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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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기도'같은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책, 편협하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유연하게 만들어 주는 책, 대리만족(가령 버거운 현실탓에 너무나 가고 싶은 여행을 미루고 있을 때  믿을만한 사람의 여행기를 읽는다거나..) 혹은 마음의 위안을 주는 책등.....저마다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앞서서 열거한 책의 범주에 속하더라도 '새로움'이란 양념이 빠진 다면, 김빠진 탄산음료처럼 혹은 와사비가 덜 드러간 냉면처럼 민숭민숭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퍽 좋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의 맛을 사랑하고, 푹 쉰 김장김치도 좋아라 먹는 토종의 입맛을 지닌 내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생소한 맛과 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을 준다. 하지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만난이후, 우리처럼 매운 고추가 요리에 많이 쓰인다는 것만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멕시코 음식에 대해 엄청난 호감과 지금 당장이라도 맛나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친밀감이 생겨버렸다. 어쩜 이 책을 따라 1월엔 크리스마스 파이를, 3월엔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를, 4월엔 아몬드와 참깨를 넣은 칠면조 몰레를  9월엔 초콜릿과 주현절 빵을 12월엔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우리와 계절이 다르니까 날짜의 조정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만큼 "양파는 아주 곱게 다진다"로 시작하는 '달..쌉..초'에는  맛과 향이 느껴질 만큼 자세한 요리방법이 이야기를 따라, 아니 이야기를 주도하며 하나하나 등장한다. 

막내딸은 어머니가 생을 다하는 날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봉양의 의무를 지닌다는 잔인한 가족전통을 고수하는 어머니 '마마 엘레나'  그리고 불운의 주인공 '티타', 사랑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겠다며 티타의 언니와 결혼하는 '페드로' 그들의 얘기가 때론 코를 톡 쏘는 매운 맛으로 때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달콤함으로 때론 당황스럽지만 입맛을 당기는 알싸한 맛으로 때론 혀 끝에 닿기도 전에 진저리가 처지는 쓴맛으로 전개된다. 구석구석 "기억 속의 소리와 향을 전하며 과거의 어떤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특성을 지닌" 섹쉬한 냄새를 풍기며....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외면당한 티타의 보금자리는 각종 맛과 향이 넘쳐나는 '부엌'이다. 그리고 그 곳엔 음식과 관련 된 거라면 뭐든지 훤히 꿰뚫고 있는 '나차'가 있다. 그녀가 마련해준 음식과 보살핌, 지혜로 겉으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며 자라난다. 그리고 결국엔 나차와 부엌에서 배운 요리를 통해 억압당한 생의 에너지를 분출하게 된다. 티타의 요리는 단순한 요리가 아닌 마술과도 같다.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성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신을 찾아가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사랑의 힘에 이끌리기도 한다.

완고한 어머니의 자기애에 의해 쉼없이 상처받는 티타,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텐데' 하지만  그 누구도 부모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티타가 더욱 매력적인 이유, 그리고 이 소설이 그저그런 통속적인 사랑얘기로 끝나지 않는 것은 어머니로 대변되는 기존의 세계로부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부터 티타는 독립을 선언하며 끝내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성의 자기 찾기는 어느날 갑자기 티타가 해준 음식을 먹고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욕구를 발산하며 창녀로, 다시 혁명전사로 거듭다는 또다른 언니와 그 언니의 출생비밀을 간직한, 악역일 수 밖에 없는 어머니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원제는 "Como agua para chocolate"로 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초콜릿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 그렇다 이 소설의 느낌을 참으로도 잘 반영한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 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다. 국적불명의, 그저 상혼에 놀아나는 기념일이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지만, 한편에선 소박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혹시 초콜릿보다 더 짜릿한 무엇이 필요하다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불 같은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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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2-1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 보고 있는데...나름대로 재미가 있더라구요.비교적 빨리 읽히기도 하고.잘봤습니다.전 어제 초콜릿보다 더 짜릿한 파티를 선사받았지요.^^ 아주 좋았는데... 리뷰 잘봤어요.

