 지속하고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다니.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은 십 대의 복잡한 마음과 관계를 sns로 보여주고 존재와 정체성을 달로 비유하고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 수현은 자신만의 개성이자 특별함을 지닌 정후, 우연, 고요를 지켜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존재, 수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건 정후, 우연, 고요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깊은 고민이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 수현은 우리가 보는 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달의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사람들도 같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들은 달을 올려본다고만 생각하지, 달이 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달인데 말이야.” (229쪽)


대부분 수현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수현은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고 관심을 갖고 마음을 건넸다. 그걸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쓸모없는 게 아니다. 나의 뒷면을 궁금해하고 알고자 노력하는 누군가의 마음,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일까. 마음을 나누고 건네며 보이지 않는 어떤 걸 알아가는 일이야말로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달의 뒷면을 꿈꾸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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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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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가까운 가족, 친구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독립적인 존재다. 사회적 관습과 문화에 길들여지는 동시에 반항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고 창조하는 존재, 그리하여 내면은 항상 들끓는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내면을 주목한다. 『그 후』를 읽으면서 확실해졌다. 『산시로』, 『그 후』, 『문』을 차례로 읽으면 좋을 것 같지만 딱히 그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 읽어보니 그렇다.


『그 후』란 제목이 『산시로』 그 후의 이야기를 뜻하는 의미도 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 후』가 의미하는 바는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 맞이하는 특정한 시기를 지나 그 후가 아닌가 싶다. 이제 『그 후』의 주인공을 만나보자. 주인공 ‘다이스케’는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해 본가의 도움을 받아 하녀와 서생을 두고 생활한다. 몇 번의 휴학을 반복하며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후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즘 청년들의 시선에는 아마도 팔자 좋은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스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서생의 눈에는 공부를 많이 하는 주인으로 보인다. 본가에서도 다이스케에게 일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선을 보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와 형이 하는 사업에 도움이 되는 그런 가문의 사람과 만나기를 주선한다.


다이스케는 결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가문을 위한 조건을 내건 만남이 싫다. 유유자적 산책을 하고 그림을 보고 책을 읽고 생각이 닿는 대로 상념에 빠지는 게 좋다. 그런 다이스케 앞에 대학 시절 친구가 등장한다.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로, 다른 친구 스가누마가 죽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해 다른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3년 만에 도쿄로 돌아온 것이다. 히라오카와와 그의 아내 미치요의 결혼을 성사시킨 게 바로 다이스케였다. 도쿄에서 만난 부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미치요는 아이를 잃고 건강도 좋지 않았고 히라오카는 새 직장을 구해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빚이 있어 어려움에 처한 상태였다. 대학 시절 절친이었던 친구의 부부에게 상대적으로 풍족한 다이스케는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사실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친구의 부인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예상했듯 사랑이다. 그 마음은 막 시작된 것이 아닌 대학 시절부터 지속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히라오카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소설은 본격적으로 다이스케의 어지럽고 복잡한 마음을 보여준다. 소세키는 미치요를 향한 다시스케의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아내를 도와주려는 마음부터 미치요를 만나기 위해 히라오카의 집에 방문하고 히라오카와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토론을 하고 부부의 관계가 어떤지 탐색하는 다이스케의 모습은 때로 안타깝고 때로 딱하다. 동시에 본가에서 결혼을 하라는 압력을 받아 심적으로 힘든 상태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용기도 없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시간을 벌자는 게 다이스케의 생각이자 전략이다. 그러나 미치요를 향한 마음이 확고해지면서 본가에 자신의 의견을 전해야 할 때가 왔다.


미치요에게도 마찬가지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아내 미치요를 홀로 내버려 두는 히라오카가 아닌 지신을 택할 수 있냐고 확인해야 했다. 집안을 위해 집안에서 정해주는 이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말이다. 상대가 유부녀이며, 친구의 부인이라 말할 수 없으니 그 마음이 지옥인 것이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자신이 원하는 것, 내면에 충실하기로 한다. 놀랍게도 그는 히라오카에게 자신과 미치요의 관계를 말한다. 진짜 대단한 다이스케다. 히라오카의 반응도 만만치 않다. 알겠다고 말하며 미치요의 몸 상태가 나아지면 보내겠다고.


