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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1
가오싱젠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평점 :
동양의 정신을 서양의 몸체에 담아라, 혹은 서양의 정신을 동양적 미학으로 표현하라.
이 명제는 동양의 문화적 전통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동양문화의 가치 회복, 결코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바로 그 문제를 고민하도록 요구한다. 거부할 수 없다.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가 왜 쉽지 않은가? 그것은 이미 정치구조, 경제구조, 나아가 생활구조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영향력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은 너무나 크고 광범위하여,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맞다.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한 할 수 있는 일은, 동양의 영광에 대한 복원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사이의 의사소통이다.
나는 작가 가오싱젠의 가치를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그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1)중국 연극이 전통적인 경극과 사회주의 선동극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깨뜨려 주었다는 점, 2)그의 작품은 명징한 주제와 신선한 기법이 동시에 살아나고 있다는 점, 3)그가 자기 연극의 이론적 토대를 동양의 문화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점.
1) 중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전통극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극'이 가장 알졌다. 특히 서구인들에게 경극은 그리 낯선 문화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극의 세계에 공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서구인들에게 경극은 연극이라기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운 재주라는 인식이 강한다고 한다. 가오싱젠의 연극은 경극과는 다르다. 그는 서양의 연극전통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가 활용하는 이미지와 상징 등은 중국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화적 전통을 '연극'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2) 그가 다루는 주제는 보편적이다. 관료집단의 횡포와 그에 대응하는 민중의 반응을 보여준 「버스 정류장」, '연극에 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독백」, 환경보호와 자연과의 교감을 주창하는 「야인」, 이들의 주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의 관객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그의 독창성이 발휘되는 것은 기법적인 측면이다. 그는 '공연을 위한 제안'을 통해서 배우들이 사실적인 연기를 하기보다는, 중국의 연기기법인 '신사(神似)'에 따르라고 주문한다.
보다 직접적인 기법은 그가 '다성부(多聲部)'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존의 연극이 등장인물들 간의 주고받는 대화와 여러 명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코러스로 이루어진데 비해서, 이 기법은 여러 명이 서로 목소리 - 하지만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것이다. 이는 극 중의 혼돈을 나타내는데 유효하며, 아울러 동참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서 현대인의 소외를 그리는데 탁월하게 작용한다.
3) 그는 극작 활동과 함께 연극의 이론과 평론을 병행하는데, 이를 통해 그의 연극이 동양적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토대에서 만들어진 연극이기에,「야인」에 삽입된 중국설화와 민요, 그리고 '우임금의 걸음걸이[禹步]'와 같은 장치들이 의미를 가지며, 이를 통해 구현되는 자연과의 화해라는 주제가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이처럼 가오싱젠은 자신의 문화적 전통과 서구의 현대문명 사이의 소통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천안문사태에 반발하여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정작 중국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로 묶여있다. 또한 그는 중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론적-작품적 현실과 정치적-사회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소통을 꿈꾸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