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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 닭을 닭으로 키우지 않고 닭고기로 키우다보니 닭의 품성을 잃어버리듯이 사람도 사람으로 키우지 않고 돈벌이 물건으로 키우니까 아이들이 자살을 하고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악마가 된 것이다"

언제부턴가 닭은 그저 토종닭과 그렇지 않은 닭으로 나뉘어 지갑이 두둑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르고 그저 생명이 없는 먹을거리로 전락해버린 것이 사실이다. 닭이든 채소든 하나의 생명체임을 인정하고 바라볼 때 '편리'라는 이름으로 타협하고 사는 현대인들의 야만적 삶으로부터 조금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릴적, 부모님께서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리바이벌이라 싫고, 당신들이 살아오신 고달픈, 척박한 환경에 비하면 너희는 복받은 줄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 귀를 닫아버리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제 서른 중반의 엄마가 되고 보니, 그 모든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재미지고 가슴 한켠에 따뜻한 그리움이 자리한다. 이 책엔 우리가 잘 모르는, 혹은 잊혀진 아름다운 우리의 풍습에 대한 이야기들도 곳곳에 나온다. 예를들면, 겨울밤 사랑방에 모인 어른들께 집주인이 대접하던 메밀묵, 왜 하필이면 메밀묵이었을까? 그것은 오줌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기왕이면 손님대접도 하고 보리밭에 줄 거름도 찾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생존경쟁'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어도 되는 건 스포츠경기에나 있지 살아가는 목숨들은 함께 살아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며, 사람답게 사는 것은 둘도 똑같지 않고 오직 혼자만의 다른 모습으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데 있다고 하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의 고난에 찬 삶속에서 깨우친 진실과 삶의 모습들을 때론 따끔하게, 때론 천진하게 들려주시는 것 같은 착각이, 한번도 뵌 적 없는 선생님의 환한 미소가 마음속에 그려져 행복했다. 삶과 글이 똑같은 분들의 모습은 언제나 존경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이 세상의 어떤 범죄도 냉정하게 따지면 단독 범행은 없다 " 는 선생의 글을 보며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단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나의 소아적 삶을 참 많이 반성했다. 나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그들' 일지라도(사람이든, 개미 한 마리, 풀 한 포기이든..) 나의 삶이 그들의 일부고, 그들의 삶이 나의 일부임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좀 더 '그들'에게 친절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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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나무 투쟁기 - 새로운 숲의 주인공을 통해 본 식물이야기
차윤정.전승훈 지음 / 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신갈나무 투쟁기'에 대한 관심은 벌써 5년이나 된 것이다. 그 제목이 흥미로워 처음 출판되었을 때부터 읽고 싶었으나 생물책 같은 느낌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질 안았다. 그러나 올 봄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봄은 분명, '사람의 계절'이 아니라 풀이나 나무와 같은 '식물들의 계절'이기에 그 찬란한 '봄'에 대한 경이로, 봄의 주인공인 그들의 시간을 쫓아 보기로 한 것이다. 왜? 봄이었으니까..그런데 책을 잡기 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 읽기 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봄에 시작한 독서는 장마가 시작되기 바로 사흘전에 끝났다. 새로운 관심사가 생긴탓에 나의 심~플한 뇌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으나, 소설이나, 수필같은 문학처럼 오랜 시간 붙잡고 있기는 쉽지 않은 책이다.