누가 봐도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관계는 뻔뻔한 불륜이고 순수함을 찾을 수 없다. 소세키는 그 사랑을 고결한 순백의 사랑으로 표현한다. 비가 오는 날 백합으로 방을 장식하고 미치요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백합은 미치요와 다이스케에게 중요한 꽃으로 과거 둘 사이의 감정을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빗속에서, 백합 속에서, 다시 살아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 어디에도 욕망은 없었다. 이해관계도 없었다. 자신을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260쪽)


비는 여전히 거침없이 세찬 소리를 내며 내렸다. 두 사람은 비로 인해, 빗소리로 세상과 분리되었다. 같은 집에 사고 있는 가도노와 할멈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두 사람은 고립된 책 백합 향기 속에 갇혀 있었다. (263쪽)


세상의 질타, 걱정 근심, 본가와의 단절은 다이스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마음과 본질, 그것이 중요했다. 『그 후』를 담백하고 아름다운 연애소설로 읽었다. 다른 이들은 1900년대 일본 시대의 경제와 근대화, 산업화에 집중해서 읽을 수도 있다. 다이스케와 주변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 소세키가 생각하는 일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으니까. 소세키는 다이스케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 인간의 내면과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안정된 직장, 풍족한 경제력, 시류를 따라 사는 일은 누가 봐도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모두에게 똑같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뜻대로 나갈 때 진실한 행복을 느낀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몫을 감당해야 한다. 다이스케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그 후의 삶까지 끌어안고 감당할 자신 말이다.


여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고혹적인 백합을 곁에 두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라면 더욱 완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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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27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를 읽어낼수 있다는 말씀 동의합니다. 또 읽게되면 저도 다르게 읽을것 같아요~

자목련 2023-05-30 09:09   좋아요 1 | URL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레삭매냐 2023-05-3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는다고 수배해
두었는데... 못 읽고 있네요.

6월에는 다시 소선생을
읽어야지 싶습니다.
여름에 읽으면 좋은 소설
이라고 하니 기대가 됩니
다.

자목련 2023-05-30 11:57   좋아요 1 | URL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혹은 휴가에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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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가만히 표지를 바라보았다. 앙리 마팅스의 포옹이었다.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 『그냥 믿어주는 일』이란 제목과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제목을 바꾼 출판사의 의도가 있겠지만 <생명의 그릇>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냥 믿어주는 일』는 미야모토 테루가 청년 시절이었던 30년 전 1983년에 펴낸 에세이다. 저자는 <생명의 그릇>이라는 제목을 거창하다 말하지만 생명을 담은 그릇은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생명을 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대단하고 거장 하지 않은가.


이 책에는 미야모토 테루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어떤 성향을 지닌 작가인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분위기, 어떤 기저라고 할까. 쉰 살 가까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려주는 글에서는 애틋한 그리움이 전해진다. 아버지란, 부모란 그런 존재니까.


수록된 55편의 에세이는 일상의 기록을 다룬 짧은 메모나 일기 형식부터 발표한 소설이나 구상 중인 소설을 소재로 사회와 삶에 대한 미야모토 테루의 생각이 담겼다. 1부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광고 회사에 다녔던 일을 다루고 2부는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칼럼 형태가 많고 3부는 작가 데뷔 후 이야기로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연인을 들려준다. 그가 바라본 일본 사회, 문학,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준 평론가와 편집자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제때 표현하지 못해 한탄하며 소설가는 대단한 직업이 아니라는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경마장에 다니던 아버지,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온 어머니와 함께 찾은 유명 사찰에서 느꼈던 우울감, 특정 인물을 마주하면 나쁜 일이 생겨 일부러 피하려 했던 시절, 소설가가 뒤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실패만 맛보던 시절, 기르던 개의 죽음을 통해 절대 개를 기르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계속 개를 기르고 사랑한 개들의 기억을 간직한 이야기. 두 아들에게 사랑할 대상을 주고 싶고 생로병사라는 엄연한 법칙을 자연스레 인식시키고 싶어 개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미야모토 테루. 결핵에 걸려 2년 정도 요양을 했을 때의 심경은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그 시간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삶에 대한 의지를 결연하게 했다는 게 전해졌다.


55편의 에세이 가운데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책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큰돈을 지불해 사주신 문고판에 대한 것으로 열 권씩 끈으로 묶어 팔고 있었는데 어린 미야모토 테루는 주인이 묶어 놓은 열 권의 다발을 다 풀고 좋아하는 열 권을 고른 후 다시 묶었다고 한다. 그 열 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열 권의 문고본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몇백, 아니 몇천 명의 인간이 품은 괴로움과 기쁨을 알았다. 몇백, 몇천 개의 풍경으로부터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몇백, 몇천 개의 작은 대화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52~53쪽)