포로롱 2005-04-2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영화로 봤던 생각이 나요. 초콜릿 좋아하지요. 그보다 더 짜릿한 경험이라면 음...생각만 해도.^^
 
우렁이 속 같은 세상 - 김학철 산문집
김학철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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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마음이 맑아지는 산문을 읽고 싶었다. 한참을 기웃기웃 거리다, 푸른빛의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을 골라잡고 읽기 시작, 그런데 이게 웬일?? 저자인 김학철 할아버지의 그 고난에 찬 이력을 감안할 때, 그분의 글은 너무나 위트가 넘치는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보다 더 젊은 그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혁명의 시대를 누구보다 열렬히 살아낸 '김학철',  18살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투신, 왼쪽다리를 잃고 제국주의 일본의 감옥에서 해방을 맞는다. 이후 1945년 단편소설 <지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울에서 잠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다가  1946년 월북해 북한의 '로동신문' 기자로 일했으나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껴 1950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문화혁명을 비판하는 '20세기 신화' 필화사건으로 10년간 옥살이와 강제노역으로 그의 85해 인생 중 금쪽같은 14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그리고 2001년 9월25일 오후 3시39분 연변병원에서 겨드랑이 종양암으로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의 일생을 마친다. 선생의 유골은 그의 유언에 따라  영안진 앞 두만강가에서 고향인 원산앞바다를 향하여 띄워보내졌다. 아마 지금쯤은 꿈에도 그리던, 죽어서라도 가고 싶었던 선생의 고향에 다다르지 않았을까..

그의 본명은 홍성걸이다.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원이 되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다고한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서울 1988) 「격정시대」(1986 ·서울 1988), 소설집 「무명소졸」(서울 1989), 수필집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서울 1994),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서울 1995)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책인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은 '장백산' '연변일보' 현지 언론에 실었던 자전 수필을 모은 산문집이다.

격동의 세월을 최전선에서 살다간 김학철 할어버지, 푹 꺼진 눈에도, 치아가 온전치 못해 보이는 입가에도 그의 질풍노도같은 삶에는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미소가 너무도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글이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넘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귀여운 손녀와의 평등 뽀뽀와 같은 개인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1부와는 달리, 2부와 3부에서는 사회와 세태를 비판하는 글이 또 4부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문인의 입장에서의 고백과 성찰이 담겨져 있다. 이런 날카로운 비판의 글에서 한번 더 그의 강팍한 정신과 삶의 자세 그리고 젊은 영혼많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용기와 기백, 솔직당당함을 느낄 수가 있다.

'영원한 젊은이'라고 해도 조금의 지나침도 없는 '김학철' 그는 '과소망상증'이라  스스로 표현 할 만큼 철저한 자기비판과 여든이 넘어서도 당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을 웃게만드는 유머와 위트를 지닌 분이다. 내 나이 여든이 되어서도 과연 그와 같을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은 어떤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김학철 할아버지의 유언이다. 생각한대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사람이란 이름으로 태어나, 얼마나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나 역시 편한대로 살고, 사는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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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0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처음 나왔을 때 사보려고 수첩에 적어놓고 그냥 넘어간 책이네요.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나이 여든에도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땡스투 누를게요.^^

드팀전 2005-02-07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아주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제가 이 책을 보고 얼머지나지 않아 김학철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지겨운 감상에 젖어있는 글이 아니라 마른 장작처럼 단단하면서 님의 말씀 처럼 웃음이 묻어나는 좋은 산문이었어요.리뷰도 잘봤습니다.명절 잘 보내시구요.^^

히피드림~ 2005-05-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학철 선생의 [최후의 분대장]을 읽었는데 일제시대 다양한 항일혁명가들의 활동을 거의 유일하게 증언해주는 선생의 자서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데 있어 선생의 증언과 인터뷰가 중요한 역할을 했죠. 의열단단장 김원봉이 감옥에서 자살한 것을 증언한 것도 이분이었죠. 아, 이 책도 읽고 싶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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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집에서 엄마의 계모임이 있는 날이면 난 심통을 부리곤했다. 심부름을 시키는 우악스런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도 싫고, 시시콜콜 "어느 집엔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네 아들은 어떻고.." 끊임없는 수다가 아주 피곤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한 아주머니만은 싫지가 않았다. 어린 내가 봐도 그다지 줏대가 있어 보이는 분은 아니었지만, 어찌나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던지....입담좋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온갖 의성어와 다양한 표정으로 실감나는 얘기를 하시는 거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놀러 오시기만 하면  엄마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의 얘기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물론 결정적인 대목에선 쫓겨나야 했지만(아무리 입담좋고 번죽이 좋아도 애들은 빠져야 하는 얘기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달콤하고 향긋해서 입천정이 다 벗겨지도록 쪽쪽 빨아먹던 자두맛 캔디처럼 매혹적인 무엇이었다.  난 지금도 가끔 그 아주머니의 두툼한 입술과 얘기 중간중간 입맛 다시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이 책 '고래'가 그렇다. 이만큼 번죽좋고 다양한 표정으로 얘기를 풀어나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는 다기 보다는 입담좋은 약장수의, 동네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는 것같은 착각이 든다.

