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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를 만나러 가다
김경욱 / 문학동네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1990년대, 기존의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일단의 소설들이 발표되었을 때, 평론가들과 언론들은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로 이들을 지칭했다. 그들이 주목했던 '신세대 작가'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영화, 음악, 컴퓨터 등의 문화와 친숙할 것(나아가 그것들을 작품 속에 포함시킬 것). 섹스, 혹은 동성애 코드에 거부감이 없을 것. 등등.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서,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은 경박하고 가벼운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경배와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비난과 거부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다. '과연 이런 것들이 얼마나 긴 생명력을 가질 것인가?'
이제 10년이 지났다. 의심받았던 것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 동안,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는 급격히 그 힘을 잃어갔다. 소설 작품 속에 그러한 문화 코드를 삽입하는 경우도 많이 줄어들었다. '신세대 작가'라는 그 말은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신세대'라는 호칭이 민망할 정도로 낡아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누가 신세대이기를 자청하는가? 이 정도의 문화적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넘치고 또 넘쳐난다.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는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러한 특성을 고집하는 작가가 있다. 김경욱. 이름과 작품의 제목만 알고 지내던 이 작가의 책을 뒤늦게 읽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출판된 <제8회 21세기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던, 「토니와 사이다」라는 작품 때문이었다. 사실 문학상에 수록되는 작품은 대부분 변화에 둔감한 것을 선정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 작품이 선정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아직까지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어떠한 일이든지, 하나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진다. 이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 한 때는 진부하게 생각되고, 경계할 것으로 보여지던 그의 수법들을 다시 읽으니, 제법 참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예술장르에 기대어 있는 상상력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나 자신도 영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라나지 않았던가?
이제야 말로, 평론가나 언론이 만들어낸 거짓 담론에서 벗어나, 1990년대 새롭게 등장한 작가들에 대한 논의를 시도해볼 시기가 되었다. 그들의 기법이나 사고를 추종할 것이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 그러한 평가 이전에 우선 진지한 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