나는 아무 장점도 없는 인간이고, 머리도 나쁘고 완력도 없으며, 제멋대로에 겁쟁이에 질투가 심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내가 조금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살짝 낮춰 대답할 것이다. 대답한 순간 나의 마음에는 틀림없이 그 열 권의 손때 묻은 문고본 다발이 스쳐갈 것이다. (53쪽)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미야모토 테루의 글엔 다정함이 있다. 그 다정함이 조금은 부끄럽고 수줍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진다. 삶을 사랑하는 뜨거움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려는 노력이 있다. 단풍나무를 보며 금수(錦繡)라는 말에서 자신의 생명 또한 금수인듯하다는 미야모토 테루의 아름다운 문장이 강렬하고 짙은 울림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올해도 또다시 단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단품은 나에게는 이제 식물의 잎이 단순히 변색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며 뿜어내는 금錦의 불꽃이다. 아름답다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 있는 자연 현상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나다. 그것은 생명이다. 오락, 야망, 허무, 사랑, 증오, 선의, 악의, 그리고 한없는 청청함까지 남몰래 지닌, 혼돈한 우리의 생명이다. 어느 시기, 어느 땅, 어느 경우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모두 금수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205~206쪽)


30년이 지난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저마다 금수의 나날을 살다는 걸 확인한다. 때로 우리를 흔드는 모든 감정과 우리를 채우는 모든 감각의 숭고함을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 그 모든 시간이 금수의 나날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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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백수린 외 지음, 이승희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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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도 사랑과 같아서 친구 사이에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발생한다. 친구를 닮고 싶은 마음, 나보다 다른 이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질투를 한다. 선택을 해야 할 때 내 의견을 지지하고 따라주기를 바란다. 청소년기의 우정은 더욱 그러하다. 가족과 부모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공유하는 친구는 막대한 힘을 지닌 존재다. 우정을 테마로 한 『함께 걷는 소설』에서 백수린, 이유리, 강석희, 김지연, 천선란, 김사과, 김혜진은 각양각색의 우정을 보여준다. 좋아하는 작가, 끌리는 제목의 단편을 먼저 읽어도 좋다. 백수린, 이유리, 김지연, 김사과의 단편을 다시 읽으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마음을 만났다. 친구가 전부였던 시절,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싶었던 마음 말이다.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은 십 대에게 친구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 ‘나’는 ‘해지’와 ‘무호’와 보냈던 시절을 회상한다. 어디에 사는지, 공부를 잘하는지 구분하여 친구들이 갈라졌다. 나는 재개발 주택에 살았지만 성적이 좋아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친구는 같은 동네의 해지와 무호뿐이었다. 무호와 해지의 관계는 그들과 나의 관계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십 대의 우정은 영원할 거라 믿지만 시절 인연처럼 한 시절의 우정으로 끝나기도 한다.


해지에게 나는 그저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당시 나를 때때로 슬프게 했다. (「고요한 사건」, 26쪽)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말이다. 김사과의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에서 ‘이수영’은 대학에서 ‘한비’를 만난다. 평범한 이수영과 달리 한비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수영은 한비가 이끄는 세계에 매혹된다. 수영은 한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한비에게 수영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수영은 둘 사이의 관계가 우정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와 다르게 나와 닮은 부분에 끌려서 친구가 되기도 한다. 강석희의 「우따」에서 프랑스 파리의 명문 학교에서 만난 ‘나’와 ‘우따’는 인종차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한국에서 온 나와 아프리카 출신인 우따. 대놓고 백인 학생들이 무시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교묘한 차별을 느낄 수 있었다. 우따와의 만남, 우따가 일으킨 사건은 나를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현실과 타협하고 불의를 외면하려 할 때 우따의 편지를 읽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나간다.


더 나은 무엇이 되자. 그때 만나자. (「우따」, 98쪽)


친구는 이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만나는 일은 어렵고 좋은 친구를 두었다면 성공한 거라 말하는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일만큼 좋은 친구가 되는 일은 어렵고 중요하다.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고 잘못된 것을 고쳐주고 언제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는 존재도 친구뿐이다. 이유리의 「치즈 달과 비스코티」 속 돌과 대화하는 ‘나’와 애니메이션 <월리스와 그로밋>을 좋아하는 ‘쿠커’는 그런 친구다. 남들이 뭐라든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일, 그게 진짜 우정이라고.