제 잘난 멋에 살다가도, 오래 된 나무를 보면 어쩔수없이 숙연해진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에 그들은 좀더 강한 것 같으니까...그냥 거기, 그 자리에서 무던히도 세월을 버티어 내며 수없이 지고 피는 동료들의 투쟁과 인간사를 지켜보고 있으니 어찌 그들 앞에서 작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그런데 사실상 나무들이 장수를 하는 것이라기 보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생장과 발달이 정지된 상태로 머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얘기라고 한다. 예를 들면 '종자휴면'같은, 그러니까 대부분 식물의 씨앗들은 싹을 틔울 시기가 될 때까지 잠을 자게 된다고 한다. 씨앗이 더 성숙해 질 필요가 있다거나, 좀 더 적응하기 쉬운 환경이 됬을 때 싹을 틔우기 위해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식물들은, 손과 발을 쉴새 없이 놀려 삶을 영위해 가는 인간처럼 그들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 악조건 속에서도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신갈나무'는 우리가 흔히 '참나무' 혹은 '도토리나무'라 부르는 것이다. '참나무' 이 말은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다. 사람의 이름을 '개똥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참나무류에는 '상수리, 굴참, 갈참, 졸참, 신갈, 떡갈나무' 6가지가 있다. 동네 뒷산에 오를 때마다 유심히 살펴 보나 그들을 정확히 구분해서 부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언제 한번 마음먹고 나뭇잎이라도 채집해서 관찰을 좀 해봐야겠다. 참나무류는 잎의 모양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잎이 길고 가는 형태로는 '상수리와 굴참 나무'가 있고 잎이 크고 두툼한 것은 '신갈과 떡갈 나무' 마지막으로 중간단계의 넓은 잎 모양을 가진 것으로는 '졸참과 갈참 나무'가 있다. 여기에다 잎의 뒷면의 모습이라든가, 두께, 털의 모양을 통해서 더 자세하게 구분할 수 있으나, 세 부류로만 나눌 수 있어도 꽤 유식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신갈나무 투쟁기'는 산림생태학과 식물 분류 및 생태를 전공한 차윤정, 전승훈 부부가 지은 것이다. 도토리가 어미 나무로 부터 떨어져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 큰 나무들 틈에서 햇빛을 모으며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지 그리고 어른이 되어 열매를 맺으며 어떻게 당당한 숲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두 저자는 인간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처럼 하나의 당당한 개체로서 그들의 얘기를 풀어 간다. 만약 학교에서 배우는 생물 교과서가 이런 정도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학창시절, 너무 외울 게 많아서 싫어 했던 과목중에 하나가 바로 생물이었다. 이 책처럼 집앞에 서있는 느티나무의 이야기로, 운좋게 등산갔다 만난 줄무늬 다람쥐의 말로 생물 책을 만든다면 어릴 적에 가졌던 호기심들이 '공부' '성적'이라는 이름으로 고사되진 않았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라, 누구하나 올챙이에 날아가는 새에 보도블럭 사이에 피어난 민들레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가 말이다... 지금의 교과서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공부를 재미없는 것이 아닌,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아니, 자연스런 호기심들이 짓밟히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작년에 경남에 사과 주산지로 유명한 '얼음골'에 가본 적이 있다. 구불구불 높은 산 하나를 넘고 나면 저 아래 작은 나무가 안쓰러울 만큼 크고 탐스런 사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느 사과밭이 펼쳐진다. 물론 꽃처럼 그 모습이 이쁘기도 하지만, 어쩐지 자연스럽진 않다. 사과의 맛 또한 어찌나 달고 단지, 하나를 다 먹고 나면 물로 입가심을 해야 할 정도다. 난 그 역시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런데 개량 작물들은 대부분 야생에 비해 키가 작고 필요 이상의 잎은 만들지 않으며 오로지 많은 수의 큰 이삭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상적인 작물인 것이다. 그러나 본성과 기능을 거세당한 개량작물들은 품종단일화로 인해 갑작스런 환경변화나 병, 해충등에 꼼짝없이 당하게 되며 결국엔 인간의 식량안보도 불안해 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한다. 또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꽃집에 진열되어 있는 대부분의 꽃들 역시, 제 기능을 상실하긴 마찬가지다. 크고 탐스런 꽃을 위해 꽃은 피되 씨앗은 맺지 않게 된 것이다. 요즘은 이런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유기농이나 무농약, 생태적인 농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생계'라는 것과 '환경보존',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발전 시키기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은 듯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저 평화롭게 무던히 세월을 버티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나무가 '신갈나무 투쟁기'를 다 읽고 나서는 더 대단해 보인다. 그리고 어쩌다 드러난 나무의 뿌리를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우리의 눈이 미치지 않는 저 땅속에서 나무들끼리, 수많은 식물들이 벌이고 있을 뿌리들 간의  전쟁을 떠오르니 삶이란 인간의 것이든, 식물이 것이든 다 그렇게 처절할 수 밖에 없는가 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이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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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6-2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오래걸려 읽으신 만큼 리뷰로 깊은 맛이 납니다.그저 건성으로 보는 나무들에 대한 님의 애정이 느껴지네요.좀 더 관심을 갖고 봐야겠다는 생각도 불쑥 들어요.

