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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얼마 전, 샤갈의 그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리처드 롱'이란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계의 오지를 걸으며 그곳에서 만난 돌, 나무, 흙 등을 소재로 작품을 만든다. 때론 삐까삐까한 전시장에서 그럴싸하게 전시도 하지만, 그가 걷기를 통해 만났던 소재의 현장에서 그 만의 전시를 하기도 한다. 보통 설치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엄청난 산고를 통해 창조했을 자신의 작품을 소유할 수 없는 작가에 대해 연민을 느끼곤 한다. (정작 당사자들은 괘념하지 않을테지만...) 하지만 '리처드 롱'의 작품에선 뭔지모를 숙연함을 느낀다. 그리고 반갑게도 '국자 이야기' 가운데, '100마일 걷기'를 통해 다시한번 그를, 우리나라 오지에서 채취한 돌로 만들었다는 '나선형'이란 작품을 떠올린다.
'국자 이야기' 한마디로 집중력이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몇번이나 책장을 되돌려 읽어야 했는지 모른다. 1인칭에서 3인칭 다시, 3인칭에서 나로, 독자들의 미간을 찌푸리게하며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점의 변화, 때론 국자로, 때론 코끼리로, 기린으로 변화하는 상징에 대해서도 쉽게 읽어 내려가긴 어려운 책이다. 난 엉뚱하게도 '국자 이야기'를 읽으며 '한 인간의 독백내지, 일기 또는 수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존재에 대한 다양한 고백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국자 이야기'를 비롯해서 '나는 봉천동에 산다' '돌의 꽃'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잘 자요, 엄마' '100마일 걷기' '입술' '좁은 문'까지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평론가 손정수의 말대로 하나같이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의 욕망이 진하게 드러나는 글들이다. "나는 수년 동안 내가 벗어나지 못했던 균형에 대해 생각했다. 내 삶의 정교한 하나의 의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그것은 일시적인 정렬일 뿐이었으며 또한 나 자신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힘든 투쟁에 대한 역사이기도 했다...나의 삶은 그것으로도 이미 한 세계이며 나의 의지가 그 세계를 관통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첫번째 소설 '국자 이야기'의 결말부분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만이 자신다울 수 있다는 주인공은 외삼촌의 국자를 통해 균형과 대칭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르는데, '잘 자요, 엄마'에서도 역시 불안과 공포, 자살충동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주인공의 힘겨운 싸움이 펼쳐진다.
그런가하면,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는 봉천동을 배경으로 소통과 공존에 관해 이야기한다. 개발의 논리에 집을 잃은 건 사람만이 아니라, 그곳에 깃들어 살던 고양이들에게도 해당한다. 심각한 환경문제로 까지 발전했던 들고양이들, 허나 이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고 그녀는 봉천동에 산다. '한쪽 날개로 날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불화와 상처를 딛게된다. 이 외에도 '나는 봉천동에 산다' 와 '입술', 그리고 '좁은 문' 역시, 스스로 혹은 환경에 의해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현대인들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비밀이 많아지고,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덫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면서 여성이 쓴 글, 혹은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글에 대해 호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젠 "만약 내가 지금 고독하다고 느낀다면 이제 내 삶과 주변의 작은 것들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질 때'라는 기린의 말을 받아 들일만큼, "어쩌면 말이란 건 결핍이 아니라 과잉일지도 모르겠다. 때론 내가 원하는 것들까지도 전달하게 되니까.."돌의 꽃의 한부분처럼,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삼켜야 될 때가 많다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 지금에선 '국자 이야기'라는 책이 식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점묘화 처럼' '칼리그람 처럼' 존재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명확하게 '보여질 수 없는 나'를 끈질기게 찾아내려는 작가의 치열함 때문에 끝까지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었고, 다 읽고 난 지금에선 자격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조경란'이란 작가를 맘껏 칭찬해주고 싶다.
"어느 날엔가 나에게도 걸어서 생긴 선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완전한 하나의 원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마일 걷기'의 한 부분).. 내가 살아서, 걸어서 생긴 선이 정말로 원이 될 지 아님, 그저 구불구불한 선으로 혹은 바늘 땀처럼 끝날지도 모르지만, 내 삶의 증거로선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