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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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건 쉽사리 망가진다.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라든가 신부처럼. 하지만 슬픔은 영원히 아름답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픔을 아름다움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194쪽

 

 돌아보면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를 채웠던 모든 것들은 미흡하고 불안하기에 아름답다. 청춘이라서 세상을 부정할 수 있었고 타자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해받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르게 살 거라 다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감정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이응준의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는 청춘의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 문하가 이삿짐을 싸면서 한 권의 노트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글로 남겨진 건 그의 과거였다. 잊고 있었던, 잊기를 바랐던 기억이었다. 소설은 문하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과거로의 여행인 것이다.

 

 문하는 열 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형이 생긴다. 남들에게는 재혼 가정이었지만 문하와 형 인하는 이복 형제였다. 정원이 있는 집에서 문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아버지는 낯설었지만 형 인하는 달랐다. 문하에게 형은 우주와 같은 존재였고 완벽한 사람이었다. 인하가 읽는 책, 인하가 들려주는 세상은 언제나 정의로웠고 빛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하는 인하에게서 더이상 빛을 볼 수 없었다. 인하는 문하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부정과 부패로 가득한 세상을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 세상과 타협하고 있었다.

 

 하나의 우주였던 형의 존재가 허물어지고 문하는 집을 나와 대학가인 가합동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산타 페를 만난다. 산타 페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예술가는 아니었다. 문하는 그를 형이라 부르며 카페 일을 돕거나 근처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그러다 수인이라는 여대생을 알게 된다. 문하는 왜 이곳에 머무르는지 모른 채 그들과 어울린다. 산타 페와 수인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산타 페와 수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소설은 끝까지 문하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후원했던 정치인에게 배신당하고 병들어 죽은 아버지, 형과 어머니의 묘한 관계가 언급되지만 문하의 감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족들에 대한 문하의 분노나 절망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다. 인하를 사랑한 만큼 그에게 듣고 싶은 변명이 많이 있었을 텐데, 문하는 철저하게 고통의 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다만 산타 페와의 일상을 통해 형 인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짐작할 뿐이다.

 

 문하가 혼자서 보낸 그 시절을 우리는 뭐라 불러야 옳을까? 나를 찾는 시간이라 해야 할까. 가장 사랑했던 이를 용서하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간이라면 맞을까. 15년이 지난 후 문하가 다시 찾은 가합동의 카페는 여전하지만 산타 페의 소식은 없었다. 그 시절은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 일생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면 그건, 과연 저마다의 인생 가운데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곰곰이 살피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중심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별자리를 만든다 하더라도, 이제는 서로를 덩그러니 수억 광년 밖에 두지 말자. 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 산산이 부서지는 밤하늘 별들의 섬광처럼 우리 지난날 아파했단 말도 쉽사리 하지 않도록, 그대는 내게로, 나는 그대의 인력 안으로 무모하게 손 내밀 순 없는지.’ 270~271쪽

 

 이응준이 스물여섯 살에 쓴 이 소설은 상처로 얼룩진 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삶을 뒤흔들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상처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채우는 하나의 과정은 아니었을까. 열 살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말이다. 아름답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은 내가 청춘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청춘들을 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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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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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는 뜨고 진다. 아침과 낮은 사라지고 밤이 된다.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진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과 자연들이다. 그저 평이한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었다는 걸 나는 꽃이 아닌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소리로 느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리는 청량한 새의 지저귐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새는 어디서 겨울을 보내고 이곳으로 날아왔을까?

 

 길고 긴 겨울잠에 빠져드는 동물,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긴 여정을 떠나는 바다거북,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몸짓으로 번식하는 식물들, 모든 것은 경이롭고 신비하다. 다만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이다.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은 이런 자연을 이야기 한다. 항구도시인 프로빈스타운에서 자연과 함께 살며 느끼는 일상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시인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을 그려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꾸미지 않고 고스란히 기록하고 전한다. 그림을 그리듯 아름다운 자연을 글로 섬세하게 스케치한다.

 

 특별하거나 놀랄만한 일상이 아니다. 그저 눈에 닿는 풍경들, 손에 잡히는 자연들이다. 동반자인 몰리 멀론 쿡과 기르는 개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고 지난 시절을 추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통해 내게로 온 그것들은 매우 놀랍고 특별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나는 왜 몰랐을까.