김혜진의 「축복을 비는 마음」은 그런 공감과 연대로 이어진다. 어른의 우정에 대한 것이라고 할까. 10대, 20대를 지나 맺는 관계는 일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설 속 ‘인선’과 ‘경옥’도 그러했다. 청소 일을 하는 ‘인선’은 신입 ‘경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인선은 그냥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경옥은 따지듯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이상한 건 경옥의 말을 인선이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경옥이 건넨 말 때문이라는 것을 인선은 나중에 알았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고, 듣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 말을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한 번쯤 그런 말을 해 주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누구도 그런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 234쪽)


일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하는 말이나 추가 수당에 대해 언급하는 일, 인선이 한 번도 듣거나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나를 인정하고 응원하고 격려하며 부당한 일에 대해 함께 나서는 이가 친구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우정이 아름다운 연대로 확장된다는 걸 말하는 소설이었다. 친구가 곁에 있어 든든하다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또래가 아니어도 성별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도 공통 관심사 하나로 우리는 친구가 된다. 어떤 이익을 바라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존재. 『함께 걷는 소설』을 읽으며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나도 그들에게 좋은 친구이었으면 한다. 우리들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함께 살아가자는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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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5-2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은 제게 너무나 배울점 많고 다정하신 알라딘 친구! 자목련님을 더 소중히 여기겠어요 이미 소중하지만....😍

자목련 2023-05-23 10:40   좋아요 0 | URL
은오 님, 더 다정한 자목련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서괭 2023-05-22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군요! 백수린 작가 장편 출간되었던데 자목련님이 곧 읽고 리뷰 써주시지 않을지☺️

자목련 2023-05-23 10:41   좋아요 1 | URL
이미 출판된 책 가운데 친구를 소재로 한 단편을 골라 엮은 테마단편집이에요.
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선 책을 주문하고요^^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 같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전화번호 유출은 분명하다. 가입 후 오랜 시간 번호 변경 없이 사용했으니 그럴 만도 할까. 그러나 이전에 없던 상황이다. 투자에 참여하라는 문자가 많이 온다. 찜찜함을 감출 수 없다. 스팸으로 분류될 문구를 추가하기에 바쁘다. 링크는 절대 확인하지 않기, 바로 삭제하게 번호 차단하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최근에는 로그인 차단을 한 지역에서 로그인 시도를 한 기록이 있다는 알림을 받았다. 순간 무서웠다. 해킹이란 말이 떠올랐다. 보안 설정을 하고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사실, 비밀번호를 변경하는 일은 정말 귀찮다. 바꾼 비번을 기억하지 못하고 종종 잃어버린다.


바꾼 비밀번호를 메모하면서 문득 든 생각.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가. 그건 가능한 일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 벌어지는 일들에 휩싸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바쁘게 복잡하게 변해하는 시대를 따라가기 버겁다.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간단하고 간편하게 해결되는 스마트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그 간단과 간편에 모두에게 적용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 누군가는 피해를 보고 누군가는 사각지대에 놓인다.


속상하고 불쾌한 생각을 뒤로하고 반가운 책 이야기를 꺼낸다.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시집. 김수빈의 『고요한 우연』과 정호승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 『고요한 우연』은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읽는 중이다. 청소년이던 시절은 지났지만 청소년 문학, 성장 문학은 언제나 끌린다. 여전히 성장 중이라 그럴까. 청소년 문학, 청소년 대상으로 한 소설을 읽을 때면 나의 청소년 시절에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당시에는 청소년 문학, 청소년 대상을 위한 분류가 없었다. 세계문학, 고전문학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 같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은 오랜만이다. 동네 책방에서 이 시집을 말했던 H가 생각난다. 나는 정현종 시인의 신간을 찾고 있었고 H는 이 시집을 매만졌던가. 작년 가을인데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두 권의 책이 표지 빛깔이 묘하게 슬프다. 제목 때문인지 모르다. 눈이 부시고 맑은 초록과 쪽빛이 그렇게 다가온다. 기분 탓이리라. 산딸나무, 찔레꽃이 피어나는 5월, 아카시아꽃이 피고 지는 5월. 5월이 가고 있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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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5-2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바쁜데, 전화해서
자기 말만 주욱 늘어놓는
텔레마케터에 그만 -

예전에는 점잖게 응대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관심 없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끊게 되었습
니다.

10원에 개인정보가 다 팔렸
다고 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하
고자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저녁이네요.

자목련 2023-05-22 09:00   좋아요 1 | URL
꼭 필요한 정보라서 놓치면 불편을 겪을까 받는데 결국엔 광고라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확인과 다짐만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ㅠ,ㅠ

blanca 2023-05-2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싱도 당했다지요...저는 요새 어린이 시절 읽었던 책들 다시 읽고 있어요. 시집 읽는 5월 근사합니다.

자목련 2023-05-23 10:43   좋아요 0 | URL
아, 피싱이라니요. 너무 무서운 세상이에요. 정호승의 시, 편안하고 좋았어요.
어린 시절의 저는 낡은 세계전집을 읽다가 멈춘 기억이 있어요. 글자도 많고 무슨 내용인지도 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