분홍달 2005-06-3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별안간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최재천 교수의 책이 생각나네요^^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추석같은 저녁바람에 향긋한 아까시 꽃향기가 묻어난다.. 해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은  어찌 된 일인지, 한번도 실증이 나지 않고 언제나 가슴을 떨리게 만든다. 사랑에 빠져 달뜬 처녀의 얼굴처럼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저 초록의 산들을 보며 자연스레 '신', '절대자'에 대해 생각한다. 변함없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 자연의 조화는 아무래도 대단한, 어떤 무엇의 힘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이러하다. 세상의 하찮은 무엇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 한없이 크고 넓은 사랑이 존재하리라 믿는 것이다.

'메타노이아(metanoia)', 이것은 예수가 대중을 상대로 첫 전도사업을 시작하면서 외친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에서 ‘회개’로 번역된 희랍어 원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메타노이아'는  한국어의 ‘회개(悔改)’나 영어의 ‘리펜턴스(repentance)’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뜻보다 훨씬 더 깊은 뜻, 곧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 세례까지 받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성경'을 읽어 본 적 없고, 늘 주변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날라리 신자'의 의혹, 더 이상 나의 믿음이 자라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카톨릭 신자인 고모를 통해 초등학교 6학년 즈음, '하느님'과 '예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호기심으로 '성당'에도 두어번 나가 보았다. 하지만 고모를 제외하고는 불교적 색채가 더 강한 집안 분위기 탓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사춘기, 둘 곳 없는 마음이 너무나 버거워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았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기도도 열심히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결국 진리의 말씀이 가득하다는 성경 때문에 난 '날라리'가 되고 말았다. 마음잡고 앉아 성경을 펼쳐들면, 창세기부터 까막눈이 되어 하나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소심했던 나는 적극적으로 나의 의구심을 해결하지 못하고, 두쪽 눈을 다 감은 채로 나의 복만을 구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한 교수님의 소개로 개신교에도 나가 보았지만, 근본적인 나의 질문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저 모두 믿음만을 강요하는(믿고 나면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분위기와 적어도 신도보다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성직자가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자식만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적인 호기심으로라도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끝이 났다. 결국 세례를 받기 위해 공부했던 성경지식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다. 불행히도 지금은 그것마저도 대부분 잊었지만... 만일 그 당시에 오강남교수와 같은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면, 나의 종교생활은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더 많은 성경지식과 예수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나의 성경에 대한 몰이해는 나의 아둔함과 게으름의 산물이었지만, 어쨌든 오교수의 말대로 우리 사회에서의 기독교적인 모습들은(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구교와 신교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다 )  문자를 넘어 그 참된 의미를 찾기 보다는 문자주의적으로, 율법적으로, 하늘나라 보다는 교회가 더 중요한, 혹은 자신과 가족만의 하늘나라 입성을 위한 이기적인 구복적 신앙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류사에서도 그릇된 믿음에 의해 비롯된 불행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믿는 이들도 믿지 않는 이들도 다같이 공평한 시선을 위해 공부하며, 더욱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교적 제국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타인의 신앙을 배척하고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 책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나의 모습을 돌아 보았다. 혈기 왕성한 20대에 '나이듦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었다. 한살 한살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 얼굴에 주름살은 늘어가지만 삶의 지혜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 더 많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참 근사한 일일진대,  생각보다 근사하게 성장한 어른도, 멋진 노년을 보내는 사람도 쉽게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깊이 패인 주름만큼 옹고집스럽게 자신과 다른 것들, 새로운 것들은 배척하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은 죽자사자 뺏기지 않으려는 어른들, 난 그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나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모습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못난 고집쟁이의 모습으로 빈티나는 짓을 수없이 저질러 왔던 것이다. 신앙이 있든, 없든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지, 내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의식의 변화를 통한 반성 '메타노이아', 참 깨달음 뿐이란 생각이 든다. 아울러, 신앙인이라면 유치한, 이기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타인의 종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길 바란다. 결국 우리가 믿는 모든 절대자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기독교를 뒤집어 읽다가 나를 뒤집어 본 의미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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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7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18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1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래 전 권정생, 이현주 목사의 책들을 읽으며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의 세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above god
자신을 뒤집어본 정말 의미있는 독서였네요.^^