'고래'는 책의 두께이상으로 많은 사건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화자인 이야기꾼을 통해서 가능한일이다. 작가의 말처럼  " 어느 정도 파격도 가능하고, 구라도 치고, 능청도 떨고, 또 그러면서 백 프로 믿을 수도 없고, 그래서 의심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말솜씨에 점점 빨려들고....이야기꾼은 자유롭게 영화 속 인물을 끌어들여 현실의 인물들과 뒤섞고, 괴담이나 야담에서도 이야기를 끌어와서 자연스럽게 버무리고...." 화자를 통해 수많은 에피소드가 '놀기 좋은 무대'에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이 스토리의 중심은 한 노파의 잔혹한 복수다.  박색만큼이나 척박한 삶을 산 한 '노파'와 묘한 매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금복' 그리고,  여자라 보기조차 어려운 거구이면서 괴력의 소유자, 동시의 벙어리인 금복의 딸 '춘희' 그들은 모두 지난 세기에 관한, 그 시대에 벽돌을 만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탄생했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시 젠더로서의 여성뿐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뒤편에 존재했던 마이너리티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이 세인물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매력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중층적인 '금복'이다.  금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관능적인 여인에서  여장부로, 결국엔 여성에서 남성이 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물이다. 또 책을 읽는 내내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자 다 읽고 난 후, 가슴을 찡하게 만든는 '춘희', 그녀는 오로지 오감에 의해서만 사물을 인지하고 소통하는 벙어리다. 그녀는 자신의 부당한 고통과 불행에 대해, 너무도 냉정한 모성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에게 고통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닌 것이다.  작가는 몇년전 겨울 자신에게 길을 묻던 덩치가 큰 한 여고생에게서  "거대한 것의 비극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한 느낌은 '춘희'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고 '고래'를 통해 상징된다.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을 담고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란 책을 보면 지극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그 무엇의 도움도 없이 아이를 출산하는 여인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가히 충격적인 대목이었다. 슬프면서도 무섭고  서러우면서도 준엄한 생의 비밀을 본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고래'에 등장하는 노파, 금복, 춘희를 통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혼자 벽돌을 굽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고독해졌으며 고독해질수록 벽돌은 더욱 훌륭해졌다." 춘희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흙과 물, 불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점토벽돌'을 빚고 그 위에 자신이 오감을 통해 만나고 느꼈던 것들을 그려넣는다.   그리고, 그녀의 벽돌은  철저한 건축가의 장인 정신으로 금세기 최고의 건축물로 재탄생한다.

세상엔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혹은 아무하고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아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조금도 특별할 것 없어 눈에 띄지 않는 사람,  두드러지는 게 불편해 평범을 가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할 수 없고, 원하든 원치않든 특별한, 눈에 띄는 존재들이 있다. 작가는 이 책을  " 지난 세기에 관한, 벽돌을 굽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손에 쥐려하면 사라져버리는 진실처럼 어쩜 그들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선 그 어떤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순정한 마음과 깊이 있는 사유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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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2-03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생각하는 거지만...참 읽고 싶게 리뷰를 쓰시는군요.저도 빨리 읽어봐야겠어요.
글 처음에 나온 입담좋은 아줌마 이야기 생생하게 그려지는군요.잘봤습니다.

분홍달 2005-02-03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당^^낼이 입춘이라 그런지 마음은 벌써 봄을 향하고 있네요..

로드무비 2005-02-0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오래전 두툼한 입술 사이로 구수하고 질펀한 얘기를 쏟아놓으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던 것 같아요.
리뷰를 읽으니......^^

분홍달 2005-02-1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아주머닌 건강하실까요?!!
 

"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 너무 발버둥치며 살아왔습니다. 너무 긴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 하지만 지지 않으려고만 하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제 피붙이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면 좀 어떻습니까. 사람 사는 일이 이겼다 졌다 하면서 사는 건데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를 붙들고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강박에서 나를 풀어 주고 싶습니다. ....................................................................................................................................................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지고 싶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음악에 지고 싶습니다. 돈이 아니라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동안 알맞게 익기만을 기다리는 빵이었습니다. 적당한 온도에서 구워지기만을 기다리는 가마 속의 그릇이었습니다. 알맞고 적당한 온도에 길들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븐 같은 공간, 가마 같은 답답한 세상에 갇힌 지 오래되었습니다.....................................................................

