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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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티머 J. 애들러와 찰즈 밴 도런이 지은 <독서의 기술(How to read a book)>(범우사, 1986)이란 책을 보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책이 속하는 장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나는 이 말에 그리 주목을 하지 않았었다. 장르라는 것은 그 안에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구태여 확인작업을 선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장르의 혼합, 혹은 장르의 파괴라고 할만한 작품들이 활발하게 양산되고 있는 것이 요즘 추세인데, 구태여 기존의 장르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 대충 이런 심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으로 인해서 이번 책읽기는 낭패를 보고 말았다. 나는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여기저기에 낙서를 하는 편인데, 중간 정도 읽었을 때 이렇게 써넣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길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박물적인 기술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음)' 이것이 나의 오류였다. 처음부터 장르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무심결에 소설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로 생각한다면, 내가 적어놓았던 지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흥미롭기 위해서는, 싱싱하고 독특한 소재를 잡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요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한 법이니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그리고 저자는, 요리의 달인은 아닌 셈이다. 똑같은 소재를 소설적인 관점에서 작품으로 만들었다면, 훨씬 재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작품의 장르를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분류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식으로 하자면 평전(評傳)에 적합할 듯 하다. 평전이란 '비평을 곁들인 전기'라는 뜻이니, 이 작품처럼 적당히 가미된 작가의 평가나 시대비판이 들어간 글에는 적합한 용어가 되리라. 평전이라는 장르 구분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이 작품을 읽어보니, 앞서 내가 찾았던 결점은 다소 상쇄가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을 평전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평전이란,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다만 그 평가에 있어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너무 적기도 하고, 사실을 허구처럼 (즉 소설처럼) 전달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작품을 소설로 착각했던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작품은 소설과 평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서 보여주는 사전의 편찬과정, 그리고 모국어(母國語)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모습은 흥미로우면서도 부럽다. 우리에게 저런 부분이 부족했다는 것을 반성하게 해주었기에 더욱. 저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문화적 자부심이란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문화적 자산이나 역량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계기를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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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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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이란, 참으로 지저분한 감정이다. 물론 그 자체로야 어떨는지 모르지만, 자칫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자주 짝을 이루는. 질투나 집착이니 하는 것이 모두 그런 변질된 감정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사랑의 유통기한은 매우 짧다. 쉽게 빠져드는 만큼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영원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진리가 사랑을 항상 허약하게 만든다.

나는 영원히 롤리타를 사랑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역시 그 애가 영원히 롤리타가 될 수 없음도 안다. 그 애는 정월 초하루면 열세 살이 된다. 이 년쯤 지나면 그 애는 더 이상 님펫이 아닐 테고 '소녀'가 되고 그 다음엔 '여대생'이 된다 ― 그보다 더 끔찍스러울 수가 있을까. (p.92.)

이 작품 속의 사랑도 그러한 속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별을 예감할 수밖에 없는 사랑, 아니 그 보다 더 끔찍하게도, 이별한 뒤에도 집착이 남아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해야 하는 사랑이 이 자극적인 소재를 비극으로 만들어 준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비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변질된 모습까지도 인정해야 한다. 사랑의 파괴적인 모습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전부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의 온갖 변형적인 형태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역시 사랑의 전부를 바라보았다고 할 수 없다. 세상에 비난받지 못한 사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난받을 수 있는 사랑 또한 없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수많은 약점과 결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에는 진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이 포함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비록 사랑 그 자체에도 수많은 변질요인이 있지만, 진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이 빠져버린다면, 그 감정은 아무리 도덕적이고 성실하다고 하더라도, 아름다울 수는 없다. 사랑이 없는 부부의 모습보다 사랑이 있는 불륜관계가 아름다운 것이 그 때문이며, 세상의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가 불륜을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이 작품은 한 때 음란성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하긴,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문제적인 소재가 1955년 당시에는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겠는가? 그러나 작가가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이 포르노그래피와 구분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이런 구차한 감상문을 읽기보다는, 문제의 그 작품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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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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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默示錄)을 꿈꿔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만의 묵시록을 만들고 싶은 소망을 품었을 것이다. 본래, 작가라는 인간들은 세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고, 또한 자신의 손끝에서 세상을 만들어내는 쾌감을 경험해본 자들이니, 그들이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서 발현해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묵시록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종말을 홀로 남아 기록하겠다는 욕망이 아닌가? 아무도 보지 못한 사실을 자신만은 알고있다는 자만심의 표현이 아닌가? 썩어문들어진 현실을 전복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그러나, 묵시록을 만든다는 것, 남들이 바라보지 못하는 세계를 기록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의 몰락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 이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창조도 어렵지만 종말도 어려운 법이다.