분홍달 2005-05-1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합니당^^
글구 ...님도 고맙습니당..저도 늘 님의 안부가 궁금할거에요..가끔씩 흔적이라도 남겨주시길....

로드무비 2005-05-1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신고하면서 그 몇 글자 안되는 댓글에 오타가 났네요.
는에 띈 -눈에 띈
고치고 갑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ㅎㅎㅎ)

레드페퍼 2005-06-0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구입리스트에 올렸어요.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리뷰가 아주 도움이 되었습니다.

분홍달 2005-06-0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페퍼님 반갑습니다..도움 되셨다니 기쁘네요^^
 
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우리가 말하고, 읽고, 행동하는 것은 이미 그 다음 순간에는 더이상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실이라 말하는 현재라는 것도,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기가 무섭게 지나가 버리고 마는 미분의 찰나에 불과하지 않던가!..." - 긴 여행의 목표  

  '자유의 감옥'에 실려 있는 8편의 소설들에는  유난히 '현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판타지 소설이다. 그렇다면 '미하엘 엔데'는 왜, 어느 장르 보다 현실을 뛰어넘는 허구성이 강한 '판타지'라는 형식으로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일까?...옮긴이의 말을 빌자면 "앤데는 자신이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판타지 세계는 단순한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의 판타지는 가상도 아니고, 찰나적 진실도 아닌, 그럴지도 모른다는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한다. 마치, 눈길을 화폭의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는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숨겨진 이야기를 더듬어 보게 한다.

 

" 신은 낙원과 인간을 만드셨지.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서 낙원을 빼앗지 않았소? 그래서 어딘가에 살 곳이 필요했던 인간이 이 세상을 만든 거라오. 그리고 인간은 아직도 만들어 가고 있지." - 긴 여행의 목표... 이 책의 맨 처음에 수록되어 있는 '긴 여행의 목표'는 한 인간의 정체성과 심리적 근원을 상징하는 '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가난하지 않아도, 아니 누구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을 지라도 따뜻한,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자신의 근원을 찾아, 신이 쫓아낸 낙원을 떠나 살 곳을 찾으며 긴 여행을 한다. 그리고 그가 켜 놓은 불빛은 또 다른 추운 영혼들에게 빛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현실은 무엇이 '단순히 있다'는 사실 외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이 전제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이 말의 의미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현실의 성질'은 '의식의 성질'에 의해 좌우된다고 대담하게 추론해 볼 수 있다..."  -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 누구나 한번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나의 자리인지 혹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저 미지의 다른 세계는 아닐 런지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빛나는 상상력으로 새로운 발명을 할 수도 혹은, 누구나 흥미로워할 글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저 공연한 생각이라며 혼자 웃음 짓고 말았다. 어쩌면 꿈도, 현실도 내가 인지하고 파고 들 수 있는 만큼만 실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저히 그 끝에 이를 수 없는 기이한 통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아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숫자만큼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는 다시 '교외의 집'으로 연결이 되며 그 신비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나도 모르게 검색창에 '보로메오 콜미'를 쳐보고 말았다.


