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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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읽고 쓴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의견을 말한다. 개인적인 공간에 남긴 기록은 한순간 사회적 공론에 휩싸일 때도 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에 댓글로 다툼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교정 같은 단순한 일부터 문맥이 맞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좋아서 쓰던 글이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의문이 생긴다.


궁극적으로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일까. 글의 형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한 행복, 기쁨, 즐거움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장르 중 하나가 소설일 것이다.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공의 이야기, 그 안에서 독자는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한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기에 일률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러니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나누는 획일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니까.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정부가 관리하고 판단하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나오키상과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요미우리문학상 등을 수상한 기리노 나쓰오의 장편소설『일몰의 저편』(북스피어, 2021)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성애 소설을 쓰는 작가인 주인공 ‘마쓰’는 ‘문예윤리위원회’(이하 문윤)라는 조직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다. 독자의 고발이 있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설명 없이 강습에 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며칠이면 끝날 거라는 직원의 설명에 아무런 의심 없이 길을 나선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말이다. 마쓰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단절된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한 ‘요양소’다. 마쓰에게 지정된 방은 형무소와 같았다. 작은 책상, 화장실, 지급되는 생필품으로 생활하며 식사, 목욕도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다. 인터넷도 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와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건물 곳곳에서 자신과 같은 복장의 사람들을 지나쳤지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 이곳에 왔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말 그대로 고립 상태에 놓였다.


그곳에서 마쓰는 이름이 아닌 ‘B98’번이었고 소장이라는 사람과 상담이 시작되었다. 마쓰가 쓴 소설이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라고 문윤이 판단해 요양소에서 갱생과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간은 마쓰가 얼마나 문윤의 조치에 따르고 협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B98번이 된 마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설은 그저 허구이며 상상의 세계가 아니던가. 단지 한 장면의 묘사, 몇 줄의 표현으로 인해 소설 전체를 평가받는 일은 부당했다. 독자의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당연한 감정이다. 작가에게 그 누구도 그런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제재를 가할 수 없으니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주의 국가에서 개인을 갱생한다는 상상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소설은 너무도 비참한 방법으로 마쓰를 구속하고 학대한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위반하면 요양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묵살했다. 그들의 설명은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서 창작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산책을 빌미로 요양소를 탐색하는 마쓰가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잔인했다. 하루하루 요양소에 적응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처음에 끓어올랐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작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말이었다.


마쓰가 그들의 요구대로 쓴 글을 읽고 검열하며 문윤은 그녀가 충분히 갱생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윤에서 원하는 글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누구나 감동을 느낄 착하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훌륭한 소설이라며 노벨문학상을 언급한다. 마쓰도 쓸 수 있었다. 요구하는 대로 변절자, 배신자도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건 작가가 원하는 글이 아니고 쓰고 싶은 글이 아니었다. 무엇을 쓸지 창작의 영역까지 허락이 필요한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글은 다양성과 고유성은 무시한 AI나 써내는 글이 아닐까. 기능적으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를 원할 뿐 마쓰라는 인간 개인의 글은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의 싸움이었다. 누가 봐도 개인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마쓰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정하며 그녀를 자극했고, 도발하게 만들어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드는 게 문윤의 전략이었다. 인간은, 그것도 예술가인 작가는 갱생되거나 교정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소설은 마치 문학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한다. 독자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선별할 능력이 있냐는 듯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세계, 작가의 창작적 자유는 그들의 집단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곧 개인이며 독자다. 소설속 문윤의 논리에 따르면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처럼 좋은 소설만 읽는 독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이다.