아무도 바라본 적이 없는 세계이기에 오롯이 혼자만의 상상력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도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도 역시 종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만들어내는 묵시록들은 대부분 한계를 내보이고 있다. 기계들에 의한 인간의 멸망을 이야기했던 '터미네이터'도, 결국에는 인간을 사랑하는 기계에게 희망을 내보이고 말았고, 자본주의 권력에 의한 노동자의 멸망을 이야기했던 '강철군화'도, 결국에는 노동자의 승리에 대한 예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묵시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의 묵시록'마저도, 성령을 통한 구원에 기대고 말았으니, 어쩌면 '묵시록'이라는 것은 그 태생부터가 한곌르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작가도 인간에 불과할진데,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지 않고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온전한 절망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내가 보고 듣고 읽은 것들 중에서, 그마나 온전하게 묵시록에 가까운 것은 '지옥의 묵시록' 한 작품 밖에 없었다.)

이 작품도 역시 그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작가는 결말을 감춰버리는 기법을 동원해서,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과연 주인공이 <폐허의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작가는 바로 그것에 대한 답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타 묵시록류가 가진 한계, 허약한 희망에 기대서지 않겠다는 작가의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말이 희망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독자들이 주인공의 편지형식으로 되어 있는 작품을 읽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부터가 그들의 생존을 암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중간중간에 또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는 진술을 하고 있는 점도, 역시 주인공이 폐허의 도시를 탈출했다는, 아니 적어도 그녀의 기록만큼은 유출되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묵시록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꿈. 하긴, 꿈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작품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쉽게 극복할 수 있다면, 그 누가 절망을 이야기하려고 할 것인가? 절망이란 결국, 삶을 이어지게 하는 또 다른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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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를 만나러 가다
김경욱 / 문학동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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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90년대, 기존의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일단의 소설들이 발표되었을 때, 평론가들과 언론들은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로 이들을 지칭했다. 그들이 주목했던 '신세대 작가'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영화, 음악, 컴퓨터 등의 문화와 친숙할 것(나아가 그것들을 작품 속에 포함시킬 것). 섹스, 혹은 동성애 코드에 거부감이 없을 것. 등등.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서,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은 경박하고 가벼운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경배와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비난과 거부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다. '과연 이런 것들이 얼마나 긴 생명력을 가질 것인가?'

이제 10년이 지났다. 의심받았던 것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 동안,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는 급격히 그 힘을 잃어갔다. 소설 작품 속에 그러한 문화 코드를 삽입하는 경우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세대 작가'라는 그 말은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신세대'라는 호칭이 민망할 정도로 낡아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누가 신세대이기를 자청하는가? 이 정도의 문화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넘치고 또 넘쳐난다.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는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러한 특성을 고집하는 작가가 있다. 김경욱. 이름과 작품의 제목만 알고 지내던 이 작가의 책을 뒤늦게 읽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출판된 <제8회 21세기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던, 「토니와 사이다」라는 작품 때문이었다. 사실 문학상에 수록되는 작품은 대부분 변화에 둔감한 것을 선정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 작품이 선정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아직까지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어떠한 일이든지, 하나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진다. 이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 한 때는 진부하게 생각되고, 경계할 것으로 보여지던 그의 수법들을 다시 읽으니, 제법 참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예술장르에 기대어 있는 상상력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나 자신도 영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라나지 않았던가?

이제야 말로, 평론가나 언론이 만들어낸 거짓 담론에서 벗어나, 1990년대 새롭게 등장한 작가들에 대한 논의를 시도해볼 시기가 되었다. 그들의 기법이나 사고를 추종할 것이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 그러한 평가 이전에 우선 진지한 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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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전집 6 (양장) - 셜록 홈즈의 회상록 셜록 홈즈 시리즈 6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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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래의 구절.

- '기본적인 거지. 이건 추론자가 제3자에는 놀라워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경우들 중에 하나인데, 그건 그 제3자가 추론의 근거가 되는 작은 요소 하나를 놓쳤기 때문이야. 실은 자네가 발표하는 요란한 사건 기록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그것의 효과는 문제의 몇 가지 요소를 독자들에게는 밝히지 않고 자네 혼자서만 쥐고 있는데 달려 있네. 그런데 지금 나는 자네 독자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네. 나는 여태까지 인간의 두뇌를 혼란으로 밀어 넣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의 실마리를 몇 가지 손에 넣었네. 하지만 가설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한두 가지 요소가 아직 없어. 왓슨, 하지만 그걸 반드시 찾아내고 말 테야!' (「꼽추 사내」, p.207.)

이 부분은 홈즈가 왓슨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추리력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히 진하게 강조된 부분이 주목된다. 결정적인 몇 가지 단서를 숨겨두고 있을 것. 이것이야 말로 추리소설의 전개방식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셜록 홈즈의 대사라기 보다는 작가가 개입하여, 자신의 글쓰기 방법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부분은, 「장기입원환자」에 등장하는 부분(pp.235~237.)으로 홈즈가 왓슨의 표정변화와 행동만을 보고, 그의 생각을 알아맞추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홈즈의 추리력이 잘 발휘되는데, 내가 주목한 이유는 그의 추리력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장면은 이미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소설 「모르그가의 살인」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작품에서도 놀라운 추리력을 가진 '뒤팽'이 친구의 생각을 알아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이 두 작품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증거(상호텍스트성)가 된다. 사실, 소설작품들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것을 규명해내는 것은 독자와 비평가들의 몫인데, 문학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큰 의미가 없겠지만, 분명히 흥미로운 주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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