 

이 외에도,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작은 자동차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방과 심지어는 스스로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까지 갖춘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  이야기 <조금 작지만 괜찮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가 떠오르는 지하 동굴세계에 사는 ‘그림자’들의 이야기  <미스라임의 동굴>,  또, '꿈꾸는 일이 직업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에는 알듯 모를 듯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렵거나 말거나...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이 여행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에게 맡겨진 과제를 해결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전의 과제가 새로운 과제로 바뀌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됐을 뿐이다"


 

그리고 표제작인 '자유의 감옥',  " 그러나 나는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가능성은 지나치게 많았고 꼭 있어야 할 것들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나를 마비시켰습니다."  늘상 경험하는 선택의 상황, 상황에서 그토록 울부짖던'자유'를 배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세상에서 '자유'이상으로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또 있을까??


 

마지막까지 이 책을 재미지게 만드는 소설 '길잡이의 전설' '긴 여행의 목표'에서처럼,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 오히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언제나 깨어나고만 싶은 꿈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향수에 빠져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현실'만을 그리워한다  " 수많은 순간과 순간이 이어져 흐르는 시간의 강에는 이것을 다시 두부모 자르듯 위에서 아래로 잘라 놓은 찰나라는 것이 있다. 바로 이 찰나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열린, 진짜 기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 길잡이의 전설 


 

혹시, 지금 이순간이, 기적의 세계가 열리는, 또 하나의 현실이 시작되는 그 마법같은 '찰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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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5-05-0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읽으셨군요. 님의 리뷰를 보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또 읽고 싶어져요. 이 책은 금방 읽기엔 좀 아까운 책 같아요. 아무래도 사서 또 읽어야 될 것 같죠?

드팀전 2005-05-0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알라딘에 책주문할때 좀 복잡한것들을 해서...머리좀 식혀야할 듯한데..
이 책 좋겟네요.^^

비로그인 2005-05-1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의 감옥 만세...-.-/
이 작품 보기 전에는 미하엘 엔데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찾아다니는 처지가 됐지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__)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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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 푸쉬킨의 이 시가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다.  모든 일이 순조롭거나 편안할 땐 물론 아니다. 세상사에, 혹은 나의 이웃에게 좌절하거나 실망할 때, 이 시의 첫 귀절을 나도모르게 읊조리게 된다. 바람때문에 봄을 실감하기 어려웠던 지난 사월의 길목에서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제목의 식상함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지만,  '헨리 데이빗 소로우'라는 이름을 보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그가 영적인 벗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엮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끔 책의 가치보다 못한 책의 제목을 만날 땐 한없이 아쉽기 짝이 없다. 빈곤한 상상력이 문제인가, 아님 판매부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출판사들의 고충으로 보아야 하는가...아무튼 이 책의 제목 또한 참 재미없는 것 중에 하나다.

'월든'을 통해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만났고, 사상과 생활이 둘로 나뉘지 않고  한결같은 그의 삶에 존경과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글을 읽으며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고자 열심히 밑줄을 그었다.  아마도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손때가 많이 탄, 지저분한 책이 아닐까....

"우리가 가진 생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네가 좋다고 고백한 그 일을 조금만 더 해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  그토록 사정없이 마음에 풍랑을 만들며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한낱 '바람이 쓰는 일기'라니..숱하게, 바람의 농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나는, 이 대목이 참 좋았다.

