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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일까?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기도'같은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해주는 책, 편협하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유연하게 만들어 주는 책, 대리만족(가령 버거운 현실탓에 너무나 가고 싶은 여행을 미루고 있을 때 믿을만한 사람의 여행기를 읽는다거나..) 혹은 마음의 위안을 주는 책등.....저마다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앞서서 열거한 책의 범주에 속하더라도 '새로움'이란 양념이 빠진 다면, 김빠진 탄산음료처럼 혹은 와사비가 덜 드러간 냉면처럼 민숭민숭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퍽 좋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의 맛을 사랑하고, 푹 쉰 김장김치도 좋아라 먹는 토종의 입맛을 지닌 내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생소한 맛과 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을 준다. 하지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만난이후, 우리처럼 매운 고추가 요리에 많이 쓰인다는 것만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멕시코 음식에 대해 엄청난 호감과 지금 당장이라도 맛나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친밀감이 생겨버렸다. 어쩜 이 책을 따라 1월엔 크리스마스 파이를, 3월엔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를, 4월엔 아몬드와 참깨를 넣은 칠면조 몰레를 9월엔 초콜릿과 주현절 빵을 12월엔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우리와 계절이 다르니까 날짜의 조정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만큼 "양파는 아주 곱게 다진다"로 시작하는 '달..쌉..초'에는 맛과 향이 느껴질 만큼 자세한 요리방법이 이야기를 따라, 아니 이야기를 주도하며 하나하나 등장한다.
막내딸은 어머니가 생을 다하는 날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봉양의 의무를 지닌다는 잔인한 가족전통을 고수하는 어머니 '마마 엘레나' 그리고 불운의 주인공 '티타', 사랑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겠다며 티타의 언니와 결혼하는 '페드로' 그들의 얘기가 때론 코를 톡 쏘는 매운 맛으로 때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달콤함으로 때론 당황스럽지만 입맛을 당기는 알싸한 맛으로 때론 혀 끝에 닿기도 전에 진저리가 처지는 쓴맛으로 전개된다. 구석구석 "기억 속의 소리와 향을 전하며 과거의 어떤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특성을 지닌" 섹쉬한 냄새를 풍기며....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외면당한 티타의 보금자리는 각종 맛과 향이 넘쳐나는 '부엌'이다. 그리고 그 곳엔 음식과 관련 된 거라면 뭐든지 훤히 꿰뚫고 있는 '나차'가 있다. 그녀가 마련해준 음식과 보살핌, 지혜로 겉으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며 자라난다. 그리고 결국엔 나차와 부엌에서 배운 요리를 통해 억압당한 생의 에너지를 분출하게 된다. 티타의 요리는 단순한 요리가 아닌 마술과도 같다.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성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신을 찾아가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사랑의 힘에 이끌리기도 한다.
완고한 어머니의 자기애에 의해 쉼없이 상처받는 티타,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텐데' 하지만 그 누구도 부모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티타가 더욱 매력적인 이유, 그리고 이 소설이 그저그런 통속적인 사랑얘기로 끝나지 않는 것은 어머니로 대변되는 기존의 세계로부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부터 티타는 독립을 선언하며 끝내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성의 자기 찾기는 어느날 갑자기 티타가 해준 음식을 먹고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욕구를 발산하며 창녀로, 다시 혁명전사로 거듭다는 또다른 언니와 그 언니의 출생비밀을 간직한, 악역일 수 밖에 없는 어머니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원제는 "Como agua para chocolate"로 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초콜릿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 그렇다 이 소설의 느낌을 참으로도 잘 반영한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 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다. 국적불명의, 그저 상혼에 놀아나는 기념일이라는 비난이 끊이질 않지만, 한편에선 소박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혹시 초콜릿보다 더 짜릿한 무엇이 필요하다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불 같은 사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