이쯤에서 독자인 나는 어떤 독자인가 생각한다. 더불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지난 정부의 예술가 명단을 떠올린다. 정부의 뜻에 반하는 목소리를 지닌 이들은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불이익을 받는 이들이다. 정치가 예술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예술가의 정치적 신념은 작품과는 별개다. 설령 같다고 해도 그건 개인의 자유 영역이다. 그렇다면 소위 문학상 수상작, 베스트셀러, 고전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다양한 시도를 하는 실험적인 소설이나 사회를 비판하는 고발 소설과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는 탐사 소설은 읽지 말아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 마쓰가 아닌 비주류 소설을 읽는 독자도 문윤의 요양소에서 갱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인 21세기에 불가능한 이야기라 장담했지만 막상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아무도 모르는 권력이 움직이는 검열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쓰는 이 글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317쪽)


“내가 말하는 건 작가가 책임을 지고 표현한 작품이야. 허구의 이야기 말이야. 허구는 다양한 인간을 묘사하지. 개중에는 차별적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지. 왜냐하면 인간 사회가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의 고통을 그리는 게 소설이니까 아름다운 것만 쓸 수 없지.”(317쪽)


그리하여 마쓰의 처절한 외침은 곧 내 것이 된다.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고 좋은 소설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꾸며진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 인형처럼 똑같은 얼굴과 마음을 지닌 인간들이 가득한 사회를 상상하자 오싹해진다.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마쓰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떠냐고 말이다. 소설 속 디스토피아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인간의 심연을 포착한 글이 소설이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배우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마쓰가 문윤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그 때문이다.


단순하게 재미만 놓고 봐도 스릴 넘치는 소설이다. 하지만 묵직한 여운을 안겨 준다. 흥미롭게 진행된 마쓰와 소장의 토론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다 정신을 차린다. 읽고 싶은 소설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독재의 사회가 될 것임을 알기에 모든 소설을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논리를 따라갈 수 없다. 작가와 독자의 인격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처사를 따를 수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쓰가 생각날지도 모른다. 현명한 독자가 되려는 묘한 욕망과 함께 말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소설 밖 현실에선 ‘일몰의 저편’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Littor》 33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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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2-09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 누구지 내가 아는 작가인데...찾아보니 옛날에 재미있게 읽은 <아웃>의 작가였네요.
신간이 나왔군요. 문학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다룬 스릴러~~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자목련 2021-12-10 10:43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소설로 처음 만났는데 쿨캣 님은 이미 만나셔군요.
재미와 함께 많은 생각을 안겨준 소설이었어요. 소설은 나에게 무엇인가 생각도 하고요.

scott 2021-12-09 1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자목련님
리뷰가 잡지 릿터에 실렸네요!^^

2021-12-10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1-12-09 1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사랑과 어듐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나쁜독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내용이지만 그 부분만은 닮은 듯한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님 *^^*

자목련 2021-12-10 10:46   좋아요 2 | URL
좋은 소설, 나쁜 소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좋은 독자와 나쁜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어요.

기억의집 2021-12-09 10: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2/3까지 읽다가 포기 했어요. 지하방에 감금될 때… 그래. 그래도 공권력이 어떡해서든 찾아 와 이들을 처벌하고 자유가 될 거야… 아무리 읽어도 경찰의 관여할 낌새가 안 보여 결말 봤다가.. 걍 접었어요. 기리노여사 지금 칠십이라던데… 끝까지 독자를 절망에 빠뜨리는구나 원망하면서요. 전 일몰의 저편이란 제목에서 저편 너머에 있는 게 어둠인지 빛인지 모른 상태에서 그래 결론은 희망적인 빛일거야라고 희망회로 돌려가며 읽었는데… 기리노 여사님 참 독하더라구요 한편으론 자민당에 대한 정치적 은유인가 싶기도 하고…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1-12-10 10:47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저도 계속 그곳을 탈출하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나 봐요.
어쩌면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자꾸 생각나요.