적당히 얻은 뒤부터는 나를 방어하는 일에만 길들여진 건 아닌지요....."

좋은생각 2월호에 실린 도종환 시인의 글입니다.. 넉~넉하게, 누구에게나 하루쯤은 져주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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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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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샤갈의 그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리처드 롱'이란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계의 오지를 걸으며 그곳에서 만난 돌, 나무, 흙 등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 때론 삐까삐까한 전시장에서 그럴싸하게 전시도 하지만, 그가 걷기를 통해 만났던 소재의 현장에서 그 만의 전시를 하기도 한다. 보통 설치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엄청난 산고를 통해 창조했을 자신의 작품을 소유할 수 없는 작가에 대해 연민을 느끼곤 한다. (정작 당사자들은 괘념하지 않을테지만...) 하지만 '리처드 롱'의 작품에선 뭔지모를 숙연함을 느낀다. 그리고 반갑게도 '국자 이야기' 가운데, '100마일 걷기'를 통해 다시한번 그를, 우리나라 오지에서 채취한 돌로 만들었다는 '나선형'이란 작품을 떠올린다.

'국자 이야기' 한마디로 집중력이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몇번이나 책장을 되돌려 읽어야 했는지 모른다. 1인칭에서 3인칭 다시, 3인칭에서 나로, 독자들의 미간을 찌푸리게하며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점의 변화, 때론 국자로, 때론 코끼리로, 기린으로 변화하는 상징에 대해서도 쉽게 읽어 내려가긴 어려운 책이다. 난 엉뚱하게도 '국자 이야기'를 읽으며 '한 인간의 독백내지, 일기 또는 수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존재에 대한 다양한 고백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국자 이야기'를 비롯해서 '나는 봉천동에 산다' '돌의 꽃'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잘 자요, 엄마' '100마일 걷기' '입술' '좁은 문'까지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평론가 손정수의 말대로 하나같이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의 욕망이 진하게 드러나는 글들이다.  "나는 수년 동안 내가 벗어나지 못했던 균형에 대해 생각했다. 내 삶의 정교한 하나의 의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그것은 일시적인 정렬일 뿐이었으며 또한 나 자신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힘든 투쟁에 대한 역사이기도 했다...나의 삶은 그것으로도 이미 한 세계이며 나의 의지가 그 세계를 관통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첫번째 소설 '국자 이야기'의 결말부분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만이 자신다울 수 있다는 주인공은 외삼촌의 국자를 통해 균형과 대칭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르는데, '잘 자요, 엄마'에서도 역시 불안과 공포, 자살충동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주인공의 힘겨운 싸움이 펼쳐진다. 

그런가하면,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는 봉천동을 배경으로 소통과 공존에 관해 이야기한다. 개발의 논리에 집을 잃은 건 사람만이 아니라, 그곳에 깃들어 살던 고양이들에게도 해당한다. 심각한 환경문제로 까지 발전했던 들고양이들, 허나 이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는 봉천동에 산다. '한쪽 날개로 날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불화와 상처를 딛게된다. 이 외에도 '나는 봉천동에 산다' 와 '입술', 그리고 '좁은 문' 역시, 스스로 혹은 환경에 의해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현대인들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비밀이 많아지고,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덫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면서 여성이 쓴 글, 혹은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글에 대해 호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젠 "만약 내가 지금 고독하다고 느낀다면 이제 내 삶과 주변의 작은 것들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질 때'라는 기린의 말을 받아 들일만큼, "어쩌면 말이란 건 결핍이 아니라 과잉일지도 모르겠다. 때론 내가 원하는 것들까지도 전달하게 되니까.."돌의 꽃의 한부분처럼,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삼켜야 될 때가 많다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 지금에선 '국자 이야기'라는 책이 식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점묘화 처럼' '칼리그람 처럼'  존재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명확하게 '보여질 수 없는 나'를 끈질기게 찾아내려는 작가의 치열함 때문에 끝까지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었고, 다 읽고 난 지금에선 자격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조경란'이란 작가를 맘껏 칭찬해주고 싶다.

"어느 날엔가 나에게도 걸어서 생긴 선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완전한 하나의 원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마일 걷기'의 한 부분).. 내가 살아서, 걸어서 생긴 선이 정말로 원이 될 지 아님, 그저 구불구불한 선으로 혹은 바늘 땀처럼 끝날지도 모르지만, 내 삶의 증거로선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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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1-24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뭔가 생각하게 하는 리뷰..잘 읽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