살면서 대놓고 욕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은 물질적 풍요밖엔 없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난 체하거나 교양있는 척 하는 사람들, 그들이 두르고 있는 것이 소위말하는 명품일진 모르지만 그들 자신은 싸구려보다 못한 짝퉁인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들을 만났다. 개인적 사정상 KTX를 자주 이용하는 난, 빠르지만 결코 편하지 않은 열차에 앉아 쓰레기같은 잡담에 두번 죽고 말았다. 고운 화장과 우아한 의상에서 한눈에도 돈 좀 있는 싸모님들이구나 싶다. 3시간 가까이 그들의 한나라당 예찬론과 명품 예찬론, 물질적 과시욕....어찌 그런 교양있는 싸모님들이 공중예절엔 그다지도 둔감한지, 오랜만의 외출일 꺼라 또 연배가 비슷하신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해하려 했지만, 대여섯 명의 싸모님들의 갈수록 커지는 목소리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 분들은 어느 교회의 총무와 그 모임의 일원이었다. 하, 이렇게도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만 백화점처럼 다 갖추었는지... 난 사실 이 땅의 개신교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번도 그들의 신앙이, 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 느껴본 적 없었고, 적어도 그러한 노력과 고민이라도 엿볼 수 있길 바랬지만 그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  그것도 아님 다른 모든 가치는 배척한 체 신에게만 향해있는 사람들로만 비춰졌다. 물론 이런 얘기에 억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런 분들이 많길 바라며 이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요하다면 신조차도 홀로 내버려두십시오. 신을 발견하고자 원한다면, 그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를 만나러 가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단지 그를 홀로 남겨 두고 돌아설 때입니다" 

"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 감자를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벙법에 대해 당신의 생각은 해마다 바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수행을 계속하는 일 외에 내가 배운 것은 없습니다." 쓰레기를 줄인다거나, 전기세를 아낀다거나, 우선순위를 정해 해야 할 일들을 처리 한다거나..등등 일상의 효율성을 위해서 나름대로 궁리를 하며 살지만 과연, 나의 정신을 위해서 얼마나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때때로 찾아오는 삶의 쉼표가 되는 것들, 슬럼프라든가, 시련같은 것들도 어쩜 영혼의 텃밭을 게을리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몸의 건강을 위해 무농약 채소에 신선한 물을 챙겨먹는 것처럼 영혼에도 신선한 영양제가 필요하리라.

하지만, 반성하고 또 각성해도 소로우의 말처럼 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럴땐 가끔씩 그와 난 달라,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삶의 방식이었어....좌절과 한끝차이인 자기합리화로 나를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 쯤, 소로우의 이런 얘기가 또다른 희망을 안겨 준다 " 인간의 새로운 재능을 알아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우리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존재를 확장시킵니다"  ' 아~ 참 아름답구나'하고 느끼는 저 초록의 나뭇잎이, 아무렇게나 피어난 들꽃에 대한 경의가 나를 확장시킬 수 있다니..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가. 나의 오감을 열고 편견없이 감탄의 할 꺼리를 찾자..내가 되고자 하는 내가 될 수 있는 길이 거기,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 내 은행 잔고는 아무리 꺼내 써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이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 누구도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소유보다 영적인 것의 가치로 충분히 인생을 누리는 소로우가 있어 난 또 감탄하며 나의 존재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울러 생각한다.

" 나에게 인간은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이다. 인간은 나로 하여금 또 따른 세상을 그리워하게 만들지만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만족하게 한다. 자연이 주는 기쁨은 인간의 다스림과 옳고 그름에 전혀 지배받지 않는다"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내내 또다른 한 사람이 떠올랐다 "스콧 니어링"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 한 분이다. 전에는 한번도 소로우와 그를 함께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둘의 삶의 공통점을 새삼 발견하며 어느 면에서는 동일인인 것 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무튼 두분모두 존경,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이다.

심란 했던 일들이 이제는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 안엔. 내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어두운 면도 있었고, 버려야 할 욕심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왜 고마운 것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 나 자신의 존재와 내가 가진 것들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매일 매일이 나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 그동안은 '감사'와 '겸손'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별개였지만, 이젠 '겸허'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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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4-2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열차에서 떠드는 싸모님들 미워용.전화통화 크게하는 사람도 시러용.
소로우 처럼 자유로우려면 많이 버려야할 텐데..무엇부터 버리나????

2005-04-28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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