책읽는나무 2021-12-09 19: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늘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자목련 님의 글입니다.
릿터 잡지에도 실리다니...축하 드립니다^^

2021-12-10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1-12-09 23: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책을 읽으시고 꾸준히 조근조근 말하시는 것처럼 올려주시는 리뷰의 힘!! 멋져요!! 계속 화이팅!!^^

자목련 2021-12-10 10:50   좋아요 3 | URL
꾸준히 읽고 쓰는 일, 알라딘에서는 대단한 분들이 많지요. ㅎㅎ
라로 님의 응원으로 하루가 따뜻할 것 같습니다^^

희선 2021-12-11 0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축하합니다 이 글이 릿터에 실렸군요 뭐든 자유롭게 써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곳도 있고 한국에서도 마음대로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예전보다 나아졌네요


희선

자목련 2021-12-11 20:02   좋아요 1 | URL
희선 님,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였어요.
읽고 쓰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고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12-11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ns와 다양한 플랫폼!
서재와 블로그 관리도 겨우 하고 있는 저로서는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자목련 2021-12-11 20:03   좋아요 1 | URL
저 역시 그렇습니다. ㅎㅎ
운이 좋았어요.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새파랑 2021-12-11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릿터를 읽어본적은 없지만 33호는 읽어봐야 겠어요 ^^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1 20:04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감사합니다. 릿터33호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포근한 주말 이어가시고요^^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었을 때
박주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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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기자이자 앵커인 박주경의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었을 때』를 읽기도 전에 나는 ‘구원’이란 단어에 사로잡혔다. 현재 복잡한 내 마음 때문이다. 그러면서 거창한 제목이 아닐까 혼자 심통을 부렸다고 할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원이구나,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려는 사람과 살리려는 사람들. 안아주는 마음과 견뎌내는 용기. 언제 누가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재난재해와 사건사고, 범죄, 참사 현장의 아비규환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맞잡아 생명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들어가며 중에서, 8쪽)


책을 통해 만나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뉴스를 통해 놀라고 분노하고 감동하는 이들의 진짜 이야기. 짤막한 꼭지로 소개되는 그들의 사연을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팬데믹의 시대를 살면서 기뻐할 일을 찾을 수 없어 불운과 불행 사이를 헤매는 우리에게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는 이들의 진심은 가장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나의 안위보다는 위기에 빠진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의 시작은 어디일까. 1장 ‘인간의 시간’에서 소개하는 위인들은 보통의 우리 이웃이었다. 먼저 그 자리에 있었고 발견했고 도움을 줄 수 있었기에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2장 ‘분노의 나날’에서는 모두가 울분을 토했던 사회 전반을 흔든 사건을 언급한다. N번방 사건과 차마 이름을 부르는 것도 미안한 정인이 사건. 매번 사건이 발생했을 때 뒤늦은 진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한다. 어쩌면 모두 방관자는 아니었을까. 뉴스에서 다룰 때에만 반짝 관심을 갖고 이후에는 내 일이 아니라고 잊어버리는 우리의 습관을 반성하게 만든다. 관련 지자체와 정부의 미흡한 대책에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이기에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을 저자는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통해 함께 사유하기를 권한다. 그저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분노하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가 묻는다.


3장 ‘상실의 계절’과 4장 ‘역병의 시절’에서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과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들려준다.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구하지 못한 세월호, 기본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인명 사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가 그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올바른 판단력과 실천에 대해 묻는다. 2005년 발생한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세월호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다시금 통탄하고 만다.


재난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귀한 목숨들이 경각에 달렸고 1분 1초의 판단이 생사를 가른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는 노력, 방법이 엿보이면 일단 시도해 보는 결단, 움직여야 할 때 빨리 움직이는 적극성이 조금이라도 살릴 가능성을 높인다. 그 증거를 세월호와 카트리나 등에서 우리는 역으로 목격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오판의 결과는 매번 참극이었다. (#25 “가만히 있으라” 중에서, 195쪽 )


