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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찬찬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창작과 비평 117호(2002년 가을호)> 
 

 

예전에 어느 분이 꼭 보여 줄 게 있다고 내 손목을 잡고 뛰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나를 한 그루 나무 앞에 세우더니 외쳤습니다. "이게 물푸레 나무야!"

우리는 뛰어오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나무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마침 가을이라 노르스름한 연한 물이 잎사귀에 막 물들고 있던 나무. 플라타너스 가로수 속에 어떻게 한 그루 물푸레 나무가 섞여 있었는지! 그 분은 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우연찮게 유독 그 나무만 잎모양새가 좀 다르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그 날 부터  나무를 유심히 관찰하며 도감을 뒤진 끝에 나무이름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규원의 <한잎의 여자>를 낭송하던 나를 떠올리곤 꼭 보여 주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김태정의 시를 읽으면, 때로는 직접 보지 않고 그리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하게 물들이며,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하게 물올리는 시상은 먼저 나무를 보았더라면 미처 떠오르지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눈으로 먼저 사물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충분히 그리워할 필요가 있나 봅니다. 그리움은 사물 속의 진실을 꿰뚫을 힘이 있으니까요.

나는 물푸레나무가 드물게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수꽃다리나 개나리처럼 흔하다면 우린 물푸레 나무를 그다지 신비롭게 생각지도, 그리워하지 않을런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물푸레 나무야!"하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입속에서 터져 나오던 파열음 "ㅍ"이 있는 물푸레나무를 발음하던 그 분이 오늘 참 그립습니다.

2005. 2. 12.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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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5-02-12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 "우리는 눈으로 먼저 사물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충분히 그리워할 필요가 있나 봅니다." 이 글, 너무 멋진대요!

2005-02-14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2-1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내가 젤로 좋아하는 나무가 물푸레예요..전에 제 아이디이기도 하구...신랑이랑 첨 설악산 올라가던 길목에서 이녀석을 보았는데..그 선하게 서있는 모습에 감동 받았더랬지요...그때 나 담에 이나무를 마당에 심어봐야지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구요..하지만 어울리지 않겠네요..사람사는 마당에는..

진주 2005-02-1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총알님도 물푸레나무와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겸이는 세뱃돈 많이 받았는지요?)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움직이고 싶어
큰 걸음으로 걷고 싶어
뛰고 싶어
날고 싶어


깨고 싶어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고 싶어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

최승자(1952~ )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전문



이런 절규가 시가 되는 결정적 이유는 제목에 있다.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 시를 던져 버리고 시를 포기한 자리에서 홀연히 싱싱한 꽃이 피었다. 아울러 끝구절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를 보라. 이 땅의 남성시인들이 결코 쓸 수 없는 시다. 그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고 큰 걸음으로 걷고 있으니까…. 뛰고 날고 깨고 부수고 있으니까.'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그녀의 시는 들끓는다. 시를 공예품처럼 다듬고 있는 장인들은 많지만 시 덩어리로 태어난 시인은 흔하지 않다. 문득 그녀들이 보고 싶다.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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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5-01-0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제목 만 보고 박찬미님 시 한번 읽어보자고 들어 왔답니다. ㅎㅎ

잘 읽고 갑니다. 최승자씨 시.

미네르바 2005-01-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자님의 시는 폭발하는 것 같아요. 예고없이 지진이나 해일이 일어나듯, 혹은 용암이 끓어 넘치듯... 뭔가 가슴 속에서 늘 끓어 넘치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더라구요.

진주 2005-01-1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저는 시읽는 것도 미숙합니다^^ 저런 제목 붙일만큼 시에 대해 아파한 적이 없어서 더더욱 짓는 건 무리겠지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시를 짓고,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한다고 생각해요...최승자시인도 막강한 힘을 가진 뜨거운 불덩이 하나 가졌나 봅니다^^미네르바님.
 

삼 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1집 <이 시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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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맞이하는 것과 마흔을 맞이하는 것은 이토록 다르다네.

2005. 2. 24.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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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우물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말갛고 고요한 추억을 긷는 우물입니다.
첫눈을 보아도 파도를 보아도 달을 보아도 가슴저린 것,
추억이란 이렇듯 소슬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사진첩입니다.
추억은 지난날의 슬픔조차도, 울먹이며 가슴 조이던
불행조차도, 감미로운 향수 속으로 몰아넣어 주는
포도주와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 문정희의《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것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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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니 아름다웠다고 말 할 수 있다면
그 순간에 내가 진실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비록 칼 같이 가슴을 에어내어도,
고통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진실로 진실했다면 그 순간은 지나고 나면 어느새
내 가슴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투영됩니다.

"그땐 우리 그랬었지....."
하며 오늘도 추억의 우물 속을 들여다 보며
낡은 사진첩을 넘기듯 중얼거립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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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리 2004-10-18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잠시 머물다 갑니다. 내 추억의 샘의 깊이를 가늠하면서요...
 

슬픔은 누구인가

-정호승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정호승 :  1950년 경북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 대한일보'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데뷔한 그는 민중적 감각의 부드러운 일깨움의 시들을
발표했다. '반시' 동인이며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가 있고, 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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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똥나무를 찾다가 멋진 시를 만났다./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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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4-10-04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