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심연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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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어떤 순간에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일까.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해도 결국엔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걸 고백하는 일, 사랑의 힘이다. 때로 사랑은 무자비하여 감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프랑스아즈 사강의 미발표 유작 『마음의 심연』에서 그런 사랑을 만났다. 사위와 장모의 사랑이라니. 누가 봐도 부적절한 관계다.


그러나 프랑스아즈 사강에게 있어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만의 사랑, 그것이 주는 고요와 평안, 안정이라고 할까. 세상의 통념이나 관습에서 벗어나 개인이 느끼는 최적의 행복 같은 것 말이다. 끔찍한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 앞에서 돌아온 ‘뤼도빅’을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유령처럼 대했다. 아내 ‘마리로르’에게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경제적 여유였다. 화려하고 사치로 채워진 삶이 전부였다. 아버지 ‘앙리’도 다르지 않았다. 아들을 향한 진정한 보살핌이나 사랑이 아니라 사회적 명예와 지위가 중요했다. 뤼도빅이 회복되었음을 알리는 파티를 열기로 한다. 파티 준비를 위해 사돈인 뤼도빅의 장모 ‘파니’를 초대한다. 앙리의 두 번째 아내 ‘상드라’는 병약했고 처남 ‘필립’은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소설은 앙리의 저택 ‘라 크레소나드’를 배경으로 그곳에 거하는 이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들려준다. 프랑스아즈 사강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각자의 공간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상황과 성격을 소개한다. 가족 구성원으로 연대나 애정이 아닌 저마다의 목적과 욕망으로 채워진 관계 안에서 뤼도빅은 혼자였고 고독했다. 그런 뤼도빅에게 장모 파니만이 눈물을 보인 이었다. 그런 이유였을까.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저택의 서재 속 피아노 소리에 뤼도빅이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그 얼굴은 ‘아득하고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그 테마를 한차례 또 한차례 치는 동안, 절망감이 그를 압도했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 음악 안에 있는 것, 그의 주위의 대기 속에 떠돌던 그것을 경험한 적도, 포착한 적도, 누린 적도 없었다. (163쪽)


파니가 치는 슈만에 빠져들었다기 보다 그 순간의 파니에게 빠져든 것이다. 아니, 그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고 그녀가 누구이든 상관없었다. 그 순간 사랑은 시작되었으니까. 뤼도빅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파니에게 사랑은 전 남편뿐이었다. 하지만 파니 역시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진입한 순간 그들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두려움도 호기심도 부끄러움도 없는 또 다른 영역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운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194쪽)


권태와 우울에서 벗어난 뤼도빅에게 세상은 다시 아름다운 곳이었고 운전대를 잡게 만들었다. 아버지나 아내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고 파니는 고민하고 고뇌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외면할 수 없다. 거대한 저택 안에서 그들의 사랑은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킬지 모를 밀회의 순간, 온전한 쾌락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랑은 이런 것이었던가.


어쩌면 그런 둘 사이를 모르고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파니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앙리, 둘 사이를 진즉 알아채고 관망하며 즐기는 필립, 아무것도 모른 채 파티를 기다리는 마리로르가 있어 그들의 사랑은 더욱 은밀하게 빛을 발했는지도 모른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지금의 사랑은 눈부시고 찬란하다.


프랑스아즈 사강은 현재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사랑이고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미완의 소설이기에 더욱 그 사랑과 삶의 궁금해진다. 한편으로는 미완이라 다행이지 싶다. 살아가는 동안 사랑도 삶도 모두 미완의 상태이기에 우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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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5 1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구매해서 실눈뜨고 읽으려고 했는데 부적절한 관계를 봐버렸어요 ㅋ 알고읽어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사강 작품은 다 좋은거 같아요. 특유의 감정도 좋고 ^^

자목련 2021-11-25 12:09   좋아요 4 | URL
네, 알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어요!!
즐겁게 만나세요^^

잠자냥 2021-11-25 12:52   좋아요 3 | URL
헉 전 일부러 그거 안 드러나게 썼는데!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25 1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애초에 이 작품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고 썼다는데, 영화로 만들었다면 파니 역할 배우 누가 했을지 궁금해요.
지금 생각하기엔 왠지 중년의 카트린 드뇌브가 떠오릅니다만. ㅎㅎㅎ

자목련 2021-11-25 14:03   좋아요 3 | URL
초반에 마리로르와 필립을 의심했다가, 며느리와 시아버지인가 싶었어요.
저 혼자 답답했나 봐요. ㅎ
파니 역할도 궁금하지만 남주도 궁금해요. 언젠가는 영화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mini74 2021-11-25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글도 자목련님 글도 넘 좋잖아요 ㅠㅠ 읽어보고 싶은 마음, 쌓이는 책. 갈피를 잡지 못하는 카드 그리고 갈등 ㅎㅎㅎㅎ

잠자냥 2021-11-25 17:28   좋아요 2 | URL
갈피를 못잡는 카드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1-11-26 15:16   좋아요 1 | URL
조금 더 고민하시고 결정하세요. 그 쯤에는 카드도 갈피를 잡겠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