그가 전하는 사연은 하나하나 우리의 이야기였다. 29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치킨을 배달하는 배달기사의 사연, 코로나19로 단절의 시대를 연결해 주는 사람들의 노고, 도움과 돌봄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홀몸노인과 장애인들의 고충까지 사회가 두루 살펴야 함을 언급한다. 누구 하나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바이러스의 전염처럼 각계각층 모두의 삶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안전한 거리 두기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확진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료진들, 격리자와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 감염자가 폭증하는 나라에 고립된 교민과 유학생들, 확진자 방문 장소를 쫓아다니며 조사하는 공무원들, 환자를 옮겨야 하는 구급 대원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주는 택배기사들, 음식 배달 라이더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면과 접촉을 감수하면서 우리 생활을 떠받치고 있다. (#36 ‘거리 두기’의 역설 중에서, 256~257쪽)


사회를 읽는 올바른 눈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사는 방법을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주경 앵커의 글은 좋은 지침서다. 적확하며 부드럽고 차갑고도 안온하다. 2020년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진행 중이다.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간다. 현재 5천 명을 넘나드는 확진자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뉴스로만 보는 먼 일상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견디는 삶이다. 힘겨운 일상이지만 그래도 힘을 보태야 하는 한다. 터널은 끝이 있고 우리 삶은 계속되니까.


세상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어둠 다음에는 반드시 빛이 오는 것이 순리이니까.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현실을 어찌 버티겠는가. (#48 그로부터 1년 중에서,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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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03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아침마다 만나는 박주경 앵커로군요. 글도 쓰네요. 몰랐습니다.
근데 29층까지 걸어서 치킨 배달을 했다구요? 이거 실홥니까?
왜 얼리베이터를 못 타나요?
그걸 시켜 먹는 사람은 사람은 누구죠?
암튼 생각할게 많은 책 같네요. 읽어 봐야겠습니다.

자목련 2021-12-03 17:28   좋아요 1 | URL
네,그 앵커가 맞습니다. 이미 다른 책도 두 권이나 있더라고요.
치킨 배달은 실화입니다. 갑질 이파트의 이야기지요.
다양한 사회이슈에 대해 우리가 무엇 놓치고 생각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고 할까요.
뉴스 이면의 이야기와 함께 저자의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캑터스
사라 헤이우드 지음, 김나연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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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삶은 거칠게 없었다. 간섭하는 이가 없으니 자유롭다. 외롭거나 쓸쓸한 때가 오면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걸 인정하면 그만이다.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이가 있지만 서로 구속하지는 않기로 했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다. 사라 헤이우드의 소설 『캑터스』의 주인공 마흔다섯의 수잔이 그랬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지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다른 방향을 불러온다. 수잔도 예외는 아니었다. 뇌졸중을 앓던 엄마의 죽음과 유언장, 그리고 계획에 없던 임신이었다.


런던이라는 큰 도시에서 살며 나는 혼자만의 이상적인 삶을 꾸렸다. 내게 딱 알맞은 집과 능력을 꽃피울 수 있는 직장, 그리고 문화생활에 접근성까지. 회사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었다. (35쪽)


일흔여덟 엄마의 죽음은 의외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문제는 유언장의 내용이었다. 엄마가 남동생 에드워드에 종신 재산 소유권을 증여한 것이다. 마흔세 살의 에드워드는 사고뭉치였고 언제 철이 들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법을 전공한 수잔은 잘못된 유산 분배를 바로 잡기로 결심한다. 가족 간의 분쟁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잔과 에드워드는 매번 만날 때마다 갈등을 빚었고 둘 사이에 에드워드의 친구 롭이 중재 역할을 했다. 수잔은 그런 롭을 의심했다. 에드워드의 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롭은 친구와 수잔이 잘 지내기를 바랐다. 임신한 수잔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혼자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던 지나 삶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기분마저 느꼈다. 엄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자책,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신 아빠에 대해 생각들, 때때로 그들을 만나면서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거나 추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쩌면 수잔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를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지도 모른다. 무조건 에드워드만 사랑했던 엄마, 술을 제어하지 못한 아빠로 인해 창피했던 기억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임신한 사실을 알고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수잔은 임신으로 인한 변화를 감당하면서 차근차근 엄마가 될 준비를 하면서 유언장에 관해서도 다양하게 알아보았다. 이모와 엄마의 친구, 목사님을 만나면서 유언장의 효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법적 효력을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할 때마다 롭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친절을 의심하고 경계했다. 롭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고 다가와도 밀어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케이트가 있었다. 수잔의 이웃으로 가끔 귀찮을 정도로 찾아오는 두 아이의 싱글맘. 임신에 대한 모든 과정을 경험자로 알려주고 도움을 주었다. 스스로 가시를 내세우고 닫혀있던 수잔에게 롭에 대한 마음을 열게 하고 다양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인생은 항상 다른 길을 안내한다. 수잔에게도 그랬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밝혀진 진실과 아이를 갖고 가족에 대한 다른 생각을 품었고 케이트로 인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배웠다. 고집스럽고 완고한 삶 대신 유연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알려준다. 뽀족한 가시로 자신을 감싸는 선인장 같았던 수잔에게 단호하고 까칠한 말투 뒤에 숨겨왔던 외로움과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라는 걸 말이다.


