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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평점 :
어려운 시대를 살다 보면 위인의 등장을 기대한다. 새로운 기운을 불러올 존재,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열어줄 거라 믿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우상이 탄생하는 배경이라고 할까. 그러나 대중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한순간 매몰차게 돌아서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알도 팔라체스키의 『연기 인간』를 통해 대중의 심리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확인한다.
제목인 『연기 인간』에서 무엇을 상상하는가? 나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상징적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소설엔 진짜 연기 인간이 등장한다. 33년 동안 굴뚝에 있다가 세 명의 노파가 불을 피우면서 생겨난 존재다. 세 명의 할머니 페나(고통), 레테(그물), 라마(창)의 이름을 따서 ‘페레라’라 불린다. 세상의 모든 관심은 그에게 향한다. 온몸이 연기로 이루어진 인간,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솔직한 그와 대화를 원하고 왕의 초대를 받기에 이르고 법전 집필이라는 임무까지 맡긴다.
“나는…… 나는…… 아주 가벼워요. 나는 아주 가벼운 사람입니다.” (11쪽)
왕과 만나기 전 그를 찾아온 이들은 그들 칭송하기에 바쁘다. 시인, 화가, 박사, 사진가, 대주교와 대화를 나누는 연기 인간은 자신은 연기로 되어 있는 가벼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대화체로 이뤄진 독특한 형식을 지닌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무대에 오른 연기 인간과 그를 보려고 모여든 관객들, 그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그를 숭배하는 격이다. 굴뚝에서 그를 꺼낸 세 노파만이 아는 게 아닐까.
유명 인사와의 만남에 이어 귀부인들의 다과회에서 그는 사랑, 시기, 열정,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귀부인 각자가 어떤 삶에 대한 고해성사 같은 것이다. 대중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정의하고 기뻐한다. 연기 인간과 나누는 대화는 철학적이고 분위기는 신비롭다. 이런 대화를 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나쁜 순간에 죽습니까, 아니면 죽음이 인생의 가장 나쁜 순간입니까?” (145쪽)
소설 속에는 이처럼 존재, 죽음, 사랑, 자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등장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 하나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며, 삶이라는 형태가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연기 인간을 따르는 군중의 모습은 마치 예수를 떠올리기에 충분한다. 그가 굴뚝에서 보낸 시간이 33년이라는 걸 기억하자.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그를 부정했던 것처럼 사람들도 페럴라를 부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궁정의 하인장인 ‘알로로’가 페럴라처럼 되려고 불을 질러 죽은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페럴라 때문이라고 믿는 딸의 울부짖음에 시민들은 동요한다. 페럴라를 숭배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를 비난하고 매도하기에 바쁘다.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여 죄를 벌하라 말한다. 그들은 페럴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환호하던 이들이다. 재판에서 그들은 페럴라가 협잡꾼, 경멸스러운, 추악하고, 무능한, 무덤에서 꺼낸 시체라고 증언한다. 페럴라의 변호는 단호하다.
“나는 가볍습니다.” (253쪽)
흥미로운 소재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1911년에 출간된 이 실험적인 소설은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를 완벽하게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대중심리와 잘못된 집단지성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모르는 사이 새로운 연기 인간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닐는지 경각심을 일깨운다. 시대적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등장하는 가짜 신과 그를 맹목적으로 따른 대중의 모습은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지 않은가.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우리가 놓치는 건 그 모든 게 연기처럼 가벼운 존재로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