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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평점 :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 푸쉬킨의 이 시가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다. 모든 일이 순조롭거나 편안할 땐 물론 아니다. 세상사에, 혹은 나의 이웃에게 좌절하거나 실망할 때, 이 시의 첫 귀절을 나도모르게 읊조리게 된다. 바람때문에 봄을 실감하기 어려웠던 지난 사월의 길목에서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제목의 식상함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지만, '헨리 데이빗 소로우'라는 이름을 보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그가 영적인 벗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엮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끔 책의 가치보다 못한 책의 제목을 만날 땐 한없이 아쉽기 짝이 없다. 빈곤한 상상력이 문제인가, 아님 판매부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출판사들의 고충으로 보아야 하는가...아무튼 이 책의 제목 또한 참 재미없는 것 중에 하나다.
'월든'을 통해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만났고, 사상과 생활이 둘로 나뉘지 않고 한결같은 그의 삶에 존경과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의 글을 읽으며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고자 열심히 밑줄을 그었다. 아마도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손때가 많이 탄, 지저분한 책이 아닐까....
"우리가 가진 생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네가 좋다고 고백한 그 일을 조금만 더 해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 그토록 사정없이 마음에 풍랑을 만들며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한낱 '바람이 쓰는 일기'라니..숱하게, 바람의 농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나는, 이 대목이 참 좋았다.
살면서 대놓고 욕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은 물질적 풍요밖엔 없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난 체하거나 교양있는 척 하는 사람들, 그들이 두르고 있는 것이 소위말하는 명품일진 모르지만 그들 자신은 싸구려보다 못한 짝퉁인 것이다. 어제도 그런 이들을 만났다. 개인적 사정상 KTX를 자주 이용하는 난, 빠르지만 결코 편하지 않은 열차에 앉아 쓰레기같은 잡담에 두번 죽고 말았다. 고운 화장과 우아한 의상에서 한눈에도 돈 좀 있는 싸모님들이구나 싶다. 3시간 가까이 그들의 한나라당 예찬론과 명품 예찬론, 물질적 과시욕....어찌 그런 교양있는 싸모님들이 공중예절엔 그다지도 둔감한지, 오랜만의 외출일 꺼라 또 연배가 비슷하신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해하려 했지만, 대여섯 명의 싸모님들의 갈수록 커지는 목소리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 분들은 어느 교회의 총무와 그 모임의 일원이었다. 하, 이렇게도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만 백화점처럼 다 갖추었는지... 난 사실 이 땅의 개신교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번도 그들의 신앙이, 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 느껴본 적 없었고, 적어도 그러한 노력과 고민이라도 엿볼 수 있길 바랬지만 그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 그것도 아님 다른 모든 가치는 배척한 체 신에게만 향해있는 사람들로만 비춰졌다. 물론 이런 얘기에 억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런 분들이 많길 바라며 이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요하다면 신조차도 홀로 내버려두십시오. 신을 발견하고자 원한다면, 그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를 만나러 가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단지 그를 홀로 남겨 두고 돌아설 때입니다"
"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 감자를 썩지 않도록 보존하는 벙법에 대해 당신의 생각은 해마다 바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수행을 계속하는 일 외에 내가 배운 것은 없습니다." 쓰레기를 줄인다거나, 전기세를 아낀다거나, 우선순위를 정해 해야 할 일들을 처리 한다거나..등등 일상의 효율성을 위해서 나름대로 궁리를 하며 살지만 과연, 나의 정신을 위해서 얼마나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때때로 찾아오는 삶의 쉼표가 되는 것들, 슬럼프라든가, 시련같은 것들도 어쩜 영혼의 텃밭을 게을리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몸의 건강을 위해 무농약 채소에 신선한 물을 챙겨먹는 것처럼 영혼에도 신선한 영양제가 필요하리라.
하지만, 반성하고 또 각성해도 소로우의 말처럼 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럴땐 가끔씩 그와 난 달라,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삶의 방식이었어....좌절과 한끝차이인 자기합리화로 나를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 쯤, 소로우의 이런 얘기가 또다른 희망을 안겨 준다 " 인간의 새로운 재능을 알아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우리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존재를 확장시킵니다" ' 아~ 참 아름답구나'하고 느끼는 저 초록의 나뭇잎이, 아무렇게나 피어난 들꽃에 대한 경의가 나를 확장시킬 수 있다니..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가. 나의 오감을 열고 편견없이 감탄의 할 꺼리를 찾자..내가 되고자 하는 내가 될 수 있는 길이 거기,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 내 은행 잔고는 아무리 꺼내 써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이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그 누구도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소유보다 영적인 것의 가치로 충분히 인생을 누리는 소로우가 있어 난 또 감탄하며 나의 존재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울러 생각한다.
" 나에게 인간은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이다. 인간은 나로 하여금 또 따른 세상을 그리워하게 만들지만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만족하게 한다. 자연이 주는 기쁨은 인간의 다스림과 옳고 그름에 전혀 지배받지 않는다"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내내 또다른 한 사람이 떠올랐다 "스콧 니어링"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 한 분이다. 전에는 한번도 소로우와 그를 함께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둘의 삶의 공통점을 새삼 발견하며 어느 면에서는 동일인인 것 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무튼 두분모두 존경,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이다.
심란 했던 일들이 이제는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 안엔. 내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어두운 면도 있었고, 버려야 할 욕심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왜 고마운 것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 나 자신의 존재와 내가 가진 것들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매일 매일이 나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 그동안은 '감사'와 '겸손'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별개였지만, 이젠 '겸허'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존재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