소설에서 롭이 선인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마치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말 같다. 각박하고 치열해진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선인장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내가 알던 가시가 아닌 수분을 간직한 가시를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손가락으로 커다란 선인장을 매만지며 그는 선인장이 수분을 간직하기 위해 잎이 아니 가시로 진화했다고 했다. 그리고 변형된 줄기가 식물에 약간의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가 생겼다고 믿지만 사실은 아니라고도 했다. 또 선인장의 두꺼운 표면과 잘 발달한 뿌리, 넓은 다육질의 줄기가 수분을 저장하고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진화한 거라고 했다. (250쪽)


서로가 잘 몰라서 시작된 작은 오해는 알려고 하지 않을 때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에드워드와 수잔의 관계는 모든 가족의 그것과 닮았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노력해야 한다는 걸 소설은 말한다. 어른이지만 여전히 성장해야 하는 수잔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렇다. 읽는 내내 분노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수잔의 성장통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리즈 워더스푼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는 즐거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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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2-0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소설리뷰는 언제나 읽어보고 싶게 만들어요. 도입부부터 콰과과강!!!! 아.. 게다가 성장통이라니 ㅜㅜ 읽고 싶다.....

자목련 2021-12-08 15:14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뭔가 특별한 것 없는데 또 그게 매력인 것 같아요.
주인공이 중년 여성이라는 점도 흥미롭고요^^
 
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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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어떤 순간에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일까.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해도 결국엔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걸 고백하는 일, 사랑의 힘이다. 때로 사랑은 무자비하여 감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프랑스아즈 사강의 미발표 유작 『마음의 심연』에서 그런 사랑을 만났다. 사위와 장모의 사랑이라니. 누가 봐도 부적절한 관계다.


그러나 프랑스아즈 사강에게 있어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만의 사랑, 그것이 주는 고요와 평안, 안정이라고 할까. 세상의 통념이나 관습에서 벗어나 개인이 느끼는 최적의 행복 같은 것 말이다. 끔찍한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 앞에서 돌아온 ‘뤼도빅’을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유령처럼 대했다. 아내 ‘마리로르’에게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경제적 여유였다. 화려하고 사치로 채워진 삶이 전부였다. 아버지 ‘앙리’도 다르지 않았다. 아들을 향한 진정한 보살핌이나 사랑이 아니라 사회적 명예와 지위가 중요했다. 뤼도빅이 회복되었음을 알리는 파티를 열기로 한다. 파티 준비를 위해 사돈인 뤼도빅의 장모 ‘파니’를 초대한다. 앙리의 두 번째 아내 ‘상드라’는 병약했고 처남 ‘필립’은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소설은 앙리의 저택 ‘라 크레소나드’를 배경으로 그곳에 거하는 이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들려준다. 프랑스아즈 사강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각자의 공간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상황과 성격을 소개한다. 가족 구성원으로 연대나 애정이 아닌 저마다의 목적과 욕망으로 채워진 관계 안에서 뤼도빅은 혼자였고 고독했다. 그런 뤼도빅에게 장모 파니만이 눈물을 보인 이었다. 그런 이유였을까.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저택의 서재 속 피아노 소리에 뤼도빅이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그 얼굴은 ‘아득하고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그 테마를 한차례 또 한차례 치는 동안, 절망감이 그를 압도했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 음악 안에 있는 것, 그의 주위의 대기 속에 떠돌던 그것을 경험한 적도, 포착한 적도, 누린 적도 없었다. (163쪽)


