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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어릴적 집에서 엄마의 계모임이 있는 날이면 난 심통을 부리곤했다. 심부름을 시키는 우악스런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도 싫고, 시시콜콜 "어느 집엔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네 아들은 어떻고.." 끊임없는 수다가 아주 피곤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한 아주머니만은 싫지가 않았다. 어린 내가 봐도 그다지 줏대가 있어 보이는 분은 아니었지만, 어찌나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던지....입담좋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온갖 의성어와 다양한 표정으로 실감나는 얘기를 하시는 거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놀러 오시기만 하면 엄마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의 얘기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물론 결정적인 대목에선 쫓겨나야 했지만(아무리 입담좋고 번죽이 좋아도 애들은 빠져야 하는 얘기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달콤하고 향긋해서 입천정이 다 벗겨지도록 쪽쪽 빨아먹던 자두맛 캔디처럼 매혹적인 무엇이었다. 난 지금도 가끔 그 아주머니의 두툼한 입술과 얘기 중간중간 입맛 다시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이 책 '고래'가 그렇다. 이만큼 번죽좋고 다양한 표정으로 얘기를 풀어나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는 다기 보다는 입담좋은 약장수의, 동네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는 것같은 착각이 든다.
'고래'는 책의 두께이상으로 많은 사건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화자인 이야기꾼을 통해서 가능한일이다. 작가의 말처럼 " 어느 정도 파격도 가능하고, 구라도 치고, 능청도 떨고, 또 그러면서 백 프로 믿을 수도 없고, 그래서 의심은 가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말솜씨에 점점 빨려들고....이야기꾼은 자유롭게 영화 속 인물을 끌어들여 현실의 인물들과 뒤섞고, 괴담이나 야담에서도 이야기를 끌어와서 자연스럽게 버무리고...." 화자를 통해 수많은 에피소드가 '놀기 좋은 무대'에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이 스토리의 중심은 한 노파의 잔혹한 복수다. 박색만큼이나 척박한 삶을 산 한 '노파'와 묘한 매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금복' 그리고, 여자라 보기조차 어려운 거구이면서 괴력의 소유자, 동시의 벙어리인 금복의 딸 '춘희' 그들은 모두 지난 세기에 관한, 그 시대에 벽돌을 만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탄생했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시 젠더로서의 여성뿐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뒤편에 존재했던 마이너리티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이 세인물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매력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중층적인 '금복'이다. 금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관능적인 여인에서 여장부로, 결국엔 여성에서 남성이 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걸으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물이다. 또 책을 읽는 내내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자 다 읽고 난 후, 가슴을 찡하게 만든는 '춘희', 그녀는 오로지 오감에 의해서만 사물을 인지하고 소통하는 벙어리다. 그녀는 자신의 부당한 고통과 불행에 대해, 너무도 냉정한 모성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에게 고통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닌 것이다. 작가는 몇년전 겨울 자신에게 길을 묻던 덩치가 큰 한 여고생에게서 "거대한 것의 비극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한 느낌은 '춘희'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 되고 '고래'를 통해 상징된다. 현대사회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거대한 정신과 아름다움이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애절함을 담고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란 책을 보면 지극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그 무엇의 도움도 없이 아이를 출산하는 여인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가히 충격적인 대목이었다. 슬프면서도 무섭고 서러우면서도 준엄한 생의 비밀을 본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고래'에 등장하는 노파, 금복, 춘희를 통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혼자 벽돌을 굽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고독해졌으며 고독해질수록 벽돌은 더욱 훌륭해졌다." 춘희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흙과 물, 불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점토벽돌'을 빚고 그 위에 자신이 오감을 통해 만나고 느꼈던 것들을 그려넣는다. 그리고, 그녀의 벽돌은 철저한 건축가의 장인 정신으로 금세기 최고의 건축물로 재탄생한다.
세상엔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혹은 아무하고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아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조금도 특별할 것 없어 눈에 띄지 않는 사람, 두드러지는 게 불편해 평범을 가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할 수 없고, 원하든 원치않든 특별한, 눈에 띄는 존재들이 있다. 작가는 이 책을 " 지난 세기에 관한, 벽돌을 굽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손에 쥐려하면 사라져버리는 진실처럼 어쩜 그들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선 그 어떤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순정한 마음과 깊이 있는 사유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