 

 ‘3월이다. 파랑새들이 하늘에서 미끄러지듯 날아다닌다. 4월이다. 고래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희귀한 참고래가 해안에 도착한다. 만으로 들어오고, 가끔 항구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장난을 아는지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뒤채고, 물 위로 뛰어오른다.’ 23쪽 「흐름」 중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밀과 백합이 자라거나 자라지 못하는 건 비에 달려 있다. 그 해에 비가 넉넉히 내리면 가을에 나무들은 고운 단풍 빛깔로 우리를 눈멀게 한다. 비의 양에 따라 연못도 신선해지거나 물이 말라 늪지로, 심지어 사막으로 변하기도 한다.’ 132쪽 「위안」 중에서

 

 계절이 바뀌고 장마나 가뭄에 따라 우리 삶이 달라진다는 생각만 했을 뿐 나무와 숲, 시내와 강을 따라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은 잊고 있었다. 세상이 그들을 주목하는 동안 잠시 그들을 생각했다. 시인이기에 그녀는 모든 것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은밀하게 변화하는 경이로운 우주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책엔 산문 외에도 시와 그녀가 읽은 ‘랠프 월도 에머슨’과너새이얼 호손’에 대한 글도 있다. 시인이 소개하는 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의 문학작품은 특별하게 다가왔고 특히 호손이 그랬다. 호손의 작품 속에 녹아 든 그의 생과 불운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천천히 읽어야 좋을 책이다. 한 문장을, 한 문단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좋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 생에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사는 날들 중 완벽한 날들이라 꼽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완벽한 날들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 완벽한 날들은 우리 곁을 지나간다.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짧은 순간처럼 말이다.

 

 ‘겨울 아침, 나는 5시나 그 전에 계단을 내려온다. 하늘은 검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나는 커피를 끓이고 창문마다 다니며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분홍, 귤색, 라벤더색 빛이 동쪽 수평선을 따라 돌진하다가 안개처럼 하늘로 기어올라 어둠의 안쪽 모퉁이에서 바르르 몸을 떤다. 우주의 은밀한 곳! 색깔들이 물 속으로 흘러들고 모든 것이 푸르게 변한다.’ 122쪽 「먼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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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박영택의 마음으로 읽는 그림 에세이
박영택 지음 / 지식채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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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하루는 같은 듯 다르다. 반복된 시간을 살지만 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는 생의 마지막 하루가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생의 첫 하루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루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것이다. 박영택의 『하루』는 그런 우리네 일상을 그림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을 50편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새벽이란 시각을 시작으로 깊은 잠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밤까지의 다양한 삶을 모습을 그림, 사진, 조각 등 예술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조금은 특별한 하루 여행이라 해도 좋겠다.

 

 책은 하루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채워지고 어떤 감정들로 새겨지는지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담아 낸다. 시간의 흐름으로 소개하는 예술 작품은 놀랍게도 우리의 삶과 너무도 비슷하다. 아니, 똑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어떤 그림은 따뜻하고, 어떤 그림은 유쾌하고, 어떤 그림은 외롭고, 어떤 사진은 아프다. 감각적인 그림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한 장의 사진에 포착된 생생한 삶의 단면은 수많은 나의 하루와 오버랩 된다. 특히 이런 작품들이 그렇다.  

 

 

 

 김경덕, <일상 - 보물> 32쪽

 

좌혜선, <부엌, 여자> 190쪽

 

 

서상익, <엄마의 정원>196쪽

 

 

 ‘일상은 늘 오늘이다. 그것은 매일매일 다소 지루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된 과정 속에 미세한 펀치를 만들어놓는 것이 또한 일상이기도하다. 겉으로는 하등의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유심히 그리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는 경이로운 차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36쪽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주변의 풍경, 내 손길이 닿는 사물들, 내가 매일 보고 사용하는 것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디 사물 뿐인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이유로 소홀하게 대해는 가족들에 대한 애틋함도 함께 몰려온다. 한결같은 반복이 주는 고마움을 생각한다.