파니가 치는 슈만에 빠져들었다기 보다 그 순간의 파니에게 빠져든 것이다. 아니, 그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고 그녀가 누구이든 상관없었다. 그 순간 사랑은 시작되었으니까. 뤼도빅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파니에게 사랑은 전 남편뿐이었다. 하지만 파니 역시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진입한 순간 그들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두려움도 호기심도 부끄러움도 없는 또 다른 영역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194쪽)


권태와 우울에서 벗어난 뤼도빅에게 세상은 다시 아름다운 곳이었고 운전대를 잡게 만들었다. 아버지나 아내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고 파니는 고민하고 고뇌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외면할 수 없다. 거대한 저택 안에서 그들의 사랑은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킬지 모를 밀회의 순간, 온전한 쾌락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랑은 이런 것이었던가.


어쩌면 그런 둘 사이를 모르고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파니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앙리, 둘 사이를 진즉 알아채고 관망하며 즐기는 필립, 아무것도 모른 채 파티를 기다리는 마리로르가 있어 그들의 사랑은 더욱 은밀하게 빛을 발했는지도 모른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지금의 사랑은 눈부시고 찬란하다.


프랑스아즈 사강은 현재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사랑이고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미완의 소설이기에 더욱 그 사랑과 삶의 궁금해진다. 한편으로는 미완이라 다행이지 싶다. 살아가는 동안 사랑도 삶도 모두 미완의 상태이기에 우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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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5 1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구매해서 실눈뜨고 읽으려고 했는데 부적절한 관계를 봐버렸어요 ㅋ 알고읽어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사강 작품은 다 좋은거 같아요. 특유의 감정도 좋고 ^^

자목련 2021-11-25 12:09   좋아요 4 | URL
네, 알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어요!!
즐겁게 만나세요^^

잠자냥 2021-11-25 12:52   좋아요 3 | URL
헉 전 일부러 그거 안 드러나게 썼는데!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25 1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애초에 이 작품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고 썼다는데, 영화로 만들었다면 파니 역할 배우 누가 했을지 궁금해요.
지금 생각하기엔 왠지 중년의 카트린 드뇌브가 떠오릅니다만. ㅎㅎㅎ

자목련 2021-11-25 14:03   좋아요 3 | URL
초반에 마리로르와 필립을 의심했다가, 며느리와 시아버지인가 싶었어요.
저 혼자 답답했나 봐요. ㅎ
파니 역할도 궁금하지만 남주도 궁금해요. 언젠가는 영화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mini74 2021-11-25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글도 자목련님 글도 넘 좋잖아요 ㅠㅠ 읽어보고 싶은 마음, 쌓이는 책.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카드 그리고 갈등 ㅎㅎㅎㅎ

잠자냥 2021-11-25 17:28   좋아요 2 | URL
갈피를 못잡는 카드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1-11-26 15:16   좋아요 1 | URL
조금 더 고민하시고 결정하세요. 그 쯤에는 카드도 갈피를 잡겠지요. ㅎ
 
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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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표지,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다. 저 여인은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일까. 팔뚝에 드러난 타투 때문일까. 여인에게도 숨겨진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케이시의 장편소설 『네 번의 노트』는 읽기도 전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온 소설이다.


낡고 오래된 원룸 건물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한다. 여성 전용층 3층의 계단에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3층에는 301호부터 306까지 여섯 명의 여자가 혼자 거주한다. 죽은 남자는 303호의 남자친구. 사건 당일에 303호는 집에 없었다. 같은 층의 여섯 명의 여자는 모두 참고인이자 동시에 용의자가 된다.


