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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ㅣ Mr. Know 세계문학 45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약 10년 전 즈음, 스스로를 관념주의자라고 말하던 영어학원의 강사가 있었다. 그는 어느 지방의 전문대학 교수였지만 교수사회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과감히 그 자리를 벗어나 학원을 선택했다. 그의 수업은 너무 진지해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듣는 사람들도 어떤 무게감을 느끼며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의 수업을 즐기는 드문 사람이었다. 그의 토플 강의가 훌륭해서라기 보단, 그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얘기들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언제가 그는 'if'라는 단어를 가지고 삶의 신념에 대해 얘기했다. 삶을 뜻하는 'Life' 를 가만히 들여다 보시라~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떼어내면 'if'가 남는다. 그렇다 삶은 그런것이다. 어려서 삶에 대한 경험이 적을 땐 "나의 삶이 어떠 어떠 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고,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서는 "내 삶이 이랬더라면 좋았을 텐데"하고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늘 기대와 후회가 교차되기 마련이니까...그것처럼 'wife'란 단어도 가운데의 두 글자만 남기면 'if'가 된다 아내 또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이런 배우자면 좋을텐데" 결혼을 한 후에는 "이런 배우자를 선택했더라면 좋았을 걸 " 고로,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나름의 신념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아~ 그 당시 심하게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참, 그는 등단을 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를 읽어 본적 없지만, 쉬운 글은 아니었으리라....그가 어느 날 수업시간 '안톤 체홉'의 '의자 고치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난 그 책이 못 견디게 궁금했고, 몇번 서점을 들락 거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예전엔 출판이 됐다가 절판이 됐던 모양이다...어쩔 수 없이, 쩝쩝 입맛을 다시는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2002년,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 문학 전집'을 통해 '체호프 단편선'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맛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왜 그토록 전 세계가 그의 작품을 칭송하는 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005년 4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란 책으로 체호프와 재회, 이번엔 이전 보다 더 강한 감동을 받는다..언젠가 '의자 고치는 여자(인)'이란 작품도 꼭 만나고 싶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표제작을 포함해서 총 17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3페이지 분량의 매우 짧은 '굽은 거울'을 비롯해서, 어느 한 편도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을 만큼 짜릿한 긴장감과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누구에게 나의 슬픔을 이야기하나...?"로 시작하는 '애수'라는 작품을 읽을 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아들을 잃은 늙은 마부 '이오나' 그는 그의 슬픔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말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더 처절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 나 또한 어스름한 저녁, 습기를 머금은 커다란 눈송이를 그대로 맞으며 차라리 눈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어느 텔런트는 학교에서 텍스트로 배우던 '체호프'이나 '톨스토이'이 그들의 나라가 궁금해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처럼 체호프의 작품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무대위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검은 장막, 그리고 마루바닥이 떠오르곤 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또 다른 매력적인 작품, 연극이어도 좋을(어쩜 이미 연극으로 상연됐는지도....)'6호병동' 비교적 분량이 긴 소설이다. 별 사명감없이 아버지의 강요로 의사가 된 '안드레이 에피미치 라긴' 그는 온갖 더러움과 소란과 폭력, 위선이 가득한 자선병원의 의사다. 그는 지성과 정직을 대단히 사랑하지만, 자기 주위에 지적이고 정직한 현실을 만들어 내기에는 품성이나 자신감이 부족한 인물이다. 그는 환자를 치료하기 보단 그저 방관자로 자신의 독서와 여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정신병 환자인 '이반 드미뜨리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역전되는 존재의 혼란과 삶의 잔인성을 그리고 있다. " 삶을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고 싫어 할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씁쓸하고 화가 나는 것은, 이 생활이 고통에 대한 보답으로 끝나거나 오페라에서처럼 갈채를 받으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난다는 거지.." 그렇다 무시할 수 없는 삶을 살던 주인공의 이야기도 결국엔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이전에 꼬마는, 이 세상에 달콤한 배나 파이나 값비싼 시계 외에도, 아이들의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하찮은 것'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제 나는 안다. 세상엔 아이들의 말로는, 아니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때때로 그러한 것들은 삶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삶의 냉혹한 잔인성에 대해 깨어있게 한다. 이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실상 앞에서, 단지 자유로운 예술가이고자 했던 체호프의 글은 어느만큼 내게도 삶에 대한 거리를 만들어주며, 미지의 두려움과 긴장감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롭게 해준다. 아마도 그것은 오종우의 해설처럼 체호프에게 글쓰기는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실제 삶의 조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얼마전 대수술을 받으신 아버지의 고통을 보면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고독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어떤 고통도 가벼이 다루어져서는 안된다고...