 

 

박강원, <서울 37> 116쪽

 

 

 ‘삶은 이렇게 찰나의 우연적인 것들로 응집되어 있고 신기루처럼 허망하게 되어 있다. 매일 반복되지만 이 장면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 공존하는 것이 일상이다. 매일매일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있겠고 또는 처음으로 이 길을 오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시는 이곳에 이들이 이렇게 모여 있을 수는 결코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매 순간순간의 장면은 단 한 번뿐인 마지막 ‘씬’이다. 유일무이한 장면인 것이다.’ 120쪽

 

 

 

이동환, <문득 깨어 있는 밤> 296쪽

 

 

 ‘잠이란 스스로의 몸으로 시작해서 끝을 함께하는 신비한 여정이다. 그것은 그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고 공유할 수도 없으며 삶과 죽음과 마찬가지로 페쇄적이고 고립된 한 인간의 육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잠들기는 평화롭고 행복하고 편안한 일임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으며 불안하기도 한 일이다.’  298쪽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경험한 이라면 이 그림 속에 그대로 스며들지도 모른다. 내일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이 잔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를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다. 숨가쁘게 지나온 하루를 끝내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 뒤척이다 불을 켜기도 할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을 이처럼 다양한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가장 편안 공간이 주는 휴식, 먹고 치워야 하는 일상, 치열할 수밖에 없는 현실, 고독하고도 허무한 순간, 숨기고 싶었던 내면의 불안과 슬픔까지 잘 전달하고 있다. 그림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들이 조금 더 크게 실렸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안다. 현재의 순간, 이 하루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하루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하루를 가만히 돌아볼 만큼의 여유는 없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말을 건다. 나만의 하루를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살포시 손을 내민다. 얼마나 바쁘게 보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나치고 있었던 삶의 풍경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그 하루로 이어진 삶의 조각들을 통해 현재의 나를 생각한다. 어제였던 오늘을 어떻게 보냈는지, 내일은 또 어떻게 보낼지 말이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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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와 나 창비청소년문학 48
김중미 지음 / 창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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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학교는 무서운 곳이 되버렸다. 함께 하는 세상을 위해 필요한 도덕이나 정의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좋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친구라는 이름은 경쟁자 뒤로 가려지고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학교 폭력에 대해서도 나만, 내 아이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때문에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직접 맞서는 이가 적은 것이다.

 

 표제작 「조커와 나」는 근육이 마비되는 희귀병을 앓는 정우와 짝 선규의 이야기다. 정우의 도우미가 된 선규는 말 그대로 도우미 역할만 한다. 정우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특수반과 화장실에 데려다 주는 게 전부다. 하지만 정우는 선규를 좋아하고 진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소설은 조커라는 별명을 가진 조혁을 필두로 정우를 따돌리고 폭언을 일삼는 모습을 통해 중학교 남자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보여준다. 선규는 그런 아이들이 못마땅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나는 정우에게 친구라 말해 놓고도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정우가 일기에 쓴 것처럼 나는 정우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였는지 모르나 내게 정우는 그저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꺼이 내 것을 나눠 줄 수 있는 대상일 뿐이었다. 서로 편해졌다 해도 그것이 우정이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정우가 나에게 갖는 기대가 크다는 걸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뭔지 모를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49쪽, 조커와 나」

 