소설은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들려준다. 경찰이 조사한 ‘내사 보고서’와 ‘참고인 진술서’의 형태로 각각 각각 여섯 명의 신상과 직업, 3층 이웃들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다. 죽은 남자가 6개월 전에 든 보험의 수령인이 여자친구인 303란 사실만으로도 범인으로 가장 유력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 나머지 5명에게는 특별한 동기가 없으니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 그렇듯 이 원룸에도 다양한 형태의 삶이 모였다. 무당인 301호,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302호, 사회복지사 303호, 지적장애가 있는 304호, 노점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305호, 건물 청소와 관리를 맡은 306호. 306호를 제외하면 미혼의 젊은 여성이다. 그들에겐 암묵적인 룰이 있다. 옷차림이나 화장으로 삶을 짐작할 뿐 서로에게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일이다.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목표가 같다는 정도다.


여섯 명의 화자가 돌아가면 자신의 삶과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원룸에 대한 이미지, 힘겹게 살아온 시간들, 직업에 대한 고충, 사회 전반에 대한 생각들에 이어 3층 여성들의 관찰한 이야기다. 귀신과 죽음,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에 고민을 들려주는 301호, 303호의 소음과 남자친구와의 다툼을 자세하게 기억하는 302호, 사회복지사 자격으로 자신을 찾는 303호를 좋은 언니라 말하는 304호, 옆집인 304호와 관리인 306호에 대해 언급하는 305호, 참견과 소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306호.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게 소설의 전부라고 여겼던 나 같은 독자는 점점 작가가 만든 분위기에 빠져든다. 자발적 비대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민, 외롭고 고독한 공간에서 벗어나 이웃과 소통을 원하는 마음, 보이는 게 아닌 들리는 것으로 타인의 삶을 짐작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똑. 똑. 똑. 똑

302호의 문을 두드렸다. 첫 방문할 때는 대개 노크를 네 번 정도 해야 한다. 두 번은 친근한 사이일 때, 세 번은 안면이 있을 때. 처 방문일 때는 노크 네 번이 적당하다. (235쪽)


저마다 감추고 숨겨놓은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드러난다. 소설 속 원룸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며 여섯 명의 화자는 결국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부다. 우리 역시 그들 중 하나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뜻이다. 1인 가구의 시대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훌륭한 추리소설이자 스릴러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은 끝났지만 삶은 끝이 없고 낡고 오래된 건물의 이미지는 오래 기억에 남아 한 번씩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서로 무관심하게 떨어져 살지만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운명공동체일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단단한 콘크리트 벽으로 뚜렷한 경계가 그어져 있지만 멀리서 보면 우리는 모두 빛으로 연결돼 있다.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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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1-2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싹..🥶

자목련 2021-11-25 11:56   좋아요 1 | URL
아, 정확한 표현이에요.
이 소설 다 읽고 소름 돋았어요 ㅎ

공쟝쟝 2021-11-25 12:05   좋아요 0 | URL
뭐랄까 되게 현실적일 것 같아서 ㅋㅋ 무서운거 읽고 싶을때 읽겠사와요!

자목련 2021-11-25 12:07   좋아요 2 | URL
맞아요, 내가 아는 원룸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무섭기도 하고요.

프레이야 2021-11-25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강렬한 느낌이 들어요. 오싹 소름 돋는 소설 요즘 좀 갈증 나던데 찜해 갑니다 자목련 님.

자목련 2021-11-25 14:07   좋아요 1 | URL
네, 표지처럼 내용도 그러해요. 영화로 만들어진다니 더 궁금해져요.

그레이스 2021-11-25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똑,똑,똑,똑
왜 이렇게 소름이 돋죠?

자목련 2021-11-27 15:44   좋아요 0 | URL
이제 노크 소리가 무섭게 들릴 것 같아요.
집콕으로 배달이 많아서 벨 대신 노크가 많은 요즘, 소설 덕분에 조금 경계할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