 선규는 보통의 아이들을 대표한다. 조커가 가해자, 선규가 피해자를 대표하듯 말이다. 하지만 조커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집을 나간 엄마 대신 외할머니와 지내다 보육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정우가 죽고 남긴 일기장을 통해 선규는 그 간의 모든 일을 알게 된다. 선규에게 진짜 친구가 되주지 못한 점, 혁이에게 편견을 가졌던 점을 후회한다. 김중미는 폭력 뒤에 가려진 아이들의 상처를 보려 한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심한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외에 모든 게 벌점으로 이어지는 학교를 꼬집는 「불편한 진실」, 학교의 입장만 앞세워 성적으로 아이들을 상, 중, 하로 나누고 입시만을 강요하는 교육 현실을 고발하는 「꿈을 지키는 카메라」,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지만 그대로 답습하는 안타까운 모습의 「주먹은 거짓말이다」, 오랜 시간 심각한 따돌림으로 인해 자살한 친구를 기억하며 폭력에 맞서기 위해 용기를 내는 소녀의 이야기 「내게도 날개가 있었다」를 통해 김중미는 책을 빌려 학교 폭력과 따돌림에 대해 직구를 던진다. 허구가 아니라 실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재를 현실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해서 생생한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이 사회가 청소년을 청소년이 아닌 어른으로 보고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럽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호 받아야 할 아이들,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걸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과연 이 같은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아파하는지 어른들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 어른들이 바뀌고 변해야 한다. 아이들이 멋진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학교 폭력을 막는 것은 가치의 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등과 우등을 가르지 않고, 일등과 꼴등을 차별하지 않고, 불의에 눈감고 정의를 외면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부끄러움과 염치가 무엇인지 알게 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와 세상을 탓하며 그 폭력에 무릎 끓거나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거대한 집단에서 겨우 몇 사람의 회심이나 용기가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작은 용기와 회심이 모이면 언제가는 바뀔 수 있다.’ <267쪽,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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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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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자기 자리를 찾아야만 완성되는 퍼즐이라면 그 과정을 견디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자리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그 자리에 대한 확신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스스로 찾아 나서고 누군가는 정해진 자리에 만족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삶이 행복한 것일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스의 짧은 생을 통해 무척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한스는 정해진 자리가 아닌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스의 생은 한스가 아닌 주변 어른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목사님, 교장 선생님은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나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다. 물론 한스에게는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주변의 높은 기대와 관심이 한스를 짓눌렀지만 단 한 번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정해준 자리에 자신을 맞춰야만 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친구 하일너를 만나면서 한스는 조금씩 변화한다. 무엇이든 당당하고 자유로운 하일너와 단단한 우정을 키운다. 하지만 제도와 관습에 반하는 행동을 보인 하일너가 징계를 받았을 때 한스는 그를 옹호할 수 없었다. 한스의 마음에는 언제나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날품팔이꾼이나 하는 짓이야. 너는 모든 공부를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게 아니야. 단지 선생님들이나 아버지가 무서워서 하는 거라고. 1등이나 2등이면 뭐해? 나는 20등이지만 성적에 목을 매는 너희 공부벌레들보다 멍청하지 않아.” 95쪽

 

 성적과 대학 입시에 얽매였던 시간을 돌아보면 하일너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학생으로 공부에 주력하는 한스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십 대라는 시기는 애매하다. 어떤 신념이나 자아가 확립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보낸 어른들에게는 한스만이 옳았다. 하일너는 그 틀을 스스로 벗어던졌고 그곳에 남은 한스는 학업에 매진하지만 신경쇠약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거나 달래주지 않았다. 한스에게 기대를 갖는 이는 없었다. 이제 그는 마을의 희망이 아니었다. 거기다 사랑의 아픔까지 겪어야만 했다. 왜 그를 안아주는 이가 없었을까. 잠깐의 꾀도 부리지 않고 공부만 했던 한스에게 필요했던 건 서기나 기계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괜찮다는 말이었다. 아니, 서기나 기계공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알려줘야 했다. 기계공이 되기로 하고 수습공의 길을 걷는 한스가 힘든 그 과정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한스는 어떤 것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자연이 주는 평온만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과일주스의 이 향기를 마시는 건 좋은 일이다. 이 향기를 마시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멋지고 좋은 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5월의 이슬비와 좍좍 쏟아지는 여름비, 서늘한 가을 아침이슬과 봄날의 포근한 햇볕과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하얗게 또는 장밋빛으로 빛나는 꽃들, 수확을 앞둔 잘 익은 과일나무의 적갈색 윤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한 해가 주는 갖가지 아름다운 일과 즐거운 일들을 말이다.’ 164쪽

 

 어쩌면 이토록 평범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너무 빨리 알게된 게 한스의 불행인지도 모른다.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것들이 허무하게 여겨졌을 테니 말이다. 한스에게 좋은 집과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일너처럼 느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버지나 목사, 교장 선생님 중 누구라도 한스에게 원하는 만큼 낚시를 해도 좋다고, 신학교에 떨어져도 괜찮다고 말을 해줬더라면 그는 그토록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퍼즐을 잘 맞춰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 퍼즐 한 조각 잃어버렸다고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게 당연한 것처럼 분명 한스의 절망과 고뇌는 다른 이름이 되어 빛났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방황하는 수많은 한스와 그들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걷어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이상 또다른 이름의 한스를 잃어서는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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